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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9강
제2장 새로운 순종의 내용
VII. 사랑(아가페)
본 단락부터 새로운 순종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런데 사랑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사랑이 새로운 순종 내용, 즉 모든 율법과 계명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가 결코 사랑이라는 말로 축소되어서는 안 되지만, 많은 것이 사랑이 전개되어 개별적으로 적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하므로, 사랑은 믿음의 열매이며, 믿음과 더불어 사랑은 새 생명의 실존 양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순종은 사랑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사도가 고전 13:4-7, 롬 12:9-21에 잘 정리했다.
새로운 순종의 내용은 사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랑에서 새로운 순종의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바울의 선포 핵심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랑도 핵심적으로 가르쳤다. 여기에서 그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간다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다.
사랑은 새 생명의 실존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면서 산다
바울이 사랑에 대해 다양하게 기술하는 바, 다양한 진술의 공통점은 사랑이 믿음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의 실존 방식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한다(갈 5:6). 사랑은 믿음, 소망과 더불어서 그리스도인 삶의 진정한 핵심이자 내용이다(고전 13:13; 살전 1:3; 골 1:4; 갈 5:5 이하. 참조: 딤전 6:11; 딤후 3:10; 딛 2:2).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성령님 안에, 그리고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 자유는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 가능해졌는데, 사랑이 “율법의 온전한 성취”이다(롬 13:10). 사랑은 그리스도 법의 내용이다(갈 6:2). 한마디로 새 생명은 사랑 안에서 실현되며, 사랑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의 삶이며 종말론적 존재 방식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난 구속의 때에 나타나는 신자의 모습이다(롬 13:10 이하).
이 사랑의 중심적 의미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근거로 제시하는 가르침에서뿐만 아니라(참조: 빌 2:1-2; 엡 5:2, 25),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신자를 사랑 안에서 아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랑에 대해 가르치는 곳에서 드러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 된다”.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사랑이 가득한 선택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는 그분에게 알려진(그분이 선택하신) 사람의 사랑의 실천 안에서 그 효과(선택하심의 결과)가 나타난다(신자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한 것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o 살전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o 살후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사랑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성화이다
이 점에서 사랑과 성화의 관계도 드러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것 같이, 사랑도 교회가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으므로, 사랑은 교회의 영적 제사이다(롬 12:1, 9-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에서 나타났고, 교회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구현된 하나님의 사랑은[1] 교회가 거룩하다는, 비밀스럽고도 분명한 표현이다. 반대로, 교회는 이러한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을 택함을 받아 하나님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교회를 세운다
이 사랑은 교회의 생명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이 사랑 안에서 머리가 그리스도인 몸인 교회가 세워져나간다(엡 4:15-16). 이 사랑 안에서 신자들은 뿌리내리고 터를 잡는다(엡 3:17). 그러므로 사랑은 완전함을 위한 띠(“온전하게 매는 띠”: 골 3:4)이며, 교회를 하나로 연합시킨다(골 2:2). 바울이 사랑의 계명을 적용할 때는, 교인이 서로 간에 책임을 지고 연합되어 있다는 의식을 깨워서 사랑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가르칠 때이다. 교인은 모두 형제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교회는 유일무이한 공동체라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드셔서 자기 소유로 삼으신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것으로 다른 단체(사람들)와 구별되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이러한 구조는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형제사랑이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서 단지 두번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롬 12:10; 살전 4:9), 그가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거의 항상 신자들이 서로를 세우고 사랑하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에서 나타난다(갈 5:13).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의 빛” 외에는 어떤 빚도 져서는 안 된다(롬 13:8). 이들은 모든 일에서 상대방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전 14:26; 살전 5:11; 롬 14:19).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는 자주 모든 형태의 영적 자족(영적 개인주의)을 공격할뿐만 아니라, 교회 속에서도 그런 것들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고후 12:20), 이른바 “악덕 목록”(예를 들면, 엡 4:31; 골 3:5 이하)에서 그것을 경고한다. 그는 특히 교회 안에서 어떤 영성주의적인 현상들을 통해 생겨나는 좀 더 세련된 형태의 개인주의와 자기 지향적인 신앙을 지적한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그 예를 살펴본다.
