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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小白山1439.5m)
<주목 감시 초소에서 바라본 소백산 정상 비로봉 전경>
국립공원 소백산은 태백산의 하위 개념으로서 작은 백산으로 해석하여 불려지는 명칭으로만 대개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산 동남쪽 정면 30km이상 떨어진 곳에서 보면 도솔봉(兜率峰;소 머리), 죽령(竹嶺;목덜미), 연화봉(蓮花峰;어깨), 비로봉(毘盧峰; 엉덩이 뼈) 국망봉(國望峰; 꼬리)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봉들이 이어진 소백산의 모습이 소(牛)의 모습을 빼어 닮아 그 뜻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소백산이다. 태백산만큼은 높지 않으나 경북과 충북의 경계가 되는 백두대간 상에 장장 30km 이상의 능선으로 이어져있다. 지형적으로 겨울철 서북풍이 집결하는 장소로 남한강 충주호의 물안개가 소백산을 스치면 상고대 등 최고의 설경을 연출한다. 때문에 소백산은 태백산 한라산 덕유산 무등산과 더불어 겨울철 눈 산행지로 인기가 있고, 6월1일 전후하여 만개하는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등 주능선에 피는 철쭉은 철쭉명산의 반열에 올라있다. 산록에는 신라고찰 부석사와 천태종의 본산으로 구인사가 있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곧 후에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이 있다. 정상에서면 태백산, 청량산, 학가산, 월악산, 치악산, 문수산 등이 보인다. 이산 경북 쪽은 햇볕이 잘 들고 토질은 물 빠짐이 좋아 수해가 적고 산사태가 잘나지 않으며 질퍽거림이 없다. 인삼과 사과 등의 특산물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정상 비로봉 일대의 주목 군락지와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와 이름난 산나물은 이산의 또 다른 자랑이다.
小白山 主稜線 縱走, 竹嶺에서 上月峰까지
<죽령 표석>
죽령(竹嶺696m)이다. 죽령은 대나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죽죽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소백산을 알고 나면 또 다른 답이 나온다. 소의 모습을 닮은 소백산은 도솔봉(兜率峰1314,2m)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죽령이 소의 목덜미에 해당되고 비로봉이 어깨, 국망봉이 엉덩이뼈에 해당된다. 죽계계곡은 소의 생식기에 해당된다. 요즘 사람들은 소 먹이를 소 사료라고 부르지만 이 지방 옛 사람들은 소먹이를 소죽이라 불렀다. 대나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소죽이 넘어가는 고개 그런 의미에서 죽령이다. 연화봉(蓮花峰1383m)과 도솔봉(兜率峰1314,2m) 사이에 있는 죽령(竹嶺)은 옛적 조령(鳥嶺), 추풍령(秋風嶺) 육십령(六十嶺)과 더불어 영남의 4대 고갯길의 하나이다. 지금은 중앙선철도, 중앙고속국도, 5번국도가 죽령터널을 통과하지만 굽이굽이 아흔 아홉 구비 죽령 옛길은 선비의 고장 경북과 청풍명월의 고장 충북을 왕래하던 고갯길로 숱한 애환이 서린 고개이다. 때문에 죽령주막과 산신당이 있다. 현재 죽령 고갯마루에서 이정표는 소백산정상 비로봉 11,6km, 도솔봉 6km이고 죽령옛길은 소백산 역 2,8km, 죽령터널 3,9km로 죽령옛길과 용부원길 을 연결하면 전장6,7km에 3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소백산의 겨울철 바람은 바람 많은 제주의 한라산과 경쟁관계에 있다. 서북풍이 불어대면 엄청난 바람의 세기는 등산객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서북풍이 월악산에서 진로방해를 받아 방향을 틀고 나서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바람은 소백산을 강타한다. 때문에 남한강의 물안개를 몰고 와서 상고대등 명품 설경을 연출한다. 그 바람은 죽령을 넘어 풍기를 덮친다. 풍기는 풍기(豊基)가 아니고 풍기(風氣)라는 농담도 있다. 죽령으로 일거에 몰린 바람은 감당할 수 없는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그 일부가 영월~춘양간 88번 도로가 지나는 태백산 주실령을 넘어 춘양면 일대를 덮쳐 이로써 태백산 남쪽에서 가장 낮은 기온으로 끌어 내린다.
