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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
내용 |
비고 |
1917년 11월
14일 |
출생(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71번지) 부.박성빈과 모.백남의 |
(음)9.30 |
1926년 4월
1일 |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
9세 |
1932년 3월
25일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제11회) |
15세 |
1932년 4월
1일 |
대구사범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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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
김호남과
결혼 |
19세 |
1937년 3월
25일 |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
20세 |
1937년 4월
1일 |
문경공립보통학교
발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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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22일 |
딸 재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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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4일 |
부친 박성빈
별세 |
21세 |
1939년
11월초 |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직 사임 |
22세 |
1940년 4월
1일 |
만주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입교 |
23세 |
1942년 3월
25일 |
만주군관학교 졸업
(1등) |
25세 |
1942년
4월초 |
일본육군사관학교
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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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월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57기), 만주군보병제8단육군소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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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10일 |
만주군 중위
승진 |
8.15해방 |
1945년 8월
29일 |
광복군 제3지대
1대대 2중대장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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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24일 |
조선경비사관학교
입교 (제2기생) |
29세 |
1946년 10월
3일 |
형 상희 사망
(대구 10월 폭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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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1일 |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 제4소대장 |
30세 |
1947년 9월
27일 |
대위 진급,
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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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일 |
소령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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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11일 |
서대문형무소
수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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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0일 |
출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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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월
7일 |
현역 파면,
육군본부 작전정보실장(민간인 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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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12일 |
모친 백남의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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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4일 |
현역 소령복귀,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
6.25사변
발발 |
1950년 9월
15일 |
중령 진급,
육군본부 수송작전지휘관 |
33세 |
1950년 10월
25일 |
제9사단 참모장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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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2일 |
육영수와 결혼
(대구 계산 천주교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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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15일 |
대령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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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25일 |
육군정보학교장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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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
10일 |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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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
30일 |
육영수 여사와
혼인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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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2일 |
첫째딸 근혜 출생
(대구 삼덕동) |
(음)1.7 |
1953년 2월
16일 |
제2군단 포병사령관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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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9일 |
충무무공훈장 수여,
제3군단 포병사령관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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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25일 |
준장
진급 |
36세 |
1954년 1월
17일 |
미육군포병학교 유학
( ~ 6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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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6월
30일 |
둘째딸 서영
출생 |
(음)6.1 |
1954년 7월
1일 |
2군단 포병사령관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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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1일 |
제5사단장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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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30일 |
6군단 부군단장
임명 |
40세 |
1957년 9월
1일 |
제7사단장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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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3월
1일 |
소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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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17일 |
1군 참모장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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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월
15일 |
아들 지만
출생 |
(음)11.5 |
1959년 7월
1일 |
6관구사령관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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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월
21일 |
군수기지사령관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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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30일 |
제1관구사령관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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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9월
30일 |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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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2월
15일 |
2군부사령관
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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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
03:00 5.
16혁명 거사 |
44세 |
1961년 5월
18일 |
육사생도 혁명지지
행진, 윤보선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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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20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장도영, 부의장 : 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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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월
3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선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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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11일 |
중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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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1월
1일 |
대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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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1일 |
"우리 민족의 나갈
길" 저서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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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15일 |
제5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후보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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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12일 |
제3공화국 초대
내각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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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16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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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5일 |
제1회 수출의 날
기념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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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6일 |
독일연방공화국 순방
( ~ 1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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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5월
16일 |
미국 순방 ( ~
5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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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
14일 |
전투부대 월남
파병안 국회 통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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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7일 |
동남아 3개국
순방(말레이지아, 태국, 자유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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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3일 |
제6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후보 당선 |
50세 |
1967년 9월
18일 |
구미전자공업단지
착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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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8월
20일 |
미국 순방 ( ~
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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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17일 |
3선개헌안과 재신임
국민투표(투표자 77.1%, 찬성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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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 |
제7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후보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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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6일 |
국가비상사태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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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4일 |
7. 4
남북공동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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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0일 |
맏형 동희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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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
대통령 특별선언 -
10월 유신 단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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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1월
21일 |
유신헌법안
국민투표(투표자 91.9%, 찬성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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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23일 |
제8대 대통령 당선
- 통일주체국민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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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
육영수 여사
서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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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0월
7일 |
육림의 날 선포,
자연보호운동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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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22일 |
100억 달러
수출의날 기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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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
6일 |
제9대 대통령 선출
- 제2대통일주체국민회의 |
61세 |
1978년 9월
10일 |
"민족중흥의 길"
저서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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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27일 |
제9대 대통령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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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대통령
서거 |
호산자님의 글:
상기 경력을 요약해 볼 때에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빈한한 농가에서 5남2녀중 막내로 출생,
1937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1937년 문경공립보통학교 발령
1939년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직 사임
1940년 만주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입교
1942년 만주신경군관학교 졸업(1등)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 편입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57기),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소위
1945년 8월 29일 광복군 제3지대 1대대 2중대장 임명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입교(2기)
위의 경력을 우리가 즐겨 읽고 있는 영웅전과 비교하여 고찰해 보자.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 출생이 비극적이며, 출생과 동시에 온갖 간난과
신고를 겪음을 수 없이 읽고 또 읽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이
출생시기와 장소, 가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겠는가?
