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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알미니안주의 연구와 비판
작성자: 김도경 목사(Th.M 1학기, 실천신학)
1. 서론
2. 알미니우스의 생애
2.1. 출생
2.2. 교육
2.3. 목회
2.4. 교수생활과 죽음
3. 알미니안주의 5대교리
4. 도르트 회의를 통해 본 알미니안주의 비판
4.1. 도르트 회의
4.1.1. 개최 배경
4.1.2. 회의 정황
4.1.3. 회의후의 상황
4.1.4. 회의 이후의 알미니안주의
4.2. 도르트 신경을 통해 본 알미니우스 예정론의 비평적 이해
4.2.1. 칼빈주의 5대교리
4.2.2. 도르트 신경 해설
4.2.3. 알미니우스 예정론에 대한 비평적 이해 요약
5.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6. 결론
1. 서 론
현재 개신교 안에서도 보수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개혁교단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면, 진보적인 교단들과 로마 카톨릭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여 대사회 책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요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6세기 종교개혁이래 기독 교회와 지도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있어왔던 내용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후 칼빈으로 대표되는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로 대표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열띤 논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특별히, 알미니안주의는 예정론의 주제에 관해 개혁신학과 배타적 반립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 내에서 가장 심각한 논쟁을 초래했습니다. 치열했던 논쟁은 마침내 개혁교회 최초의 국제적 총회인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11.13-1619.5.9)를 개최하게 했고, 이 회의는 알미니안주의를 단호하게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정죄를 당한 후에도 항론파(Remonstrants)는 그들의 견해를 계속 고수했습니다. 이로써 1517년의 종교개혁 이후 약 100년동안 단일체로 유지되었던 개혁교회는 크게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알미니우스에 대한 평가는 이단이라는 견해로부터 칼빈의 오류를 극복한 위대한 신학자라는 견해까지 극단적으로 상반됩니다. 극단적 평가들의 공존은 그만큼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한국의 개혁교회 또한 이론적으로는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서 탈선한 중세교회를 성경적인 교회로 되돌리기 위해 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은혜로’(Sola Gratia)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함성이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강조하는 신․인 협력설에 기초한 책자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등 오히려 중세교회보다도 더 세속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 알미니안 연구 비판을 통해서 우선 알미니안주의를 낳았던 알미니우스의 생애와 5대 교리를 살펴보고, 왜 그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도르트 회의를 통해서 알미니안주의가 정죄되었는데 그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연구 비판을 통해 아직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적인 가르침 보다는 알미니안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면 이제는 더이상 이런 잘못을 행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2. 알미니우스의 생애
2.1. 출생
알미니우스는 1559년 지금의 네덜란드 남부지역에 속한 우트레흐트 지경의 작은 도시인 아우더바터(Oudewater)에서 헤르만 야콥슨(Hermann Jacobson)과 엘보쉬 야콥스도흐터(Elborch Jacobsdochter)의 2남 1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출생직후 혹은 유아기 때 부친과 사별했지만 그는 모친을 비롯하여 여러 가족들의 도움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을 받았습니다.
2.2. 교육
여러 곳에서 교육을 받았던 알미니우스는 1582년에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칼빈의 계승자인 베자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62세의 노인이었던 베자는 레이든 대학의 신학 학과장으로 있었으며, 칼빈의 예정론 교리의 비중을 훨씬 더 강화시켜 놓았던 상태였습니다. 즉, 그는 비로소 본격적인 칼빈주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지만, 알미니우스는 베자의 충실한 제자로서 그의 예정론을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2.3. 목회
알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 노회에서 교회와 정부의 지도자들의 검정을 받았고 만장일치로 암스테르담 교회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5년동안 그곳에서 일했으며 그 사이에 그는 곧 대중적으로 영향력있는 설교자요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2.4. 교수 생활과 죽음
1602년에 레이든 대학 신학부 교수 3명중 2명이 역병으로 죽었을 때, 새로운 교수 선발은 나라 전역에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칼빈의 제자였으며 벨직 신앙 고백서 개정에 관여했었던 유니우스 박사의 공석이 생기자마자 대학의 책임자들은 곧바로 알미니우스를 최상의 책임자로 지목했습니다. 알미니우스는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사회적 신분 상승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와 정부와 대학이 몇 차례 협상을 거쳐 알미니우스를 정식 교수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학 교수로 청빙을 받으면 취임 강연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제출된 알미니우스의 논문에서는 이미 개혁신학과는 다른 입장의 변증신학이 드러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는 본래 엄격한 칼반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디릭볼캘트스 준 코른헤르트(Dirik Volckaerts Zoon Koornheert)의 저작에 맞서 칼빈주의 교리를 옹호하고 그를 반박하여 달라는 암스텔담시장의 요청을 받고 그의 글을 읽다가, 자신의 생각보다 코른헤르트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보편적인 은혜와 의지의 자유 교리를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각성한 자의 합법적인 갈등 기록을 비중생인에 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중생인에 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수정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동료 교수 프란시스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5)와 공개적으로 대립했습니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와 최대의 적수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은 “고마루스파”(Gomarists)라고 불리웠습니다. 이 논쟁은 곧 화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알미니우스는 정부에다 회의를 소집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의가 소집되기 전 극심한 무질서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때 죽고 말았습니다.
3.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
알미니안주의의 5대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항〉인간의 자유 의지, 또는 인간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연적 무능력
인간은 타락을 말미암아 영향을 받아 본성으로 부패되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믿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나타났는데, 이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것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제2항>예지에 기초한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복음에 대해 반응을 보이리라고 예지하신 대로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속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정하셨고, 또한 끝까지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에게 영원한 형벌을 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여기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① 죄인은 하나님의 성령과 협동하여 중생이 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하든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② 인간의 의지는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회개케 하시는 역사도 인간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는 범위에서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연적인 타락 상태에서 그들의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싶어 한다고 여기시는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③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며, 중생에 선행한다. ④ 로마서 8장을 근거로 하여 예지에 근거를 둔 예정을 말한다.
즉,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셔서 십자가 위의 자기의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과 죄의 용서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에 따르면 믿는 사람 이외에는 죄의 이 용서를 실제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 그리고 요한의 첫째 편지 2장 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이다.”
<제3항>인간의 개인적 믿음에 의해 제한되는 보편적 구속, 또는 일반적 속죄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이 되셨으나, 다만 그들이 믿는다는 조건부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므로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이 예비된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 믿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으며, 누가 구원을 위하여 선택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인간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제약되는 것이다.
<제4항>중생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역사, 선행적 은혜는 인간의 의지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는다.
