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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제 4차 통고산~칠보산 산행기
답운치(답운리)05:00,헬기장5:14, 운해6:27, 임도06:36, 통고산 정상1066.8m)07:20)이정표07:30(왕피리, 하산)애이랑재08:00, 937m봉08:00(낙동정맥)애미랑고개09:10, 삼각점10:30, 칠보산(974.2m)11:50새신고개11:00, 신암리(신양분교)11:00
찌든 배낭 속에는 나의 삶이 함께 하고 있으며 영원한 동반자로 내일도 모래도 산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질 것이며, 길섶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들도 모두가 내 친구이니,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오늘도 산을 오르며 그저 세상 살아가련다.
취락은 산의 서쪽으로 서면과 봉화군 소천면의 경계를 지나는 도로변에 발달하고 있으며, 곳곳에 산촌(散村)이 분포한다. 산의 북동쪽 하원리에는 불영사와 불영계곡이 있으며, 그밖에도 왕피굴·승지곡(僧至谷)·춘양목 천연보호림 등이 있다.
답운치고개에 출발한다. 답운치는 어둠과 고요 속에 묻혀있다. 배낭을 짊어지니 무게가 12kg은 족히 될 것 같다. 우선 집에 전화로 무사히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고 하니 잘 다녀오라고 하며 몸 상태는 어떠냐고 한다. 산행에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들머리를 조금 지나 .완만한 능선을 따로 꾸준한 오름 길이 계속된다.
묵직한 배낭의 중량감을 느끼며 천천히 답운치에서 약190m 올라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이어지는 길은 작은 나무들로 자주 몸을 구부리고 빠져나가야 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밤중에 무얼 보러 산행을 하는가? 평범하게 생각하면 낙동정맥 산행이 그게 정답 일게다. 헤드랜턴 불 빛 따라 그냥 순수한 자연과의 만남 때문이라고 자위한다.
헬기장에 도착한다. 헬기장을 출발하여 15분쯤 진행하였을 표지가가 안 보인다. 다시 돌아와 표지기 있던 곳 까지 가서 보아도 다른 길이 없다.
소나무와 철쭉이 빼곡하게 점령하고 있는 헬기장을 지나치면 산죽길에 이어 신갈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한참 올라가다가 우뚝 선 아름드리 소나무 두 그루를 지난다.
선입견(先入見)만큼 산길에서 만나는 울창한 수림이 주는 신선함도 크다. 통고산 숲의 아름드리 거목들은 제법 이름난 산들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굵기와 밀도로 시종일관한다.
북사면으로는 쭉쭉 뻗은 춘양목이 피톤치드를 아낌없이 품어준다. 숲속에서 통고산은 두 아름도 넘는 거대한 노송 군락으로 숲의 절정을 보인다. 수목 줄기의 선은 대개 숲을 분할하는 선으로 역할을 하지만, 이곳 통고산 수목은 굵고 길어서 간혹은 초록 숲의 태반이 이 굵은 검은 수목 줄기들로 가려지곤 한다.
동쪽으로 한참을 오르다가 889m봉을 넘어서면 통고산 자연 휴양림에서 올라온 임도를 만난다. 차량이 다닐 만큼 도로상태가 좋고 산악자전거 트래킹코스로 이용되겠다. 임도를 지나면 자연휴양림에서 통고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만나는 휴양림 3거리에 이르게 된다.
임도를 건너 올라서는데 반디부리의 반짝이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어렸을 땐 시골에 반딧불이 무척 많았다. 여름날이 이놈들이 반짝이는 걸 보고, 즐기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깊은 산중에서 조차 극히 드물게 보일뿐이니 환경훼손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보이지 않던 잔디불이 몇 마리가 숲 사이를 난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느 정도 나이든 사람들이라면 어려서 저녁부터 밤 깊도록 깜박거리며 높고 낮게 어지러이 나는 잔딧불 쫓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제 몸을 태우면서 칠흑바다의 등대처럼 꺼지다 켰다 명멸(明滅)하며 짝을 부르는 반딧불은 공중을 날면서도, 섶에 앉아서도 쉼 없이 빛을 내는 사랑의 등불이다. 누구인지도, 어디서 있는지도 모르는 그리운 짝을 찾아 켜고 끄는 정열의 푸른 불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뭐 길래 하는 애절한 생각이 든다.
