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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종로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 종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골풀
제4차 종로문화유적 담사자료 수정한 원고입니다.
앞에 올린 원고에서 수정할 부분이 있어 다시 올립니다.
먼저 원고는 지우고 이 원고를 인쇄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오병훈
제4차 종로문인협회 문화유적 답사 / 인왕산 수성동 지역
2014. 4. 12(토)
수성동(水聲洞) 일대 문화유적
시인 이상(李箱) 옛집
현재 이상의 집은 종로구 통인동 154-10 소재의 단층 가옥(등록문화재 88호)이다. 그러나 이 건물에서는 실제 이상이 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등록문화재 취소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이상 생존 당시에는 이 일대가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한옥이었고 부지가 300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이상의 나이 세 살 때인 1912년 양자로 들어가 백부가 사망한 1932년까지 통인동 154번지에 살았다. 당시의 주소는 경성부 순화방 반정동(半井洞) 4통 6반이었다. 백부가 사망하면서 유산으로 남긴 집을 처분하여 청진동 조선광업소 아래층에 금홍과 같이 다방 제비를 경영했으나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이상의 옛 집은 여러 필지로 나누어져 작은 건물 여러 채가 들어서게 되었다.
2004년 이상 가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때까지 1~2년 동안의 언론 보도 내용을 보면 문화재청이 너무 서두른 것 같다. 이상의 집에서 같이 하숙했던 지인의 증언에는 넓은 집터에 안채와 사랑채만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와 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했던 이상에게 건축은 예술혼의 태반과 같았다. 후대 건축동네의 기념사업은 선의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이상의 발자취에 불필요한 흠집을 낸 격이 됐다. 베일에 싸인 작가의 고독한 내면세계를 대중과 소통시키는 과제도 이번 스캔들로 더욱 멀리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명분과 욕망에 도취돼 기본 사실 확인조차 없이 여론몰이를 했다는 비판에서 재단과 언론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상이 살지도 않았던 집을 그의 문학혼이 깃든 집으로 포장한 치명적인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건물은 아니어도 통인동 집터 자체는 여전히 역사성을 지니는 만큼 이제라도 매입 과정의 오류를 해명하고, 보존 방안에 대해 지역주민의 의견을 구해야 한다.
이상(李箱)의 문학세계
본명은 김해경으로 1910년 서울에서 이발업을 하던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생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에게 입양되어 반정동에서 자랐다.
이상의 생부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으며 손가락 세 개를 잃은 장애인이었다. 이상은 어린 시절 자신을 친부로부터 갈라놓은 큰아버지도, 형에게 아들을 빼앗긴 생부도 사랑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거울을 갖고 다니면서 햇빛을 반사시키며 놀았다.
집안이 부유하여 양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백부의 경제력과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를 거쳐 경성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Boiteus·Boiteus〉, 〈파편의 경치〉 등을 《조선과건축》지에 발표했고 1932년 《조선》지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필명을 썼다.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일터에서 일본인 동료가 이상을 보고 이씨라는 뜻으로 ‘李さん’이라고 불렀는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이상(李箱)이라고 하게 되었다. 오얏나무는 조선의 국왕 문장이요 대한제국 황제를 상징하는 꽃이니 바로 조선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봉별기〉 첫 머리에서 ‘스물 세 살이오 -삼 월이오- 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날로 다듬어 코밑에 나비만큼 남겨가지고 약 한제 지어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을 찾았다. 게서 난 죽어도 좋았다.’ 1933년 3월 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기생 금홍을 만났기 때문이다.
금홍과 함께 서울로 온 그는 다방 ‘제비’를 운영하게 되었다. 폐병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烏瞰圖)》를 연재하지만 30회로 예정된 시가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회로 중단되고 말았다. 1935년에는 다방과 카페 경영에 실패하여 금홍도 떠났다.
이듬해 구인회 동인지 《시와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을 내고 그만 두었다. 《중앙》지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고, 《여성》지에 〈봉별기〉를 실었다.
이상(李箱)은 장편소설 〈십이월 십이일(十二月 十二日)〉을 《조선(朝鮮)》지에 발표했다. 12, 12라는 말은 억양을 세게 하면 욕이 된다. 소설의 제목을 통해 조선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을 조롱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는 종합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다니. 등골이 오싹하다. 한글과 발음을 모르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숫자로만 이해하여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이 된다는 점을 몰랐다. 얼마나 통쾌한가.
