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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향수에 썻습니다.
98년 타계하신 아버님 고향은 평북 선천, 어머님 고향은 평북 철산, 평화시장에서 남자 성인 바지 도매상을 하셨고.
아버님은 해방 후 먼저 월남 하시고, 어머님은 6.25전에 형님을 업고 38선을 넘으셨다.
선천에서 지주 집안 이라, 공산당이 들어선 후, 지주를 우대해, 지주들은 대부분 월남하지 않았다.
어머님이 아버님 만나러, 시댁을 출발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작별인사 드리고, 월남하는 일단이 안내원에게 돈을 주고, 밤에만 걸어서 소리 안내고 월남 길을 가시는데, 북한군에게 발각됐다.
당시 작은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몇 손 꼽는 대지주 셨다.
자제 분들은 김일성 대학 교수하시고, 어머님이 작은 할아버지에게 연락해, 작은 할아버지가 풀어 주라고 해, 다시 38선을 넘어,
당시, 신통하게도 2살 가량이던 형이 엄마 등에서 계속 울지 않았다고 한다.
부산에서 아버님을 만나시고, 부산 국제 시장에서 아버님이 미군 바지 염색해 파시며 생계 이어가시고, 부산에서 큰 누님, 작은 누님이 나셨고,
아버님이 성실하시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라 위 장사로 돈을 어느 정도 모았는데, 1차, 사기를 당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남산 밑에, 해방촌 아래,용산동 선천 동내에 정착해, 나와 여동생이 태어 났다.
50평 정도 되는 대지에 허름한 기와집에 앞애는 우리 살림살이, 뒤에는 바지공장으로, 재단사, 미싱기사, 시다, 오바로꾸, 다림질 하는, 사람들이 15명 정도 있었다.
만든 바지를 아버지가 남대문 시장에서 도매 장사 했고, 5남매가 전부 1등하고, 반장하며 인물들이 잘나고, 화기 애애 해 동내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실향민 아버님과 4남매가 , 형님은 고등학, 사춘기니 없었겠죠. 쪽 팔리시 니까.
60 년대 입니다.
그야 말로 별들이 총총, 북두칠성, 오리온 자리, 큰 곰 자리, 밤 하늘 가득히 은하수,
요즘 애들과 달리, 흙, no 인터넷, good old days.
저녁 먹고, 피복 도매 하시던 아버님이 가꾸신 우리 집 정원에, 50평 대지에
맨드라미, 장미, 난초, 코스모스, 해바라기, 국화, 채송화, 옥수수, 등등,
동네 부러움, 우리 집.
나중 집 짓고는 나무로, 시집 가신 두 누님이 각각 남기고 간 소나무.
매화, 라일락, 무궁화, 벚꽃,...., 이름이 기억이 안 납니다.
식후 돚자리 깔고, 대장 아버님과 올망졸망 새끼 네 무리.
밤하늘 잔치에, 흘러가는 유성 보며,
지휘자 선창, "별 하나 ", 우리 졸개들 이구 동성으로 " 나 하나",
“별 둘” “ 나 둘”…. 열까지 갔겠죠.
아버님이 즐겨 부르시던 이북 동요, 덜 큰 우리 들이, 똑 같은,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 억양으로 수시로 저희들 입에서.
"김칫국 강냉떡이 마디 있어요, 할아버디 할마니 잡둬 보셔요, 이 빠디가 아파서 못 먹갔다야, 이래두 저래두 잡둬 보셔요".
아버님 저하고 북한산, 인수봉 뒤 계곡으로, 가시면 소주 한 잔 드시고,
넓직한 바위 위에, 아버님 특유의 바지 무릎 까지 걷 우시고,
꿈에 본 내 고향을,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곤 하셨습니다.
김정호의 “불효자는 웁니다.”를 내가 나중에 그런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해야지.
무지가 병으로, 장사 끝 내시고도 근육질, 형님, 누님들 집에 남산서 길어 온 약수물 큰 물통을 등에 지시고,
개포동, 상도동, 화곡동으로 번갈아 나르시 곤, 용산동 그 곳들 까지 물통 지시고, 걸어 가셨던 것.
새벽 세 시에 기상, 약수터 가셔서 운동 하시고, 물 길어 오시고, 배달,
세 분 집 식수는 남산 약수물, 매주 북한산, 천성적 으로 부지런 하셔서,
아버님 보시면, 사람들이 법 없이도 사실 분 이라고.