칠 같은 검은 밤에 켰다 꼈다 작은 등불
풀잎 거리에 요정의 길 밝힘인가
그 불빛 날아만 가면 시름 될까 하노라
지금은 변영의 시기다.
잔딧불을 보며 지금은 멸종되어가는 동물들을 생각한다. 일급수의 맑은 개울가에만 알을 낳고, 부화하면 유충도 역시 맑은 물에만 사는 다슬기나 나사조개같이 깨끗한 것만 먹으며 살다가 개울 풀숲에서 성충이 된다. 잔딧불은 여름번식기가 되면 배마디 속에 가득채운 인(燐)에 산소를 공급하여 빛을 내는데, 투명한 각질 창을 통해 1분에 7, 80번씩 푸른색의 형광(螢光)을 켜고 끄며 짝을 찾는다.
옛날에는 등잔에 불 밝힐 지름도 없던 가난한 선비들의 밤 글 읽기를 도와주었다지만, 지금은 휘황한 조명, 눈부신 불야성에 질린 사람들에게 회고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정갈한 벌레의 이름을, 누가 하필이면 당치도 않은 개똥벌레라고 했을까?
몸의 빛깔이 검은 따름인데, 이제는 저들이 살 만한 맑은 물도 없고, 사랑의 불을 밝히기에는 더럽혀진 찌든 공기의 세상, 이 산에서 과연 몇 번이나 환상적인 형광을 볼 수 있을는지…….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주목 사이로 붉은 빛이 열십자를 그리며 떠오르는 태양의 아름다움이여, 볼수록 신비스러운 이 모습은 전문인들도 감탄하는 멋진 작품으로 나의 자랑스런 보물1호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새벽이 밝아온다. 서쪽하늘에 운해가 몰려온다. 운해 속에서도 나무들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러나 운해는 불투명한 몸을 가졌다. 그 운해 속에서 붉은 나무는 운해 화살을 박고, 화살나무는 온몸에 운해 화살을 박은 채 서 있다. 소나무들은 그것대로 제 몸에 운해 화살을 꽂고, 나무들은 제 속에 많은 운해 화살 사무침을 갖추어 있다.
산중턱을 가로지른 임도를 둘러싸고 산행 리듬을 툭툭 끊어버리거나 여름이면 두통도 유발하는 뙤약볕 임도는 통고산 허리를 뱀처럼 구불거리며 휘감고 있다. 이 임도로 고생을 겪어본 등산꾼들이 다시 못 갈 산으로 낙인을 찍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었을 때 아름답고 생명력이 한껏 드높아진다. 야생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연은 그대로 우리가 기댈 곳이며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어머니의 품이다.
수많은 돈을 들여 인도를 만들지 말라. 자연을 그냥 놔두었을 때 본연의 야생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손길이 개입되지 않은 야생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뿐더러 그 자체로서 진리의 모습이다. 마구잡이로 인도를 만들어 환경을 파괴시켜놓고, 이제 와서 환경을 ‘환경을 살리기 위한 짓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인도가 우선이 아니라 생명이 우선이다. 대자연의 생명이 우선이다. 대자연의 생명을 그대로 두었을 때 우리 인간의 생명 또한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좋은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통고산119 구조3번 위치“ 팻말이 나온다.
임도에서 이곳까지 1,45km 거리이다.
위쪽으로 드디어 완만한 정상 입구. 헬기장이 보이고 10m쯤 뒤에 통고산 정상석이 버티고 서있는 것이 보인다.
통고산 정상은 널찍한 헬리포트다. 제법 넓어서 바깥을 조망하려면 변두리로 나서야 한다. 정상표지석은 헬리포트 바로 옆에 서 있다. 표지석 뒷면에 산 이름의 유래가 새겨져 있다. 정상석의 비문에 따르면 통고산은 부족국가시대 실직국(悉直國)의 왕이 다른 부족들에게 쫓기어 이 산을 넘다 통곡했다 하여 통곡산(通哭山)으로 불렸다가 그 후 통고산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한다.
