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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시작 된지 어언 10년이 되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도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의 새마을운동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도시는 전통적으로 혈연, 지연, 친분 관계 등으로 공동 운명체적 특징이 강하 농촌과 비교하여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데 있어 이를 저해하는 갖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도시의 생활환경과 여건이 농촌과 다르다 하더라도 나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과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점에서 보면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이 도시라 할지라도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도시에서의 주민들에게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업을 선정하고, 새마을운동의 참뜻을 바르게 인식시켜 협동심을 불러일으킴으로서, 차원 높은 범국민 운동으로 전개해 나아간다면 새마을운동이 농촌에 못지않게 훌륭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여 마침내 도시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수많은 실례를 보아 왔습니다.
다만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과 그 실천적 수단을 어떻게 도시의 특수성에 알맞게 선택하고 도시의 주민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이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케 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글에서 부끄러운 대로 제가 면목 7동장에 부임하면서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아니 새마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주민과 지역에 연결시켜 새마을운동을 전개 하였는가, 그 사례를 말씀 드림으로서 이와 같은 평소의 저의 소신을 뒷받침하고자 합니다.
저희 면목 7동은 1977년 9월 1일 면복 3동에서 분동한 서울에서 최 동쪽에 위치하여 용마산의 능선을 따라 남양주 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서울시에서 60년대 초에 추진한 제1차 도시 계획 정리 지구 즉 망우 지구 구역 정리 지역 내에 위치하여 도로 정리의 미숙한 계획 탓으로 2차선의 S형 도로에다 또한 토목 사업이 전연 안 되어 있어 지금으로서는 서울 시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입니다.
따라서 시내에서 싼 집을 구하려거든 면목동에 가 보라고 할 정도로 낙후된 곳입니다.
거기에다 기초적인 공사가 전연 되어 있지 않아 면목동 주민들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곳”이라는 속어까지 나온 것이 바로 이 곳입니다.
저는 20여 년의 공직 생활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동대문구민을 위하여 봉사하고자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모임이든 가는 곳마다 이러한 취약점을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 면목 7개 동의 인구가 20만 명이 거주하는 곳에 남녀 중 고등학교 하나 없으며 이곳과 비슷한 인구의 도시인 천안시와 비교하거나 같은 생활권인 태능 지구의 17개 동에 인구 42만 명이 거주하여 이와 비슷한 전주시와 비교하여 남자 고등학교가 한 곳도 없고 여자 중학교가 망우동 내 3개 교가 몰려있고 남자 중학교는 4개 교 중 3개 교가 중화동에 있고 1개 교가 망우동에 있는 고로 우리의 귀여운 자녀들이 이중 삼중의 교통의 불편을 겪어가며 통학을 하니 같은 여건 하에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여건이 좋은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보다 학업 성적이 떨어질 것이 아니겠느냐 하며 그것은 자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성세대가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의 운행이 도시 외곽으로만 운행도고 도심지를 지나는 버스는 1개 노선 뿐 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셋째, 도시의 기초적인 토목 사업이 안 되어 있으니 이 모든 생활 여건의 불편한 점은 우리 기성세대가 책임을 느끼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그렇다고 주민들은 조금도 좌절할 것 없으며 토목 사업은 뒷골목 사업으로 추진하면 되고 기타 사업은 상부에 건의할 것이며 우리 주민이 하여야 할 것은 용마산을 새마을 산책 공원으로 개발하여 경치 좋고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우리 마을로 만들어 결국은 우리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게 되었을 적에 이것이 곳 소득 증대 사업이 아니겠느냐고 역설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민을 설득하니 혹자는 저 사람 “대의원 꿈이 있나봐.”하고 모함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저의 거주지가 이곳이 아니고 상봉동이라는 점을 인식시키며 이를 새마을운동과 연계시키니 주민도 호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로, 주민이 공감하고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업으로 토목 공사 사업을 추진시키기로 하고 78년을 토목 공사의 해로 정하여 하수도 포장 공사와 새마을 뒷골목 사업인 보도블록 포설 공사를 자조 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다행히 공직 생활에서 토목직과 같이 일한 관계로 각 구청을 찾아다니며 유색 보도블록과 교체하는 헌 보도블록을 무상으로 인수 주민에 공급하니 주민들의 환호성은 대단하였습니다.