옥상에 플라스틱 팩들이 옥상 가득히, 북한산, 남산에서 가져온 흙 넣고 상추, 깻잎, 고추 등 재배, 본가와 세 분집 야채 조달,
자연히 건강 하시고, 60대, 70대 이 신데도 팔뚝에 굵은 핏줄이,
가족 병력 없는 우리 집이나, 프랑스 월드컵 열리던 때 경찰 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타계 하셨습니다.
그 해 봄에 감기 걸리 셨는데 , 매일 한산도 한 갑 피우시니, 폐가 견뎌내지 못하고,
입원 후에 계속 악화, 나중 백혈병 으로도.
폐만 그렇지 의식은 명료 하시니, 면회 가면 집에 가서 야구도 보고 등등 하셨는 데, 집에는 더 이상.
어머님이 아버님 간호하려 병원에서 기거 하시고, 형수님, 누님 들이 밥, 반찬 갔다 주시고.
무지가 병으로 사위 두 분과 여동생 남편이 데이트 할 때, 나중 결혼 하고도
우리 집에 올 때면 한산도 한 보루를 사오 셨으니.
여담 인데, 제가 긴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제 아들이 사정이 있어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 , 또래 보다 약하고 항상 울고 보채곤 했습니다.
둘 째 딸은 자연 임신으로, 토실 토실, 건강.
아버님이 나중 중환자실로 옮겨 졌습니다.
입원 말기 폐 엑스레이 사진이 전체가 하얗게.
병원은 형님께, 굿바이 준비 하라고.
중환자실서도 악화 일로에 폐가 역할을 못 하여, 산소 마스크를.
병원에서 연락, 자식들 다 데리고 와서 작별 인사 해라.
조카들 학교 대신에, 매형들, 동생 남편 출근 대신해, 병원으로 마지막 인사 드리러.
숨을 가뿌게 쉬시는 아버님이 저희들과 각각 눈인사 하시고, 제 아들에게 만은
산소 마스크 벗으시고는 가뿐 숨을 몰아 쉬시며 재호가 96년도에 태어 났으니
"재호야, 귀엽다는 말 인사와 잘 있어"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오늘 못 넘긴다고 연락이, 네덜란드와 게임 할 때 , 개포동 형님 집에 모두 대기.
병원에서 오라고 전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집사 이던 어머님이 지역장, 권사님께 전화해
그 분들, 목사님, 저희들 보시는 데 , 저희 찬송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목사님 기도 속에
의식은 명료 하셨던 아버님이 두 눈에 눈물 가득 고이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통일동산에 삼촌, 삼촌 어머니 옆에 영면하고 계십니다.
어머니, 전형적인 한국여인, 어머니 였습니다.
아버님이 장사 하시다 보니, A형 이지만, 아침식사 하시다가, 밥상을 통째로 뒤집어 엎으시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걸레를 들고 오셔서, 말 앖이 닦고, 훔치고, 정리 하셨죠.
또, 아버님 어떤 불만 사항이 있어, 아버님이 안방에서 부엌으로 가셔, 어머님 뺨을 때리 셨습니다. 저희는 보고 있었구요.
어머니는 뺨 맞은 부분이 빨개 지시고, 눈물을 머금고,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조용히 계셨습니다.
남남 북녀 말대로, 생활에서 억척 같이 사셨죠,
일요일 아침엔, 아버지와 5남매가 남산을 가 배드민턴, 공놀이 하며 남산 순환도로를 일주해 운동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아침 밥해놓고, 마당에 돚자리 펴고, 소 불고기 구어 아침을 먹었다.
아버지가 마당에 해바라기, 아주까리, 국화, 장미, 난초, 코스모스, 맨드라미, 채송화 등을 심으셔서, 집이 작은 숲, 화단 같았다.
형이 캐논 카메라로 사진 찍고. 부모님 이북에서 결혼식 날 사진 찍은 색 바랜 사진(엄마가 월남시 품에 넣고)이 있는데,
신성일, 엄앵란 부부 이상 가는 미남, 미녀 이다.
이목구비 뚜렸하고, 코 오똑하고, 등등, 우리 가족 같은 인물만 있다면, 요즘 대세인 성형외과 문 닫아야.
엄마가 5남매 뒤 바라지 하시고, 공장을 혼자서 꾸려나가 셨다.
