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함(李涵)
[본관] 우봉(牛峰)
[생졸년] 1659년(현종 1)~1740년(영조 16) / 壽 81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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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첨지 이공 묘갈명(僉知李公墓碣銘)
우리 종친 첨지공 휘 함(涵)은 자가 윤구(潤九)인데, 충직하고 순후한 장자(長者)이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선전공(宣傳公) 후의(後儀)에게 양육되었는데, 선전공이 일찍이 심덕(心德)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고 중년에는 상화(喪禍)를 만나 황해도 지방에서 유락(流落,고향을 떠나서 타향에서 삶)한 채 수고롭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농사에 힘을 쏟았으며 모든 일에 마치 신의 도움이라도 있는 듯이 명을 기다렸다.
10년의 노력으로 재산이 제법 풍족해지자, “분수에 족하다.”라고 하고는 이때부터 더 이상 재산을 늘리지 않고 오로지 절약을 일삼았다. 얼마 뒤에 또 탄식하기를,
“이곳이 낙토(樂土,걱정이나 부족함이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지만, 자손을 키울 수는 없다.”
하고는 스승을 골라 아들을 보내 가르쳤다.
얼마 뒤 가솔을 데리고 교하(交河)로 돌아갔다가 또 도성의 서강(西江)으로 옮겼고, 만년에는 또 파산(坡山,파)에 우거하였다.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통정대부에 제수되고 곧이어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한번 사은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경신년(庚申年,1740, 영조 16) 6월 8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2세였다.
우리 이씨(李氏)는 우봉(牛峰)에서 나왔는데, 고려에서 시중을 지낸 공정공(公靖公)의 선대를 공통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참판 순(淳)은 청백리에 기록되었고, 집(緝)은 집의를 지냈다. 집의의 증손 수경(守敬)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첨지중추부사는 통덕랑 식(寔)을 낳고, 통덕랑은 후강(後綱)을 낳았으니 바로 공의 3대이다.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제정(濟艇)의 딸이다.
공의 배위 숙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중보(重寶)의 딸이다. 두 아들은 명혁(命赫)과 명직(命直)이고 딸은 유한철(兪漢喆)에게 출가하였다. 명혁의 아들은 계(棨), 반(槃), 형(㯏), 조(條)이고, 사위는 신광두(申光斗)와 유응길(柳膺吉)이다. 명직의 아들은 어리고, 사위는 민희성(閔希聖)이다.
공은 가정에서의 행실이 매우 돈독하였다. 모친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른 것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여겨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도록 힘썼으며 늙어서 비단옷 입는 것조차 오히려 불안하게 여겼다. 제사 때마다 반드시 정성을 다해 정결한 제수를 마련하였고, 제삿날 밤에는 한번도 옷을 벗은 적이 없었고 여러 번 일어나 별을 보고서 시간을 짐작하였는데, 여든이 넘어서도 그러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간절히 경계하신 말씀도 제사에 관한 일이었다. 또 누대의 묘전(墓田)을 매우 후하게 두었고, 몹시 가난한 종제(從弟)를 위해 밭을 떼어주어 생계를 꾸리게 도왔으며, 과부가 된 종매(從妹)가 가난하여 딸을 시집보내지 못하자 돈을 내어 도와주었으니, 모두 효성을 옮긴 것이다.
타고난 성품이 조심스럽고 공손하여 마치 무능한 듯이 행동하였으나 일을 맡으면 과감하고 확실하게 처리하였다. 또 미리 준비하는 것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세밀하고 신중하게 살펴 실패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남과 교제할 적에는 친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충애(忠愛)의 마음을 극진히 하였기에 선한 자들은 공을 좋아하고 불선한 자들은 공을 미워하였다. 향리에 몹시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두루 구휼하였고, 아래로 노복들까지도 굶주림과 추위를 걱정해주었기에 인심을 잃지 않았다.
공은 체력이 건강하여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 갖추고 앉았는데, 하루로 폐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여든이 되도록 감히 불선한 일을 하지 않았으니, 비록 깊은 밤에 혼자 있는 때에도 항상 귀신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이 마음이 두렵다.”하였다.
어렸을 때 공부할 시기를 놓쳤으나 율옹(栗翁 이이)의《격몽요결(擊蒙要訣)》 보기를 좋아하여 항상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다. 또 만년에는 《소학》을 좋아하여 중요한 말 9조목을 직접 써서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다. 공은 가정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으며 내외의 구별에 더욱 엄격하였다.
후세를 위한 계책으로는 작은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작은 공을 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선을 쌓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거듭 면려하고 신칙한 말이 모두 덕 있는 군자의 말씀으로 한결같이 모두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었으니, 아마도 옛날에 일컫던 선인(善人)일 것이다. 공이 한번은 여종이 뜨거운 물을 땅에 쏟는 것을 보고는 꾸짖기를,
“흙 속에 잠자는 벌레가 없겠느냐.”
하였으니, 그 어진 마음이 이러하였다.
아! 나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으리란 것을 알겠다. 공은 부평(富平) 백사동(柏寺洞) 참판공의 무덤 왼쪽에 안장하였으니, 그 유지를 따른 것이다. 김 부인(金夫人)은 공보다 4년 뒤에 세상을 떠나 공과 합장하였다. 명직(命直)이 내게 수학한 자인데, 눈물을 흘리며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공의 자수성가는 / 嘻公成家
농사에 바탕을 두었네 / 本之稼穡
근검하고 수고하여 / 勤儉勞苦
그 선이 쌓였네 / 厥善攸積
인으로 지키고 의로 가르치니 / 仁守義敎
무엇인들 떳떳한 법칙 아니랴 / 疇非彝則
어리석고 촌스러운 듯한 겉모습에 / 外若椎野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 없네 / 世莫吾識
오직 하늘이 있어 / 惟有天翁
오복을 누리게 하였네 / 餉以五福
귀하게 여길 것은 큰 것에 있으니 / 所貴有大
오직 덕을 좋아함이었네 / 曰惟好德
내가 이 돌에 명을 새기노니 / 我銘斯石
유구하게 마멸되지 않으리라 / 悠久無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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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첨지 이공 묘갈 :
이 글은 이함(李涵, 1659~1740)의 묘갈이다. 이함의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윤구(潤九)이다.
[주02] 오복(五福) :
수(壽), 부(富), 강녕(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천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考終命]으로,《서경》〈홍범(洪範)〉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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