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 (140) 선종의 수행론-달마선 ⑥
등현스님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관심론>에서 정심(淨心)을 또한 진여심(眞如心)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진여심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영원한 마음인가, 생멸하는 마음인가? 혹은 여래장인가? 열반의 마음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도불교에서 존재하거나 인식되는 모든 것은 셋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는 마음(citta), 마음의 대상(cetasika), 물질(rūpa), 이 셋 중의 하나에 속하고, 이를 유위(형성된)의 진제(saṅkhata paramattha)라 한다. 유위의 진제는 경험 주체와 객체가 모두 인연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심과 심소 역시 인연따라 생멸한다.
둘째, 열반과 개념이다. 이 둘은 생멸하지 않는 법이다.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하였으므로 생멸의 주체가 사라졌기에 이를 형성이 해체된(무위) 비형성의 진제(asaṅkhata paramattha)라 하고, 개념은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관념이므로 생멸을 말할 수 없으므로 속제(sammuti) 또는 빤냐티(paňňatti)라고 한다.
진여심은 그러므로 이 셋 중 하나이다. 인도불교에서 마음은 오온 중 수상행식 중의 하나에 해당되고 이는 형성된 진제이다. 아비달마에서는 수상행을 심소, 식을 심으로 칭하면서 심소를 46 또는 52개로 자세히 나누지만, 요약하면 심이나 심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둘은 같은 대상을 동시에 인식하며 동시에 사라지기에 진여심도 생멸심일 뿐이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을 진여심과 생멸심의 2문으로 나눈다. 여기서 진여심은 생멸심과 대비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멸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멸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마음은 과연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두 가지만 가능하다, 하나는 열반의 마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성이다. 사실 열반의 마음은 여래의 마음이며, 여래의 마음은 깨달음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여래가 한 법도 깨달은 바가 없으며, 그 이유는 열반은 비형성(無爲)의 진제이고, 모든 형상과 모양, 개념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그런 이유로 열반은 유무로 지칭할 수 없다. 반야부 경전은 진아가 홀로 존재하며, 생멸을 초월한 진여심을 절대적으로 부정한다. 그렇다면 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심은 불성(佛性)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불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만일 불성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여래장(tathāgata garva)으로 이해하면 불성이란 존재적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추상명사일 뿐이다. 이는 논리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기에 조건의 성취 여하에 따라 부처가 될 수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불성을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진아의 상태로 이해한다면, 불성은 ‘중생의 본질적 마음’이다.
이러한 불성은 불교를 떠나서 힌두교의 진아론과 유사하게 된다. 심지어는 <능가경>에서조차 여래장은 외도의 진아설과 다르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능가경에서는 두 가지의 일천제 종성을 말한다. 보살 일천제는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는 일천제이고, 두 번째 일천제는 5역죄 등의 악업에 의해서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서 우리는 불성을 부처의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부처가 되거나 되지 못할 수가 있다.
선종에서는 불성을 중요시한다. 한 수행자가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지 물어 보았을 때 조주는 ‘무(無)’라고 답했다. 이 대답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불성의 유무에 대한 답으로 ‘무’를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불성 자체에 대한 대답으로 언어와 유무를 초월한 ‘무’로 이해 할 수 있다. 이 후자의 대답이 중관학파의 소의 경전인 금강경의 핵심 사상이고, 조주는 불성을 열반심으로 이해한 것이다.
[출처] 불교신문
[출처] 선종의 수행론-달마선 ⑥|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