인간 속에 선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나 은혜는 인간 자신의 성향에 상반되게 행동하도록 그를 강요하지 않으며, 저항을 받고 끝내 거절될 수 있다. 성령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려고 할 때에, 죄인이 이 생명을 자진해서 나누어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생명을 나누어 주실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그가 저항을 받으실 수 있고 그의 목적이 좌절당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제5항>조건적 견인(Conditional Perseverance)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마침내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들이 직면하게 될 모든 시험을 견디어 내도록 풍성한 은총과 능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참으로 중생한자도 그들의 믿음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정하여 가르친 이 신조들을 레몬스트라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널리 가르치고자 하며, 이 이론을 구원의 이론으로서 충분하다고 보고서 그 이상으로 높이거나 그 이하로 낮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4. 도르트 회의를 통해 본 알미니안주의 비판
4.1. 도르트 회의
4.1.1. 개최 배경
네덜란드의 신학자 알미니우스가 죽은 지 일 년 후인 1610년, 그의 추종자들은 신앙 5개조를 항론서(Remonstrance) 형식으로 작성하여 당시 네덜란드 교회의 교리적 입장이었던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자기네 교리적 견해와 일치하도록 변경 수정해 줄 것을 네덜란드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즉, 앞에서 설명한 5대교리를 제시한 것입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항론서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고 교회에 적합하며 구원을 위해 충분하기 때문에 국가가 그것을 바른 교리로 결정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마루스는 나중에 도르트 신경 작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다음과 같은 반항론서(Contra-Remonstrance)를 1611년에 발표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 가운데서 그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결정에 의해, 부분적으로 선택하셔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과하고, 죄 가운데 놔두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인들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것을 대적하지 않는 한 언약의 자손들 역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백성들로서 간주한다.
②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선택함을 받는 사람들의 신앙이나 회개함을 주목치 아니하셨다. 곧, 온전한 경건 가운데서 참 신앙과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갈망하며 살 수 있도록 하셨고, 그리하여 구원에로 인도하시기로 하셨다.
③ 선택된 백성들을 구원에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의 속죄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을 죄로부터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단지 선택함을 받은 자들 그리고 참된 신앙인들에게만 능력이 되게 하셨다.
④ 성령은 외적으로는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내적으로는 특별한 은혜로,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하게 역사한다. 그 결과 그들 스스로, 의도적으로 회개코자 하며, 신앙에로 오게끔 한다.
⑤ 성령의 그러한 동일한 능력에 감사하여 선택함을 받은 자들은 참된 신앙에서 결코 어느 때고 완전히 떠날 수 없다.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마음 가운데 심겨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마땅히 맺을 수밖에 없다. 그 반대는 결코 있을 수 없다.
1611년 5월 20일에 헤이그에서 열린 회의에서 두 진영은 논쟁에서 주요한 관점들을 충분히 논의했음데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올덴바르네펠트의 관용파뿐만 아니라 마우리츠의 원칙파도 항론파를 옹호함으로써 의회는 항론파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우세했습니다. 원칙파는 국가회의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알미니안은 시민 권위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쳐서 이를 수년 동안 저지했습니다. 국가의회가 자치주들의 종교적인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1615년경에 스페인과의 국교재개의 문제를 두고 관용파와 원칙파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생겼습니다. 귀족계급과 중산계급 상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관용파는 강대국과의 국교재개가 경제적 이득을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경제적 이득과는 별 상관이 없는 중류 이하의 시민층의 지지를 받는 원칙파는 과거 자신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했고, 여전히 네덜란드의 남부지역을 강점하고 있는 스페인과 다시 손잡고 싶지 않았습니다. 관용파는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항론파와 사상적으로 가까웠던 반면에, 원칙파는 카톨릭 국가 스페인과의 우호관계로 인해 네덜란드 내에 카톨릭 세력의 성장과 교리적 오염을 우려하는 정통 칼빈주의와 가까웠습니다. 1615년에는 일부 목사들이 비밀교회회의를 조직할 것과 국가 주도의 교회에서 탈퇴하는 문제를 두고 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1617년에 마우리츠가 위텐보하르트가 설교자로 있는 헤이그 궁정교회에서 예배하기를 공개적으로 거절하면서 관용파와 원칙파는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 차이는 논쟁 해결 방안에 있어서도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관용파는 네덜란드 전통을 따라 지방 자치적으로 지방 노회와 지방 의회에 의해 해결하자고 주장했고, 원칙파는 국가교회회의를 소집해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관용파는 당시 네덜란드의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인 북부 홀란드 지방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지방 자치로 논쟁을 처리하면 홀란드 지방에 속한 레이든 대학 내에 알미니우스주의 교수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것은 원칙파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일이 되었습니다. 두 진영의 의견충돌이 심화되면서 올덴바르네펠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방 민병대를 소집했습니다. 그러자 총독 마우리츠는 1618년 7월에 친위군을 이끌고 연방의회 내에 관용파들을 숙청했습니다. 관용파의 대표자들인 올덴바르네벨트와 국제법 아버지로 유명한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체포 구금되었고, 그 해 11월에 알미니안 논쟁의 해결을 위해 도르트에서 국가교회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4.1.2. 회의 정황
도르트 회의는 개신교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개혁파 총회로서, 네덜란드 전국 총회일뿐만 아니라 개혁파 교회의 국제 회의적 성격을 가졌습니다. 루터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개신교 교회의 사절단이 초청되었습니다. 1618년 11월 13일 화요일에 리디우스와 더 뿌르스의 설교로 개회하여 요한네스 보겔만(1576-1637)이 의장이 되어 진행된 회의는 1619년 5월 9일까지 약 6개월 동안 154회의 공식 모임을 가졌으며, 네덜란드 대표들은 별도로 22번의 모임을 더 가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65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팔라틴경(라인강 서부의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령), 헤센, 브레멘, 동 프리슬란드, 엠덴, 제네바, 독일어 사용지역의 스위스등지에서 마우리츠의 초청을 받은 대표자들 28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사실은 알미니우스가 제기한 신학적 문제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나라에 속한 개혁교회 교인들 역시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유럽전역에서 개혁교회 대표들이 초청된 것은 재판의 공정성을 보증하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13명의 항론파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마치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인 채 참석하여 자신의 입장을 진술해야 했습니다. 회의는 항론서의 의미를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해서 항론서에 대한 보충 설명을 요청했으며, 1618년 12월에 31차와 34차 회기에서 ‘항론파의 견해들’이라는 해명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들은 에피스코피우스와 12명의 신학자들을 변호인단으로 내세워 5개 항목을 설명했으나, 57번째로 열린 속회(1619년 1월 14일)에서 사기꾼과 거짓말쟁이로 정죄를 당하고 추방되었습니다. 회의는 136회 회기에서 “충분하고도 신중하게 조사한 후, 만장일치”로 알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혁신적 사상들을 거부했습니다. 알미니안들은 이단자들로 공표되었습니다. 회의는 ‘항론서’의 5개 항목을 일일이 반박하면서 정통 칼빈주의 입장을 명백하고도 분명한 용어들로 명문화한 도르트 회의 헌장(the Canons of Dort)을 발표했습니다. 도르트 회의가 정치적 주도권 싸움의 결과로 개최된 것은 일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회의가 결정한 교리적 내용까지도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국내의 정치적 혼란에 대해서 자유로운 세계 개혁교회가 함께 결정한 내용이며, 6개월 동안 주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모이다시피한 154회의 모임을 통해 심사숙고한 결정이었으며, 또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숙청은 도르트 신조가 작성되고 세계 개혁교회의 대표들이 떠난 이후, 네덜란드 자체의 추가 회의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도르트 회의의 교리적 결정과 정치적 상황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특히 회의는 양 진영의 신학적 견해를 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 아니라, 개혁파 국가를 위기에 빠지게 한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개혁파 총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정죄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알미니안이 정치적으로 희생되었다고 말하기에는 회의 참석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했고,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모임을 가지면서,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인 토론을 벌였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존재가 어느 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공의회나 노회의 결정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전통 신조인 니케아 신조나 칼케톤 신조의 내용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도르트 회의 역시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것입니다.