첫 번째 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개인적으로 행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는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사랑을 통해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친다[2](갈 5:13).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 우리에게 친숙한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한 구절에서 구체적인 적용 실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자유와 사랑에 대한 그의 매우 특징적인 이해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 음식에 있어서도 – 대단히 강조하지만, 이와 같은 강도로 사랑을 근거로 해서, 만약 이들이 약한자에게 죄를 짓게 하는 빌미가 될 경우에는, 이 자유를 개인주의적이고 영성주의적으로 이용하지 말하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만약 강한 자들이 여기에서 자기 자유를 절제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거슬러, 즉 교회를 세우는 그들의 의무를 어기고 죄를 범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강한 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내세우는 지식은 사랑과 대립된다:
o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o 고전 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o 롬 14: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두 번째 예도 영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교회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은사와 사랑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바울이 그들이 받은 다양한 영적 은사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만족과 개인주의가 퍼지고 강화되는 위험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특별히 고린도전서 12장, 13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교회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특성이, 사랑이 교회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이곳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바울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싸운 덕분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2, 13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사람의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논증을 이끌어낸다. 몸의 지체가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도 각자 다양한 은사들과 능력들 안에서 하나의 그리스도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이러한 개별성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 가장 좋은 은사를 열망할 수 있다(31).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은사를 넘어서서 이들보다 훨씬 값지고 높은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가장 좋은 은사들, 즉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비밀을 꿰뚫어 보는 지식의 은사나 이적들을 행하는 믿음의 은사나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것도 이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한 모든 은사를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믿음과 소망과 함께 사랑이 교회의 실존방식이기 때문에, 사랑은 형제들과 관련하여,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개인주의적이 될 수 없고, 교만하여 다른 형제들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모든 면에서 한몸과 관계되어 있다. 이 사랑이 없는 자는, 그가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다면 몸인 교회와 끊어져 있으며, 교회만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와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은사가 아니라 사랑 안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몸을 묶어주는 능력이며 생명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은사가 구원의 시기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하므로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믿음, 소망과 함께 영원히 머물고 이 셋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과 같이 단지 구원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통 속에서 인간 삶의 재창조로서의 구원이 이미 실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과 소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셋 중에서 가장 크다. 왜냐하면, 사랑은 개인에게서 나타날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의 문맥 전체가 보여주듯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기 소유로 삼은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의 전인 교회가 사랑 안에서 하나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랑이 전개된 모습(사랑의 개별화)
이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데, 바울 권면의 대부분이 이런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 13:4-7과 롬 12:9-21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사랑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한다:
화평을 사랑함(에이레네), 오래 참음(마크로튀미아), 인자함(크라스토테스), 선함(아가토쉬네), 신실함(피스티스), 온유함(프라우테스), 불쌍히 여김(오이크티르모스),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 오래 참음(아나케스타이), 용서(카리제스타이), 참됨(알레테), 옳음(디카이아), 존귀함(셈나), 순전함(하그나), 사랑 받을 만함(프로스필레), 칭찬 받을 만함(유페마), 관용(에피에이케이). 참조: 갈 5:22-23; 빌 4:8; 골 3:12-15; 빌 4:5 등[3].
이 개념 중에 어떤 것은 좀 더 기독교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런 성격이 좀 덜한 것들이 있다. 이 덕목들은 헬라 윤리학에서도 나오기는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그들 처럼 개인의 인격 형성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이 모든 개념을 형제 간의 교제와 교회를 세워나간다는 관점에서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이 덕목들을 사랑의 계명의 성취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순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특유의 내용을 지니고 있다(빌 2:3; 골 3:12; 참조: 롬 12:16; 고후 7:6). 바울은 신약성경 밖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로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단어를 스스로 낮아진 그리스도의 사랑과 밀접하게 결부시키고(참조: 빌 2:3, 8),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롬 12:10) 것으로 좀 더 자세히 정의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겸손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예컨데 고후 7:6에서처럼),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낮춘 모범을 따라 교회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겸손을 나타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의 반대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데도 마치 대단한 자라도 된다는 듯이 생각하는 것을 나타내는 교만(휩셀라, 롬 11:20), 자부심(케노독시아), 이기심(에리테이아. 빌 2:3)이다. 사람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늘 자기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일들을 시험해야 한다(갈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이외에도 더 많은 권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의 본질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것들은 앞에서 모두 제시되었다. 요약하면, 기꺼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고자 하고, 남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지 않고(자기를 상대방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고), 모든 일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사랑하는 자이다. 이러한 관점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러한 것은 사랑에 관해서 당시에 통용되는 전통적인 관점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사랑의 계명을 깊이 통찰해서 해석한 것에서 나왔다. 한편으로는 여기에 위대한 인간성과 형제를 돕는데 필요한, 성숙하고 깊은 통찰력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고상하고 일반적인 개념으로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이 사랑의 계명이 이렇게 구체화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가 단지 각 개인에게만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의 찬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님의 성전으로서의 새로운 실재라는 사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바울은 사랑으로 섬기는 대상이 거의 교회 내에서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이 형제 관계로 맺어져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운다는 관점으로만 보았다.