이에 힘을 입어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수거하니 우리 동 뿐만 아니라 인접 동까지도 나누어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공사 실적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하수도 공사 → 새마을 뒷골목 사업(9.6km)
○ 포장 공사 → 새마을 뒷골목 사업(505a)
○ 보도블록 포설 공사 → 자조 사업(6만장)
<용마산에 동민(洞民)의 꿈을 심자>
‵79, 8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참 뜻을 보이기 위한 제2차 사업으로 용마산을 주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각종 시설을 설치하고자 하였던 바 10.26 사건으로 계획만 수립하였을 뿐 시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사회가 점차 혼란되어 감을 안타깝게 여긴 저는 주민들의 잘 살기 운동은 시대의 변천이 온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무언의 교훈으로 삼게 하기 위하여 구청장에 간청하여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에 입교, 자원 2기(통산 157기)로 수료 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주민들을 설득하여 혼란된 사회 속에서 정신만은 동요됨이 없이 새마을운동을 지속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연수원의 교육은 저로 하여금 스스로 용기를 넣어 주어 누가 뭐라 하더라도 새마을운동은 지속되어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심어 주어 수료 후 동훈을 “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자.”로 바꾸고 새마을 지도자 및 기타 공적(公的)인 조직원들에게 연수원에서 배운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참다운 애국자는 내 고장, 내 마을을 위하여 묵묵히 일하는 인간 상록수들이다.”라는 좌우명 아래 주민의 생활신조 또한 새마을 지도자의 생활신조인
이상은 높게 현실은 착실하게 살자.
빚지기를 두렵게 저축하기를 기쁘게 알자.
겉치레보다 실속 있는 생활을 하자를 생활 철학으로 심고자 온 마을을 누비며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주민들의 비웃음 특히 나와 호흡을 같이 하여야 할 공적(公的)인 조직원까지도 “동장이 이상해, 때가 어느 때인데 새마을운동 운운하고 잠꼬대 같은 이야기야, 저 사람 웃기네.”라는 비웃음을 일 삼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막연히 새마을운동을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면목 7동 주민이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업으로 용마산을 새마을 산책 공원으로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새마을 지도자들과 같이 주민들을 설득하니 역시 주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고로 한 사람, 두 사람 호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용마산 일원에 국기 게양대 3개소를 위시하여 약수터 3개소에 배드민턴장 5개소, 기계 체조 시설 2개소, 맨손 체조장 2개소 등을 설치하고자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새마을 지도자들과 함께 삽과 괭이질을 하고 모래·시멘트·시멘트블록을 나르며 산책 공원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10일 후 부터는 운동을 좋아하는 젊은 청년들이 대거 참여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 분야에 가담하고 회원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더니 평균 1일, 100명씩 3개월간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손바닥이 부풀어 오르는 것도 모르고 체육 시설 외에도 곳곳에 휴지 소각장, 휴지통, 의자 등 30개소를 설치하니, 구청에서도 감격, 주민들의 편의 시설인 의자, 휴지통 등 15개를 더 설치하여 주어서 새마을운동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이에 힘을 입은 주민들은 각종 표지판, 새마을 산책 공원 내의 등산로 등 피땀 어린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이룩하나 하고 용마산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스스로 시설금을 보내준 것이 340만 원이나 되어 용마산은 말끔히 단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연 인원 4,200여 명이 동원된 결과, 80년도 서울시 도시 새마을 사업에서 우수 동으로 지정, 시장님의 표창 및 <용마 마을>이라는 애칭과 시상금 50만 원을 받으니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80년은 저물어 갔습니다.
금년에도 구청에서 980만 원을 들여 취로 사업으로 산책 도로를 완전히 축조하니 주민들 또한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 이 사업을 도우며, 또한 취로 인부들에 간식을 대접하는 등, 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4km의 산책로를 개설하니 주민들은 서로 자랑하며 활짝 웃는 웃음의 동산으로 변하였습니다.
산책 공원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산 주인은 이러다가는 자기 산이 공원 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여러 곳에 진정을 하여서 법적 문제까지 되었으나, 새마을 지도자 10여 명이 찾아가 산 주인 및 관리인을 설득하고 이해 시켜 이제는 주민의 안식처로 부족함이 없이 잘 가꾸어져 인근 주민은 물론 시내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새마을 지도자의 사기도 충전>
둘째 문제는 사회 지도층 인사의 참여와 새마을 지도자의 정비 보강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참여는 명예 지도자로 추대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 새마을 지도자를 어떻게 정예화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당초부터 7개의 공적(公的) 조직 곧 남성 5개 단체, 여성 2개 단체를 중복되지 않게 조직하였습니다.