도르트 헌정은 알미니안주의의 5대 항목의 오류들을 반박하면서 정통 칼빈주의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대외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동시에 중요한 몇몇 교리에 대해 정통 개혁신학 입장을 간결하면서도 세밀한 부분까지 명료하게 확립했다는 점에서 신학적 의의가 있습니다.
4.1.3. 회의후의 상황
도르트 회의는 정통 칼빈주의의 입장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까지도 명확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회의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혼란된 교회와 사회를 수습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고,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지 않고서는 혼란을 바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619년 5월 9일에 도르트 회의는 파회했고, 당일에 외국 대표자들은 출국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대표들은 국내에 발생한 정치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참된 신앙을 분명하게 옹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회의를 가졌고 회의가 끝난 직후에, 정통 개혁신학에서 벗어난 목회자들과 도르트 회의의 결정에 서명하지 않은 교수들을 파면하고 감금하고 체포하고 추방하는 등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랐습니다. 약 200명에 달하는 알미니안파 목사들이 이탈해나가게 되었고, 항론파 정치 지도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의 충동을 받은 마우리스 총독에게 마구 체포를 당하므로 말미암아 그 세력을 잃어갔습니다. 그로티우스는 국회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내의 계책으로 인해 피신할 수가 있었습니다.(1621). 반 올덴 바네벨트(van Olden Barneveldt)는 국가원수에 대한 반역죄를 범했다는 억울한 누명으로 사형언도를 받고 헤이그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1619.5.14.). 그의 아들들은 복수심에 불타 마우리스를 시해하려 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도르트 총회의 결정사항은 프랑스 개혁교회에서도 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1620년 10월 1일 알리이스(Alais)에서 모인 제 23차 총회와 1623년 9월 샬렌톤(Charenton)에서 모인 제24차 총회에서 도르트 총회의 결정사항을 목회자들에게 시달했습니다.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준) 세계 교회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르트 총회는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표준문서들을 제정하긴 하였으나, 그 참석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1.4 회의 이후의 알미니안주의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 냐려졌던 추방령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낫소의 마우리스 총독이 죽고(1625) 그의 유순한 동생 프레데렉 헨리(Frederick Henry)가 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첨차로 종교적인 관용과 자유의 물결이 고조되어가던 화란 땅 어느 곳에든 돌아와서 학교와 교회를 세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에 저 유명한 신학대학을 설립했습니다(1630). 이 학교는 지금까지 남아있으나 그 위치는 라이덴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화해가 알미니안주의자들로 하여금 논쟁을 통해서 계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데까지 이르도록 해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수효는 점차로 줄어들어 지금에는 매우 작은 종파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노틀담과 암스텔담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인 영향력과 저술들은 그들의 조직 밖에까지 미쳤습니다. 이들 중에서 나온 유명한 학자들인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에피스코피우스(Episcopius), 림보르흐(Limborch), 쿠르셀레우스(Curcellaeus)등은 풍부한 성경해석과 비평지식을 가지고 신학적 입장을 자유화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그들은 종교적 관용정책과 세례받지 않은 유아들의 구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소시니안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세기 말부터 최근 정통적인 칼빈주의와 루터주의의 애호사상에 대한 반동이 일어난 시점에 이르기까지 화란, 제네바, 독일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고 크게 번져나간 합리주의(Rationalism)를 위한 길을 예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온건한 반펠라기안주의의 본래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죄, 은혜, 자유의지, 예정교리에서 독특한 견해를 가진 알미니안주의는 찰스 1세 이후의 영국 감독회의(Episcopal Church)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지나 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도들(Methodists)로부터도 크게 환영을 받아냄으로써 처음 생겨났던 화란에서 보다도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면서 그 지역을 점차 확대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의 기본교리들을 고수하면서도, 약간의 중요한 복음적 수정이 가해진 알미니안주의의 5대 주장도 함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4.2. 도르트 신경을 통해 본 알미니우스 예정론의 비평적 이해
4.2.1. 칼빈주의 5대교리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확립하게 되었는데 알미니안 5대조항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5대 교리는 다음과 같으며 영문 첫 자를 조합하여 ‘TULIP'이라 불린다.
T: Total Depravity (Total Inability: 전적 타락, 전적 무능, 전적 부패) 전적 부패라는 표현은 사람의 모든 면이 타락으로 인해 영향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향하게 될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U: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인 선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택한다. 이는 어거스틴적, 칼빈주의적 전통과 알미니우스와의 쟁점에서 근본적 분수령이다.
L: Limited Atonement(Particular Redemption: 제한 속죄, 곧 특징적 구속)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한데 반하여 그 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오직 택한 자를 구원하는데 있다.
I: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인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택한 자들이 그것에 응답하려는 보증이 되는 그런 면에서 그들 안에서 역사한다. 은혜의 효과는 의지분쇄에 있지 않고 기꺼이 응답하게 하도록 고무시키려는데 있다.
P: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진실로 회개한 자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참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4.2.2. 도르트 신경 해설
제1조 신적 예정에 관하여
(1) 1항은 개혁주의 예정론의 3가지 기본 전제를 말해준다.
