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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동시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허암 박일
'아평 겨울호(2016) 특집-종교와 아동문학 중에서'
한국 아동문학과 동학(천도교)
박 일
1.
동학, 너는 이 민족에 무엇인가?
그림자인가.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는 눈썹인가? 우리의 것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백마 타고 오는 왕자일 수도 있을 텐데.
루돌프 슈타이어(1861∼1925)는 유럽 녹색운동의 창시자인데 20세기 대신비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새 문명,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나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그 성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 민족이 극동에 와 있다.’라고 했다. 그의 제자인 일본 인지학회 회장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는 그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며, 그 성배가 바로 최제우의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실토한 바 있다.
성배의 민족! 혼돈의 세상을 극복할 위대하고 성스러운 민족이라는데, 정작 동학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벌판에 서 있는 집처럼 버려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적 무관심, 무지, 사대주의적 근성 아니면 성배의 민족임을 시샘하는 일본이 민족정기를 꺾어버리기 위해 동학의 기를 팍팍 꺾어버린 것은 아닐까?
본고에서는 동학의 역사와 의미를 중시하면서, 항일 및 계몽문화운동 그리고 방정환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어린이 문화의 중심이 된 천도교 소년회 활동 등을 중심으로 서술코자 한다.
2.
조선 후기,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도(道)로 말하면 천도(天道)요, 학(學)으로 말하면 동학(東學)을 창도한다.
창도한 분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다. 경주 용담정에서 득도를 위한 수련을 하던 중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 경신년(1860년) 4월 5일이다.
동학의 창도 정신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다. 사람은 한울(하늘)을 모시고 있는 시천주이기 때문에 사람 섬기기를 한울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 오는 손님도 한울님의 강림이라고 했다. 천도교 소년회에서 방정환 등이 어린이를 올려 보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 운동을 전개한 것도 이 정신의 구현 이었다.
이는 사랑이나 자비보다 더 거룩한 말이다. 사랑이나 자비는 베푸는 쪽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만 사인여천은 서로가 섬기는 일이니까 그보다 더 큰 휴머니즘이 아닐까? 쉽게 풀이하면 ‘섬김’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눈높이보다 더 낮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까.
현대를 가치관의 혼란 시대라고 하던가. ‘사인여천’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여유와 양보, 정의와 협동, 성실과 믿음, 그리고 꿈이 실현되는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적당주의, 부실, 결탁, 위선, 과시, 압력, 갑질, 청탁, 왕따 등의 부정적 행위와 내가 한 사랑은 로맨스며 남이 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이기주의도 발을 붙이지 못했으리라.
수천 년 동안 동양을 지배해온 종교 사상은 천본(天本) 사상이었다. 그런데 동학은 그 하늘의 개념을 개혁해 버렸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본주의는 그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생철학자 니이체(F. W. Nietzsche)는 ‘신이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하여 신본주의에 대한 도전을 하였으니, 이들은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19세기 종교 개혁자였다.
동학은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되었고, ‘인내천(人乃天)’을 종지로 내세워 ‘천인합일(天人合一)’ ‘신인일체(神人一體)’의 진리를 창출하였다. 지금까지는 인간과 신을 따로 떼어 신은 높게 보고, 인간을 천하게 여기면서 신의 종속물로 파악하였지만 신 본위에서 사람 본위라는 사상적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신 본위에 응고되면 어떤 설득도 들어올 틈이 없다. 언젠가 어느 종교인이 방문해서 그들의 종교를 선전한다기에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면서 토론해 볼래요?” 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고, 나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지칭했다. 그런 게 어디있냐며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
동학이 추구하는 세계는 ‘개벽(開闢)’과 ‘지상천국(地上天國)’이다. 개벽이란 종말이나 파멸의 개념이 아니다. 문화적 몰락을 극복하거나 전환시키거나, 종말의 위기를 타고 넘는 문명사의 대전환이며 재창조의 세상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후천 개벽의 새 세상을 하늘에 세우자는 게 아니다. 이 지상에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신으로 민족과 함께 존재하여 왔다.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당시 진정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건지려던 이는 동학농민군들이었다. 그들은 ‘보국안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으며 죽음으로써 일본과 맞서 싸웠다. 그 당시 그들이 요구한 폐정개혁은 조선 왕조의 봉건적인 지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 세력이라기보다 현실적으로는 반일 세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학은 민족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동학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각자위심(各自爲心)’이다. 시쳇말로 이기주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동귀일체(同歸一體)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고, 사회와 겨레는 물론 전 인류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교지(敎旨)로 하면서, 정성(誠), 공경(敬), 믿음(信)의 세 가지를 기본 도덕으로 내세웠다.