이상이 ‘제비’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했던 ‘69’도 간판을 붙였다가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되었다. 남녀의 성교를 상징하는 69외에도 다리 둘(女)과 다리 셋(男)을 뜻하는 ‘23(二十三)’이 있다. 또 우리말로 차팔 또는 조팔(조빨)로 발음하는 ‘且8’은 발기한 남성 성기를 나타낸다. 이런 방법으로 일제를 조롱하며 조선총독부를 골탕먹였다.
화가 구본웅(具本雄)과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안회남(安懷南)과 절친하게 지냈다. 1937년 김유정이 이상보다 한 달 먼저 요절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갔다가 사상이 불온하다는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된 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힘든 감옥살이와 영양실조로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26세로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화장한 유해는 경성으로 돌아와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마친 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1977년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해 왔다. 2008년부터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세계’가 공동으로 이상시문학상을 제정 수상자를 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시 〈오감도(烏瞰圖)〉를 비롯하여 소설 〈날개〉, 〈종생기〉와 수필 〈권태〉 등이 있다.
박노수(朴魯壽) 가옥
박노수 가옥은 1938년에 건립한 이층집이다. 집 뒤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예서체 암각 글씨가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이 각자는 주택개발로 부지를 메우는 과정에서 시멘트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집을 지을 당시에는 중국 석공들이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옥과 중국식, 양옥의 수법을 섞은 절충식 건물이다.
1층은 벽돌을 쌓아 지었고 2층은 목조이다. 서까래가 노출된 처마를 가진 박공지붕이다. 온돌ㆍ마루ㆍ응접실 등을 마련한 1층은 프랑스풍으로 꾸몄고, 2층은 마루방 구조이다. 주택 내에는 벽난로 3개를 설치하여 겨울철 난방을 해결했다.
베란다가 있던 2층을 30여 년 전에 방으로 개조했다. 심전 박노수 화백이 1972년부터 이집에 거주하면서 작업실로 쓰다가 박 화백이 작고하고 난 지금은 구청에서 미술관으로 개장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서체 예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며 금석학자요 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호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과노(果老)·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등 100여 가지를 썼다. 한국 금석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옛 비문을 탁본하고 서체를 연구하였다.
생부인 김노경을 비롯하여 추사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 김정희가 7살 때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쓴 글을 대문 앞에 붙였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보고 “이 아이는 장차 명필이 되겠는 걸.”하고 칭찬했다는 말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시, 서, 화에 두루 통했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백부 김노영(金魯永)이 귀양 가게 되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고 15살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얼마 뒤 양어머니도 죽어 삼년상을 치르고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했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24세 때인 1810년 생부인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당대 제일의 학자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을 만났다. 옹방강은 당시 78세의 노학자이고 추사는 24살의 총명한 천년이었다.
이어 운대(芸臺)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에 심취하게 된다. 완원은 22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천재로 27세 때 조선의 박제가를 만났다. 박제가는 제자 중에 추사라는 총명한 청년이 있다는 것을 완원에게 얘기했을 것이다. 추사가 완원을 찾았을 때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왔을 정도로 환영을 받았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추사에게 기증하였고 완원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그의 성을 따 호를 완당(阮堂)이라 했다.
추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했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오래된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추사가 금석학에 심취한 것은 스승인 옹방강의 영향이 크다. 옹방강 당시의 중국에서는 왕희지나 구양수의 필법에만 매달려 있던 때라 그 이전의 서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예술성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옹방강은 한대 이전의 예서체에서 위대한 예술성을 발견하고 천하를 누비며 고비를 탁본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탁본들을 본 추사가 놀란 것도 당연하다. 옹방강이 평생에 걸쳐 연구한 서법이론을 그대로 조선의 청년 추사에게 물려주었다. 추사는 한예체(漢隸體)를 바탕으로 한 옹방강의 서법이론을 익혀 제주도 유배생활 9년만에 독창적인 추사체로 완성시켰다.