•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공의성: 이 3가지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원론, 예정론 논의의 전제 조건이다.
(2) 5항은 유기의 원인에 대해 말하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지만 죄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두 대조를 보여 준다. 알미니안주의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조 1조 5항의 표현처럼, 불신앙과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복종과 불신앙까지 허락하시며 자유의지를 영어두신 채로 행하시며 하나님이 시간 내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방하여 죄를 짓도록 섭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조 1항을 인정한다는 것은 죄책이 인간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기로 한 작정에도 불구하고 모든 불신앙의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진술 제1조 8절(“하나님은 오로지 그의 의로우신 뜻에 따라서 그 누구도 아담의 타락에 빠져 죄의 상태에 놓임으로 저주를 받게 하지도 않으셨고, 또한 믿음과 회심에 필요한 하나님과 은혜로운 사귐에서 벗어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에서 하나님께서 ‘유기자’도 예정하셨다는 항론파의 반박에 대하여 신조는 다음과 같이 성경으로 대답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8)
그러나 이 구절은 이중예정에 대한 답은 주지만, ‘유기의 원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제1조 18항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엄한 유기에 대한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사람아 네게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향치 못할 것이며~ (롬11:33-36)”. 그러므로 이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살펴본다.
성경은 출 7:3, 8:15, 8:19, 8:32, 9:12, 9:34, 10:1-2,20에서 바로의 마음의 완강케 된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작정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 대상의 의지를 대상의 뜻과는 반대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자유한 의지를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기의 원인이 되는 ‘불신앙과 죄’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유기의 원인을 인간론에서 사려할 때는 ‘죄와 불신앙’에 잇다고 진술할 수 있다.그러나 유기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신론에서 찾아야 하는데. 곧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유기)하심 속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불신앙’이 유기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선행과 믿음이 예정의 원인이 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며 ‘죄와 불신앙’그리고 ‘선행과 믿음’열매로서 드러난다
(3) 7항은 하나님이 예정적 선택을 실현하시는 방법은 오직 은혜로만 되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하나님이 정하신바 된 특정수의 사람만을 불러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자신들 안에 어떠한 선행적 또는 예지적 신앙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고 본성상 택함 받지 못한 자보다 하나도 나은 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4) 8항: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며 인간의 그 어느 것이 작용되어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작정이 유일한 근거라고 할 때 하나님의 작정이 여러 종류의 작정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의 작정이 있을 뿐이다.
(5) 9항:우리가 신앙에 열심이고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예정적 선택의 열매이므로 거꾸로 이런 결과의 열매를 통해 구원의 확신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시간 안에서 인간의 믿음으로 보시고 한 예지의 선택이었다고 보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에게 구원은 늘 불안한 것이지만, 개혁주의 예정론에서 하나님의 예정은 보이지 않는 신비요, 비밀이며, 감추어져 있는 영원의 선택이지만 오해려 성도 안에서 열매들을 통해 확신되는 이것이 바로역설이며 신비인 것이다.
(6) 11항: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성에 대해 말한다. 즉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며, 인간을 보고 하신 것이 아니고 기쁘신 뜻에 의하여 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작정적 선택이 방해받거나 취소 될 수 없으며 확정적이다.
(7) 15항 유기에 대해:모두가 선택받는 것이 아니므로 유기된 자도 또한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유기의 작정이 하나님을 죄의 책임자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이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유기 되는 것이다.
(8) 18항 그러므로 예정론은 가장 아름다운 보석 같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신앙의 마지막 수준이다. 인간이 모든 신학적 활동을 통해 저항하고 질문하고 답하고 하는 모든 과정을 끝내고, 피조물이요 유한자며 죄인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완전히 항복하는 상황이며 이를 아는 사람은 롬 9: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항론파의 잘못된 주장들을 배척한다.
1. 성경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예정의 대상은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거처럼 믿게 될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택한 자들이다.
2. 선행적 의지와 후행적 의지에 대해: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에 있어서, 선택을 위한 몇 단계의 나눔이 있다고 구분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단일하다(신경 1부 8항에서 이미 설명했다.)
3. 하나님의 기쁘신 주권적 선택 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어떤 조건도 배척한다. 알미니안 주의는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이 선택한다고 할 때 이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을 받을 만한 절대가치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영생에 이를 만한 가치가 없음을 인정할 만큼 인간의 죄인 됨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믿음의 순종 역시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하며, 믿음의 가능성도 역시 하나님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의 약속 안에서 이런 믿음의 순종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절대가치가 있는 것처럼 받아주시는 것 자체가 바로 알미니안 주의가 말하는 은혜다. 그렇다면 이것이 참 은혜인가? 그럴 수 없다. 인간의 절대적 의미의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며 인간의 믿음의 반응 자체에 어떠한 공로성을 두어선 안 되며, 믿음을 반공로적 가치로 제한적 의미의 공로적 개념이라도 넣어 풀어주는 것이 바로 알미니안 주의의 오류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예정에 있어 사람들이 자연의 빛을 바르게 잘 사용하게 되면 경건하고 온유하고 영생에 가까워 질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안 주의의 주장은 잘못된 견해다. 이 견해는 사람이 태초에 아담처럼 에덴동산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적 중립성이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영적 무능력을 부인하게 된다.
4. 예지를 근거로 하여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믿음, 순종등은 예정적 선택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기 때문이다.(롬 9:11; 행13:48; 엡1:4; 요15:16; 롬11:6; 요일4:10)
5. 택자의 유동성에 대해: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반대하며 예정된 사람 가운데서도 멸망에 이를 수 있고 실제로 멸망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잘못이며, 이는 성경과 모순된다.(마 24:24; 요6:39; 롬 8:30)
6. 성도의 견인과 구원의 확실성을 부인하는 것은 잘못이다.
7. 예정이 제한선택이므로 사람이 믿거나 말거나 또는 신앙이 나태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복음전파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제2조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구속을 통한 인간 속죄의 범위
(1) 3항과 4항은 예수님의 속죄의 충분하고 무한한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속죄의 대상이나 범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효력의 가치는 무한한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5항은 복음의 보편적 전파와 속죄의 제한성(제한속죄)을 말하고 있는데 복음 전파의 대상과 속죄의 범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연결되고 있다. 알미니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무한하나 속죄의 무한성과 신앙의 가능을 연결시켜 선택에 있어서 신앙이란 조건성을 주었다. 그러나 [속죄의 범위]를 [보편]으로 하여 무한한 가치를 연결시키는 한 어떤 형태의 조건성을 말하든지 간에, 보편속죄가 되어버린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영원 전에 예정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도 죽으신 것인가? 실제로 그런 자들을 다 속죄하셨는가? 하는 속죄의 가능성과 실제성에 대해 그 어떤 경우든 간에 범위가 제한적인가? 보편적인가? 에 대해 도르트 신경은 분명하게 [제한적이다]라고 말한다.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숨겨진 작정과 드러난 작정의 불일치로 인해 제한 속죄에 대해 반발하지만 예수께서 ‘내 양을 위해 왔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제한성에서 제한 속죄의 근거가 나오는 것이다.