<자연산 약초 판매상>
오늘 산행을 위해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는 죽령에 어제 오후 늦게 도착하여 3시간 가까이 죽령일대를 산책했다. 옛 선비들이 남긴 시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눈썹이 길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나도 남달리 눈썹이 길어 아내는 나 더러 이러다가 산신령이 될 것 같다고 이발을 할 때마다 눈썹을 다듬어오라고 주문했다. 이발사도 머리털과 수염 외에는 관할지역이 아니라고 특별한 요청이 없으면 눈썹 털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번에는 깜박 이야기를 안했더니 다듬지를 못했다. 기우는 해가 눈높이만큼 내려왔을 적에 나도 햇빛이 눈썹 털 사이로 비추이는 것 같았다. 운곡 원천석 (耘谷 元天錫1330~?)선생이 원주에서 안동으로 지인을 찾아가던 길에 죽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
竹嶺(죽령)
策馬行穿竹嶺雲 (책마행천죽령운) 말을 채찍해 죽령구름을 뚫고 달리니
行裝彷彿接天門 (행장방불접천문) 헤메 온 행장이 마치 하늘 문에 닿은듯하네
高低遠近山無盡 (고저원근산무진) 높고 낮게 멀고 가깝게 산은 끝이 없건만
南北東西路自分 (남북동서노자분) 그러나 동서남북 길은 절로 분명도하네
處處封疆平布列 (처처봉강평포열) 곳곳에 구역경계는 평평하고 넓게 이어졌고
重重洞壑互馳奔 (중중동학호치분) 겹겹이 골짝 골짜기로 서로 이어졌네
停鞭四顧乾坤豁 (정편사고건곤활) 채찍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니 땅에서 하늘로 열였고
眼界微芒入暮痕 (안개미망입모흔) 눈앞에 가느다란 저녁 빛이 눈 섶 털 사이로 들어오네!
<죽령 옛길의 쉼터 죽령주막>
눈썹이 길어 미수(眉叟)라는 호(號)을 갖게 된 눈썹이 긴 어른 미수 허목선생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여든 여섯까지 장수했다. 여든이 넘도록 산행을 해왔던 미수 허목 (眉叟 許穆 1595~1682)선생은 죽령을 넘던 소감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竹嶺(죽령)
人喧小白太白高 (인훤소백태백고) 소백 태백 높다고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複嶺重關天下壯 (복령중관천하장) 겹 고개 겹 관문이 천하에 웅장도하여라
積翠嶺嵷六百里 (적취영종육백리) 첩첩이 가파른 산 육 백리나 뻗혀
煙霞縹渺連靑嶂 (연하표묘연청장) 안개 속 아스라이 푸른 산이 잇닿았도다
石棧盤回危且險 (석잔반회위차험) 사다리 돌길 꾸불꾸불 험하고도 험하다
行行脅息煩側望 (행행협식번측망) 걸음마다 숨죽이고 곁눈질 자주한다
三月嶺上見積雪 (삼월영상견적설) 삼월에도 고개위에 쌓인 눈은 보이고
高處寒凝未暄暢 (고처한응미훤창) 높은 곳 한기서려 따뜻하지 않구나
蜀道不得難於此 (촉도부득난어차) 촉나라 험한 길도 이보다 더 어려울까
使我羈旅久惆悵 (사아기려구추창) 나그네 길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누나!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연화봉 오름길>
죽령휴게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07시 정각에 죽령을 뒤로하고 산행 길에 올랐다. 이곳 이정표에 비로봉 11,3km, 연화봉 7km이다. 제2 연화봉 천문대까지 나있는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야한다. 진입도로 입구 탐방안내소를 지나 굽이굽이 시멘트 포장도로다. 딱딱한 바닥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나더러 혼자 산행을 하면 심심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길가에는 아카시아, 함박꽃, 병 꽃과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김춘수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고, 풀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새로운 의미가 되고 있음은 무었인가? 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나의 형제요 이웃사촌이다. 그뿐인가? 창조주로부터 지음 받은 유 무형의 모든 피조물은 형제라는 인식하에 이슬 방울하나 이름 모를 풀꽃하나까지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내게 주어지는 지으신 이의 은혜가 한량없이 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통신 중계소(KT)>
제2 연화봉(弟二蓮花峰1357,4m)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KT;한국통신중계소)를 돌아올라 도로가 끝나는 연화봉 중턱 소백산 천문대이다. 천문대는 건물하나가 경주 첨성대모형으로 지어져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도로는 입구 탐방안내소에서 일반차량은 통제를 받는다. 출입이 가능한 차량은 공원 업무용차량, 공원 내 시설물 근무자의 출 퇴근차량 및 허가받은 학술조사 및 언론사 취재용 차량이다. 여기까지 오르면서보니 출근차량 모두가 하나같이 눈길에 대비해서인지 사륜구동 차량이었다. 천문대에서 연화봉까지는 걸어서 5분정도의 거리다.