재단 나라시, 다림질도 연탄이라 연탄 갈고, 연탄가스 마셔, 혼나기도 하시고,
아침에 만든 바지를 아버지와 부모님 키 만한 보따리에 108계단(경사도 있고,쉽지 않음), 아버지는 어깨에, 엄마는 머리에 이고 매일 계단 밑 까지 운반 하셨다.
사춘기 중, 고생 이던 큰누나, 작은 누나는 엄마가 머리에 이고 가시는 것이 창피해 다른 시간에 등교하곤 했다.
엄마가 잠이 모자라(일 하시느 라고, 하루 3~4간 미만, 하루 종일 일 하시고, 얼굴이 많이 여의셧다.
내가 후암 국민학교에서 4학년때 부터 계속 반장하고, 1등 하며, 축구선수로(천부적인 골잡이).
담임 선생님이 너는 이 나라 이끌어야 되는데, 선수 그만 두라해 6학년 여름쯤 그만둠.
108계단에서 겨울엔 썰매 타고, 108계단위 약 50미터 좌측 2층집이 저희 집입니다.
76년도에 지었고, 아버님 타계 하시고 어머님을 누님들이 일산으로 모셔,
그 후 세 사는 사람들이 삽니다. 벽 위로 목련, 라일락, 등 여러 나무가.
아버님이 평화시장에서 피복 도매 장사할 때, 집 공장에서 만든 바지를 매일 아침 아버님, 어머님이 계단 밑 까지 지고, 택시로 평화시장으로.
전형적 남남북녀 어머님이 어머님 키만한 바지 보따리를 머리에 이시고.
저는 후암 국민학교 15회 졸업생 입니다. 염치 불구하고 또 자랑,
4,5,6 학년 계속 반장, 1등, 골게터 축구선수, 1학년 때 부터 제출하는 모든 그림, 글짓기에 교 내외로 매번 부상 받았습니다. 최우수상등, 2학년 때 제 그림이 교장실에 걸려 있다고, 5학년 반장이던 작은 누님이 말씀해 주셔서, 교장실 청소를 6학년 여학생 반장, 부반장들이 돌아가며 청소. 일요일 이면 6명이 남산 순환도로, 리라 국민학교 위 경유, 도서관 까지, 배드민턴, 축구, 등 하며 운동 일주 하면 , 어머님이 소 불고기, 김치 우러 나게, 마당에 돗자리 깔고, 꽃 나무 화단 배경에 7명이 식사, 형님이 캐논 카메라로 흑백 사진 찍고,
동네 부러움을 사는 우리 집, 단란하고, 공부 잘하고, 반장하고, 잘 생기고. 저는 동네 어린이들 캡틴, 밤 자기 전 까지 30여명을 내 머리에서 발상한 여러 놀이를 주도 하며, 남녀, 2년 선배들 까지, 국민학생 머리에서 나온 놀이로 생각이 안될만큼, 조직적 이고, 흥미 있게, 자러 가기 전 모두 아쉬워서 내일 기약하고.
12월 초, 중순경 김장했다.
어머님이 해방촌 시장에서 배추 삼백포기, 무 100(?)를 구루마 아저씨가
끌고 와 그날 저녁부터 마당의 수도에서 씻고 소금에 절여 놓는다.
어머님이 집 뒤에 남자 성인 바지 공장 제품일 돕다가 오후 6시경
해방촌 시장에 장보러 가신다, 매일.
5남매고 평화시장에서 바지 도매 장사하니 돈은 여유 있어, 어머니
시장 바구니가 매일 한가득, 전형적 남남북녀 이신 어머니가 시장 바구니 들고
운반. 형 빼고 4명이 교대로 도와주러 따라가고,
시장에서 어머니가 떡, 순대, 돼지 간 등 사주시면 그자리에서 먹는다, 그 맛에 주로 따라 가지만.
남매들이 명랑하고 활발해 하루 자주 노래 부른다.
시장 가면서도 작은 누나, 여동생 등과 노래 부르며.
남매들이 다 반장하고, 1등하니 노래도 많이 알고.
누나들, 여동생도 씩씩하게 노래 부른다.
김장 계속.
용산동에 대지가 약 50평.
60년대니, 허름한 기와집에 앞에는 살림집, 뒤가 공장.
김장 날, 당시는 지금보다 추웠다.