우주의 본체를 ‘지기(至氣)’라고 한다.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정신적 본체를 ‘이(理)’라 하고, 물질적 본체를 ‘기(氣)’라고 보았다. 천도교 경전에는 ‘지기’를 해석하기를 ‘지’라는 것은 지극한 것이오,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이라고 하였다. 천도교의 ‘지기론’은 이ㆍ기 이원론을 극복한 새로운 우주관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위정자들에게는 동학은 호랑이를 키우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누구나 군자라고 하니까 하인처럼 부려먹을 수도 없었다. 그것을 관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최제우는 혹세무민(惑世誣民),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한다. 동학을 창도한 지 5년 후였다.
2세교조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이겨낸다. ‘최 보따리’라는 이름에는 동학의 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을 보관하고 전수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 느껴지지만, 묵묵히 동학을 키워낸 자부심 같은 것도 느껴진다. 동학을 지키는 일은 형극의 길이었다. 늘 관의 주목을 피하면서 기반 위에 올려놓아야 했으니까.
조선 말기 억압받는 민중들에게는 구원의 등불이었다. 그들이 언제 인간다운 대우를 받아 왔던가. 용담유사 「교훈가」에 ‘입도한 세상 사람 그 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니냐’라고 하면서, 동학을 믿으면 누구나 군자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배를 당해왔던 풀뿌리 민중들에게는 햇살 같은 복음이었다. 비로소 인간의 본성과 자존감을 깨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인간의 본성을 깨달은 민중들의 함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는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군의 개입으로 그들과 대치하면서 목숨까지 분연히 버렸던 것이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갑오개혁을 이끌어 개화의 시대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으니, 독립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동학의 한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보국안민의 충정을 키웠었다.
동학은 그 후에도 갑진년(1904)에 단발령을 발표하면서 세계 문명에 참여하는 개화혁신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진보회장 이용구가 동학을 배신하고 ‘진보회’를 ‘일진회’와 합병하여 친일 단체로 둔갑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동학이 친일파 이미지를 남기면서 입지가 급격히 좁아져 버린다. 교활한 일본이 민족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동학을 꺾기 위하여, 이용구를 이용하고 그 한 사람의 배교 행위를 통하여 동학을 매도해 버린 것이었다. 이 국가를 위하여 쓰러진 동학혁명의 선구자들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비통해 했으리라.
이를 계기로 천도교로 거듭날 수밖에 없었다. 동학 대신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해 버린다(1905). 원래 동학과 천도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동학이 훨씬 정감이 느껴지지만 천도교는 동학의 명예와 명성을 회복하려는 각오가 서려 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종교로 안착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의절이 생긴다. 기도식, 시일식(매주 일요일 행하는 종교 예식) 등에서 지켜야 할 수행 요령들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웬일인가!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소망할 때처럼 정화수(청수)를 모시는 것이었다.
천도교는 정부의 따스한 미소를 받지 못하여, 늘 좌절의 사태에서 파악되고 있는 약점이 있긴 하다. 무극대도로서, 민족정신으로서 그 자리매김이 확실히 되었으면 좋으련만.
3.
일제 강점기에서도 천도교는 깨어 있었다. 3ㆍ1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당황한 일본은 문화 통치라는 미명으로 수습에 성공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자주독립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일본은 잡아 놓은 대어를 놓치지 않은 행운을 얻은 셈이다.
3ㆍ1 만세운동은 천도교가 없었더라면 이룰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 천도교인이 15명이었고, 이 중에서 천도교 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대표 중의 대표였다. 거사 자금까지 거의 천도교에서 준비하였다고 하니 이 민족과 함께 하고, 함께 살아가는 종교의 거룩한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1920년대는 억눌려 있던 우리들의 문화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교육, 언론, 문예, 학술, 종교 그리고 실업 등 각계의 지식인들은 민족 문화의 향상, 민족 자본의 확립이 바로 독립운동의 지름길임을 깨닫고 있었다.
신문화운동의 핵은 일간신문, 잡지 등의 발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신문과 《개벽》을 비롯하여 《서울》《성광》《조선지광》《아성》《신생활》 그리고 《신천지》 등의 잡지가 1919년 2월부터 1922년 사이에 계속 발간되었다. 《창조》《폐허》《장미촌》 그리고《백조》 등 문학동인지 들도 쏟아졌다.