<별 동산에서 바라본 연화봉 중턱 소백산천문대>
연화봉(蓮花峰1383m)이다. 3개의 연화봉 중에 두 번째로 높지만 가운데에 위치하여 연화봉을 대표한다. 산 아래 풍기 쪽에서 올려다보면 더 높은 제1연화봉(第一蓮花峰1394,4m)은 뒤쪽에 있어 보이질 않고 이곳 연화봉이 단연 우뚝하다. 연화봉에 눈꽃이 내려앉으면 백련이 된다. 소백산 주능선이 철쭉이지마는 국망봉일대가 단연 최대의 철죽 군락지다. 그러나 여기서 해마다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이 윤번제로 철쭉축제를 공동개최하는데 그 이유는 행사시 유관기관이 출동하기에 접근성이 좋은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희방폭포를 거처 소백산역까지 5,9km, 죽령 7km, 소백산정상 비로봉4,3km이다.
<연화봉 정상에서 바라본 소백산 천문대와 한국통신중계소(KT)>
연화봉에서 내려섰다가 등산객이 지치기 쉽다는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서면 제1연화봉(第一 蓮花峰(1394,4m)이다. 웬만한 사람은 여기서 쉬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도 오늘 처음으로 여기서 잠시 휴식을 했다. 계단아래서 80대 노인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 중년부인이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하고 물으니 그 노인은 “여든넷이요.”했다. 그 부인은 “어르신 참 건강하시네요. 얼굴에 주름살도 하나 보이질 않고...” 그러자 노인은 “감사합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마음을 잘 먹어서인 것 같습니다.”했다. 그 노인은 어디에서 올랐든 여든이 넘어 젊은 사람도 힘들어 하는 소백산에 오르겠다는 용기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든까지만 했는데 말이다.
<소백산 주능선 길 연화봉~비로봉구간>
다시 계단 길로 내려서 철쭉군락지가 있는 능선을 타고 비로봉으로 향했다. 일기예보에 오늘은 날씨가 맑다고 했는데 비가 쏟아질 듯 시커먼 안개가 소백산마루를 덮치고 있다. 소백산 산행을 총 정리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는데 자칫 그르칠까 염려까지 했다. 비로봉아래 악천후 시 무인대피시설로 이용되는 주목감시막사다. 여기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며 안개가 타고 넘는 주목군락지 일대의 철쭉 군락지와 녹색 잔디를 깔아 놓은 듯 펼쳐지는 비로봉 일대를 감상했다. 비로봉은 바람이 심하여 키 큰 나무가 없다. 그래서 바람을 적게 타는 잎이 좁은 풀들만이 무성한 초원지대다. 철쭉제가 열렸던 지난 주말처럼 인산인해로 장사진을 이루었던 비로봉 계단 길 장면은 비로봉의 또 다른 볼거리다. 오늘은 비교적 한산하다.