아침부터 어머니 진두 지휘 아래, 일요일 하니
힘쓰는 것은 아버님 몫, 큰 독 두개 땅에 묻으니 땅 파시고.
삼백포기가 쌓으면 꽤 된다.
어머님등, 추우니 속에 목장갑 끼고 겉에 고무장갑, 옷도 일에 편하게
중무장 해야, 추운날 계속 마당에서 하니,
5남매는, 솔직히 형님은 별로 안 도와, 대학생, 어른 이니.
지난 스토리에 썻지만, 캐논 카메라로 사진 찍는다든가.
다시 4명이 춥고, 젖은 배추 나르고 하다 보면 발이 젖어 시럽고 등,
안방 온돌에서 지지고 다시 참가.
아버님, 어머님은 요지 부동, 근면등 하시고, 생활력이 강인한 분 이시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어머님이 큰 다라이에 양념 해 놓으신 것,
평북 선천식, 굴, 갈치, 무 썰은것 등 고추가루와 같이,
배추 안에 노란것, 꼬갱이라 한다, 꼬갱이에 양념 발라 먹는다.
참 맛있었고, 어머니가 손으로 고무장갑 낀채 입에 넣어 주기도 한다.
제비가 새끼 먹이 주듯이.겨울밤에 동치미는 일미.
어머님이 두뇌가 우수하시고 감각이 있어 요리 솜씨가 뛰어 나시다.
talent가 요리에 적용 되는 듯.
평북 선천식 요리, 반찬들, 맛과 영양을 겸비했다.
아버님도 지주 집안 이고, 머리들 좋으시지만,
어머니 집안이 머리는 더 우수, 철산 선비 집안 이다.
다시 두분 빛 바랜 결혼식 사진이, 최고의 선남선녀 이다.
신성일, 엄앵란 이상 가는, 이 분들 보다 지적이고, 깊이가 있어 보인다.
이목구비, 흠 잡을데 없고.
75년에 2층집 짓기 전까지, 제품 한것에 대해.
짓고 나서는 지하실에 공장 마련, 아버님 연세가 있어 과거만 못했다.
공원이 17, 18(?)명,
재단사, 완성품 최종적 다리미질 하는 분.
수동 미싱, 나중엔 전기 미싱, 재단기도 처음엔 수동, 나중엔 전기 재단기,
재단 보조도 고용해, 종석이 형이라고, 작은 누나와 양띠 동갑, 재단 보조하고,
평화 시장 2층, 3층에 원단 가게들 있다, 용달 시켜 실코 원단 집 공장으로 나름.
재단도 넓은 판위에 원단 쌓아 펼쳐 놓고,
재단사가 자고(크레용(?) 일종, 원단에 표시나는, 흰색 삼각형 모양) 바지 부위 별로 선 그으면,
어머님이 잡고 도와주며(나라시 라고 한다, 다 일본말), 원단 자르는 칼로 자른다.
이 칼 들이 무뎌지면, 아버님이 숫돌에 일요일날 칼 가신다.
평화 시장에 중국집들도, 내가 바지 날라 주고, 아버님한테 돈 받아 짜장면 사먹거나,
야구장 가면, 삼천원 주시는데, 입장료 삼백원(?), 야구장 내에서 짜장면, 중국집 짜장면하고
맛이 다르고, 떨어 진다 표현해야. 중국집 짜장면 맛이 안나고, 가정에서 만든 짜장 느낌.
재단사가 처음엔 용주형 이라고, 형님 또래다, 해병대 갔다 오고.
이 분이 중간에 바지 빼 돌린다, 아버지가 아셔서 불러 놓고, 이야기 하며 혼내 주고.
다음 재단사는 칠성이형, 재단 일하다가 바지 장사 공장 마련해 오픈하기도,
다시 수동미싱이 7(?)대, 한 미싱에 미싱사와 시다가.
미싱사가 의자에 앉아 계속 미싱질 하고, 시다들이 앞에 바닥에 앉아서
시다일 보는 것, 오바로꾸 한 분.
미싱사들이 대부분 해방촌 고개 넘어, 지금 이태원 내려 가는 길, 당시 하꼬방.
거기들 사시고, 아침에 삼삼오오 출근, 오후 8시경 퇴근.
미싱사 중에 용자누나라고.
키크고, 미녀에, 미싱 솜씨가 뛰어 났다.
아버님이 시장에서 팔기 전 , 바지들 본다.