그 가운데서도 개벽사를 중심으로 한 출판운동은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월간 종합지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에 창간되었는데, 3ㆍ1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던 천도교가 민족의 계몽과 방향전환 수단으로 발행한 것이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일제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여, 두 번이나 압수를 당한 끝에 창간 임시호를 발행하면서 겨우 그 빛을 보았다. 창간호부터 이렇게 탄압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 잡지 사상 유래 없는 일이었다. 1926년 8월, 72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이 될 때까지 이 땅에 남겨 놓은 신문화의 발자취는 실로 큰 것이었다.
개벽사는《개벽》외에도《별건곤》《혜성》《부인》《신여성》《어린이》《학생》 그리고 《신경제》 등 잡지를 발행하여 계몽을 이끌었다. 또한 천도교는 농민들의 의식적 훈련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선농민사’를 설립하고, 《조선농민》과 《농민》이라는 월간지도 간행하였다. 이 외에도 일간지이면서 교단의 기관지였던 《만세보》, 국판 체계의 월간지인 《천도교회월보》 그리고 《신인간》(이 잡지는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음) 《당성》《당우》《전선》그리고 《동학지광》등도 간행하여 교세도 과시하며 이 민족과 신문화 선도의 횃불을 높이 들었었다.
특히 소파 방정환에 의하여 발행한 《어린이》잡지는 우리나라 근대 아동 잡지의 효시가 된다. 김기전, 방정환 등은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을 실천하였고, 이들에 의하여 어린이날(1923년 5월 1일)도 제정되어 대대적인 문화 행사도 곁들인다. 이것이 우리나라 어린이날의 효시가 된다. 이런 매개활동은 동학의 핵심 사상인 사인여천과 해월 최시형의 법문 ‘대인접물(待人接物)’에서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니, 하늘이 싫어하고…’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 20만 장의 광고지가 살포되었다. ‘어룬에게 전하는 부탁’과 ‘어린이에게 전하는 부탁’이었다. 오늘날까지 그 울림이 남아 있어 그대로 옮긴다.
어룬에게 전하는 부탁
1.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반다시 쳐다보아 주시요.
2. 어린이를 늘 갓가히하사 자조 이야기하여 주시요.
3.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요.
4. 이발이나 목욕 또는 옷가라 입는 것 가튼 일을 때맛쳐 하도록 하여 주시요.
5. 산보나 원족(遠足) 가튼 것을 각금각금 식히사 자연을 친애하는 버릇을 지여 주시요.
6. 어린이를 위하여 즐겁게 놀을 기관(機關)을 맨그러 주시요.
7. 이 우주의 뇌신경의 말초(末梢)는 늙은이에게도 잇지 아니하고 젊은이들에게도 잇지 아니하고 오즉 어린이 그들에게 잇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요.
어린이에게 전하는 부탁
1. 돗는 해와 지는 해를 반다시 보기로 합시다.
2.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가튼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3. 도로에서 떼를 지여 놀거나 휴지 가튼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4. 꽃이나 풀은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5.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룬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6. 입을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고 합시다.
7. 어룬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존경하기로 합시다.
또한 ‘오늘이 어린이 날 희망의 새 명절’이라는 타이틀 아래 ‘어린이날 선언문’도 발표하였다.
1.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2.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놉게 대접하십시요.
3. 어린이를 윽박지르지 마십시요.
4.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주십시요.
5. 어린이는 항상 칭찬하며 길르십시요.
6.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보십시요.
7. 어린이에게 잡지를 자조 읽히십시요.
4.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난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리네.
소파(小波) 방정환이 지은(번안) 「형제별」이란 동요다. 이 노래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감상주의에 젖어 있긴 하지만 주권상실 하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매양 서럽고 슬픔 현실에 슬픔을 달래주는 카타르시스적 작용을 해주면서 애창되었다.
이렇게 볼 때, 소파는 아동문학가나 청소년운동가 외에 피압박 민족의 감정을 대변해 준 민족주의자였다. 천도교인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는 추상적 이념을 민족주의나 청소년운동에 접목시킬 줄 알았고, 구체적 실천행위로 승화시켰으리라.
