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주양 언니
광주지하철을 처음 타 봤다. 서울지하철보다 폭이 약간 좁았다. 쌍촌역을 지나 화정역 사이를 지나고 있으니 광주국군통합병원 생각이 났다.
40여 년 전 내가 근무했던 곳이다. 그때는 77육군병원이란 이름으로 1964년에 개원했었다. 다음 17육군병원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또 다시 국군통합병원이라 불렀다. 육군병원이기 때문에 소아과와 산부인과만 없었지 대형 종합병원이었다. 병실 안에 환자들은 온통 젊은 청춘 군인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간호해주는 우리들은 인기가 좋았다. 특히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주양언니는 자그마한 키에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 더욱 더 인기가 많았다.
나는 주양언니와 같은 방을 사용했기 때문에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냈다. 쉬는 날이면 영산포역장 사택에서 살던 언니 집으로 가서 1박2일을 하고 다시 극락강역 인근에 살았던 우리 집으로 와서 1박2일을 하는 등 우리는 서로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언니도 없고 동생도 없는 나는 주양언니가 참 좋았다. 늘 붙어 다니는 우리 사이를 동료들은 많이 부러워했다.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었다.
어느 날 언니가 나한테 김양아, 나 어쩜 그 남자와 결혼해야 될 것 같다, 한다. 언니가 말하는 그 남자라 함은 언니의 부모님이 추천한 신랑감인데 맞선을 보고 와서 언니 맘에 든 곳이 하나도 없다고 했던 상대였다. 단호하게 싫다고 하지 그랬어? 했는데 순하고 착한 언니성격으로 거절을 못하고 그냥 아버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언니의 결혼식장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아 신랑한테 넘겨주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의 의미를 나는 알 것 같았다. 1남 2녀를 낳고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전 처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 곁에 있는 계모 밑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자랐던 딸을 생각한 것이다.
누구나 기쁘고 즐거워야할 결혼식에 주양언니의 행복한 표정은 단 한차례도 보이지 않았다. 내심 걱정스러웠다.
주양언니가 떠나고 나도 한참 후에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연락이 끊긴 주양언니를 찾아보려고 언니 친정집을 찾아가 보았다. 역장관사의 주인이 바뀌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계모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단다. 주양언니는? 물었더니 결혼 후, 애도 없이 바로 이혼하고 지금 서울 S대병원에 근무한다고 했다.
내가 서울로 올라와 S대병원을 찾아갔다. 그런 사람 없다고 한다. 잘못 가르쳐주었던 정보였다. 허무하게 돌아섰다. 그 후로 지금까지 주양언니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세상은 급변하여 지금은 각자에게 휴대폰이 있으니 언제 어디서나 연락이 가능하고 얼마나 좋아졌는가. 지금 주양언니는 어디에 있을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지하라서 여기쯤었다고 짐작만 했고 다시 오는 길엔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그 길을 지났다. 돌고개에서 타고 농성동을 지나 화정동에 이르러 친구한테 내려서 천천히 걸으며 육군병원, 대건신학대학, 상무대까지 옛길을 걸어보고싶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는 지금 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며 국군통합병원은 진즉 함평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벌써 7,8년 됐고 지금은 텅 빈 3만3천여 평의 땅에 허물어져가는 건물과 무성한 잡초 속에 빈 땅으로 모기 벌레들만 들끓어 주민들의 원성만 자자하다고 한다.
건물 옥상에 간첩을 생포하여 헬리콥터가 내려앉았던 일, 환자 한명이 사망하여 영안실에 불이 켜지면 꼭 서너 명씩은 연달아 죽어나가던 징크스, 육영수여사가 위문 오셔 환자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던 일, 최희준 현미 한명숙 등 가수들이 위문공연 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는 유독 정이 많아서 기간병들이 제대해서 돌아가거나 퇴원해나가는 환자들이 인사할 때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어야할텐데 우선 그간 정들었던 이들과 헤어진다는 서운한 생각이 앞서 혼자 눈물 흘리곤 했다.
전국에 각기 다른 고향으로 아니면 부대로 떠났던 그 수많았던 인연들 지금은 어디에서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잘들 살아가고 있겠지.
약 력
한국문협 전통문학연구위원
강남문화원 운영위원
강남구 청소년지도위원
강남문화해설사
강남대모문학회장
첫댓글 나도 만나고싶은 주양 언니와 꼭 재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양언니도 좋은 새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참 좋겠네요.
주양 언니를 나도 아는 사람같은 친근감이 드는 이유는
김작가님이 찾고 싶어 하는 그리운 사람이고
그러한 작가님의 심성을 나는 잘 아는 관계인 고로...^^
1995년 어느 날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첫사랑? 남자의 전화를 받았어요. 2년인가 펜팔하다가 절교하쟀더니 쇼크 받아서 '월남에 간다'고 떠난 후 소식 없던 사람이었죠. 20년 넘는 세월동안 노마드처럼 이동하며 살아온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신기했어요. 경찰관 형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 있어 추측컨데!!! 선생님도 주양언니 찾을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아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죠?
펜팔 할 때 글은 얼마나 잘 쓰셨을까.
이루지도 않을 헛 정을 듬뿍 안겨주고 나비처럼 날라가 버린
그 무정은 당연히 심판대에 올려졌어야 할 것입니다.
낙심한 결과로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하게 된
그 순정남이 지금은 어디서 늙어가고 있을까.
지금은 그런식으로 사람찾다간 그 공무원 모가집니다. 본명은 두루주에 인숙(주인숙)이구요, 오빠는 당시 JAL회사근무 일본인처와 일본 거주, 여동생은 배구 아니면 농구 국가대표였는데... 누구아는 사람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