(3) 6항: 복음에 의해 초청을 받는 많은 사람들 중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아 불신앙 가운데 멸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결점이 있거나 불충분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의 탓이다. 그러나 참 신자는 지로부터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는데, 이와 같은 구원의 은택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4) 8항: 유효적 대상 - 3항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무한하다고 했지만 8항에는 대상은 오직 선택받은자(elected only)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속죄의 유효적 대상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속죄의 가능성도 제한되어 있고, 동시에 속죄의 범위도 제한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무한하며, 영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선택된 자에게는 실제로 임하여,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적용되는 게 아니라 택정한 선택의 흐름이 영원 전부터 주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제한속죄는 실제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즉, 가능성이 열려있는데 믿는 자에게만 열려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영원 전 안에서도 제한되어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1항부터 보라, 자신들의 죄로 인해 멸망받아 마땅한 그 가운데 일부를 택해 구원한 하나님이 악하신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죄안에 있는 자이며, 피조물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정하는 자임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의지나 공로나 그 아무것도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철저하게 신론적 구조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원론이요 은혜 구원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항론파의 잘못 된 주장들을 배척한다.
1.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세우신 것은 누구를 구원토록 하기 위한 분명한 계획 없이 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은 구원이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 적용된 적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공로의 필연성과 유익성과 그 가치는 그대로 존속할 수 있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성경과 모순된다.(요10:15,27; 사53:10)
2. 2부 5절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은혜계약에 들어감으로써 그 누구도 원죄로 인한 저주를 받지 않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원죄로 인해 저주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원죄의 죄의식에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성경에 모순된다.(엡2:3)"
3. 2부 6절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공로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지만 죄 사함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은혜며, 영생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 속에 역사하는 어떤 특별한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잘 선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항론파들의 주장은 펠라기우스적인 오류다.
제 3,4조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께로의 회심과 그 태도
(1) 1항 원죄론에서 중요한 인간론적 관찰이 나온다. 죄책이 어디 있는가?와 인간의 타락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타락의 결과가 적극적 의미에서 의의상실, 악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이며, 이런[타락으로 인한 의의 상실]이 개혁주의 예정론의 서론이다. :
가. 타락의 개념에 대해
• 개혁주의: 타락 전에 인간에게 원의(original righteous: 의, 거룩성, 순결)가 있었었으나 타락 이후에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악의 영향]과 소극적 의미에서[원의의 상실]을 함께 애기하고 있다.
•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나 세미펠라기우스 주의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악의 비참한 결과가 생략되고 타락의 결과를 단순히 원의의 상실로만 언급한다.
나.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에 대해
• 개혁주의는 [상실된 회복]은 반드시[악의 극복과 제어]가 필요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길이 없다는 인간의 절대 절망으로 설명한다. 똑같이 타락의 비참한 결과를 얘기하지만 성경과 개혁주의는 영적 죽음을 말하며 이로 인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 알미니우스 주의는 오직[상실]로만 얘기하며 자유의지도 중립적 상패로 선택적 능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물론[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완전히 세미펠라기우스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가 주어지기 위해서 타락의 적극적 면은 흐려지고 소극적 면만 부각되는 것이다.
(2) 2항은 원죄의 유전성을 설명한다.:원죄가 후손들에게 유전이 되는가? 도르트 신경은 죄책 뿐 아니라 죄성도 유전된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잉태되었다고 하며, 죄책과 죄성의 결과에 대해 말하지만 유전의 방식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펠라기우스 주의자들이 얘기하듯이 죄의 습성을 모방하고 흉내 내어 후천적으로 죄가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악한 품성이 전달되는 것이며 죄는 행위가 아니라 본성적인 것이다. 이때 죄성이란 새로운 본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의 성품의 질적 성격이 타락성을 갖고 있으며 죄의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중세 스콜라 신학은 원죄를 단지 원의의 상실로 설명했다. 그들은 설명하기를 처음 창조 시 인간에게 하나님의 원의(original righteousness)라는 [부가적 은사: donum superadditum]를 주셨다고 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보기 좋았다’라고 하는 처음 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원의를 덧입혀 주었으나 불순종에 빠짐으로 이 부가적 은사가 상실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원의는 상실되었지만, 원래 아담의 창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았고 이것이 kfkr 후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 전의 원의를 다시 덧입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스콜라 철학은 인간이 순종을 해나가는 은혜 속에서[부가적 은사]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복음이란 바로 인간에게 부가적 은사를 덧입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는 것이며, 만일 인간이 복음을 둗고 순종하면 원의가 회복된다고 하며 , 이런 의미에서 원죄를 단순히 원의의 상실로 본다.
알미니안 주의도 가은 맥락에서 원죄의 비팜한 결과에 대해 악의 충만성을 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 회개와 신앙에 돌이키는 역사가 불가능하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답변은 훨씬 적극적 면에서 인간의 악의 부분을 말하므로 알미니안 주의의 이런 견해는 낙관적이며 비성경적이다. 개혁주의는 단순히 의의 결핍이 아니라 불의의 충만성이 인간의 원죄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3) 3항은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전적 무능력을 말한다.
(4) 4항에서는 타락한 후 인간에게 자연의 빛이 남아 있지만 이를 통해 인간은 영적 차원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연과 시민의 영역에서 조차 바르게 사용할 수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5) 10항에서 ‘자유의지의 적절한 사용’이란 말을 했는데,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떤 선택적 반응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으므로 인간은 자유의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영적인 일에 대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아무런 기반이 없다ㅣ 그렇다면 역기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패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로서 의지는 여전히 인간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의미에서 의지가 철저히 부패한 성질로 바뀌었으므로 영적 문제에 있어서 영적 선을 택하고 영적 악을 멀리할 수 있는 서낵적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악으로만 치닫는 성질을 가리켜서 전적 부패라고 하며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지로써 선한 것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은혜앞에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왜 알미니안 주의는 이런 자유의지의 선택이 가능하다고 하는가?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상실한 것이 아니며, 여전히 자유의지를 가진 자로서 영적 선택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 후 인간은 순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행적)은혜를 부어주시면, 자유의지를 통해서 순종의 가능성이 열리며, 이 순종을 보고(중간지식을 통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시는 것이다. 타락r 이후 상실한 거룩한 의와 진리(원의)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인간이 아담처럼 자유의지를 순종으로 사용하여 거룩과 의와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이런 도식은 전형적인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타락했으나 불순종으로 인한 원의의 상실이란 결과만 왔고 질적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제약하지 않으므로 (중립성)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부패한 자유의지라는 개념도 없다 그러므로 알미니안 주의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은 같이 타락을 말하지만 전적 무능력을 말하는 개혁주의 입장과는 다르다.
