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요나 1 : 1 - 16
다시스로 가는 배가 갑자기 큰 폭풍을 만나서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물질을 다 버리고 온갖 방법을 다 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재앙 앞에는 노력도 수고도 다 헛된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배는 더 위험했습니다. 재앙을 당했을 때는 재앙의 원인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어쩌다 사고가 났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아서 책임 질 자에게 책임을 묻고 잘못한 것을 고쳐서 다시는 그와 같은 사고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원인을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원인을 부정하면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원인을 부정하면 똑 같은 사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고의 원인이 천재냐? 인재냐를 생각합니다. 폭풍은 천재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인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7)고 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 원인을 인재로 인한 사고라고 결론을 짓고 잘못한 사람들에게 죄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물론 파도가 세고 물결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고 하지만 선장을 비롯하여 선주 모두가 책임을 다 했더라면 그와 같은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선장과 선주 모두가 자신의 맡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서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인재의 원인은 죄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 역시 큰 바람이 불고 큰 폭풍으로 파선의 위험을 당한 것은 죄 때문이였습니다. 천재이기 전에 인재라는 것입니다. 그럼 인재라고 할 때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배안에는 많은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이 탔습니다. 그중에는 살인자나 강도도 있을 수가 있고, 도적질한 사람도 있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나는 그들에 비교하면 성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강도가 몇 백 명이 탔다고 할지라도 그 강도들 때문에 배를 파선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 때문에 배를 큰 폭풍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과는 비교도 안되는 작은 아이 성을 점령하다가 패배했습니다. 난공불락이라고 하는 여리고 성은 손 하나 대지 않고 함락시켰지만 아이 성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참패를 당하고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라’(수7:11)고 하셨습니다. 아간 한 사람이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패배를 한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안에 탄 모든 사람들의 죄로 인한 재앙이 아니였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한 재앙이였습니다. 가정이 망하는 것이 가족 모두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가족 전체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맡은 사명감을 다하지 못하는 한 사람입니다. 가족들 모두에게는 자신이 맡은 사명이 다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맡은 사명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사명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파산되는 것입니다. 역시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다고 해서 사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사명에서 벗어나면 온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요나의 죄는 무엇입니까? 요나는 도덕적으로는 배안에 탄 다른 사람들보다는 의로울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주신 사명은 니느웨로 가서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사명을 하기가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서 당시 세계 제일 크고 화려한 향락과 죄악의 도시로서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습니다. 악독이 차고 넘쳤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2)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에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요나는 가서 외치면 혹시 몇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실까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고서도 반대편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5). 요나가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들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이미 큰 바람이 불고 큰 폭풍으로 배가 거의 깨어질 때입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질 때 요나는 배 밑으로 내려가 잤습니다.
조용하게 항해를 할 때라면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깨어서 함께 노력해야 할 때 요나가 배 밑으로 내려가서 깊은 잠을 잤습니다. 요나가 너무 피곤해서 잠이 든 것이 아닙니다. 10절에 보니까 요나는 배가 파선케 될 정도가 된 원인이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게 된 것을 참아 눈을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배 밑으로 내려가서 깊이 잠든 채 한 것입니다.
선장이 잠자는 요나에게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6)고 하며 깨웠습니다.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8)고 물었습니다. 그때 요나는 12절에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요나는 ‘나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재앙이 누구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일이 잘 되었다면 자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잘되지 않았을 때는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고로 인해 어려움과 손해가 있을 때 먼저 자기의 잘못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있고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을 때는 변명을 합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누구의 탓으로 돌립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강풍으로, 무슨 변명을 해서라도 자신을 변명해서 자신을 잘못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요나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니느웨는 죄가 많아서 망해야 할 도시이기 때문에 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라고 변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재앙의 원인이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알았습니다(10).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고 사람들에게 변명을 하거나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 였습니다.
바다는 더 흉용하여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리는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다”(14)라고 부르짖으며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흉용하던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바다에 던져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의 가정을 상징합니다. 교회에 주인은 누구입니까? 주인은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가 주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됐던 잘못됐던 책임지는 자가 주인입니다. 재앙의 원인이 내 탓이라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의 주인도 어른이 아닙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인은 더 이상 변명을 하거나 책임을 남에게로 돌리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어렵고,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책임은 지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찾고 고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땅히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요나는 배안에 탄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일개 선객 중에 한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을 만난 원인이 ‘나 때문이라’고 하며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하여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나처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책임을 지는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잔잔하여 지리라’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실상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존경 받을 만큼의 훌륭한 선지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했지만 니느웨의 반대방향으로 가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을 지내는 죽음의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니느웨에 가서 외쳤습니다. 그러나 즐겨 외친 것이 아니였습니다. 사명감에 불타는 심령으로 외친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외쳤습니다. 요나는 충성된 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흘 길이나 되는 니느웨 성을 겨우 하루 외치고는 어찌되는가를 보기 위해 언덕에 올라가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구경하고자 했습니다.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성을 내며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말했습니다(4:3). 하나님께 성을 내며 달려들기까지 하는 요나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존경을 받을 만큼의 훌륭한 선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였습니다. 우리도 존경받을 만큼의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는 큰 폭풍으로 모두가 죽게 되었을 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므로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1:15).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질 때 문제는 쉽게 풀어집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문제는 풀리지 않고 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큰 물고기가 삼켰습니다. 요나는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비유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흘과 예수님의 무덤 속에서의 사흘이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냈던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무덤 속에서 사흘을 지내셨다가 살아나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으로 바다가 잔잔하여 배안에 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은 곧 죽을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문제의 책임을 지는 사람은 곧 작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질 때 많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책임을 질 때 나도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살리는 구원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많은 죽을 사람을 살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요나처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십시오. 그래서 책임을 지므로 멸망 받을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