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성찰
(2007년 12월 30일 대곡성당에서의 특강요약)
1. 2008년 대구대교구 사목지침서에 의한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앞둔 우리교구의 일정과 실천사항
1) 교구의 일정
2008년: 성찰이라는 주제로 각자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한다.
2009년: 비전이라는 주제로 미래의 교회상을 새롭게 정립한다.
2010년: 도약이라는 주제로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을 다짐한다.
2) 실천사항
(1)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각자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한다
(2) 교구 시노드 준비에 열린 마음으로 적극 참여한다.
(3) 100주년 기념성당건립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과 정성을 모은다.
(4) 교구 100년사 편찬에 관심을 가지고 교구역사를 공부하고 신앙선조들의 전통을 계승한다.
교구장님의 위와 같은 결정에 따라 먼저 성찰을 주제로 우리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기로 하였다.
2. 성찰의 일반적 방법
일반적으로 성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판단의 방법: 구성적인 방법. 이미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반성의 방법.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사건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서 전체적인 사건의 내막을 재구성해서 평가하는 방법.
2)발견의 방법: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반성하는 방법. 우리는 미래의 일을 계획할 때의 방법. 목적을 먼저 정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들을 하나하나 계획한다.
결국 과거에 대한 성찰은 미래에 대한 계획과 연결되어 있고 그럼으로써 직접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엄밀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부분을 강조할 수는 있다.
3. 성찰을 위한 정체성 인식의 필요성과 정체성의 구분
성찰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야 한다.
1) 정체성 인식의 필요성:
성찰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처신을 잘 하지 못한다. 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잘못된 삶을 살 수 있다.
2) 정체성의 구분
정체성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대구교구 신자로서의 정체성 등
4. 가톨릭신자로서의 정체성
우리는 대구교구 신자이기 이전에 우선 가톨릭 신자이다. 가톨릭신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가톨릭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이요 하느님이 세우셨기에 거룩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사도들로부터 전해오는 교회이며 우리는 그러한 단체의 일원이다.
5 가톨릭 신자의 삶의 목적은 행복을 얻는데 있다.
그리스도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끝없이 누리는 곳이다. 그리스도는 왜 이런 말로써 선교를 시작하셨을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다. 인간은 불행 그 자체를 추구할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 위해 자살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최고의 행복을 끝없이 누리는 곳인 천국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신다.
따라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천국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천국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천국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것이 바로 망덕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는 신망애 삼덕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망덕을 포함시키지만, ‘왜 성당에 다니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할 때는 망덕을 빼버리는 경향이 있다.
최근 가톨릭 신문에 게재된 대구교구신자들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하나도 없다. 그것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이 입교하게 된 동기가, 가족의 종교일치를 위해서, 가톨릭신자의 모범적 생활을 보고서, 전례분위기가 좋아서 등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설문조사에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6. 그리스도교의 행복주의(eudaemonism)는 하느님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다음의 것들은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서로 사랑하라. 누구든지 나보다 먼저 부모나 형제나 전답이나 다른 것들을 구하면 나와 합당하지 않다. 먼저 하느님을 온 정신과 마음과 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등의 말씀들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 십계명도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산상수훈이 제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행복주의다.
7. 그리스도교의 행복주의와 엄격주의의 차이점
임마누엘 칸트(I. Kant)의 의무론(deontology): 칸트의 의무론은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의무감을 갖고 하는 행동만이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행복을 위해서 윤리적 선을 행하는 것은 타산적인(interested) 행위이며 오직 의무감을 갖고 행하는 행위만이 사욕이 없는(disinterested) 행위로서 윤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난 뒤에 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이론은 실제생활과 맞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다. 의무는 윤리적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나 자비 또는 사랑은 의무보다 더 큰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의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정의보다 더 큰 것이다. 영적으로 위대한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 이상의 것을 기쁘게 행한다. 그리고 인간이 의무에서 이든지 또는 기뻐서 이든지 윤리적인 선을 행함으로써 주어지는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다.
8. 그리스도인의 행복주의와 쾌락주의의 차이점
에피쿠로스(Epicuros)의 쾌락주의 :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추구했던 사람. 그런 점에서 그는 고상한 사상가였다고 볼 수 있으나 쾌락을 진리보다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쾌락주의는 진리보다 쾌락을 우선시한다. 쾌락주의의 입장에서는 쾌락은 곧 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행복주의는 행복 그 자체보다 하느님 즉 진리를 우선시한다. 즉 그리스도교는 먼저 하느님을 섬기고 그럼으로써 주어지는 행복을 추구한다.
9. 그리스도인이 행복을 얻는 방법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사는 것.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져서 하느님처럼 완전한 자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구분 된다
1)창세기:
아담은 하느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다. 여기서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복음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성부처럼 완전한 자 되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창세기에서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고 하느님의 진선미에 참여함으로써 진선미를 소유하고 하느님의 생명과 영원한 행복 등에 참여(participation, 분유, 관여)함으로써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우리는 양자라던가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는 말들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들이다.
10. 성찰의 방법
하느님의 완전함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양자로서의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성찰을 함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함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스스로 하느님처럼 완전한자가 된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반면 우리가 우리 자신만 성찰하면,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한 과오에 대해 몰입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그 두 가지의 성찰을 병행할 때, 겸손과 희망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하느님과 우리자신에 대해 성찰해야 하는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우리의 과오나 나약함에 대해서 보다 하느님에 대해 조금 더 묵상할 것을 권한다. 차렷 자세는 시선이 수평에서 상방 15도를 향하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는 눈이 그 각도에서 아래위를 전체적으로 가장 잘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땅이나 하늘만 쳐다보아야 할 때가 있지만,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고려해보면 영적인 눈도 이런 각도에서 일반적으로 전체를 가장 잘 보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과 우리자신에 대한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들 예컨대 우리의 가정, 본당, 직장, 교구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사명을 성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구대교구 대곡성당 이정희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