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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과 익산 기행
소한을 이틀 앞둔 날 아침 집을 나서며 다른 날보다 기온이 올라간 것을 느끼면서 1박 2일 동안의 여행을 하기 위여 출발장소로 향했다. 버스에 타면서 인사를 나누고 예산을 출발했다. 참 하늘이 맑았다. 이번 겨울이 몹시 추운 날로 계속되었지만 출발을 하면서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버스는 서해안 고속도로 위를 달렸고 잠시 홍성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나누며 여행일정에 대해서 상의를 했다.
고창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아서 인지 우리들은 줄곧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선운사 인터체인지를 통해서 고창으로 접어들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은 그 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좁은 도로로 가서는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다. 우리들은 처음에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1891~1955)선생의 생가에 들리기로 하고 면 소재지에서 한참 달렸다. 눈이 많이 내려서 버스가 다니기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나 한참 달려서 마을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인촌정(仁村亭)이 세워져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었으나 우리들은 정해진 시간 때문에 곧바로 생각로 갔다. 인촌 생가는 880년 건립되었으며, 민족 지도자로 제 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성장했던 곳이다. 김성수 선생은 일제시대에 언론인으로 동아일보를 교육자로였다.
고풍이 흐르는 아늑한 마을에 장방형의 긴 대지 안에 낮은 사이 담을 경계로 앞쪽에 작은 댁이 있고, 뒤쪽에 큰댁이 있었다. 큰댁, 작은 댁 해서 부인이 둘이었나 했더니 대문 앞에 세워진 비문을 읽어보니 인촌은 앞쪽의 작은댁에서 태어나서 뒤쪽의 큰아버지에게로 양자를 갔다. 양부와 생부 형제분이 담을 사이에 두고 중문으로 드나들며 한집 같이 앞뒤에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지붕 위에는 40센티미터도 넘는 눈이 쌓여있어 우리들에게 전라북도 지방에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곳 저곳을 구경하면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던 인촌 선생님의 고택을 방문한 후 우리들은 미당 시문학관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잠시 버스를 타고 달리자 왼쪽으로 문학관이 나타났다.
역시 눈이 많이 온 관계로 마당에 눈이 쌓여 있었다. 미당시문학관은 벌써 세 번째 인데 애가 소속해 있는 문학단체에서 한 번, 그리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들과 한번 그리고 이번에 방문하게 되었다. 입구를 들어서서 문학관에 가지 않고 우측에 있는 미당이 태어난 집으로 향했다. 도중에 눈이 치워져있었지만 그래도 눈이 위협적이었다. 오 분 정도 가니 두 채의 초가집이 나타났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인 그 곳은 1970년부터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다가 2001년 8월 옛 모습대로 복원이 되었는데 눈을 가득 담은 지붕이 오히려 보기에 참 좋았다. 다시 미당 시문학관으로 가는데 좁은 개울에 놓인 다리 이름이 미당교여서 웃고 말았다. 다시 시문학관으로 돌아왔는데 문이 닫혀있어 관람을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관람객들이 있을 텐데 어떤 안내문 없이 문을 닫은 것은 관람객들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생각을 했다.
미당시문학관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 지난 2001년 고창군의 주도로 폐교되는 초등학교에 문을 열었다. 10억원을 들인 이 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육필 원고와 각종 사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미당 초상화 등 자료 1만 여 점이 있다. 내부를 돌아볼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우리들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법성포로 향했다.
법성포라는 지명은 백제 때 아무포, 고려때 부용포, 조선시대에 법성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때는 서해안 최고의 항구도시로서, 백제 때는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곳이며, 고려시대에는 나주 영산포와 함께 전라도 2대 조창이 생겨 온갖 물품이 모이는 교역지 였고,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생겨 군사적 요새로서 자리잡은 번성한 곳이었고 지금의 법성포는 옛날부터 유명했던 영광 굴비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우리나라 굴비의 대명사처럼 되고 있다.
우리들은 법성포의 한 식당에서 굴비 정식을 먹었다. 나오는 음식이 맛깔스러웠다. 병어회와 굴 그리고 젓갈 두어가지, 꼬막 무침, 굴비 구이와 매운탕이 입맛을 돋궈주었고 복분자술을 마셔 붉은 얼굴을 만들었다.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은 굴비를 떼어 밥 위에 올려놓으니 살살 녹아들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일행 중 몇 명은 굴비를 샀는데 한 두릅에 2만원부터 5만원까지 있는데 그것이 일반적이고 백화점에 납품되면 소비자 가격이 몇 십 만원까지 한다는 얘기를 듣고 실소를 자아냈다.
그 곳을 출발한 우리들은 다시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에는 일년에 한 두 번은 꼭 다녀오는데 이번엔 겨울이어서 석산이나 동백꽃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으나 그래도 눈 속에 파묻힌 사찰을 만나는 것도 나름대로의 기쁨을 주었다. 선운사로 향하는 길은 양쪽에 벚나무가 있는데 지금은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봄에 왔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우측으로 서정주 시인의 시비를 발견했는데 공사중이라 다가갈 수 없었다. 멀리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 입구에 들어가면 좌측 산 끝자락에서 눈에 이긴 초록빛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송악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고 개울을 건널 수 없어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천연기념물 제367호인 송악은 일본이 패망되기 직전 다른 것보다도 선운사의 송악을 가져가고 싶었으나 바위에 붙어 자라는 생장습성 때문에 바위와 함께 가져가지 않는 한 생존 가능성이 없어 포기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선운사 송악은 줄기 둘레가 80cm에 이르고 나무의 높이도 약 15m나 되는 거목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내륙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중에서 가장 큰 나무이고 꽃은 10-11월 에 황록색으로 피는데 짧은 가지 끝에 여러개가 둥글게 모여서 달려있다.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늘 푸른 넝쿨 식물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남부의 섬이나 해안 지역의 숲 속에서 주로 자라지만 동해안쪽으로는 울릉도까지 서해안쪽으로는 인천 앞바다의 섬까지도 퍼져있다고 하는데 내륙에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이 된다고 하는데 남부지방에서는 송악을 가리켜 소가 잘 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소밥이라고도 한다.
