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 15:4-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대림절 둘째주일이다. 여러분 가정의 기다림 초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첫 번 째 초는 예언의 초, 그리고 오늘 밝힐 두 번째 초는 베들레헴의 초이다.
가정에서 밤마다 정기적으로 불을 밝히는 일은 참 어렵다. 게다가 식구들이 모이는 일은 더욱 힘들다. 그러니 기다림 초가 무거운 짐이 되기 쉽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이런 여러분의 번거로운 수고 덕분에 장차 한 세대 후에는 가정마다 기다림 초를 밝히는 그런 경건한 대림절을 맞게 될 것임을 믿는다. 지금 기다림 초를 밝히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약 오백 가정 정도가 참여한다. 대단히 선구적인 사건이다. 그러니 사명감을 갖고 참여하기를 바란다.
독일의 수도자이며, 작가 안셀름 그륀은 기다림 초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대림환(기다림 초)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결합하게 한다”.
그는 초에 불을 붙이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대림 시기에 언제나 삶 안에서 저희를 비추게 하소서. 저희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저희가 머무는 집을 사랑으로 채우소서”.
이 대림절에 희망의 불빛을 밝히듯이, 복음에 비추어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1)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예수님을 화해와 평화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점차 고난과 박해가 다가왔다. 팽팽하게 긴장된 상황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에도 갈등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지금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인내와 위로’였다.
성경은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언약을 준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
가정이든 공동체든 위기가 닥칠 수 있다. 그럴 때일수록 일치가 중요하다. 교회도 종종 위기를 겪는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력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라고 한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이시다. 그런 화해자이신 예수님을 본 받으라. 형제의 약점과 연약함을 대신 하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무엇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든든한 무릎을 지닌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넘어지는 사람을 붙들어 주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
<예수의 네 가지 얼굴>이란 책이 있다. 저자는 복음서가 쓰여진 공동체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 책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을 전하면서 얼마나 그들이 그 말씀 앞에 치열했던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분노, 탄원, 희망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장하고, 비감하게 들렸다. 초대 교인들은 목숨을 걸다시피 예수님의 말씀과 씨름하였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평화로운 시기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고난 중에 있는 로마 교회를 향해 가슴으로 뜨겁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2)
바울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위기에 처한 때일수록 서로 용납하고, 한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며, 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한다.
본문은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한다. 물론 받아들이는데 전제가 있다.
“예수를 본받아”(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6).
예수님의 품은 얼마나 넓은가?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고, 스스로 병든 자, 스스로 고난당하는 자, 스스로 소외된 자, 스스로 이방인이 되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유까지 그렇게 낮아짐으로써 가능하였다.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닮은 인물을 손꼽으라면 성 프란체스코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날 때가 되어 큰 산고를 겪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 순례자가 이 소식을 듣고 기상천외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아기를 낳으라는 것이다.
어디가 가장 낮은 곳인가? 바로 구유였다. 부자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편안한 침실이 아닌 외양간의 구유에서 태어난 배경이다.
구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였다. 짐승의 먹이 통인 구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 비천한 자리에 오신 생생한 현장이다. 하나님의 도는 높이 깨닫고, 널리 진리를 아는 것 보다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낮은 자리로 찾아오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더 높이 올라오라고, 더 깊은 진리를 깨우치라고 하지 않으신다. 더 낮은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하물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가 서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경에는 ‘서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출 18:7), “서로 화목하라”(막 9:50),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골 3:13)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 4:7).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서로’라는 두 글자를 빼면 그 핵심이 없어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는 연대적 언어이다. 우정이니, 사랑이니 ‘서로’ 하는 것이다. 혼자 하는 섬김이나 봉사는 없다. 서로 서로 하는 것이다. 얼마나 다정한 말이며 흐뭇한 말인가? 천국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
영어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어는 라틴어의 ‘Munus’에다가 서로란 의미의 접두사 ‘Com’을 붙인 것이다. 여기서 ‘munus’는 세 가지 뜻을 가졌다. 선물, 짐, 책임이다. 그래서 Communus가 되면 선물을 서로 나눈다. 짐을 서로 진다. 책임을 함께 진다는 뜻이다.