또한 알미니안 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에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원리이며, 이런 약속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택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게 되므로, 그의 은혜 개념은 개혁주의의 이해와 달리 거절할 수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인 것이다. 이런 개념은 중세 유명론(nominalism)의 세미펠라기우스 주의와 신학적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중세 신학자들은 인간의 최초의 상태를 규정하고 처음 상태에서 죄도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부여해주는 이 (부가적 은사)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부가적 은사는 아담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더해졌으므로 ,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부가적 은사:donum superadditum]가 상실되었고 이는 공로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는 논리적 연역이 가능하다: 즉 타락 이후에도 남아있는 자연 상태 안에서 순종이란 공로에 의해 부가적 은사가 열릴 수 있다고 하므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의 가능성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조 10항에서[자연의 빛을 더 잘 사용했기 떄문이 아니다]
라는 표현속에는 이런 중세의 반공로 개념에 대한 부인이 암시되어 있다 즉[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미 네 안에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순종해 나오면 그것을 보고 공로로 인정하여 은혜를 베풀겠다..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자연의 빛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라]는[meritum de congruo]의 개념을 알미니안 주의는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안 주의는 자유의지의 개념과 자율적인 순종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펠라기우스처럼 원죄를 부정하여 자유의지의 영적 가치를 떼어버린 것이 아니라 원죄를 인정하지만 원의만 상실된 것으로 약화하여 적당히 넘어감으로써 자유의지를 보존한 부분에서 펠라기우스와 같은 구조를 갖고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주심의 요소가 들어가며,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약속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가시며 베푸신다는 점에서는 세미펠라기우스적이다.
(6) 11항: 그러므로 성령의 전적 조명 아래 의지에 새로운 성질을 부여해 줄때만 부패한 자에게서 영적 선이 가능해지며, 이런 성령의 역사는 초자연적 역사요, 가장 강력한 역사이므로 불가항력적이다.
(7) 12항은 개혁주의의 은혜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영향 받게 되고 그 결과 사람의 의지가 활성화되는 모든 과정의 영적 역사가 바로 은혜이므로 은혜는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일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항론파의 잘못 된 주장들을 배척한다.
1. 원죄의 결과는 전 인류를 정죄할 만큼 충분하다.
2. 영적인 은사들, 혹은 좋은 성품들, 선함, 거룩성, 의와 같은 것들이 처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덧붙여진 것이라고 하는 알미니안 주의의 인간관은 잘못이다 :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거룩과 의가 의지 속에 본래 속성으로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관으로 인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한 타락한 의지란 개념이 본래부터 없다는 것이다.
3. 인간의 영적 죽음 안에서, 거룩 선등이 인간의 의지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잘못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해가 어두워지고 인간의 정서가 통제성을 상실해 버린 결과로 방해받는 것이지 어떤 상황에서나 인간의 읜지가 타락한 적이 없다고 하는 항론파의 주장을 배척한다.
4. 중생치 않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실제로 또는 완전히 죽은 게 아니며, 영적선을 행할만한 능력이 또한 결여된 것도 아니다. 중생치 못한 사람들도 의와 생명에 굶주리고 갈급할 수 있으며 회개와 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안 주의의 가르침을 정죄한다. 이는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엡2:1,5. 창세기 6:5 ,창 8:21)
5. 부패한 자연적 사람도 보편 은총을 잘 사용하거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은사들을 잘 사용한 결과 점차적으로 구원의 은혜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정죄한다. 인간은 일반 은총적 측면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선에 대해선 닫혀 있으며 따라서 성경은 어떤 형태로든 보편 구원론에는 열려있지 않다.
6. 인간의 참된 회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새 성품을 의지 안에 부여해주심을 반대하는 항론파의 주장은 잘못이다.:원래 인간에겐 부패한 의지가 없다고 하며 중립적이라고 보는 것은 성경과 모순되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의 새로운 자질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을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주셨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렘31:33; 겔36:27)
7. “은혜와 자유의지는 회심하는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나, 회심의 과정에서 볼 때 은혜는 자유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여 결정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 자유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며 성경과 모순된다. 성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롬9:16;고전4:7)라고 말씀하신다.
제5조 성도의 견인
제5조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끝까지 구원하신다는 성도의 견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 1항: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를 육적, 영적, 도덕적 연약성으로부터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영적 측면에서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나님이 주의 나라로 이끄신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의 초점이다.
(2) 2항: 성도의 행하는 최선의 일에서 조차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하며, 성도에게 견인하시는 은혜가 없다면 성도들은 견인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으나 끝내 구원으로 이끄시며, 결코 멸망으로 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각 과정 속에 드리워지는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며, 이 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3항)
(3) 4항은 알미니안 주의의 비판에 대한 반박이다.
알미니안 주의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도의 견인 교리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한다. 즉, 사람이 의지가 타락해 있어서 , 의롭게 하시며 중생케 하시는 전적은혜가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며, 이 역사는 불가항력적 은총이므로 실패와 인간의 거역이 없으며 반드시 구원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실제 성도들의 삶을 보면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이기지 못하며, 인간의 불순종으로 계속적인 패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무력해 보인다.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불가항력적 은혜가 어떻게 구원해 놓은 다음에 견인해나가는 은혜에 있어선 무력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불가항력적 은혜로 구원받았으므로 신자는 삶에 도덕적 영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아무렇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간음하며 살인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는 다윗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실패한 것인가? 알미니안 주의는 이를 실패로 해석하며 이런 문제들 때문에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은혜의 불가항력성과 성도의 삶에서 보이는 견인의 은혜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견인의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일하심이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계획안에서 방식을 결정하여 개개인의 신앙적 순례의 길을 다루어가시며, 다양성 있는 삶을 다루어 가심에 있어서 공통적 영적 특징은 바로 구원의 계획이며, 그 목적은 우리에게는 성화이며, 엡1:6,1:12,1:14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찬미케 하려 함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든 삶은 성화의 과정을 이루기 것이다.