추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무학 대사비’ 또는 ‘고려 태조비’라고 알려져 왔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대로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라고 밝혀낸 시실이다. 그의 학문적 태도를 밝힌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학문에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추사는 차(茶)를 좋아했다. 한국의 다성(茶聖)이라는 초의(草衣)스님과, 당시의 선지식인 백파(白坡)스님과도 친분을 맺었다. 추사가 완원을 처음 찾아갔을 때 북송의 황제가 마셨다는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를 내놓았다. 후에 추사가 차에 깊이 빠져든 것도 이때의 맛과 향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추사는 초의스님과 교류하면서 그에게 ‘명선(茗仙)’이라는 호를 써 주었는데 그 작품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추사는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를 따 이 글씨를 썼다고 했다. 바로 완원의 서재에서 본 탁본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글씨를 머릿속에서 기억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가 되었다. 뒤에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고, 1835년(헌종 1년)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30년 윤상도와 그의 아들 윤한모가 상소문을 올렸는데 내용은 죽은 효명세자가 덕망이 없고 호조판서가 국비를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순조는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시켰다 하여 이들 부자를 추자도에 유배시켰는데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며 김노경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10년 후, 윤상도 부자의 죄를 다시 논하게 되었다. 안동김씨 측에서 추사가 상소문을 초안했다는 허위진술을 하여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제주에서 책을 구하기란 힘든 일이었으나,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연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 스승에게 전했다. 그 중에는 《만학집》, 《대운산방문고》, 《황조경세문편》 등이 들어있었는데 그 책을 통해 추사가 학문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추사는 답례로 ‘날이 찬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제일 늦게까지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며 송백을 지조에 비유하여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주었다. 이 그림을 받은 우선은 1845년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인 장악진(章岳鎭)ㆍ조진조(趙振祚) 등 16명에게 보이고 찬시를 받았다. 귀국하여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의 글과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를 붙였더니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세한도는 우선의 제자였던 매은(梅隱)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 갔다. 매은의 아들 소매(小梅) 김준학(金準學)이 보관했다가 평안 감사를 지낸 휘문고등학교 설립자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1930년대 경성제대 교수였던 일본인 수집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에게 팔았다. 그 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의 노력과 끈질긴 설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손재형이 귀국하고 나서 3개월 후인 1945년 3월 10일 후지츠카의 서재는 미군의 공습으로 불타 많은 수집품이 소진되었으나 세한도는 살아남았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돼 있다.
자수궁 지(紫壽宮 址)
자수궁 지(紫壽宮 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5번지에 있는 유지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북학(北學)’이라는 학당이 있었다. 문종실록(文宗實錄) 즉위 년 3월 31일 기록에 따르면 “태조의 7번째 왕자인 무안군(撫安君)의 사저를 왕명으로 수리하여 자수궁(紫壽宮)이라 하고,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광해군(光海君) 8년(1616) 경희궁(慶熙宮) 일대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풍수설이 나돌았다.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자신의 장래를 염려하여 그 자리에 궁궐을 지어 왕기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운명은 피할 수 없었든지 결국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자수궁은 1623년에 헐리고 말았다. 그 후 자수궁 자리에 비구니들의 수행선원인 자수원(慈壽院)을 세워 한 때는 5,000여 명의 비구니를 수용하는 국내 최대의 승방이 되었다. 그 후 비구니들이 풍속을 헤친다고 하여 1661년(顯宗 2) 2월 부제학 유계(兪棨) 등의 상소로 폐지되었다.
반정이 일어난 1623년 3월 12일 밤 광해군이 북문 담을 넘었으나, 갈 곳을 찾지 못하여 자수원(慈壽院)으로 가다가 길에서 정몽필(鄭夢弼)을 만났다. 그가 말을 주므로 총희(寵姬) 변씨(邊氏)와 함께 타고 총애하던 안국신(安國信)의 집으로 갔다. 안국신은 상중이라 흰 개가죽 남바위를 쓰고, 삼베(生布)로 지은 천익(天翼)과 삼띠에 짚신 차림이었다. 광해군은 안국신의 상복을 얻어 입고 몰래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 하다가 의원 정남수(鄭楠壽)의 밀고로 군사들에게 잡혔다.
능양군(綾陽君, 仁祖)이 서궁(西宮 慶運宮)으로 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뵙고 옥새를 바쳤다. 대비가 이르기를, “광해를 보아야 너희들이 한 일을 알겠다.” 하므로 드디어 광해군이 입은 옷 그대로 작고 까만 가마를 타고 나아가 뜰에 엎드렸다. 대비가 36가지 죄를 들어 면전에서 꾸짖으며 꼭 죽이려고 하는 것을 능양군이 극력 간하고 말렸다. 그리고 반정한 것을 사직에 고하였다.