서로 나누는 관계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서로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것이다. 부모 자식 사이에 만약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참 불행한 것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휴전선이 따로 없다.
그 관계야 말로 책임이고, 짐처럼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인생은 다른 무엇보다 그런 커뮤니케이션에서 행복해야 진짜 성공한 것이다.
올해 대림절부터 내년까지 매 주마다 영어로 된 고전설교 한 편 씩을 읽기로 하였다. 미국에 있는 후배 두 사람과 약속을 하고 서로 메일로 느낌을 주고받는다. 답답하니 구글의 화상 채팅인 ‘행아웃’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아직 내가 소통을 못한다. 시차도 있고, 숙제도 많고 소통이 어렵다.
이번 주 읽을 고전설교는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대림절 설교였다. 그는 역시 시대의 예언자였다. 그는 1967년 성탄절 전날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의 의미를 설교하면서 복음의 소통에 대해 말하였다.
“예수의 복음은 개인의 차원과 한 나라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평화의 메시지다”.
그는 4년 전 그 “I have a dream”이란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꿈에 대해 말할 때에, 특히 흑인들에게 그 꿈은 너무나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하여 청중의 반웅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킹 목사는 아직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한다.
심지어 그가 꾼 꿈은 아직 악몽으로 남아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킹 목사는 아직도, 끊임없이 꿈을 꿀 것이라고 설교한다. 설교문의 마지막 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여섯 번이나 되풀이해서 주장한다.
“I still have a dream today”.
마틴 루터 킹 역시 같은 말로 권면한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백인더러 흑인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건강한 자들에게 핸디캡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미국인더러 가난한 세계인들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받아주심으로써,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억압으로부터, 불행한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목적이다.
3)
바울은 본문에서 네 번에 걸친 구약 성경을 인용한다. 궁극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9).
예수 구원의 참뜻은 교회 안에서 믿음 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는 한 몸으로 하나가 되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의 가족으로서 친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의 평화는 이웃에게, 한 나라의 평화는 열방, 즉 모든 나라를 향해야 한다.
이것이 이새의 뿌리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민족과 백성의 희망이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
지난 주에 소천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도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세계감리교대회에 초청받았던 감리교인이다.
마틴 루터 킹이 미국의 흑인의 민권을 위해 싸웠듯이, 만델라 역시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자유를 투쟁에 헌신해왔다.
“나는 ..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결국 만델라는 27년 동안 복역했지만, 분노의 목소리보다 평화의 목소리를 높였다. 옥살이를 끝내고 나온 1990년 2월,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천한 종으로 서 있다”.
그는 수감생활 14년 만에 처음으로 아주 어릴 때 헤어진 딸과 면회하였다. 딸은 갓난아기를 강제노동으로 시달리고 투박해진 아버지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는 “세상 어느 누구도 그 때의 저만큼 행복하지는 못 했을 겁니다”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손녀의 이름을 자쥐웨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의 뜻은 ‘희망’이다.
그 희망 속에 넬슨 만델라 자신의 희망과 가족의 희망과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희망이 담겨있었다.
누구나 마틴 루터 킹처럼, 넬슨 만델라와 같을 수는 없다. 그들처럼 흑인 전체의 아픔, 남아프리카인들 모두와 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짐을 ‘서로’ 나누어 질 수는 있다. 열 사람과 동시에 포옹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포옹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이고, 예수님의 사랑이다. 한 사람씩 안아주는 것, 한 사람씩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림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받아들이는 절기이다. 어려운 말로 인권과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안아주려고 하면 그것이 출발점이 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받아주셔서 언제나 평화와 기쁨과 희망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