<바람받이 소백산 비로봉의 초원지대>
소백산정상 비로봉(毘盧峰1439,5m)이다.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등 명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름이다. 비로(毘盧)는 불교용어로 어둠을 뜻하는 아수라(阿修羅)의 반대격인 비대칭 용어로, 최상의 빛, 최고의 생명, 변함없는 진리를 뜻하는 아름다운 빛 노사나(盧舍那) 곧 비로자나(毘盧遮那)에서 온 용어이다. 그러므로 비로봉은 소백산 여러 봉우리 중에서 최상의 가치를 지닌 봉우리다. 비로봉은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의 경계가 되므로 두 개의 정상 표지석이 있다. 11시20분 죽령에서 여기까지11,3km에 4시간 20분 걸렸다. 단체산행이 아닌 혼자산행이라 넉넉하게 사간을 배정하여 늦어도 12시까지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소백산은 겨울철 바람이 유별나다는 것은 이견이 없다. 그러나 조망이 좋아 맑은 날에는 치악산, 월악산, 금수산 청량산, 태백산 문수산 등이 잘 보인다. 오늘은 구름과 짙은 안개로 비로봉 하나도 겨우 보인다.
<죽령루에서 내려다 본 풍기읍>
비로봉과 연화봉의 계곡물을 받은 금계천 계곡이 십승지로 알려진 삼가리 소백산 금계동이다. 청화산인 청담 이중환(靑潭 李重煥1690~1752)선생은 택리지 복거총론(擇里志 卜居總論) 에 기록하기를 술사 격암 남사고(格菴 南師古1509~1571)선생은 소백산을 보고 넙죽 절하며 “소백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고 했다한다. 하긴 소백산은 산줄기가 서북풍을 막고 동남쪽은 낮게 내려앉아 토심이 깊고 물 빠짐이 좋으며 햇볕이 잘 들어 농사하기 좋아 지금도 전국에서 농가소득이 높은 고장이다. 풍기(豊基)는 옛 부터 괴산의 연풍(延豊) 무주의 무풍(茂豊)과 함께 삼재(三災;전쟁, 기근, 전염병)를 피해 숨어 살만한 삼풍(三豊)의 하나로써 소백산 삼가리 금계동은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알려져 왔다. 이로써 1890년대부터 수차례에 걸쳐 격암유록이나 정감록의 풍수도참설 (風水圖讖說)을 믿는 개성과 황해도와 평안도 비결 파 사람들이 이곳 소백산기슭 풍기로 찾아 들었고 그런 연고로 하여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해방 후 북한공산치하에서 벗어나려고 기독교인들까지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 풍기로 대거 이주해 왔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종교화합에 앞장섰던 인물로 강원용(姜元龍1917~2006)목사를 비롯하여 평양 대 부흥 운동을 경험한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몸만 빠져나온 이들은 인삼재배법과 인견직조 기술을 가져와 생업의 수단으로 삼았고, 사과는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전래되어 최초로 재배하기 시작한 대구에서 재배 기술을 배워온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풍기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으니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랜 사과 역사를 갖는다. 기온의 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으며 물 빠짐이 좋아 기후풍토에 적합해 풍기사과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오늘날 소백산 풍기의 인삼, 인견, 사과 등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명산물이 되고 있다. 일찍이 사거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1420~1488)은 소백산에 올라 한편의 시를 남겼다.
小白山(소백산)
小白山連太白山 (소백산연태백산) 태백산에서 이어진 소백산은
逶迆百里揷雲間 (위이백리삽운간)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鬼破慳 (지설천성귀파간)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가까이서 본 국망봉 정상부>
국망봉(國望峰1420,8m)이다. 소백산 철쭉군락지 중에서 국망봉 일대가 가장 좋다. 국망봉에서 상월봉까지 06km 구간은 능선 따라 철쭉터널을 이룬다. 6월1일 기준 만개시기를 넘겨 오늘은 꽃이 듬성듬성 보인다. 초가을 구절초 쑥부쟁이 등 흔히 말하는 들국화 등 야생화도 볼만하다. 국망봉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 빼앗기자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이태자가 국망봉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하고(단양읍지), 풍기 군수를 역임한 신제 주세붕, 퇴계 이황 선생이 서울을 바라보면서 임금을 생각했다한다. 또 풍기읍지에 선조대왕이 승하하자 명종1년 배순(裵純)이라는 사람이 제물을 차려 국망봉에 올라 3년 동안 궁성을 향해 곡 제사를 드렸다하여 국망봉 이라고도 한다. 국망봉 남쪽 초암사가 있는 죽계구곡 아래 배점리가 있다. 배순(裵純)은 대장간을 차려 소백산 화전민들을 상대로 농사용 낫, 도끼 호미등 철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여 이 마을을 배점(裵店)이라한다. 그는 퇴계선생의 제자이기도한데 선생이 별세하자 3년 상복을 입고 제자의 도를 다 하기도 했다. 배점리에 그의 충절과 효행을 기려 1649년 배순정려비(裵純旌閭碑;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9호)가 건립되었다. 순흥에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제55호)은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선생이 안향(安珦)을 배향하기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한 이후1543년 백운동서원을 설립, 1544년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 배향했다. 풍기군수 퇴계 이황선생의 노력으로 1550년 사액서원으로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고 주세붕도 배향되었다. 1886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되어 오늘에 이른다.