바지에 나떼루 큰 호치케스로 찍고
바느질등이 엉망이면, A형 이고 선한 분이나, 장사해서 그런지 바지 집어 던진다.
아침마다 큰 보따리 두개에 싸서 더 큰거는 아버님 어깨, 다른 하나는
어머님이 키 만한 것, 머리에 이시고, 108계단 내려가 후암동 버스 정류장 있는 곳에
택시타고 평화시장으로 나른다.
낮에 나, 큰누나(여대생 이었에도), 용석이 형등이 보따리에 평화시장 조달.
한성여객 9번(나중 태릉운수 45번)타고, 운전수 옆 넓은 쇠 위에
바지 보자기 놓고,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청계천 6가 까지.
운전 가상 연습도 해보고.
다리미를 연탄에 덮혔다, 어머님이 종종 연탄가스 마시고.
어머님이 잠 못자고, 공장일, 5남매 뒷바라지 하느라 하루 4, 5시간 정도 취침.
얼굴이 야위셨고, 버스만 타면 몇 정류장 가면 오바이트, 전 글에 썻다.
원단 조가리, 기래빠시 라고 아궁이에 태워, 들을 형방, 누나들 방에 난방연료로.
한달에 한번 정도, 공원들 저녁에 국수 대접, 어머님이 만들어 안방에 큰상들 놓고,
공원들 국수식. 여름에는 수박화채 제공.
매달 임금날에는 아버님이 흰봉투에 각각 이름써서 돈 넣고, 공원들 일 끝나고,
공장에 즐겁게 대기, 아버님이 이름 알려주면 우리가 공장가서 부르면,
해당원이, 아버님과 1대1로, 수고했다등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월급 봉투 준다.
아버님 일요일 일과가, 천성적으로 근면 성실해, 화단 가꾸고, 아버지가 발가락볼이
좁아, 장사도 하고, 발에 무좀 있었다.
신문지를 깔대기 모양으로 여러개 말아, 마당에 의자에 앉으셔서 말린 신문지
넓은 쪽에 불 붙히면 좁은 쪽으로 신문 인쇄가 탄 연기가 나온다.
연기 나오는 것을 발가락에 사이에 대고, 아마 무좀균을 독한 인쇄 연기로 죽이는 듯,
덕분에 아버지 발가락 사이 사이 들이 노란 진으로 노랗다, 신문 인쇄 연기에.
당시 동아일보 봤고, 우리는 소년동아, 라디오는 대부분 792키로헬쯔 동아방송에.
일요일 저녁 8(?)시, 전영우 실장 진행, 유쾌한 응접실, 청산유수 양주동 박사,
극작가 이서구 선생님, 다른 한분 이름 기억 안나, 세분의 고정 게스트,
연예인등이 초대대 같이 재담하며, 중간 중간 가수 노래.
동아방송 악단장이, 우리 친구 노성종 아버님이시다.
유쾌한 응접실하면 , 우리 식구 다 모여 듣고.
형님, 누나들은 밤에 윤형주, 이장희 진행하던 영시에 다이얼.
세시에 다이얼 디스크쟈키 박인희 씨도 목소리 좋았죠.
축구 중계는 전영우, 우재근 캐스터, 김덕준 해설위원, 연대 나와
최초 국제 심판, 일요일날 종로5가 효제 국민학교에서 일요축구학교.
후암 축구부가 내가 6학년 되자 창설, 창설 전에 4학년 때 부터 동네 형, 또래들 같이
매주 일요일 효제 국민학교로, 집에 가기전 모두에게 천원씩 좋다, 상당한 매력.물론 축구에 미쳐 있어지만, 주야장창 볼만 찼으니, 밤, 소나기, 폭설, 아스팔트, 해변가,왕모래, 작은 돌밭, 진흙 뻘 ,등, 모두가 우리 축구장이다. 실내 축구장 빼고, 시대가 시대니.
일요축구학교에서 효창운동장에서 학교별 시합하면 그라운드가 황공무지 스럽게 좋다.
슬라이딩 태클 깊이 들어가도 허벅지 안 까지고, 쭉쭉 미끄러지고.
당시 평화시장 장사하시는 분들이 알부자가 많았다.
아버지도 나무로 만든 돈통에 천원, 만원 짜리가 수북히.
남대문 시장에서 할 땐 상호가 남일사, 평화시장에선 영신사, 작은 누나 이름 쓴 것.