산의 동쪽에는 진덕왕 5년 의상대사가 부근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지어 불리워지고 있는 천축산이 있고 산기슭에는 그 당시 창건한 불영사가 있으며 하류에는 불영계곡이 있다.
표지석은 관광 울진, 환경 울진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7만 군민의 정성어린 뜻을 담아 육군본부 항공대 헬기 지원으로 이곳에 세우다.1998년 11월 23일 울진군수.
정상석 앞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을 한 컷 찍고는 바로 일어나 출발 10m쯤 가니 산불감시용 무선중계소건물이 있고 우측을 돌아 내려간다.
통고산 정상에서 270m내려오니 우측에 표시판이 서있다. 이곳에서 왕피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내리막길을 30분쯤 내려오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건너 진행하니 우측으로 벌목지대 가 넓게 펼쳐진다. 무슨 이유에서 벌목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작은 나무와 풀밭이 되어있다. 통고산에서 임도까지 거리 1.78km 다시 능선을 따라 천천히 고도를 높여간다.
937.7m봉에서 헬기장을 거쳐 애미랑재까지 1시간45분이 소요되었다. 애미랑재 절개지는 대단히 높아 보인다. 좌측에 매달린 표지기를 따라 엄청난 절개지가 보이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도로가 보인다. 이제 '애미랑재'에 도착한 것이다.
절벽위에서 재 아래로 내려서는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깝다.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잡고 네발로 기다시피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도로에 내려섰다. 이런 산자락을 잘라서 이렇게 커다란 절 개지를 만들어야 했을까?
절 개지를 내려가니 포장도로에 이르고 도로 우측으로190m정도 올라가니 도로를 따라 남회룡 방향으로80m정도 내려가 절개지 사면을 올라간다. 이곳부터 칠보산 까지는 제법 힘든 오르막이 시작된다.
똑같은 천지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늘 웃음 속에 살고 어떤 이는 늘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닐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는 법이다.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일상의 난관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성숙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법, 반대로 생각하면 그 무게는 한결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것이다. 어떤 배는 바람 때문에 침몰하지만 어떤 배는 바람이 불어야 더 잘 나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렵고 힘든 우리네 일상일지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은 백발십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눈이 어떤가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봄날 꽃 한 송이 바라보며 문득 아름다움도 내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미소가 종일 떠나지 않는다.
왜 애미랑재란 이름을 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개가 하도 높아 주변 산과 구분이 되지 않고 애매하다고해서 '애매랑재' 애미랑재로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봄의 와 있다. 매화, 산수유를 시작으로 매화,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피어나더니 이제는 철쭉과 영산홍, 수수꽃다리, 미선나무에서 꽃이 피어날 것이고, 또 앵두꽃 복사꽃, 배꽃들도 아름답게 피고 지며 이 아름다운 생명의 4월을 마감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고개를 숙이고 산길을 걷다 보면 제비꽃, 민들레, 냉이꽃, 들이 발아래 한창이고, 또 씀바귀, 고들빼기, 냉이, 쑥 등의 봄나물이 봄기운을 흠뻑 느끼게 해준다.
또 숲은 어떤가! 4월초까지만 해도 침묵하던 숲이 중순이 지나면서부터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며칠 되지 않아 감쪽같이 숲 색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 있다. 우리 곁에 있는 대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며 교감하고 그 소박하지만 깊은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는 생명의 정신이 많이 희미해졌다.
봄이 오고 온갖 꽃들이 피어 꽃 사태를 이루지만 우리 마음속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이 않은가. 산색이 한 달 동안 완전하게 옷을 갈아입었지만 그 사실이 우리에게 별 의미 없이 다가오고 않은가.
물론 나 또한 대자연이란 길동무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이 자연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안에 대자연들에게 내 안에 대자연이 깊이 들어오고 난 뒤부터 내 삶은 그야말로 확연하게 바뀌었다. 대자연과 공명하는 삶은 그 어떤 깨어 있음과도 같은 적요(寂寥)를 가져 온다.
