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다는 졸본은 과연 어느 지역에 있었던가?
고구려 연구자인 필자는 오래전부터, 아마도 고구려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줄곧, 현재의 중국 요령성 환인현(환인만족자치현)은 고구려 첫 도읍이었던 졸본 지역이 결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필자는 2015년 12월 23일 인하대학교에서 열린 <고구려 평양 위치 탐색과 관련한 학술회의>(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 후원)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졸본은 현재의 환인 지역이 아니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의 첫 부분은 먼저 환인 지역을 고구려 첫 도읍이라고 주장하는 기존의 소위 통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로서 시작된다.
[논문의 '서론' 부분 인용] 중국 요령성 환인현의 혼강(渾江) 가에 위치한 오녀산성 아래에는 <고구려시조비(高句麗始祖碑)>가 서있다. 고구려의 시조가 이 지역에서 건국했음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필자는 매번 답사로 들를 때마다, 이 조형물을 지나 오녀산성에 올라, 험한 산들을 비집고 꿈틀거리며 흐르는 혼강을 내려다볼 때면, 늘 오래도록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 한 가지가 떠오르곤 한다. 그 의문은 “이곳이 정말 고구려의 첫 도읍일까?”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중일 3국의 역사학계에서 환인 일대를 고구려의 첫 도읍으로 비정한 연구들이 많이 나왔다. 1986년의 오녀산성 긴급발굴조사에 이어, 1996년에서 1998년 사이의 체계적 발굴조사도 이루었으며, 그곳에서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나왔다는 보고도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연구의 진전에 따라, 환인 일대가 고구려의 첫 도읍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필자의 추론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환인 일대를 고구려의 첫 도읍으로 비정하는 논의들은 대체로 “현토군의 설치에 따라 압록강 유역은 한(漢)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들어갔다”거나 “현토군의 경우 치소(治所)가 서기전75년에는 흥경(興京)ㆍ로성(老城) 방면으로 옮겼고”, 현토군이 옮겨간 환인 일대의 공간에서 부족연맹체 형태의 정치집단이 형성되면서 고구려의 모태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 논의는 대체로 한사군 중의 현토군이 현재의 압록강 유역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성립되고 있다. 현토군이 압록강 유역에 설치되었고, 그에 따라 고구려 첫 도읍을 현재의 환인 일대에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토군이 압록강 유역에 설치되었던가? 압록강 유역의 현토군과 관련을 맺으며, 고구려 첫 도읍이 과연 현재의 환인 일대에 설치되었을까? 이러한 문제 인식에 따라, 본고에서는 우리역사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이 비정되는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의 목적은 그 비정들이 어떠한 전제 아래 이루어졌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즉 지금부터 100년 이전으로부터 작성되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고구려 첫 도읍 관련 연구들은 대부분 현토군이 현재의 압록강 유역에 설치되었음을 전제로 하는데, 고구려 첫 도읍 관련 비정이 시작된 고려시대나 그 이후 조선시대 및 근대에서도 그런 전제 아래에 고구려 첫 도읍을 비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인용 끝)
필자는 이 논문에서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분석하여, 고려시대 사람들은 고구려의 첫 도읍을 현재의 요하 서쪽에 있는 요령성 북진시 일대의 의무려산 인근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했었음을 파악해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이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에 있었다고 인식하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이 직접 그 지역을 왕래하며 "고구려의 첫 도읍이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
옛날 대요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 요의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자, 뵈러가는 우리 사신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 가면 의주에 이르러 연계(燕薊)로 향하게 되었으니, 때문에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그들의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현지를 직접 다녀온 견문에 의한 지리정보를 적극 활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즉 1125년 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연경(지금의 북경 일대)에 왕래하는 고려의 사신들이 동경(현재의 요양)을 지나고 요수를 건너 서쪽으로 하루 이틀을 가면 의주에 이르러서 다시 연경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왕래 과정에 고구려 초기 도읍이 그곳에 위치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위의 인용문에서 “때문에 그러함을 알 수 있다.”고 서술한 것이다. 요가 멸망한 1125년 이후 20년만인 1145년에 『삼국사기』가 완성되었는데, 그때의 편찬자들에게는 요의 동경이나 요수 및 그 서쪽의 의무려산 일대에 대한 여러 유형의 지리정보가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역들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인 흘승골성과 졸본의 위치를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 첫 도읍 졸본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아래 지도와 그 설명문은 필자의 위 논문에서 인용).