현종(顯宗)은 신축년(1661)에 도성 안에 있는 비구니(比丘尼)의 사원(寺院) 두 곳을 철거하였다. 처음에 왕은 승려와 비구니들이 성인의 가르침을 어지럽힌다고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는데 대신과 옥당(玉堂 弘文館)이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고 아뢰니, 마침내 먼저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두 사원을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나이가 젊은 비구니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이는 성 밖으로 내보냈다. 사원의 목재를 골라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고 음사(淫祀)를 금지시켰다.
겸재 정선 유거지
인곡유거(仁谷幽居)는 겸재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겸재가 52세에 이곳으로 와 84세로 소천할 때까지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의 집 이름을 인곡유거 또는 인곡정사(仁谷精舍)라고 불렀다. 세속을 벗어나 깊은 골짜기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는 뜻으로 유거라는 이름을 붙였다. 겸재의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태어난 집도 악록유거(岳麓幽居)였다. 삼연의 증조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붙인 이름이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옥인동 20번지 부근 지금은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이다. 인곡유거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당시 겸재의 집이 한도(漢都) 북부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의 인왕곡(仁王谷)이니 인곡이 바로 인왕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인동이라는 현 동명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류동(玉流洞)과 인왕곡을 합친 이름이다.
겸재의 탄생지는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幽蘭洞)이었다. 현재 청운동 89번지 일대이니 경복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절정에 이른 것이 60대 이후이다. 인곡유거는 80세 전후해서 겸재가 그 예술혼을 한껏 불태웠던 명작의 산실이다.
정선파의 화가들
조선 후기에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정선에게 직접 배웠거나 그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다. 중국화에서 벗어나 실경을 사생하여 지극히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작가들이다.
강희언(姜希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김유성(金有聲)·거연당(巨然堂)·정황(鄭榥)·정충엽(鄭忠燁) 등이 정선파로 불린 화가들이다. 이들은 정선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에서 보는 특징들을 잘 살려내고 있다. 수직으로 힘차게 내리긋는 수직준법(垂直皴法)과 토산의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한 미점(米點), 적묵법(積墨法)을 사용한 바위 표현, 측필(側筆)로 여러 번 반복한 침엽수 표현법, 조감법을 사용한 원형구도 등의 공통점이 있다.
특히 정선의 손자인 정황은 정선파 화가 가운데 정선의 화풍을 가장 충실하게 답습한 화가이다. 정선파의 화풍은 18세기 후반까지 활발히 유지되었으나 19세기에는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한 채 추사파 (秋史派)의 부상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그러나 민화에서는 정선파의 잔영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해환(海煥)이다. 1925년 만 8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는데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인 송몽규,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도 함께 공부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 학교에서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했다. 이듬해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용정의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를 위해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했다. 은진 중 2학년 때 〈초 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를 썼다.
1935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3학년 2학기로 편입. YMCA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 제15호에 〈공상〉이 실려 처음으로 활자화 했다. 이듬해 일제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했다. 이 때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에 동시〈병아리〉(11월호)와 〈빗자루〉(12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필명으로 발표했다.
1937년 《카톨릭소년》에 동시〈오줌싸개 지도〉(1월호), 〈무얼 먹고 사나〉(3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하고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尹童舟)란 필명으로 발표했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23), 시 〈유언〉(2.6), 〈아우의 印象畵〉(10. 17)를 발표했다. 《소년》 3월호에 동시 〈산울림〉을 발표,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에 다녔다.
1941년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에서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에 하숙을 했다. 하숙집을 나와 사직단 아래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고 다시 금화터널 위의 작은 고개를 넘으면 연희전문이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걸어서 학교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신촌에서 전차를 타고 남대문에서 내려 명동의 서점가를 돌아보고 수표교, 관훈동의 고서점가를 거쳐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하는 《문우(文友)》지에 〈우물속의 自象畵〉, 〈새로운 길〉을 발표했다. 일본 경찰이 주목하는 김송의 집을 나와 북아현동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 4학년을 졸업,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自選時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각각 1부씩 증정했다. 처음에는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뜻으로 시집 제목이 《병원》이었으나 〈서시(序時)〉를 쓴 후 고쳤다. 도일 수속을 위해 성을 ‘히라누마(平沼)’로 바꾸었다.
1942년 고국에서 쓴 마지막 시 〈참회록〉을 썼고,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했다. 이듬해 7월 송몽규가 독립운동 협의로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검거되고, 고향에 가려고 준비하던 윤동주도 같은 혐의로 검거되었다.