<상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국망봉>
이곳 국망봉에서 한양 궁성을 향해 바라보았던 풍기군수를 지낸 신재 주세붕선생은 장안은 보이지 않으나 용문은 보인다고 했고, 퇴계 이황선생은 연운이 깔려있으니 용문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적에 두 가지 방법이 있었겠다.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과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육로를 이용해도 여주쯤에 이르면 멀리 용문산이 보이고 수로를 이용하면 남한강 양평에서 가까이 쳐다보인다. 용문산이 보이면 한양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다. 용문산은 산세가 용의 모습을 닮아 정상은 용의 몸통이고 남한강 변에서 용솟음치듯 우뚝 솟아오른 백운봉은 용의 머리에 해당 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도 있는데 용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어 용문산 자락 두 물머리(兩水里)에서 남북 한강이 만나 한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나는 20년 넘게 매년 한 두 차례 소백산에 온다. 나는 금년에 소백산 산행이 두 번째이고 이해가 가기 전에 한두 차례 더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소백산에서 용문산을 본 적이 없다. 날씨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시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기실 용문을 보았다면 눈으로 본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았으리라. 전임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 (愼齋 周世鵬1495~1555)선생은 49세 되던 해 가을에 석륜암에 유숙하면서 소백산 국망봉에 올라보니 장안은 보이지 않으나 용문은 보인다고 했다.
國望峰(국망봉)에서
國望峰頭望京國 (국망봉두망경국) 국망봉 꼭대기에서 서울을 바라보니
長安不見見龍門 (장안불견견용문) 장안은 보이지 않으나 용문은 보이네
龍門西畔五雲起 (용문서반오운기) 용문 서쪽 기슭에 오운이 일어나니
白髮孤臣雙淚痕 (백발고신쌍루흔) 늙고 외로운 신하는 눈물을 흘리누나!
그 후에 후임 퇴계이황(退溪李滉1501~1570)선생도 49세 때인 1549년 4월에 소백산을 유람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말 쯤 해당된다. 그때 남긴 “유 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오늘처럼 흐리고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는 늦봄에 국망봉에 올라 쓴 시에는 용문은 보이지 않으나 저 멀리 한 가닥 흔적이 보인다고 했다.
國望峰(국망봉)에서
漠漠煙雲生晩日 (막막연운생만일) 연운이 널리 깔려있으니 해는 저물고
龍門不見況脩門 (용문불견황수문) 용문은 보이지 않으니 하물며 조문하랴
欲知紫極宸居處 (욕지자극신거처) 대궐의 임금님 거처를 알고자하니
天際遙膽一抹痕 (천제요담일말흔) 하늘 끝 저 멀리에 한 가닥 흔적보이누나!