바울이 명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드물다: 롬 8:28; 고전 2:9; 8:3; 엡 6:24(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이것은 우연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바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구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드러난다: 롬 5:10-11; 고후 5:20; 롬 8:7-9. 그럼에도 그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곳에서도, 단지 이웃사랑만을 염두에 둔 것과(롬 13:8-10; 갈 5:14),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명시적으로는 이웃사랑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도 독특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웃사랑이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신자 간의 새로운 사랑의 관계로부터 생겨나고, 조금이라도 어떤 독립적인 이웃사랑이나 인류애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이, 이와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특히 이웃사랑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 계명은 존재하지만, 이중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4]. 이웃사랑을 넘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여러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찬양시에서이다:
o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o 롬 9:5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o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형제사랑과 외인들에 대한 사랑의 차이점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웃사랑을 어떻게 불신자 이웃(“밖에 있는 사람”)에게 적용하는지 이다(고전 5:12-13; 골 4:5; 살전 4:12). 이에 대해 알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점은, 바울이 사랑의 계명을 가능한 한 넓게 적용하므로, 이것이 단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단호하게 배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라고 두 번 말한 것은(3:12; 5:15), 의심할 여지 없이 교회 밖의 사람이며,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이다(참조: 빌 4:5). 사랑의 계명을 구체화시킨 매우 중요한 단락은 롬 12:9-21에서 사랑은 – 그리스도의 계명에 의거해서 – 형제들에게만 아니라 외부사람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들이 자기에게 적대적이고 여전히 폭력과 불의를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14, 17, 19 이하. 고전 4:12도 참조하라).
이러한 사랑의 보편성은 목회서신에서 특별히 부각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과 매우 근본적으로 그리고 절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몇 구절에서 드러난다. 교회는 그들이 모일 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3-4절). 또한 그리스도 자신과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사역이 이 보편적 사랑의 증거이다(딤전 2:5-6). 마찬가지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고서(딛 2:11-12), “모든 사람”에 대하여 관용하며 온유함을 나타내어야 한다(딛 3:2). 또한, 교회는 그들도 전에는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악독한 자들이었지만, 오직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딛 3:3-5).
바울복음의 기본 모티프들이 그의 선포 전체와 권면까지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분명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신자 간의 교제와 신자와 불신자들과의 교제 사이에는 분명하게 근본적인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도 드러난다. 살전 5:15에서는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라고 말하고, 갈 6:10에서는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하라는 정도 차이가 아니라 교제의 차이이며, 이와 관련된 사랑의 성격에 관련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상호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이것이 잘 기능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바쳐진 교회를, 같은 하나님 권속(식구)에 속한 사람들인 이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띠다. 반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양자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는 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도 이러한 구별을 제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밖에서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6:22). 그러므로 교회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공통점이 아니라, 늘 교회의 독특성이 이웃 사랑의 근거로 요구된다[5]. 그리고 교회가 외인들에게 지혜와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나타내는 목적은, 이들 중 얼마를 얻고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는 데에 있다(참조: 고전 10:32; 11:1; 빌 2:15-16; 골 4:5-6; 딛 2:5, 8, 10).
[1] 신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사랑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하는 능력이다.
[2] 마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 관계가 잘 설명이 되어 있다.
[3] 이 모든 것은 사랑이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이러한 것이 드러나야 그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4]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므로,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5]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근거로 교인과 외인을 똑같이 대해서는 안 된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9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에 수록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