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노래의 작사가 정인보 선생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에! -
(1절)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면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킨 자취니
길이 길이 지키세 길이 길이 지키세
(2절)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에서 나리니
이 노래를 아시나요?
바로 광복절 노래입니다.
얼마나 광복이 기뻤으면 우리 흙도 다시 만져보고 감격을 하고, 바닷물도 춤을 출까요?
그만큼 일제강점기 속에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회한과 고통, 그리고 독립을 위한 염원과 노력이 느껴집니다.
“기미년 삼월일일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로 시작하는 <삼일절노래>,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라는 우리의 헌법이 탄생한 날을 기뻐하는 <제헌절노래>등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구구절절한 노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이러한 나라사랑의 의지가 담긴 노래의 가사는 같은 작사가에 의해 탄생된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정인보선생님.
<정인보 선생님 사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1893년에 태어난 정인보 선생님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운 한학자 집안의 아들입니다.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의 후손, 철종대의 영의정 정원용의 증손자로 장례원부경·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의 아들입니다.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할 정도로 뛰어나 이미 10대 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그. 그의 주옥같은 글귀들은 어릴 때부터 보인 재주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재주를 안타깝게도 은둔하면서 펼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 이유는 일제의 한반도 무단 강점.
그는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안타까움에 일제하에 머물지 않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칩거하시지 아니하고, 1912년 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습니다.
그 후 아내의 죽음 때문에 귀국하여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님의 가장 중심 분야는 후학 양성.
불교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나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습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을 담당했습니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 역사와 깨달음을 주고자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정기를 진작하는 논설을 썼습니다.
그가 글을 쓴 이유. 바로 일본이 날조한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를 깡그리 없애고 제대로 된 역사를 쓰겠다는 의지.
그 결과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의 연재물입니다. 이것이 해방 후에 ≪조선사연구≫상·하로 간행되었습니다. ≪조선사연구≫·≪양명학연론≫·≪담원시조집≫·≪담원문록≫·≪담원국학산고≫ 등 저서를 간행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흔히 부르는 “실학”이란 학문도 정인보선생님이 붙인 이름입니다. 그는 정약용 선생님 사망 100주년을 맞아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며 조선후기 개혁적 학문 실학을 이름 짓고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인 실학사상처럼 자주독립정신 갖도록 권장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한 상황. 그 상황에서 제대로 된 우리 역사를 쓰는 것의 위험성을 짐작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글을 쓰고, 역사를 바로 잡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얼빠진 조선의 혼”이라고 통탄하며 일제강점기의 일본에 의한 왜곡된 우리 역사를 그대로 믿고 있는 우리 국민들을 위해 글을 쓴 선생님.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것 같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사임할 정도로 곧은 의지를 가지신 분입니다.
대통령이 청할 정도로 중책을 맡았지만 평생 비단옷을 한번 입어보지 않으신 분이 바로 정인보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대대로 관직을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어도 은수저 한 벌 없이 살았다는 선생님.
그 선생님의 나라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나요?
제자들에게 나라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따지지 말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인보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중 북한군에 끌려가다가 그해 말 사망한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살아 계셨다면 더 아름답고 주옥같은 노래가사가 탄생했을 것이고 더 많은 우리 역사와 언어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왔을 것 같아 우리의분단과 전쟁이 더 가슴아프게 느껴집니다.
정인보 선생은 북한에서 사망하셔서 시신을 찾지는 못했지만 현재 국립 현충원에 봉안되어 계십니다. |
첫댓글 광복절 노래를 부르면 피가 솟구치고 머리에 쥐가 납니다.
뜨거운 피 엉킨 자취니...와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민족이라는 감정에 지금도 힘이 불끈 솟습니다
지난 금요일 2월14일 저녁 신사동에서 경기고등56회 운영위 모임에 초대되어 갔었지요.. 마침 자연인이란 필명을 갖인 분의
작은 할아버지 뻘 되는 분이 정인보 선생님이랍니다..그래서 그분의 발자취를 한번 살펴 보았더니 대단한 민족의 선구자
였던 분이 시었지요.. 아깝게도 6.25때 행방 불명으로 처리 되신 분이란 걸 알았습니다..이제 보니 그분과도 많이 닮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