다윗이 범죄 한 때에도 견인의 은혜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성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삶을 이끌어 가시며 결국 끝까지 끌고 가시는 견인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지 은혜의 불가분성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성화의 방식에 따라 하나님이 인간의 죄이 행동을 허용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가는 방식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2차 cause)를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다루어 가시는 통치 원리로써 2차 cause의 성격을 사용해나가는데, 예정에 의해 구원에 이르는 동안에도 자유의지를 사용하되 자유의지의 죄성을 제어하며 자기의 입으로 고백하는 자유의지의 역사를 하시며 강력하게 끌어오신 은혜 이후 조의 허용은 지혜안에서 허용하신다. 따라서 다윗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안에서 허용하서서 끌어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이 죄인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이끌어 가시는 지혜를 우리는 찬미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는 이를 능력의 문제로 보고 있다. 5조 1항을 다시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되 죄의 몸, 육체의 연약성으로부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다]는 제한적 단서가 이미 하나님의 견인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로 인해 견인 받는 성도들의 탈락하고 회복되는 과정들은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성화적 삶을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이며, 죽을 죄를 짓지만 용서받고 계속 붙드시는 은혜를 맛보면서, 성화적 과정을 통해 영적 은택을 주셔서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구원의 역사가 임했음을 깨닫게 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 안에서 인식론적으로 구원의 확신에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
(4) 6항: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이나 구원에 대한 확신은 그 본성을 따져보면 나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거룩함이나 선한 행동, 또는 그 밖의 다른 경건한 행위를 행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므로, 오히려 확신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항론파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내재하는 성령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5) 9항 구원의 확신 문제: 참된 신자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할 수 있으며 때로는 흔들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왜 구원의 확신이[ 성도의 견인]을 가르치는 고백 안에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베풀어가는 영적 은혜의 하나로서 성화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6) 10항: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적으로 또 모순되게 어떤 개별적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게 아니라 확실히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바로 구원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믿음이 자신안에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인해야 확신하게 된다.: 즉, 확신은 없지만 구원 얻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과 구원에 대한 믿음은 구별되어 이해되어야 하다.
다시 설명하자면 구원의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상속자이심을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로부터 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항 2조는 확신의 근거를 2가지로 말한다.) 즉, 객관적 약속에 기초한 믿음과 이런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은혜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다. 그렇다면 이런 내적 증거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주어지는 성화의 열매들이요, 또 하나는 성령이 우리 안에 주시는 내적 각성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 본문은 그러므로 중생자에게만 적용되며 이는 패배가 아니라 성화의 과정 안에서 춰지는 갈등이며, 영적으로 자라는 자들 안에서 고백되는 것이며 신앙의 실존 상에서 고백되는 것들이다. 이런 신자의 패배주의적 모습 때문에 로마서 7장 본문이 비중생자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시평의 신앙적 실패와 갈등, 모순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7) 12항: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어느 때라고 정할 수 없으며 믿자마자 되는 것은 아니며 성도의 견인 속에서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믿으면 그때부터 항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조심해야 한다. 비록 성도들이 자신들의 습관적 죄악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어도, 그리스도의 은헤로 부르심 받아 주 앞에 선 자요, 구원받은 자로 영원하신 작정 속에 포함된 자라는 자기 안에서 말씀에 근거한 깨달음의 조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다. 비록 완전한 성화가 아니며, 죄의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구원받은 자의 영적 선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해 연약하나마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가? 신비적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다 예정적 선택의 확신은 하나님의 비밀이므로 숨겨진 깊은 곳에 있는 것을 호기심으로 살펴서 얻는 것은 아니며, 성경 말씀에 나온 그런 열매들이 내 안에 영적 기쁨과 더할 수 없는 거룩한 즐거움 속에 있는지 찾아봄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쁨,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두렵고 떨리는 거룩한 경건성,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 분노, 아픔, 주의 의를 향한 굶주림과 갈등 같은 영적 선이 내 안에 기쁨으로 있다면 이것들이 바로 영원한 작정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의 증거요, 열매인 것이다.
4.2.3. 알미니우스 예정론에 대한 비평적 이해 요약
도르트 신경을 통해 알미니안 예정론이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출발했지만 여러 부분에서 차이점과 문제점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알미니안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거부하는 점에서 행위적 공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펠라기우스적은 아니며 종교개혁의 전통(‘오직 은혜로’) 안에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또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지 않고, 전적 부패를 말하며, 구원에 있어서의 은혜의 절대 필요성과 예지 예정을 주장하므로, 개혁주의 예정론과 구조는 다르지만 예정론적 특징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세미펠라기우스적 요소들을 갖고 있으므로 개혁주의 신학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1, 원죄에 대해:
알미니안 주의는 펠라기우스 주의와는 달리 원죄를 인정하며 그 결과 부패와 타락을 인정한다. 개혁주의의 전적 타락 개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도덕적 무능력이며 구원에 수반되는 어떤 영적인 선도 행할 수 없도록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했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예정론 전개에 있어서 팜으로 중요한데, 결국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의 인정은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성과 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알미니안 주의는 원죄의 결과에 대해 [원의의 상실]만을 말하므로, 타락 후 자유의지 자체는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중립성을 갖고 있어, 은혜를 부어주시면,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따라 자유의지의 선택을 통해 순종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의 개념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도와주시는 것이며.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가능성 때문에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항력적(resistable)이 되는 것이다.이런 은혜 개념 안에는 중세 유명론의 세미펠라기우스적 해석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펠라기우스 주의는 원죄를 부정하여 자유의지에서 영적 가치를 떼어 버림으로서 자유의지의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면, 알미니안 주의는 원죄를 인정하지만 워의만 상실된 것으로 약화시켜 적당히 넘어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유의지를 보존하였고 선택의 부분을 열어 두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에 대해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를 주시고, 그 자유에 따라 하나님이 반응하시는 관계를 설정하셨다고 보므로 하나님의 전능성과 주권에 대한 이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영원 안에서의 작정을 시간적 실행과 혼동하여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양립할 수 없는 대림 구조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런 모순적 구조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없는 인간의 온전한 개념은 철학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자유 의지 개념은 결코 하나님의 주권과 동등한 위치에서 다룰 수 있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속에 계시며 시간 안에서의 실행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과 섭리 안에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3. 속죄에 대해:
알미니안 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속죄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인류를 속죄의 대상으로 하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함에 있어 인간의 의지의 제한을 받으려면 보편속죄설과는 다르면서도 적용에 있어선 효과의 범위가 죄인의 의지에 달려 있도록 제한이 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단순히 사람들에게 구원이 가능하도록 하시기(보편속죄, 잠재적 속죄)위한 것인가? 아니면 보다 구체적이고 확정적인 대상의 구원을 위함인가?(제한속죄)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어떤 자의 구원도 확보한 것이 아니며, 모든 개개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도 보편적이고 성령의 역사도 보편적인데 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알미니안 주의는 은총이 사람에 의해 거절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보편속죄는 [Resisitable grace]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성경의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지 속죄의 범위를 죄인의 의지에 따라 제한된다고 하지 않는다. 제한속죄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제한성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양을 위해 오셨다고 하시며, 예수님은 실제로 자기 양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속죄는 잠재적이거나 가능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다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잠재적 속죄는 실질적 속죄가 아니므로 인간이 참으로 죄 가운데서 죽어 있고 죄에 얽매여 있다면 단순한 잠재적 또는 조건적 구속만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4. 은혜: 선행은혜
선행은총(혜)은 인간이 자연 상태로는 복음에 대해 반응할 수 없으므로, 인간에게 은혜를 주셔서 복음에 반응할 수 있도록 돕는 성령의 은혜를 말한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선행은총이 없어도 복음에 반응할 수 있다고 했지만, 세미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전제하에 그 은혜의 반응으로 가능한 선택을 말한다. 알미니우스 주의는 부패는 얘기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적 능력을 제한시키지는 않는다. 알미니우스는 복음의 초청을 선행은총이라고 하며, 이 은혜가 부패성 측면에서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손상되어, 자연적 선택에는 열려있지만 영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생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계없이 스스로 선을 선택하거나 악을 선택하거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며 중생 이후에도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열려지게 된다.