선운사에 닿았다. 눈이 많이 쌓여있어 길을 벗어나면 푹푹 신발이 빠졌다. 나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혹시 작년 이맘 때 보았던 동백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사찰 뒤의 언덕으로 올랐는데 올해 추위가 심해서인지 꽃 봉우리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감나무에 아직도 매달린 감을 바라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우리들은 그 곳을 나와 개울을 따라 난 길을 따라갔다. 산에 오르고 싶었기에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려 했는데 일행중 반만 참여했고 우리들은 중간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대신 중간의 비닐 하우스에서 막걸리와 도토리 전을 먹을 수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내준 시원한 동치미가 겨울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선운사를 나온 우리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들을 보러갔다. 눈에 덮인 고인돌을 잠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 곳을 떠날 때 차츰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삽십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버스는 군산의 어느 횟집 앞에 주차되어있었고 우리들은 분주히 그 곳을 나와서 횟집으로 갔다. 그 횟집은 서너 번 갔던 경험이 있는데 건물 전체가 회센터를 운영하고 있었고 우리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우리들이 알고 있던 것은 군산의 회가 제일 유명하다고 했는데 사실 요즈음은 지역의 횟집이 더 많은 쓰끼다시(우리말로 무엇인지 모르겠음)가 나오고 더 정성을 들이니 그 곳까지 갈 필요가 없다. 식사를 한 후 우리들은 숙소로 향했다. 3층의 한 방에 짐을 풀자마자 총무가 우리들을 단란주점으로 몰고 간다. 그 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추고 스트레스를 풀고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 우리들은 모텔 앞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뱃속을 달랬다. 맛은 그만이었고 주인은 맛이 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말로 너스레를 떨었다. 식사를 한 후 한 동료의 제의로 골목에 조각된 작품을 보았다. 남근의 모습이었는데 처음엔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무를 조각해 만든 작품이니 과히 예술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식사 후 우리들은 익산으로 향했다. 익산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잠시 달린 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王宮面) 왕궁리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5층석탑이 있는데 높이 약 8.5m. 이고 1965년 해체, 보수되어 원형이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지역에 대한 문화재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오층석탑을 관람한 후 우리들은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그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많이 있었고 특히 거의 원형그대로 출토된 큰항아리가 인상적이었다. 그 곳에는 출토과정의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출토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잠시 후 우리들은 보석박물관에 닿았다. 익산 보석박물관은 백제 문화유적과 보석의 아름다움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4만 3천 여 평 규모의 왕궁보석 테마관광지내에 건립되었으며, 진귀한 보석 원석 등을 11만 여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일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니 입구가 나타났고 보석에 대한 여러 가지 전시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우리나라 왕조별 왕관 등 보석장신구류와 유럽 왕실들의 복제유물, 대형원석 등을 전시하고 있고, 2층 상설전시실에는 초대의 장, 체험의 장, 역동의 장, 감동의 장, 결실의 장 등 다채로운 테마로 다양한 장이 마련돼 관람객들이 보석의 이모저모를 잘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2층 상설전시실 초대의 장은 보석의 질감과 이미지를 느낄 수 있도록 이미지 터널 천장에 광섬유를 이용한 안드로메다를 연출하는 한편 환영로고 타입의 홀로그램을 설치해 관람객을 보석세계로 이끌어 들이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인식의 장은 백제의 보석 관련 장인기술과 그 정신을 소개하는 공간으로서 이 지역에서 발굴된 입점리 금동신발 등 유물을 복제 전시해 백제인들의 놀라운 보석세공 기술과 유산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어지는 보석이야기 코너에서는 월별 탄생석을 영상화면을 통해 소개하는 한편 터치스크린을 통해 1월부터 12월까지의 탄생석의 의미와 에피소드 등 정보를 제공하고, 어린이 관람객들이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역사적으로 전래되어 오는 보석 관련 설화를 소재로 코믹 애니메이션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곳 전시관을 빠져 나와 일층의 기획전시실을 찾았는데 그 곳은 보석을 주제로 한 한 대학의 졸업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잠시 그 곳을 관람하고 그 건물 옆에 있는 화석전시관으로 갔다. 지질시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화석전시관에는 시대별 각종화석과 익룡,
수장룡, 실물크기의 골격공룡 등을 전시하여 청소년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도 록 구성되어 있었는데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면까지 고려한 것이 인상적이었고 공원에 세원 진 공룡상에서 주라기 공원을 보는 듯 했다. 그곳을 출발해서 부여에서 식사를 하고 예산까지 직행했다. 버스를 내리며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니 전날보다 더 차가워진 날씨가 나를 움츠리게 했으나 씩 웃으며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200601051305
첫댓글 가 본적 없는 이곳을 마치 제가 다녀 온듯 한 착각에 잠시 빠져 봅니다..
원제 한번 같이 가유. 우리 문협에서 한 번 가 본적이 있지만 봄쯤에 동백꽃보러가면 참 좋아요
김성수 생가를 비롯하여 미당 생가, 그리고 선운사의 송악...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곳이었죠. 돌아오며 춘백을 꼭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보았는데 아직도 실행하지 못했네요. 봄이 곧 오겠지요...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 동백꽃 필 때 문협회원들과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꾸 동백꽃과 채석강이 아른 거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