즉, 일인일직(1人1職) 봉사 원칙을 제도화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마을 지도자를 자질이 훌륭한 분들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모임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일 적에는 봉사하는 분도 왜 나만 이래야 하나 하게 되며, 이 조직, 저 조직 다 형식뿐이지 올바른 봉사 한 번도 하지 못하게 되며 마을의 모든 문제를 단 몇 사람이 모여서 의논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일인일직 봉사 원칙으로 마을에 봉사하다 보니 새마을 지도자 협의회를 비롯한 7개 공직원 352명이 호흡을 같이 하게 되어 용마산을 애용하는 6개 조직 110명과 합하여 462명이 협동하게 되고 주민 27,000여 명이 협조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묵묵히 일하는 새마을 지도자를 어떻게 하여 사기를 앙양시키고 활력화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를 꾸준히 노력한 결과 관내 <동보 의원>과 새마을 지도자(남녀 60명)가 의료 보호 자매 결연을 맺도록 하여 50% 할인을 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새마을 지도자는 할인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마을 지도자 중에는 내 몸을 고쳐 주는데 왜 할인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거절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동에도 새마을 지도자를 위시하여 공적 조직원의 주민등록표 상단 한 곳에 표시하여 가족이 찾아왔을 때 즉시 이 분은 새마을 지도자의 부인이다, 자녀이다, 라고 알고 인사하도록 하니 그렇게 좋아하여 우리 직원들은 이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새마을 지도자와 우선적으로 협의하는 등 그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으니 지도자들의 사기는 앙양되어 갔습니다.
또한 지도자에 못지않게 부인들의 위로에도 힘썼습니다.
그래도 내 남편이 봉사하는 것을 지역에서도 알아주더라 하는 긍지를 부인들이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또한 새마을 협의회 내에 친목회를 별도 조직, 이러한 것을 자체 추진하도록 하였습니다.
<전 주민이 한데 뭉쳐>
셋째가 자생 조직의 참여 유도인 것입니다. 저희 새마을 지도자들은 각종 자생 조직에 자기 취미에 맞는 조직의 일원으로 용마산을 산책 공원으로 조성할 때부터 참여시켰습니다.
이제는 전 자생 조직(용마 조기 친목회, 용마와 용마 배드민턴 클럽, 기계 체조 부인회, 솔입회, 강인회, 조기 축구회)에서 2.3명씩 오늘도 열심히 자기 체력 관리를 하면서 1일 1회, 용마산의 자기 조직의 자연 보호 책임 구역 내에서 휴지 줍기, 나무 안 찍기 등을 홍보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택가에서 상가에서 지역 내 직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 조직에 속한 지도자들에게 이해와 설득을 하도록 하여 새마을운동을 심화하여 저변으로 활성화 시키고 있습니다.
넷째로는 새마을 금고의 내실화인 것입니다.
우리 새마을 금고도 4년 밖에 안 되었어도 회원 5천 3백 명에 자산 5억 4천여 만 원으로 1세대 1통장 갖기 운동이 완전히 이행되어 1세대 당 10만 원씩 저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 자산을 우리 마을의 상한선으로 정하고 내실화를 기하니 동대문구에서 가장 우수한 새마을 금고로 되었으며 구판장도 시범 구판장으로서 생활필수품의 원활한 유통에 일익을 담당하여 앙등되는 물가를 견제하면서 자체 전물(4층 250평, 시가 2억 5천만 원)로 서민의 생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새마을운동의 재원을 이 새마을 금고의 이익금의 일부에서 부담함으로서, 정부의 지원 없이도 도시 새마을운동을 지속, 활성화 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 마을 금고에서는 82년도 예산 편성 시, 정식 항목으로 택할까 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신앙화 하였을 때 새마을운동의 종주국으로 부끄러움이 없이 우리 민족은 이렇게 나의 빈곤과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싸웠다고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새마을 지도자들은 9월 1일 새마을 날을 기점으로 도시 새마을운동을 활력화 하고자 큰 건물에는 대형 새마을 기를, 거리에는 소형 새마을 기를, 100여 개, 20여만 원을 들여 준비하고, 태풍 에그니스호가 불어오는 비바람 속에서도 비가 오면 하기(下旗), 비가 안 오면 게양의 작업을 하루에도 2, 3회 반복하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도시에도 심화 활성화되어 조국이 바라는 자조, 번영, 복지의 제 2차 새마을운동이 힘차게 전개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보이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 새마을운동의 기수로서 일하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며 저는 공직을 떠나더라도 여러 새마을 지도자와 더불어 나의 가정과 마을과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쳐 일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자료출처 : 새마을 통신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