전국 곳곳에 우리 바지 떼서 소매하는 분들, 아버지 장부에.
돈 때 먹고 안주는 사람, 설날, 추석 대목 후, 연휴 쉴 때 아버지가 지방 돌며 수금 가신다.
평화 시장에 그 분들 오시면, 아버님이 만원 짜리 돈 같지 않게 훅훅 꺼내 주신다.
저녁에 장사 끝내고, 보자기에 버신돈 가져 오신다. 보자기 얼추 용적 30큐빅, 지폐 가득하다.
남대문에 있을 때는 우리 어릴 때 장난감 많이 사오시고, 특히 내 장난감이 많아.
추석, 설날 전날 밤, 보따리 가득 우리 먹을 것 사오시고.
전 글에 썻지만 이렇게 번 돈을 삼공에 고스란히 뺏기고(성남고 앞에 빌딩 사려 했었는데)
남은 것은 2층집, 오남매 대학 교육 시킨 것.
추첨으로 봉천 중학교에 1회로 들어갔다.
3년간 반장하고, 전교 1,2등 하며, 총동창회 초대 총무를 했다.
신설학교니, 경기중 폐교하며 3명의 주임선생님, 등 명문 중고, 베태랑 선생님들과 반은 사대 그 해 졸업하신 신참 선생님으로 구성돼다.
나는 중 1학년 반장이 군 지휘자 이상으로 반 전체 운동장 집합시켜 뺑뱅이 돌리고, 해이해 지면 반 전체를 몽둥이로 궁둥이를 때리고, 담임 선생님은 지켜 보시기만 하시고, 완전 장악. 리드해, 다른 반 나보다 10cm큰 학우들이 내 카리스마 때문에 나를 똑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국가관, 민족관, 정의감, 효도 등이 중학생 이상 이었다.
입시 있을 때 가르쳤던 베태랑 선생님들(부유 하셨다.)
신설학교 배정 돼, 촌지를 대 놓고 요구 하며, 반장 중에는 나만 공립학교 출신이고, 반 임원 등 모두가 사립학교 출신 이었다.
어머니 들이 부리나케 학교와 촌지, 선물 등.
그러나 엄마는 공장 돌보시고, 5남매 뒷바라지 하느라 졸업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오셨다.
잠 못 주무시고 일하느라, 잠 부족하고, 이들 이유로 버스만 타시면 4~5 정류장 정도만 가시면 오바이트 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출발 전에 구토물 담을 손수건을 매번 준비 하셔야 하셨다.
베태랑 선생님들은 내 리더쉽을 인정 하면서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돈 봉투를
내게서는 한 번도 없으니,아무 잘못 없는데, 나를 반 앞으로 불러, 반 급우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때리곤 하셨다.
대신 젊은, 신규 선생님들 한테는 내가 최고 였다,
특히 여선생님들 한테는 완전 최고 였다.
부모님 지원 없고, 특이한 상황있는 신설학교에서, 반 리드 장악하고, 모범생으로 생활 하기 위해, 사춘기 중학생 때 있는 친구들 끼리 2차 성징에 대한 얘기 나누고 하는 것을 나는 일부로 안했다.
임원등 웬만하면 머리 이부로 깍는데, 이발 비용 아끼려고 항상 빡빡 머리로 깍았다.
이 것이 내 인생 비극 시리즈의 시발점이 었다.
이것을 나 외엔 아무도 모르고, 몰랐다.
졸업식 때는 졸업생, 재학생, 학부모들 다 모인 졸업식장에서 교감 선생님이 연단에서 마이크로 연설 중, 저를 지칭하며, 제가 나중에 최소한 국회의원 이나 장관이 될 거라고 말하셨다.
물론 어머님은 졸업식장 오시면서 버스에서 토하시고.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크리스마스날 결혼 하셨다.
아버님이 장사 하시다가, 잠바 차림으로 오셔서 있는 모습 봤는데, 피로연 즈음에 안 보이셨다.
베태랑 선생님들은 하객들 다 있는데, 큰 소리로 “반장 아버지 어디 있어, 피로연 해야지.” ,
부반장 어머니만 안절 부절 못하고 분주히 움직 이셨다.
물론 나는 많은 사춘기 갈등을 겪었고.
중2 때 영어시간에,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희 영어 담당.
입시 있을 때, 경기 중학교 폐교하고 세 분 주임선생님이
신설학교인 저희 중학교에 주임 위치를 바꿔, 신설학교 터전 잡음.
