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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원근법 | ||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의 평론가는 이것을 산수화와 비교해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원근법이 무시된 채 그려지는 산수화의 화가는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개념’, 즉 ‘형이상학적 모델’을 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말을 바꾸면, 선험적인 개념이나 형이상학적 모델에 근거하여 그림을 그리는 한 결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개는 이렇게 생겼다, 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 혹은 형이상학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몽실이’나 ‘똘똘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개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왜곡시키기도 한다. 개를 식용으로 내다 팔기 위해 기르는 사람과 집을 지키려고 기르는 사람과 외로움을 달래려고 기르는 사람 사이에는 개에 대한 인식이 너무 멀게 자리하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개는 한 마리도 없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디에 있는 무엇을 보느냐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원근법의 산물이라고 말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이 큰가?’ 하는 질문에 대한 원근법적 대답은 ‘가까이에 있는 것이 크다’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멀리 있으면 가까운 곳에 있는 낮은 언덕에 의해 가려진다.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을 작게 나오게 하려고 뒤에 서는 것은 우리가 그 이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은 신이 거하는 집이므로 언제나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크게, 중심에 그려져야 한다는 생각, 술탄은 위대하므로 이 세상 어떤 인간보다 돋보이게,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을 우대하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굽실거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한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들, 그렇다고 인정되어 온 것들로 인해 다른 것들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나아가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원근법적 사고가 활용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이나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인간을 위한 법과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보이는 대로 먼저 보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온다. 성전의 신성함, 술탄의 위대함, 이념의 가치 같은 것을 원근법적으로 읽을 때 어떤 뜻이 되는지를 환기시키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더 직접적으로 이 점을 가르쳐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곧 왕과 신에게 한 일이 된다. 반대로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왕과 신에게 하지 않은 일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 지극히 작은 자가 왕과 신보다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 지극히 작은 자가 곧 왕이고 신이기 때문이다. 소개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우화인데, 자기가 어려움을 처했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왕에게 억울해 하며 이렇게 항의하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왕의 대답은 이러했다. “여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현재가 중요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크고, 지금 하는 일이 가장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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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따미..나도 코기토에르고 좀 해보자믄..두개달린 눈만 눈이여? 마음의 눈도 있고 제3의 눈도 있고 요상하게 보이는 잠자리눈도 잇고 눈없는 눈도 있는디..우주선타고 올라가서 같은 눈으로 봐도 또 다른디..ㅋㅋ 잘나가다 하나님 말쌈에 이르니 글이 잼탱이가 없넹;;
뭐니뭐니해도 현재가 중요하다는 글쓴이의 말에는 동감이여.
ㅎㅎ.. 울 옆지기가 쓴 줄 알았네~~ ㅋ
동양화가 대체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리죠. 그렇다고 동양화가 형이상학적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동양화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각의 크기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습니다. 호수 한 가운데 정자가 크게 눈에 들어오면 원근법과 상관없이 크게 그리거든요. 그 안에서 노는 사람이 크게 다가오면 사람을 무지 크게 그리고 말이죠. 우리의 삶에서 원근법대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