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오모에서 바라본 피렌체
이탈리아 피렌체의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은 로렌초 디 메디치란 인물때 최 전성기를 누렸다. 로렌초는 메디치은행을 근거로하여 각 군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고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열강들로부터 이탈리아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메디치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돈이 많은 가문이었다. 그리고 공화국인 피렌체에 메디치가 족벌체제를 굳혀 사실상 군주제로 이행한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 로렌초)란 칭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로렌초 사후, 렌체의 수도사인 사보나롤라의 선동으로 메디치가문은 피렌체공화국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수십년 후, 로렌초의 차남인 조반니가 교황 레오10세가 되자 외국군대의 힘을 빌어 피렌체에 다시 메디치가문 족벌체제를 정립하고 레오10세의 조카손자뻘 되는 코시모 디 메디치는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해 군주국가를 세우게 된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家)가 시정(市政)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지모 및 손자인 대(大)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다.
윈저 가와 케네디 가 그리고 록펠러 가를 합친 것과도 같았던 부․패션․권력의 왕조 메디치 가. 그들은 3백 년간 유럽을 지도를 구획하고 유럽의 정치, 과학, 예술 심지어는 교황까지도 조정하였다. 그들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갈릴레오의 후원자였으며, 피렌체로부터 전지구적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갔고, 드디어는 그 모든 것을 잃었다.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전역에 이름을 떨쳤고 프랑스에도 그 집안의 딸을 왕비로 보낸 왕가와 맞먹는 유서깊은 집안이다.
그러나 이 유명한 가문이 대대로 유서깊은 귀족이 아니라 일계 평민-그것도 농민에서 환전상-지금으로 말하면 은행가-로 시작한 평범한 가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그러니 이 집안이 유명하게 된 것은 허울좋은 혈통이나 전쟁에서의 무공이 아니라 돈때문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쓸 줄 알았다.
차츰 금융업의 지점망을 늘려가면서 프랑스 왕에게까지 대부를 해주고 그들은 부와 명성을 축적하고 서서히 피렌체의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피렌체는 몇몇 유력가문의 지배하에 이었지만 가장 늦은 출발을 한 메디치가는 민중을 조종하며 건축과 예술을 자신들의 매스미디어로 이용하면서 권모술수와 실력으로 피렌체의 정권을 잡았다.
코시모메디치나 로렌초메디치는 상당히 영리한 사람들이었던 것같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처럼 절대군주의 독재를 드러내지않고 최고의 시민으로 자처하면서 실권을 장악해갔다. 권력의 맹점이 한 번 취하면 놓기어렵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인데 그럴 수록 파국도 빨리온다.그들은 아마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조국의 아버지란 칭호를 부여받고서도 코시모는 최고시민의 영예를 놓지않았다. 메디치가가 왕가도 아니고 유서깊은 대귀족도 아니었으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것은 이와같은 처세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남기면서 그들의 독재정치를 미화해갔다. 권력가나 왕조가 역사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져가지만 메디치가는 그들이 남긴 문화적인 유산으로 세계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은 선조들처럼 영리하지못했다. 결국 그들은 추방되었다가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서서히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르네상스의 시대에 황금만능주의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고 시민으로서의 최대한 처세술과 용인술을 펼쳤다.
르네상스의 후견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낸 메디치가 사람들의 행적을 보면 과연 "부자는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개국보다 수성이 어렵고 수성보다 치국이 어렵다고 한다.
메디치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 점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산 로렌조 교회 메디치 예배당의 줄리아노 드 메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