또한 아동문화 운동가, 아동인권운동가로서 ‘영원한 어린이의 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천도교인으로 기억하는 이는 극히 적다. 청소년운동이 범민족적 입장에서 파악함으로써 천도교인으로서의 소파는 묻혀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천도교의 인지도가 낮은 것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소파는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夜珠峴-지금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소파의 가정은 꽤 부유한 편이었으나 그가 소학교에 다니는 동안 가산이 기울어져 학교를 마칠 때에는 매우 궁핍했다 한다. 그런 삶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는데, 어느 미술가가 그의 재질을 아까워하여 환등기 한 대를 사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변사 흉내를 내는 등 구연에 대한 천재적 소질을 보이게 되었다.
15살 되던 1913년, 미동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엄친의 명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그 학교를 자퇴한 소파는 더욱 독서에 열중하게 되었고, 유광렬 등과 봉놋방(노무자 무임숙소)에서 민족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을 자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권병덕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도하게 되었고, 천도교 교리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공부를 했으리라. 독실한 교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천도교 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의 사위가 될 수 있었고, 1917년 19세의 나이로 손병희의 3녀인 용화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회고(‘신인간’지 제367호, 1979년 5월호, ‘소파선생과 어린이 운동’)에도 당시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지만 아버님께서 천도교인에게 시집보낸다고 모두 기다리고 있다가 언젠가 권병덕 선생께서 그이를 소개하게 되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소파에게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민족정신과 사인여천 윤리는 그를 아동인권운동이나 구국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였었다.
소파에 의해서 ‘어린이’가 인격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아동문학을 비롯한 어린이 운동의 시발을 보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재철 박사는 「한국 현대 동시 약사」에서 ‘일반 성인문학과 마찬가지로 현대 아동문학의 진정한 출발은 1920년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3ㆍ1운동과 《창조》지 이후의 동인지 활동을 배경으로, 1923년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본격 아동지 《어린이》의 창간, 최초의 아동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의 창립 등으로 전개된 일련의 아동문화 운동은 곧 현대아동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이었다’고 했다.
미인박명이라더니 천재도 박명인가. 과로와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소파는 구연동화 활동 중에 쓰러져 경성제국대학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5.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종교는 문화를 수반한다. 그 문화가 종교를 천착시키는 뿌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의 질은 종교의 질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천도교 문화는 그저 질박하다고나 할까.
한국의 유명한 관광지에는 거의 사찰이 들어있다. 불교문화가 그만큼 발달했다는 증거다. 세계의 곳곳에서도 종교 문화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런데 동학은 관광객을 끌기는커녕 동학이 가지고 있는 실체마저 보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학의 문화는 백여 년의 역사다. 문화 찾기는 그동안 계속되어 왔지만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 게 많다. 가령 ‘용담정’만 하더라도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이곳이 동학이 창도된 곳이라고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동학혁명의 역사터도 중요한 문화다.
원래 역사는 우리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천도교는 우리 역사 위에서 늘 시련과 고난과 비판을 받아왔기에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천도교의 버팀목마저 부실하게 느껴지면서 우리 민족에게서도 사랑받는 종교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수년 전에 「천도교 문학과 예술 활동」이란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서두에 서정주의 시 「자화상(自畵像)」을 인용하였다. 제2연의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는 시구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글에 ‘훌륭한 예술 작품이란 작가의 개인적 진실로부터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시를 접하면서 그런 마음을 더욱 갖게 하였다. 그런데 천도교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 왜 이 시를 인용하였는가? 그것은 이 시에서 시인 자신의 개인적 진실을 보아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동학 혁명이 일어나던 갑오년에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동학을 소재로 한 작품이기 때문만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 시를 찬찬히 훑어보라. 어쩌면 천도교의 자화상과 그럴 듯하게 맞아 떨어지기 않는가!’라고 썼었다. 이 시를 통하여 천도교 문학(또는 예술)의 부끄러운 자화상의 실체를 찾아보았다. 역시 팔할은 바람이 키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전략도, 새로운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인내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부지기수겠지만.
천도교!
우리 민족 위에, 우리의 역사 위에 거인의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성배의 민족으로 승화시켜주리라는 확신이 서지만 아직도 먼 그림자처럼 느껴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천도교과 문학, 예술의 만남도 활발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나마 천도교 소년회가 이룩한 어린이 운동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믿는다.
아무리 새롭고 멋진 풍경이 있은 들 무엇하랴! 구경하고 감탄하는 이들이 없다면.
첫댓글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
곱씹어 읽어 볼 내용이 가득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