지각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6세 전후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누구는 1917년을 전후 한
세대중에, 그 지방에서 유명한 석학들을 집으로 초빙하여 독선생을 앉혀 놓고 10년 공부를
하기도
하였고, 누구는 근대교육제도의 혜택을 입어 보통학교, 사범학교를 졸업하기도
하였으며, 누구는 사업에 투신하여 거부를 일구기도
하였다.
이 글의 주인공은 중간의 예에 속한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주인공은 군관학교 입학을 결심하게
된다. 일대 변환이고 역사적 전환점이다. 문무겸전을 하겠다는 주인공의 용단이기도 하다.
영웅전의 주인공들처럼 입지
분발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나이는 이미 24세의 약관이었으나 군관학교의 지망시기에는 많이 늦었다.
입교 원서를 수 차례
넣었으나 연만으로 번번히 퇴짜를 받곤 했다, 이를 고민하고 있던 중,
동료 교사의 아이디어로 혈서 지원을 하게 되었고, 그 내용은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설이 널리 유포되었으나, 최근에 확인된 사실은 "일사에 어봉공"으로 밝혀 졌다. 또한 그 대상도
일본
천황이 아니라 만주신경군관학교장에게 보낸 것이며, 이 혈서지원서도 거절되었고,
입교할 수 있었던 진짜 원인은 만주군관학교를 주인공에게
소개하였고, 사범학교 시절
교련교사를 역임하였으며, 그 당시 만주주재 일본관동군 독립수비대장 아리가와 대좌의
강력한 추천으로
연령제한 규정을 예외로 하여 입교가 결정된 것이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등으로 우등 졸업하였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육사의 3년 유학
편입의 기회가 주어 졌다.
그렇다면 스스로 판단하기에 많이 부족하여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데,
공부란 것이 모름지기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혀 유용하게 쓰고자 함인 데, 그 당시 서구문명에 앞서 있던 일본, 유럽,
미국에 가서
공부하였다면 어떠한가!. 힘껏 노력하여 자기의 능력이 부치는 만큼 계기를 마련하고
성실히 학업에 임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
한가?
비판가들이라면 역지사지하여 볼 때, 이러한 기회를 포기하였겠는가?
그 후에도 격동의 세월은 주인공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급전하여, 3년 사이에
만주군 보병제8단 소위 임관, 광복군 제3지대 2중대장, 조선경비사관학교 입교
졸업후
대한민국 육군 대위 임관으로 이어진다.
속된 말로 사관학교를 3개나 졸업하였다!.
현산 |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고 다른 사람들도 인용될 자료로 생각되어 잘 못 기술된 2가지를 지적하니 수정 부탁드립니다.
첫째, 입학시켜주면
멸사봉공하겠다는 그 혈서란 것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된 것이 아닙니다. 그때도 또 입학거절 되었습니다. 입학은 그 다음해, 만주 주재 일본
관동군 독립수비대장 이리가와 대좌의 추천서로 연령제한 규정을 돌파한 다음, 우수한 시험성적으로 결정된 것이 사실입니다.
참고로
당초 만주 군관학교를 소개한 이도 사범대학시절 교련 교관이었던 그 아리가와 였으며, 일본은 결국 패전할 것임을 박정희에게 토로하던 이도 그
아리가와 였지요.
둘째, 연대기에서 '일본육사 입교'는 '3학년 편입'으로 '졸업'은 '1년 이수'로 표기하심이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만주군관학교 우등생에게 주어진 만주국의 1년 유학 특전이었음도 명기해 두셔야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오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셌째, 구체적 설명 없이 기재한 '혈서'부분은 그 대상처가 일본국 천왕이 아닌 '만주국' 만주군관학교임을 명백히 하셔야
무지한 이들이 착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11/19 08:23:14
(112.xxx.133.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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