1944년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 받고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 2월 16일 혹독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이었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왕산(仁王山) 수성동(水聲洞) 계곡
인왕산(仁王山) 수성동(水聲洞) 계곡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 자락에 있는 수려한 계곡이다. 2010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옥인아파트 일대는 조선시대 수성동(水聲洞)으로,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漢京識略)》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었고, 겸재의 <수성동> 회화에 그려진 옛 풍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전통적 경승지’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 무대였다. 따라서 문학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명작의 산실이다. 계곡 아래에 걸려 있는 기린교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한다.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돌다리다. 협곡에 두 개의 통돌을 걸쳐놓은 석교로 조경학적, 교량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
수성동은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한 인왕산 아래 첫 계곡으로 조선시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렀다. 계곡의 길이는 총 190.8m, 폭은 최대 26.2m, 최소 4.8m에 이른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玉流洞)을 흘러 기린교 아래쪽에서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렀다. 따라서 청계천의 발원지는 인왕산 아래 옥류천이고 수성천이 지류가 되는 셈이다. 옥 같은 맑은 물이 흐르던 ‘옥류동 계곡’은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수성동 계곡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수성동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경관이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았던 명승지였다. 겸재의 ‘장동팔경첩’은 당시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던 장동(현 효자·청운동 일대)의 명승지 8곳을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중 ‘수성동’ 그림 속의 기린교 인근에는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린교는 폭 1m, 길이 6m의 화강암으로 인왕산의 석질과 같은 것으로 보아 인근에서 깎아낸 듯하다.
수성동은 겸재 작품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등 많은 문헌에 명승지로 소개돼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名勝) 수성동(水聲洞) 편에는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어 개울과 암석의 빼어나 여름에 찾아가 감상하기에 좋다. 혹은 이르기를 이곳이 비해당 터(안평대군 이용의 집터)라 한다. 옛 돌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水聲洞 在人王山麓 洞壑 幽邃 有泉石之勝 最好 暑月 遊賞 惑云此洞 匪懈堂(安平大君 瑢蹟也) 舊基也有橋名麒麟橋
수성동 계곡에는 조선시대 저명한 인물들과 관련 있는 유적들이 널려 있다. 거대한 바위 계곡 사이로 급한 개울이 흐르고 주변에는 암석이 수려하며, 계곡에는 장대석을 두 개 맞댄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있는데, 선비들은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고 있다. 오늘날 인왕산 수성동 풍경의 원형이 18세기 겸재 정선의 회화 속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윤묵(朴允默)은 《존재집(存齋集)》에서 수성동의 풍경을 ‘조물주와 같이 세상 바깥에서 노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산문이다.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水聲)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 동안 내려 개울물이 불었고 평지에도 석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에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걸쳤다.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러 아래 위쪽의 풍경을 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른다. 벼랑에 비단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폭포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물은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른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른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의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하고, 자욱하게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하다. 마음이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이르러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
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
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
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
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西山之上雨床床兮
西山之下水 湯湯兮
惟此水是吾鄕兮
徜徉不忍去
物與我而俱相忘兮
歌闋相顧而起
天忽開霽
西日已在山
위항문학(委巷文學)의 개념
주로 한시를 가리키는 개념이지만 넓게는 시조·가사와 전(傳)을 포함한 산문에 이르기까지 중인계층에 의해 창작된 모든 문학작품을 말한다. 양반문학과 서민문학에 사이의 대응되는 개념으로 중인문학(中人文學)이라고도 부른다. 역관(譯官)이나 아전(衙前) 등의 전문지식인과 기술직 중인이 주도한 문학이지만 서얼과 승려, 하층민까지 참여했다. 따라서 중인 이하 하층민을 위항인(委巷人) 또는 여항인(閭巷人)이라 했으므로 위항문학 또는 여항문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위항문학은 17세기말에 성립되어 18, 19세기에 크게 융성했다. 당시 사회적·경제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중인층은 학식이 있어도 신분의 제약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학식과 재능을 문학에 쏟았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시회(詩會)를 열고 시사(詩社)를 결성하는 등 위항문학운동을 펼쳤다.