베테랑 반, 사대 졸업하시고 첫 부임하신 등, 20대
교사님들 반.
56년생 부터 중학교 추첨.
우리 구역에 라디오 발표하는데 거리 제일 멀고 신설학교인 봉천 중학교 만은
아니라고 다 기도하는데, 내가 4번 이었는데, 4번 봉천.
제일 바라는 바로 옆 용산, 다음이 효창동 선린.
후암 국민학교 반장들 중, 촌지가 많았던 반장 등은, 용산, 선린 등등.
나는 않(NOT) 촌지 이므로, 봉천.
배정 받고 작은 누나와 학교에 신고(?)하러 가는 데,
55번 신화운수 좌석 타고 봉천동에 내려, 봉천4동
인 학교로.
도로에서 3분 들어가면 봉천여중, 3(?)년
먼저 개교.
찾아 가는데, 논밭 지나고, 진흙탕 지나며, 신발은 양말까지 진흙으로.
길등 계속 정비하는데, 나중 등교시, 비 안와도
우리 학교 얘들만 검은 장화 신고 다닌다. 반 까지 진흙 자국이,
142번 입석 버스, 신촌운수, 봉천여중, 고개 오르면
상도중, 고개 내려갈 목에 상도여중, 키 작고
장화 신은 애들이 봉천중.
여선생님들, 하이힐 반까지 진흙 묻어 있다.
데이트는 어떻게 했을까? 별들에게 물어 봐.
이 분들께 내가 최고 였다 는 것.
저를 연모한 여 선생님도, 실비아 크리스탈 이네, 가정교사에.
이 배우 보다는 훨씬 지성적.
150번 신인운수 등 종점으로 가는 길에 논둑 따라 가다 보면 똥 통(구덩이)도 있다.
빠진 애들도.
운동장 계속 정비해도, 축구 하면 진흙탕에서 해야 하고,
화단 가꾸는 데
옆에 관악산 가서 큰 돌들 들고 와 , 학교 화단으로.
그래서 영어 시간에 급우가 질문 "물물
교환이 영어로 water water change" 이냐고. 웃으면
복이 와요.
나는 3년 반장, 전교 1,2등, 제 1회 총동창회
총무.
우리 집에 유일 약점인 키, 내가 앞에서 삼분에 일 신장 인데
내 카리스마로, 학교 학우 들이 복도 등 나와 지나치면 죄인 처럼
전부 고개 숙이고 지나간다. 나
보다 10cm 커도.
반 애들 규율 잡으러, 전부 운동장 집합, 뺑뺑이
돌리고.
큰 애들, 175cm 까지, 키 작은 1번 부터 마지막 까지 전부 내게 나무로
궁둥이 맞는다. 규율 목적 이므로 세게 떼려 맞고 나면 전부 엉덩이 부여 잡고 비명.
칠판 위에는 내 사랑의 매, 몽둥이를 항상 비치.
덕분에 담임 선생님은 모든 것에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다.
전부 내가 알아서 하고, 모든 수업 전에 책 펴 놓코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당번이 칠판을 나중엔 물걸래로, 칠판이 진한 녹색으로 선생님 흰 백묵으로
경쾌 하게 써 나간다.
영어 시간에는, 선생님이 "반장, 읽어" 하면, 서서
해당 레슨 읽고.
환경 미화 하면, 부반장 등 임원, 미화부장, 글 그림 잘하는 애들, 며칠 동안 방과 후 남아,
교실 앞 뒤로, 매직, 싸인펜 등 쓰고, 그림 그리고, 신문 잡지등 오려 붙히고(스크랩) 등
만들어 나간다. 임원들과 갈포지 사다가 밀가루 죽으로 된 풀 발라 붙여
바탕을 붙이고,
돈 있는 애들 시켜, 너 화분 사와, 꽃 사와
등등 정비.
당연히 우리 반이 일등, 월요일 교회 시간에 상 받으로 내가 교단에 올라 간다.
교회 시간, 1반 부터, 쭉, 반장은 맨 앞에,
반장들은 대열 3m 정도 앞에 위치.
교회 전, 우리 반 줄을 일직선 으로, 앞 에서 보며 소리 지르고, 패며 정비.
우리 반이 최고로 거의 일직선.
매 수업 전 후에 반장이 일어나 구령.