<상월봉 풍경>
국망봉에서 상월봉으로 향한다. 상월봉 상월 불각자가 새겨진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유독 눈길을 끈다. 국망봉에서 상월봉에 이르는 국망봉 일대는 능선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철쭉터널을 이루는 소백산 최대의 철쭉군락지다. 6얼1일이 소백산 철쭉만개 기준일인데 비로봉 일대에 꽃이 조금 남아있을 뿐 만개직전에 연속2일간 비가 내려 낙화가 되고 말았다. 소백산 철쭉은 남도의 정열적인 진분홍 철쭉과는 색깔이 달라 연분홍의 은은하고 청순한 느낌을 받아 색다른 멋이 있다. 꽃이 좋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다. 꽃은 떨어졌지만 나무는 남아있어 그러기에 내년을 기약하는 또 다른 기대를 해본다. 이 지역은 구절초, 쑥부쟁이 등 흔히 말하는 들국화가 만발하는 초가을의 정취도 나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25년 전 처음으로 소백산을 등정할 때 배점리(裵店里) 구석진 마을 점마(店村)에서 상월봉에 오르고 국망봉을 거처 비로봉으로 산행을 한 개인적으로 뜻 깊은 지역이기도 하다.
<상월봉 전경>
상월봉(上月峰1394m)이다. 13시40분 죽령으로부터 15km거리 5시간40분 걸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23,4km의 대장정이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느긋하게 걸어 사간이 많이 걸렸다. 상월봉에는 정상표지석이 없다. 여기서 서쪽으로 약10km 거리에 3시간 남짓 걸어 내려가면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가 있다. 상월봉정상 동남쪽 사면에 얼핏 보면 송이버섯 같기도 하고 남성 상징물이 발기한 것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하나있다. 바위모양이 특이하게 생겨서 미륵신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바위에 빌면 무언가 곧장 이루어질 것 같은 미륵불이 될 수도 있었겠다. 이 바위에 새겨진 상월불 각자는 상월봉 정상 쪽 바위면 상단에 희미하게 새겨져있어 작심하고 유심히 찾지 않으면 굴참나무 숲에 가려져서 잘 보이질 않는다.
<상월봉과 상월불각자 바위>
이 바위에 1945년에 창건된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 창건주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가 소백산에서 입산수도할 적에 썼다고 전하는“上月佛”자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속칭 상월불각자(上月佛刻字)다. 하단 한쪽에 동일인의 글씨체로 보이는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있는데 새긴 시기도 같아 보인다. 불각자를 새길 때 작업을 함께한 사람의 명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이 토굴에서 수행한 소백산 구봉팔문 터에 구인사를 창건하고 천태종 초대 종정을 했다. 이곳 소백산 상월봉(1394m)에서 서쪽으로 신선봉(1376m), 민봉(1361,7m), 푯대봉(1313m)으로 뻗은 능선이 푯대봉에서 다시 아홉 개의 능선이 부채 살처럼 펼쳐진다. 지형적으로 아홉 개의 봉우리와 여덟 개의 골짜기를 이룬 구봉팔문(九峰八門)에 자리 잡은 불교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救仁寺)가 있는 것이다.
수미산(須彌山)은 구산(九山) 팔해(八海)의 중심에 높이 솟아 정상에 제석천(帝釋天)의 궁전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상상의 산이다. 바로 이런 곳에 구인사를 창건했다. 이를 기념하여 구인사 대조사전(救仁寺大祖師殿)세우고, 창건주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1911~1974)를 모신다. 구인사는 전국 30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리는 사찰답게 단일 사찰로는 전국최대 규모를 자랑하는데 역사가 짧고 한양절충식 건물들이라 고풍스런 멋은 없다.
<죽계계곡 풍경>
상월봉에서 내려와 걷기 좋은 철쭉능선 길을 따라 다시 국망봉이다. 여기서초암사입구 주차장까지 7,8km 거리다. 국망봉 삼거리 죽계계곡 초암사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가파른 길을 걸어 내려와 신재와 퇴계가 백운동에서 국망봉을 오를 때 유숙했던 봉황대라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 석륜암 터(石崙庵址)에서 물 한바가지 듬뻑 받아 마시고 나서 잠시휴식을 취했다. 봉황대 바위벽에는 불교식 기도문이 있고 가족의 명단이 새겨진 걸로 봐서 석륜암이 없어진 이후에도 치성을 드리던 장소였음을 짐작케 한다. 계곡을 따라 내려와 차도가 시작되는 초암사(草庵寺)를 지나고 사과 적과가 한창인 과수원 길을 지나 16시30분 배점리 초암사 입구 주차장이다.
