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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반, 오늘날의 멕시코 북부에서 중남부로 남하하기 시작한 수렵민족이 있었다.
그 도중 그들은, 오늘날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호수와 습지대로 이루어진 곳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선인장 위에 올라앉은 독수리가 뱀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 장면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그 습지대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의한다.
테노치티틀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그리고 오늘날 아즈텍 제국 또는 아즈텍 문명이라고 알려진 국가는 이렇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후 2백여년 동안 아즈텍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중남부 멕시코의 패자로 떠올랐고, 많은 부족들을 굴복시켜 그들에게서 공물을 받는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즈텍 제국은 아메리카 대륙 밖에서 온 사람들에게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즈텍 제국이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멸망한 날이다.
오늘의 주인공, 에르난 코르테스.
아즈텍 제국을 멸하고, 옛 아즈텍인들을 가혹하게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르난 코르테스 데 몬로이 이 피사로(Hernán Cortés de Monroy y Pizarro, 1485 ~ 1547.12.2)는 스페인의 탐험가로, 오늘날 멕시코 지역에 위치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멕시코를 스페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코르테스는 스페인 북부의 메데인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스페인 중서부의 살라망카로 유학을 떠나 법학을 공부하고, 법원 서기로 일했다고도 전해진다.
오늘날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한 코르테스가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20세 때인 1504년의 일이다.
오늘날의 히스파니올라 섬으로 건너가 농사를 짓는 한편 새로 건설된 도시 아수아의 서기 일을 하는 등 재산을 벌어들인 것이다.
히스파니올라 섬의 위치.
아즈텍 제국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코르테스가 아메리카 대륙 가운데 처음으로 연을 맺은 곳이
바로 이 곳이다.
1511년, 코르테스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오늘날의 쿠바 정복에 나섰다.
이 원정에서 코르테스는 상당한 공적을 세웠고, 새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쿠바의 총독이 된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에게 땅과 노예를 하사하는 등으로 보답했다.
이것으로 코르테스는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지위도 높아져, 쿠바에 있는 도시 산티아고의 시장으로 두 번 선출되기도 했다.
쿠바의 위치.
히스파니올라 바로 옆이다.
한편,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섬을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아메리카 본토에 대해서는 금이 많이 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이에 벨라스케스는 아메리카 본토로 두 차례 원정대를 파견하는데, 두 번째 원정대가 파견된지 1년 뒤인 1518년에 세 번째 원정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원정대의 대장으로,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코르테스를 임명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의 생각을 금세 부수어버리고 만다.
한달도 채 지나기 전에 뛰어난 연설 능력을 발휘하며 6척의 배와 300명의 병력을 모은 것이다.
코르테스라는 인물이 자신의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벨라스케스는 세 번째 원정대의 지휘자를 다른 인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수를 친 쪽은 코르테스였는데, 이듬해인 1519년에 11척의 배에 500여명의 병사, 10여 필의 말과 10문의 대포 등을 싣고 돛을 올린 것이다.
쿠바를 정복하고 초대 총독이 된 디에고 벨라스케스.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쿠바 총독이 된 다음의 행적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없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3년 뒤인 1524년에 세상을 떠났다.
덧붙여 검색엔진에 디에고 벨라스케스라고 입력하면 화가 벨라스케스가 검색되는데,
두 사람은 동명이인이다.
본토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그곳에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주변의 아메리카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 차례차례 복속시켰다.
코르테스의 원정대가 말이나 대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아메리카인들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황금을 가지고 있다는 아즈텍 제국에 대해 듣게 된다.
이에 코르테스는 본격적인 원정 준비에 착수하지만, 뜻밖의 일에 부딪치게 된다.
원정대원 가운데 일부가, 쿠바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이다.
코르테스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타고 온 배들을 모두 불태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쿠바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코르테스가 함대를 불태운다는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상관인 총독의 명력을 무시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행동이 자칫하면 반역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어디까지나 조국과 국왕의 이익을 위해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사후승인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다.
코르테스 시대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
스페인 왕인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했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원정은 완전히 독단에 의한 것이었고,
코르테스는 그 독단의 결과가 대단한 것임을 카를로스에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같은 해인 1519년,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 원정에 나섰다.
아즈텍 제국에 가까이 다가간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정치적인 결점을 파악했다.
아즈텍이 인근의 부족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며, 식량과 공물을 조달해 간다는 것이었다.
아즈텍의 지배를 받는 부족들의 불만이 상당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코르테스는 그들에게 기독교와 스페인 왕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자신과 함께 아즈텍을 무너뜨리자고 설득했다.
제안을 거절하는 부족들은 무력으로 진압했고, 몇 차례 전투를 벌인 뒤에는 여러 부족들로부터 공물이나 동맹 제의를 받기도 했다.
결국 코르테스는 20만 명이 넘는 동맹군을 얻을 수 있었다.
코르테스의 진군로.
게다가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한 코르테스 일행을 본 아즈텍의 왕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기고 직접 나와 환영했다.