칠보산을 바라보며 뽀족한게 멋지다. 오르기가 아휴 힘들어 높게만 보이던 칠보산 정상. 힘든 오름길은 계속되고 지루한 오름이 끝나나 싶더니9부 능선쯤에서 봉우리를 끼고 좌측사면으로 돌아 나가서 이 봉우리로 오르는 것이 아닌 가 했는데 잠시 후 다시 우측으로 꺾여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오른다.
새신고개는 평평한 지형 이고 신암과 세신을 넘나드는 곳. 새신고개 좌측으로는 신암리 우측으로는 개내골로 탈출로가 있다. 헬기장을 지나니 춘양목이 나타난다.
금강송 숲 탐승은 소나무향에 취하고, 피톤치드를 듬뿍 마시며 쉬엄쉬엄 걷는다. 통고산 능선의 송림지대. 양쪽으로도 소나무 줄기로 아예 가려지다시피 한 곳이다.금강송은 조선조 때 심재(心材) 부분이 누런 황금색을 띤다 하여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렸다.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 바르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난히 붉다. 이 소나무를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剛松)라고 한다. 강도도 높아 조선시대부터 우목재로 인정받아 궁궐과 천년고찰의 대들보로 사용되어 왔다. 1950년대 춘양, 영주, 석포를 잇는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춘양역이 금강송이 외지로 반출하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춘양목(春陽木)으로도 부른다. 금강송의 왕자격인 춘양목’까지 감상했으니 낙동종주의 보람이 더해지는 것 같다.
곧게 뻗은 줄기가 여러 가지(枝)로 뻗었는데 여러 줄기(10개가 넘음)가 꽃다발처럼 한 묶음이 되어 하늘로 솟았다 보통 소나무 줄기는 옆으로 뻗는데 모든 줄기가 하늘 향해 치 솟아있다 열심히 촬영하였다.
마루금 길에는 겨우내 얼어붙어있던 산길이 눈 녹아 풋풋한 흙내음을 실어 오는 싱그러운 봄바람이 나의 몸을 어루만지며 피로에 지치지 않게 하였다. 또한 훤칠한 키에 의연한 자세로 능선 좌우에 도열하여 서서 함께 걸었던 이른바 금강송의 멋진 자태는 멀고 먼 거리로 인하여 무거운 발걸음에 지쳐 헐떡이는 나그네로 하여금 낙동정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도록 하였다.
더 이상 정맥 종주에 대한 갈등과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것 같다. 몇 고개를 넘으면서 새신고개를 지나고 춘양목에서 깃재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뚜렸하게 길도 나있고, 깃재라고 쓴 표지도 걸려있다. 깃재에서 신암리(신양분교) 여기에서 버스에 몸을 씻고 서울로 출발했다 .
이번 산행은 참으로 힘든 산행이었다. 저녁을 먹지도 않았는데 복통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계속 설사를 한다. 그래서 이번 낙동정맥을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독산타잔님 전화가 와서 부득이 간다고 하였다,
저녁도 먹지 못했고, 더구나 산행도중 세 번씩이나 설사를 해서 힘이 빠져 도저히 산행하기가 힘들었다. 산행하다가 아침도 점심도 설사가 날가봐 하지 않았다. 다행이 박칠규 사장님이 그 무거운 배낭을 대신 매어주어서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맙습니다.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주저앉았을 것이다. 또한 사향님도 회장님의 배낭을 대신 매여 주어서 회장님도 고령(高齡)한 연세인데도 그 머나먼 무박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새마포산악회는 대동단결(大同團結)하고 다정불심(多情佛心)하며 또한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상부상조(相扶相助)정신으로 제와 같이 이렇게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고 친절한 회원들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많은 산악회를 가 보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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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글을 읽는 순간순간마다 흙냄새가 코를 찌르는군요.....산....꽃....나무....사찰.....너무나 자세히 올려주시니 한눈에 다 보는것같군요.....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너무 무리하시지 마시고. 산행하셔야지요....아무쪼록 오래오래 건강해서 좋은 산행지를 올려주셨으먄........바람입니다....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