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복은
생계의 근간이 되는 땅을 주신 것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시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땅이 없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늘 그렇듯
사업에 실패하거나 흉년이 들면
돈과 양식이 부족해지고
집과 땅을 담보로 잡혀 빚을 내야 하고
그 다음에도 일이 안 풀리면
빚을 갚기는커녕 이자도 못 갚다가
저당잡힌 땅과 집을 모두 잃게 된다.
그 시대에는 그런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흉년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불운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복스러운 땅의 기업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해서
여러 가지 법적인 보호장치를 주셨다.
부채를 탕감하거나, 노예를 해방하거나,
토지를 반환하는 안식년과 희년의 법이 그러하고,
과부가 된 여인을 보호하는 형사취수제가 그러하며,
가까운 친족이 잃어버린 기업을
돈을 주고 되찾아 돌려주는 '기업무를 자'의 율법이 그러했다.
'기업 무를 자(히브리어로는 '고엘'이라고 한다)'의 율법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대대로 물려내려온 땅이 있었다.
그것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에게 상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멜렉의 시대에
흉년 때문에 그의 토지는 다른 이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희년이 되면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이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말론과 기룐도 희년이 되어 땅을 되찾기 전에 죽었고,
심지어는 자식도 없이 죽었기 때문에
희년이 되어도 그 땅은
다른 사람에게로 영구적으로 넘어가고
엘리멜렉의 가족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나오미나 룻은
땅도 없이, 삶의 터전 없이
이삭을 주우며 연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의 율법에 의하면
이 집안의 가장 가까운 친족,
예를 들어 엘리멜렉의 형제나 삼촌이나 사촌 등의 친족이
재산이 넉넉할 경우에는
자기의 사비를 들여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그 땅을
도로 사서 되찾아올 수 있고,
그것을 엘리멜렉의 집안에 도로 주어야 한다.
만약 가장 가까운 친족이 여의치 않아서
기업 무를 책임을 거절하면
2순위 친족으로 넘어가고,
그도 거부하면 3순위로, 4순위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친족 중에 누군가는 그들의 땅을 되찾아 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적어도 그 집안에 남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멜렉이 죽었지만
그 아들 말론이나 기룐이 있었다면
그 기업을 되찾아 오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말론이나 기룐까지 죽었어도
그들의 어린 아들이라도 있다면
다른 친족이 땅을 되찾아 와서
그 아들의 이름으로 땅을 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나오미의 집안에는
그 남편도, 아들도 다 죽었고,
손주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며느리 룻도
아들을 얻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기업을 무르는 율법이 무의미했다.
만약 나오미와 룻의 집안에
기업이 되돌아올 수 있으려면
그것은 단순히 땅만 되돌려서 될 일이 아니고,
누군가 룻에게 남편의 역할까지 해주어서
아들까지 나아주고
그 아들을 자기 아들이 아니라
룻의 원래 남편이었던 말론의 아들로 호적을 올려주어야
그 땅이 나오미와 룻의 집안으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땅만 사서 준다고 해서
남자가 없는 그 집안에
땅이 귀속될 수는 없었다.
그 집안에 남자도 생겨야
그 남자의 이름으로 땅이 귀속되는 것이었다.
보아스는 룻이 맘에 들었다.
룻이 자신의 근족임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룻의 기업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째는 그가 돈으로 그 집안의 땅을 사서 돌려준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그 집안에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보아스 자신이 룻과 동침하고 남편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녀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어야 했다.
보아스는 아마 그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룻과 아예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아주고,
그 땅도 되찾아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면 그 집안에 땅을 되찾아 주는 것일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보아스 자신의 땅과
엘리멜렉 집안의 모든 땅까지 소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보아스는 분명 그것들을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룻의 남편이 되는 것,
그 집안의 땅을 되찾는 것,
그녀와 자기 사이에 아들이 생기는 것.
보아스는 그것을 원했고,
그것은 사실 나오미와 룻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어려운 문제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자' 중의 1순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1순위는 다른 더 가까운 친족에게 있었다.
보아스는 2순위였다.
만약 보아스와 룻이 서로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기업을 무를 것을
간절히 원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1순위의 책임이 있는 친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오미 집안의 기업을 물러 되찾아 주려고 한다면
보아스의 계획은 다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나오미도, 룻도, 보아스도
서로를 너무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만약 1순위 책임을 가진 친족이 율법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버리면
그들의 만남은 무산되는 것이다.
호감을 가지고 서로 이성적으로도 좋아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잘 못하는 것이 있다.
나는 대부분의 욕망과 의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원하거나 욕심내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나도 싫어한다.
그러나 가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것인 경우도 있다.
나는 정말 그것이 갖고 싶고,
나는 정말 그 일을 하고 싶고,
나는 정말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분명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실 것을 알고 있는
그런 욕심, 그런 소원, 그런 갈망이 가끔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꼭 이루고 갖고 하고야 마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도
그 욕심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는 실패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해버릴 때도 있는 것이다.
내가 포기하기 싫어서 말이다.
그것은 악독한 죄악이며 교만이며 고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은
그만큼이나 어렵다.
내가 보아스였다면
나는 룻을 포기하지 못했을 것 같다.
젊고 아름답고 착하고 성실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며
무엇보다도
나를 원하고 나를 좋아하고
나의 보호와 도움을 받기를 원하는
그런 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래서 이미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총각 남자로서 그런 여인을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 예상에는 보아스도 그랬을 것 같다.
보아스도 룻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3:12~13)
보아스는 자기의 바람,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의 바람,
그 둘 서로의 갈망과 사랑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중시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더 중하다고 믿었다.
자기가 아무리 원해도,
자신이 사랑하게 된 그녀가 아무리 원해도,
그리고 그것이 선하고 착한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과 절차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종으로서 마땅한 태도였다.
자신에게 돈이 있고,
자신이 하려는 일이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과 질서, 절차와 원칙을 무시하고는
그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고
온전히 아름답게 빛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 말할 때에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6~7)고 했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고 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서로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선행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 속에서
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에서 사랑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보아스는 그런 면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진심으로 룻을 사랑했던 남자다.
그것은 어떤 아름답고 애절한 로맨스보다
더 근사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자세였다.
보아스 그는 진짜 사랑을 아는
진짜 남자, 상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