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사라는 이름은 현재 대웅전 정면 돌계단의 오른 쪽에 있는 샘에서 유래한다. 용이 그 연못에서 살다가 승천하여
용천으로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본래 그 연못은 서해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지금의 연못은 그러한 전설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니고,
현대식으로 밀폐되어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정면 돌계단의 난간에 새겨진 연화문 조각은 역사의 흔적이 배어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연화문은 연꽃 줄기와 꽃봉오리를 양각하였는데 아직도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그 연대는 1685년 무렵의 석등 조성
연대와 같이 추정한다. 이 아름다운 계단을 지금도 오르내릴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성보문화재로는 지방유형문화재 제84호인 석등을 비롯하여 목조여래좌상, 석탑, 부도군, 괘불석주, 불화 등이 있다.
*현재 조계종 종정스님인 법전스님의 고향이고, 스님의 선친이 주지로 계셨던 역사성도 가지고 있다.
함평 모악산에 자리한 대한 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전언에 의하면 백제시대 600년(무왕 1년)에 행은선사(幸恩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그런데 《조선사찰사료》에 수록된 <용천사대웅전현판단청기>에 보면 중국 당나라 현종 재위기간, 즉 712~756년 사이
에 국행(國幸)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용천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고려시대 1275년(충렬왕 1년)에 각적(覺積)국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국사. 왕사 가운데
각적국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아닌 가 추정한다.
각진국사(1270~1355)는 현재 장성 백양사 출신의 승려로 1351년 왕사로 책봉되고 사후에 국사에 추증되었으며 송광사
16국사 중의 한 분으로 그의 영정은 국보 제 56호이다. 그러나 중건연대가 1275년이고, 각진국사의 출생연대가 1270년
이어서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절이 폐허되었다가 1632년(인조 10년)에 법당을 새로 짓는 등 중창이 있었고,
1638년에 쌍연(雙衍) 개연(慨然)스님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그 뒤 건물이 퇴락되므로 1705년(숙종 31년)에 여러 스님과 시주들이 힘을 합해 절을 중건하고는 그것을 기념
하기 위하여 단청기를 지었다. 당시의 석등 등이 남아있다.
근래에 와서는 1938년에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 중에 다시 불탔다. 1964년에 금당(錦堂)스님이 옛 보광전에 대웅전과
요사를 세워 법통을 이어왔고, 1984년의 요사채 건립, 1988년의 전통사찰 등록 등으로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는 1996년
에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현재 대웅전 정면 돌계단의 오른 쪽에 있는 샘에서 유래한다.
용이 법당 앞 연못에서 살다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본래 그 연못은 서해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정면 돌계단의 난간에 새겨진 연화문 조각은 역사의 흔적이 배어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연화문은 연꽃 줄기와 꽃봉오리를 양각하였는데 아직도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그 연대는 1685년 무렵의 석등 조성 연대와 같이 추정한다.
이 아름다운 계단을 지금도 오르내릴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대웅전 *목조 여래좌상* =문화재

신중전

산신탱화

지장보살 탱화



상사루

상사루에 모셔진 지장보살

=천불전=

천불과 함께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모셔져있다.

지장전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과 지장탱화

요사채

종무소와 공양간
감로수


용천사는 온산이 상사화로 덮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