1668년에 간행된 최기남(崔奇男)·남응침(南應琛)·정예남(鄭禮男)·김효일(金孝一)·최대립(崔大立)·정남수(鄭柟壽) 등 6명의 위항시인이 쓴 《육가잡영(六家雜詠)》은 공동시집 간행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1712년에 홍세태(洪世泰)가 편찬한 《해동유주(海東遺珠)》에는 48명의 시 230여 수가 실렸다. 1737년에는 고시언이 중심이 되어 162명의 시 660편을 모아 9권 2책의 《소대풍요(昭代風謠)》를 냈고, 그 후로 60년마다 위항인들의 시를 간행하는 전통이 세워져 1797년 《풍요속선(風謠續選)》, 1857년 《풍요삼선(風謠三選)》을 차례로 간행했다.
17세기말 임준원(林俊元)을 중심으로 한 낙사시사(洛社詩社)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홍세태(洪世泰)·최승태(崔承太)·최대립(崔大立)·김충렬(金忠烈)·김만최(金萬最)·이득원(李得元)·고시언(高時彦) 등의 동인들은 서울 북부 삼청동에서부터 사직동 사이에 모여 살면서 인왕산 수성동 등지에서 시회를 여는 등 동인활동을 펼쳤다. 홍세태의 경우 당시 사대부들까지 그의 시를 칭송했으나 신분이 낮아 큰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신분문제로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내용의 시가 많다.
18세기말 옥계시사(玉溪詩社)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라고도 하는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모임이었다. 송석원의 주인인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장혼(張混)·김낙서(金洛瑞)·왕태(王太)·차좌일(車佐一) 등 동인들의 시회활동의 중심지였는데 한번 시회를 열면 수백 명씩 모여 시를 짓고 사대부들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한 시선집이 《풍요속선(風謠續選)》이었다. 333명의 시 723수를 인물별로 편집했는데 승려와 여자의 시도 포함시켜 위항문학의 폭을 넓혔다. 송석원시사의 뒤를 이어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서원시사(西園詩社)·직하시사(稷下詩社) 등으로 이어졌다.
백호정(白虎亭) 터와 바위 글씨
인왕산 남동쪽 기슭 누상동 백호정(白虎亭)터에 있는 바위글씨이다. 백호정이란 조선시대 활쏘기 연습을 위한 다섯 곳의 민간 사정 중 하나였다. 다섯 민간사정은 등과정(登科亭), 등룡정(登龍亭), 운룡정(雲龍亭), 대송정(大松亭), 백호정(白虎亭)을 말한다. 이러한 민간 사정들은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의 상무정신을 키우기 위해 세워졌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 되었다.
‘백호정(白虎亭)’이라는 바위글씨는 숙종 때의 명필 엄한붕(嚴漢朋)의 글씨로 전한다. 그는 한석봉 이후 최고의 명필가로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바위글씨는 가로 세로 30 × 130㎝로 예서체를 띤 해서체이다.
백호는 청룡, 주작, 현무와 함께 사신도 중에서 서쪽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호랑이로 상징되는 인왕산은 한양의 도성에서 매우 중요한 산이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이곳에 황학정과 백호정을 세워 상무정신을 키우려고 했는지 모른다.
각자석 아래 백호정(白虎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나 현재는 이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상범(李象範) 가옥과 화실
이상범(李象範) 가옥과 화실은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이며 종로구 옥인 1길 22에 있다. 청전(靑田) 이상범은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과 함께 현대 실경산수의 양대 산맥을 이룬 분이다. 수많은 역작을 그려냈고 신문 삽화를 그렸으며 한국 화단을 이끌어 갈 제자들을 길러냈다. 1933년 청전화숙(靑田畵塾)을 꾸미고 문하생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은 누하동의 사랑채였다. 제당(霽堂) 배렴(裵濂)을 비롯하여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동초(東初) 이현옥(李賢玉) 등 많은 제자들이 이곳에서 창작의 꿈을 키웠다.
청전은 1929년부터 1972년 작고할 때까지 43년을 줄곧 이집에서만 지냈다. 1938년에 바로 옆에 청전화숙(靑田畵塾)을 신축하여 작업실로 쓰면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청전은 조선조 궁중화가 출신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선생으로부터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와 함께 그림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스승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청전도 자상한 스승의 인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안중식 선생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호를 지어 주었는데 노수현에게는 자신의 호에서 심자를 따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이상범에게는 뒤의 전을 따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 집이 등록문화재가 된 것은 전통 한국화의 맥을 이은 명작의 산실이며 이상범이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혼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0년대 문화예술인의 가옥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오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