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된 연극 '폭풍'
막이 열리면 벽 위에 걸쳐놓은 긴 널빤지 9개가 보인다. 배우들은 그 위로 걸어 올라가 벽 뒤 강물로 풍덩 풍덩 몸을 던졌다. 그리고 흠뻑 젖은 몸으로 돌아왔다. 공중에 비스듬히 매달린 거울로 그들이 헤엄치는 모습도 보였다. 19세기 볼가강 옆의 한 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러시아 연극 '폭풍'은 널빤지들을 내리거나 올리는 방식으로 장면을 바꿨다. 소박하지만 창의적인 장치였다. 드라마는 흙과 물, 결혼과 불륜, 삶과 죽음 등의 대비로 출렁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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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개의 널빤지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러시아 연극 ‘폭풍’.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이야기는 단순하다. 여주인공 카체리나는 상인인 치혼과 결혼했지만 시어머니는 아들을 어린애 취급하고 며느리에겐 정숙을 강요한다. 치혼이 모스크바로 출장 간 사이 사건이 터진다. 카체리나가 마을 청년 보리스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된 러시아 푸슈킨드라마씨어터의 '폭풍'은 집중시키는 힘과 세부 묘사가 깊었다. 러시아 최고 권위의 황금마스크 페스티벌 작품상(2008년)을 차지한 연극다웠다. 왁자지껄한 식사 장면, 슬프기보다 우스꽝스러운 짝사랑, 눈먼 여인의 자연스러운 몸짓과 희극성, 중요한 순간마다 괴롭히는 모기, 단추와 옷이 엉키면서 휩쓸리는 사랑…. 관객은 소박하면서도 재미있고 연극성도 강한 이 드라마의 리듬에 금세 젖어들었다.
'죄의식'이 지배하는 이 연극에는 사랑·혐오·집착·분노 같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연출가 레프 에렌부르크는 물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들은 볼가강으로 뛰어들고, 젖은 옷을 꼬아 물을 짜다 남녀가 가까워지며, 치혼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왔을 때 카체리나는 빨랫줄에 걸린 천에 얼굴을 파묻는다. 시소나 저울처럼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찾는 널빤지 무대와도 호응했다.
'폭풍'은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것 역시 균형 감각일까. 마지막 장면은 볼가강에서 카체리나의 주검이 발견된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누군가 "불이야~" 외치고, 배우들은 또다시 모기를 잡기 시작한다. 죽은 카체리나까지 벌떡 일어나 양손바닥을 마주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수수하지만 올해 내한한 외국 연극 중 최고였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일정은 www.spaf.or.kr 참조. (02)3673-25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