군 지휘자 모냥 우렁차고, 위엄있게 구령.
일부 선생님들은 교탁 뒤에서 내 구령에 위축 되는 모양.
참 매일 교탁, 화병에 돌아 가며 꽃 사오라 시켜, 매일
꽃을 간다.
시험 후, 학급 마다 성적 순위가 매겨 진다.
우리 반이 떨어 지면, 방과 후 전부 남아, 나
한테 영어, 수학 등 수업 듣는다.
교복 목 깃에, 오른쪽 학교 뱃지, 왼쪽에 학년
뱃지 다는데, 반장은 학교 뱃지 바로 우측에 정사각형 으로 된 녹색 반장 뱃지, 부반장은 흰 부반장 뱃지, 부착.
춘추, 하복은 왼쪽 가슴에.
그렇게 고생 하며 바지 도매 하시며 돈을 제법 모았다.
68년도에 남대문 시장에 대화재가 낳다.
아버지 가게는 전소했고, 보험도 안 들어 났었다.
그 후 평화시장으로 이전해 장사 하셨다.
당시 장사 하신 던 분들이 알부자라, 아버지 가게에 돈 박스(나무 상자)에 현금이 수북이 있었고,
저녁에 귀가 하실 때 보자기에 현금을 수북이 넣고, 5남매 줄 과자류, 장난감들 사오셨고, 대목(구정,추석) 때는 나와 큰 누나가 수시로 바지를 버스 타고 날랐다.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주 아버지 가게에 바지 나르고, 아버님 께 돈 받아 자장면 사 먹고, 인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빈번히 갔다. 광 팬 이었다.
당시 실업야구는 관중이 거의 없었는데, 실업 야구장에도 거의 항시 내가 있었고, 고교야구, 대학야구는 물론, 고교야구 빅 게임이면 아버님이 장사 끝내고, 야구장 오셔서 같이 관전하고, 형님과 같이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국민학생이 실업야구 선수들 프로필을 줄줄이 꾀고 있었다.
형님 친구 분들이 같이 오셔서 관전 시, 내가 줄줄이 프로필 등 얘기 하는 것 보고 혀를 내두르곤 하셨다.
가을에 추울 때, 나이트 게임 할 때, 아버님과 같이 보면서, 추워서 아버지가 보자기로 나랑 아버지 같이 다리에 덮고 관전하곤 했는데,
하루는 급우들이 이런 모습이 tv에 잡혀 봤다고 하고, 연구 주임 선생님도 몇 월 몇 일날 야구장에서 아버님과 제가 야구 보는 모습 봤다고 하셨다.
75년도에 단독 2층을 짓고, 아버님이 버신 돈을 당시, 영등포나 강남이 미개발 할 때라,
성남 고등학교 앞에, 4층 짜리 건물을 사려고 하시다가, (구매 했으면, 대대로 임대 수입으로 편하게, 아주 유복하게 살았겠죠)안 하고,
집 앞에 선남이 아버지란 분이 공동 투자 하자고 해, 우린 버신 돈 전액을 그 분은 절반 정도 투자해, (사업성, 수익성은 실재 있었음),
그러나, 3공에 군사 집권 후 정치 자금이 필요해 기업 등등으로부터 강제 차출이 있었죠, 삼성등 전부 강제 납부, 나는 새도 떨어 뜨린 다는 중정 요원 들이 시행하니, 알면 서도 항의 못하고 그대로 뺏겨야 했죠.
그때 항의 했으면, 아버님은 그때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없어 져야 했겠죠. 이것이 2차 사기(돈 뺏김) 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며, 쓰지도 않고 번 돈인데, 어머니 뿐만 아니고 우리 가족 전부의 희생과 땀이 밴 돈인데 싸그리 빼 았겨야 했죠.
아버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장사 그만두고 집에 계실 때, 어머님은 너무 억울해 선남이 아버지 사는 집 보고 오시곤 하셨고, 공장 안 하시니 버스 타도 그 이 후론 토 하시지 않으셨고.
결국 부모님 월남해 고생고생 하며 돈 버신 것, 단독 2층과 5남매 대학교육 시킨 게 전부 입니다.
아버님 보시면 법 없이도 살 분이라 하셨죠.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 하시고, 어머님, 5남매가 다 그랬죠.
인물 훤하고, 똑똑하고, 공부 잘 하고, 주변에 부러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trade mark고.
이상 우리 가족 story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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