[지도 1] 『삼국사기』에 비정된 고구려 첫 도읍 졸본(흘승골성) 위치(A)
위의 [지도 1]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A)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요하에 인근한 요의 동경(B)을 거쳐 요하를 건너, 의무려산 아래 쪽에 있는 졸본의 옛 지역 A에 이른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지도의 오른쪽 중단에 표시된 C(환인)는 현재 다수의 학자들이 고구려의 첫 도읍이라고 주장하는 압록강 중류 일대의 환인현 지역이며, 단지 실제 고구려의 첫 도읍일 수 있는 졸본(A) 지역과의 비교를 위해 표시해 놓았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의무려산 일대에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이 있었다고 인식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첫 도읍이 한반도 안의 성천 일대에 있었다든가 혹은 현재의 압록강 중류 일대의 환인 등지에 있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분석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어떻게 고구려 첫 도읍과 관련된 이러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는가? 필자는 논문에서 이에 대한 의문을 해석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사대적 역사관 즉 소위 정통론이 작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필자는 또한 이 논문에서 일제강점기의 소위 식민사관에 의해 고구려 첫 도읍 위치를 현재의 환인으로 규정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일제의 한국역사에 대한 역사관의 문제가 어떻게 고구려 첫 도읍의 위치를 왜곡하게 되었는가? 일제 식민사관을 지닌 학자들이 왜 환인을 고구려의 첫 도읍으로 규정하려 하였는가? 일제와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고구려의 첫 도읍을 환인 일대에 규정함은 한국고대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필자는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이 논문에서 간단하게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위의 논문을 통하여, 고구려 첫 도읍인 졸본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것처럼 현재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이거나 혹은 그 이외의 다른 지역이었을 것이며, 현재의 압록강 중류 일대가 결코 아니었다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고구려 첫 도읍이 환인 일대에 있었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초기 기록은 제대로 해석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위에 소개한 논문에서처럼 고구려의 첫 도읍을 요하 서쪽 의무려산이나 혹은 그 이외의 지역에 위치시키고 나면, 비로소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초기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로서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구려 첫 도읍의 위치 문제는 고구려사를 연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관건적 문제이다.
위에 소개한 필자의 논문은 다음과 같다. - 임찬경,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 」『仙道文化』제20권, 2016. ------------------------------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 The review for presumption about the first capital of Goguryeo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임찬경 2016.10.20 23:21 관리자 조회 수:14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처음 건국될 때의 도읍은 “홀본”이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처음 건국한 지역이 “졸본”으로 기록되었다. 이들 사료를 통해, 고구려 첫 도읍의 명칭이 “홀본” 혹은 “졸본”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고구려 첫 도읍인 “홀본” 혹은 “졸본”이 어디인가 하 는 것인데, 현재 학계에 정설(定說)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고 구려 첫 도읍이 어디인지에 대해, 사학계 및 고고학계에 이미 기본적 으로 공통의 인식이 형성되었는데, 그 도읍이 현재의 중국 요령성 환 인현 경내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고구려 첫 도읍에 대한 일종의 통설(通說)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은 사실에 근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확히 역사적 사실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필자는 고구려 첫 도읍에 관한 기존의 통설이 고구려 첫 도읍에 관한 역사 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도 못하며, 오히려 고구려 초기 역사 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 여, 본고는 고구려 첫 도읍에 관한 인식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비판 적으로 검토하려 한다. 본문에서, 역사문헌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 환인현 일대는 고구려 첫 도읍이 아닐 수 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출처 : http://kukhak.eeaa.co.kr/sundo/788 |
첫댓글 고구려의 첫 도읍은 곧 천도하여 유물을 거의 남기지 못햇기 때문에 사료로밖에 파악할 수 없습니다. 삼한사의 재조명 (1)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을 요하 상류 어딘가가 아닐까 하고 잠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부여의 도읍지 혹은 영역과의 비교 검토가 필수적일듯 합니다. 현재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기 때문에 저도 다른 후보지를 살펴보고 있으나, 부여에서 이탈한 추모 집단이 최초로 남하해 정착한 곳이 어딘지 살펴보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려운듯 합니다. 졸본부여와의 결합 후 그 뒷배경을 바탕으로 고구려로 성장했다는 기록을 어디까지 취신할지 모르겠지만, 이를 신뢰한다면 졸본부여의 위치 또한 고민할 여지가 있으며, 그에 따라 행인국과 구다국, 개마국, 북옥저 등의 위치 또한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그렇기에 아직은 섣불리 어디다...라고 대답하기 어려운듯 합니다.
지도에서 A라고 표시된 곳은
요동과 요서의 경계는 의무려산이므로,
A라는 곳은 '험독'이 되는 겁니다.
초기 고구려의 수도는 목단강 유역으로 생각됩니다.
그곳은 <만주원류고>에 등장하는 '영고탑'과 관련 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