알미니안 예정론은 인간이 보이는 믿음의 순종이 구원의 조건으로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순종을 절대가치가 있는 것퍼럼 받아 누시는 은혜를 말한다. 이러한 알미니안 주의의 은혜(은총)의 개념 안에는 5세기부터 전해 내려온 값없이 주어진 보편적 은총(gratia generalis grata data)과 구원해 주는 은총의 구별, 또 자연을 적절히 사용해서 얻는 공로(meritum de congruo)와 초자연적 은총을 근거로 하는 공로(meritum de condigno)를 포함하는 세미펠라기우스적 요소가 덧 입혀져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이러한 공로 개념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뿐이며 인간의 믿음의 반응에 절대적인 것으로 봐주는 어떠한 공로성도 두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 개념 속에는 믿음의 가치를 반공로적 공로로 보는 제한적 의미의 공로적 개념과 행위 구원적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인정하며 예정이 없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한 작정을 통해 그의 선함과 행위를 보지 않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선택한 사람을 대상으로 보는 반면,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이 미리 구원받을 사람으로 보시고 선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을 예정의 대상으로 본다. 또 개혁주의는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 반면 알미니안 주의의 예정이란 개인을 향한 예정이 아니라 믿음의 길로 오는 사람을 구원받도록 하는 구원론적 틀을 짜주는 일반적 예정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일반 예정 안에서 믿는 자들을 구원받도록 하나님이 작정해 놓으셨는데, 이때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사람이 결정하며 하나님은 그 선택을 미리 보심으로 구원하시므로, 결국 하나님은 구원을 위한 기반과 조관과 틀을 조성하시는 분이며, 정작 구원 역사에 대한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읻. 다시 말해서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지만 제시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예지 예정 아래에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주도권을 가진 자)과 인간(응답해야 할 자)의 연합 노력을 통하여만 성취되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인협동설로 나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알미니안 주의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 전통 안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예정론 전통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중세 후기 유명론적 해석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므로 구원론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하나로 수렴할 수 없는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5.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차이
이 두 사상 체계의 근복적인 차이는 하나님과 죄와 구원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패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인용하면서 두 체계의 차이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 양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그 강조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다. 한편은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다른 한편은 하나님을 인간 스스로 구원하게 하는 분으로 말한다. 칼빈주의는 유기된 인류의 회복을 위한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의 사역들, 즉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소명 등은 동일인에게 역사하여 구원을 확실하게 성취시킨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주의는 그 각 사역을 다른 방법으로 말한다. 즉 구속의 대상은 모든 인류이며, 소명의 대상은 복음을 들은 자들이며, 그리고 선택의 대상은 그것을 듣고 응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은 그것들 중 어느 사역에 의해서 확실하게 보증된다는 것을 부정한다. 칼빈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칼빈주의는 믿음을 하나님의 구원 은사의 일부로 간주하지만,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에 대한 인간 자신의 기여로 생각한다. 칼빈주의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만, 알미니안주의는 그 찬양들을 구원의 장치를 세우신 하나님과 믿음으로 그것을 움직이는 인간의 것으로 나눈다. 그리고 칼빈주의를 요약한 이 5대 교리의 항구적 가치는 이 두 사상이 나타내고 있는 차이와 범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 결 론
지금까지 알미니아누스의 생애와 알미니안 주의의 5대교리, 도르트회의를 통해 나타난 알미니안 주의의 거부 및 칼빈주의 5대강령 및 알미니안주의 와 칼빈주의의 대조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면서 명확한 것은 알미니아누스의 생애가 온전히 개혁파적인 요소를 갖춘 것이 아니라 친로마적이며 반 개혁적인 요소를 갖추어서 이어져 내려왔다라는 점이다. 즉, 어느날 갑자기 반개혁적인 부분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요새 알고 있는 칼빈주의의 5대강령이 바로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와의 갈등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알미니안 연구 비판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알미니안은 일반 우리가 정죄하는 이단과는 달리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우리들 속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무지불식간에 우리들의 신앙속에 들어와 있어 우리의 신앙을 성경의 본 뜻과는 다르게 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공로주의의 요소가 가미되는 개신교내에서의 여러 종파들과 로마카톨릭과도 알미미안주의는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이번 연구 비판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 알미니안적인 요소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지 않기로 다짐해 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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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선, “도르트 신경을 통해 본 개혁주의 예정론”(신학석사학위, 합동신학대학원, 2005)
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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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도서 및 자료
브리태니커 사전
네이버 지식검색
Dale M. Yocum 박사 저, 「기독교 신조 대조」손택구 박사 역, 서울: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 출판부
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dom ,vol. Ⅲ
척 스미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서울: 도서출판 건생, 1998.
Cunningham, Historical Theology, vol. Ⅱ
곤잘레스, 「현대교회사」,김병훈 역
[출처] 알미니안주의 연구와 비판|작성자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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