<주차장 주변의 찔레꽃>
오늘은 비교적 장거리 산행인데도 지치지 않고 성공적인 산행을 했다. 연화봉과 비로봉을 지날 때 즈음 구름이 덮이고 안개까지 몰려와서 자칫 오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도 했고 시야가 흐려져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어 산행에 도움을 주었다. 세상일이란 늘 그런가 보다. 아름다운 철쭉꽃은 보지 못했어도 신록이 짙어가는 초여름의 소백산은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오늘 행로는 죽령~제2연화봉~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월봉~국망봉~초암사~초암사입구 주차장, 23,4km 9시간30분이다.
2013년 6월4일 화요일 흐림
첫댓글 대단하시네요~^^
가까이 살면서도 소백을 잘모르고 있었는데....
종주산행에 해박한 자료,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소백산 전구간 종주는 예천 용문사~비로봉~단양 구인사까지 50여 km 에 이릅니다.
저는 이번에 주능선 종주를 했지요. 저와 같이 주능선 종주를 하시더라도 일조량이 많은 봄이 좋습니다.
참고로 능선에는 식수를 구할수 없으므로 종주산행시 식수를 충분히 준비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도솔봉에서 국망봉까진 봉우리마다 한 두번 올랐고 구간 종주도
해봤습니다만 상월봉을 빼먹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자료로 활용해도 될까요?^^
遠雲님의 申告를 잘 받았습니다.
영리목적이 아닌, 등산정보나 학술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산행기는 만인이 고유함에 있습니다.
다만, 영리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으니 주의 하시면 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저의 산행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 주신 산행기 고맙게 읽었습니다.
즐거운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산행기에 공감을 하시는지요?
내용 중에 정답은 아닐지라도 저의 소신을 밝히는 부문이 있는데,
그래도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십시요.
오늘은 <산이좋아>님이 이 산행기에 올리신
한시들을 추려서 별도로 소개 해야겠습니다.
산이좋아님 감사합니다.
늘 수고많으십니다.
저는 이 카페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는데요.
<漢詩 속으로> 발전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巨村선생님!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들마다 萬事亨通 하시기를 祝願드립니다.
제가 親庭 곳에기도 하며 소백에 굳은 기상
국망봉 높히~~~젊음에 소망싣고 맑게 솟았다.교가도 생각나고
사진과 한시 글은 산행책으로 엮어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좋습니다.
산행도 대단하시지만 이렇게 회원님들을 위하여
산행정보와 한시 교육적으로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저는 연화봉을 가서 희방사 뒷골 철쭉이 하늘 만첩
키큰 골로 내려오는데 아주 혼났습니다.
예전엔 철쭉아가씨 선발대회도하고 그랬답니다.
죽령길 걷기도하고 행사가 많았지요.
저는 시설안한 옛흙길 그대로를 좋아하고
산도 들도 자연 그대로의 옛길을 즐겨합니다.
한시감상 소리내어 읽었습니다.감사 합니다.
아! 그랬었군요.
저도 어릴적 소풍을 희방사로 간적이 있어요.
그때 희방사역(지금은 소백산역으로 개칭 됨)에서 희방폭포까지만 갔다가 왔지요.
희방사 계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던 그때가 더 좋았던것 같습니다.
소백산을 한 눈에 보내요 감사합니다 지난 겨울 눈산행은 하였으나 이번 소백산 철쭉산행은 일정이 맞지 않아 안타깝게 가질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감사할 뿐 입니다
저도 이번 산행에서 철쭉산행으로 할 계획이 었으나,
주 능선 종주 산행이라 연일 비가 와서 날짜를 몇일 늦추었더니,
그만 철쭉이 지고 있었네요.
우리 내년 6월1일경 소백산 철쭉산행을 기약합시다.
다녀보신 길이라도 추억하시면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겨울 철 소백산의 엄청난 바랍은 다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겠지요.
사람이 날아 갈 정도니까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계단 손잡이를 틀어 잡아야 했지요.
살아 남기를 원한다면 높은 곳에 오를 수록 자신을 낮추는 법을 소백산 비로봉에서 실감나게 체득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