당시 아즈텍 제국에는 한 가지 신화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풍요와 평화의 신이자 아즈텍인들에게 농경과 베 짜는 법, 달력 등을 가르친 켓살코아틀이 전쟁의 신의 음모로 쫓겨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언젠가는 켓살코아틀이 돌아올 것이라는 전승도 있었는데, 코르테스 일행의 특징인 흰 피부에 금발은 켓살코아틀의 외모라고 전해지는 것과 일치했고 십자가는 켓살코아틀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한 해는 1519년이었고, 켓살코아틀이 돌아온다고 전해지는 해는 1500년이었다.
코르테스가 몬테수마에게 기습공격을 가해 포로로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포로로 잡힌 몬테수마에게 스페인 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테노치티틀란에서 보물을 약탈하고 신상을 파괴하는 한편 귀족들을 살해했는데, 코르테스의 테노치티틀란 정복이라는 소문은 쿠바에까지 퍼져나갔다.
코르테스와 몬테수마의 만남.
코르테스를 신으로 착각하고 끝내는 나라를 내어준 몬테수마를 어리석은 군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느낌이다.
정말 이중삼중으로 켓살코아틀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니, 신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듬해인 1520년,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1천 명의 토벌군을 파견했다.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군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코르테스는 야습을 가해 토벌군 사령관을 사로잡고 토벌군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편, 테노치티틀란에서는 치명적인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 수비를 위해 남겨둔 병사들이 아즈텍 제국의 전통 축제를 반란 음모로 오해하고, 무력으로 진압해버린 것이다.
코르테스군의 학살에 분개한 아즈텍인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코르테스는 즉시 수비군과 합류했지만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까지도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던 아즈텍의 왕 몬테수마는 아즈텍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가, 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18세기 초에 그려진 몬테수마 2세.
위에서 언급했듯이 코르테스에게 나라를 잃은 어리석은 군주로만 생각되지만,
법률을 개혁하고 재판소를 설치하는 한편 많은 건축물을 세우고 수로와 병원을 신설하는 등
내정 면에서 다대한 업적을 남겼다.
같은 해인 1520년 6월, 코르테스군은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탈출 도중에 아즈텍인들에게 발각당했고, 곧바로 전투가 벌어졌다.
후대의 스페인인들은 이 사건을 ‘슬픔의 밤’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전투에서 대패한 쪽은 코르테스였다.
전리품을 대부분 빼앗겼을뿐더러 스페인인 8백여 명, 아메리카인 동맹군 1천여 명을 잃은 것이다.
코르테스 자신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동맹 부족의 영토로 퇴각했다.
이후 코르테스는 다시 한번 아메리카인 부족들을 정복하고 동맹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정비했다.
한편 해가 바뀐 1521년, 아즈텍 제국에서는 스페인인들에게서 옮은 천연두가 퍼져나갔다.
이전까지 천연두에 걸려본 적이 없었던 아즈텍인들은 급속도로 수가 줄었고, 코르테스는 그 해 5월에 테노치티틀란 공격에 나섰다.
테노치티틀란은 거대한 호수 한가운에 있는 섬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즈텍 제국은 몬테수마의 뒤를 이어 즉위한 쿠아우테목의 명령으로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끊었다.
이에 맞서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포위해 식량공급을 차단하고, 전함을 제작해 호수를 장악했다.
테노치티틀란 주변의 지도.
검은 실선이 쿠아우테목의 명으로 끊어진 다리이고 Marais라고 되어있는 곳은 습지,
나머지는 호수다.
녹색은 호수 바닥의 진흙을 퍼올려 농경지를 만든 것인데, 이것을 치남파라고 한다.
결국 같은 해 8월 13일, 코르테스의 명령으로 투입된 아메리카인 병사들은 쿠아우테목을 사로잡고 테노치티틀란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으로 아즈텍 제국은 완전히 멸망한다.
아즈텍 제국의 열한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쿠아우테목.
코르테스의 스페인·아메리카인 동맹군에 맞서 4개월 동안 테노치티틀란을 방어했지만,
끝내는 코르테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후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황족인 틀라코친을 명목상의 황제로 삼고, 총독으로서 멕시코를 다스린다.
이듬해인 1522년, 아즈텍 제국 정복의 공로를 인정받은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 총독으로 임명됐다.
1524년, 코르테스는 오늘날의 온두라스로 원정을 떠났다.
태평양 탐사를 위해 파견했던 부하들이 그곳에서 독자적인 정복사업에 나서, 통치자가 됐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온두라스의 위치.
하지만 온두라스 원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뿐더러, 코르테스 자신의 지위까지 흔들어놓게 된다.
테노치티틀란 관리를 맡겼던 부하들이 잔혹한 정치를 펼쳐, 극심한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이런 상황은 스페인 본국에 보고됐고, 스페인은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조사단장은 아메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코르테스는 조사단장을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총독으로서의 코르테스.
천신만고 끝에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지만, 정작 총독 자리는 오래 지키지 못했다.
1528년, 코르테스는 본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에게 자신의 죄가 없음을 직접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카를로스는 코르테스에게 환영식을 베풀고 후작 작위를 내렸지만, 앞으로도 아메리카에서 활약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530년, 코르테스는 옛 아즈텍 제국의 영토에 설치된 식민지인 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곳에서 태평양 탐험사업에 몰두하지만, 주목할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1540년, 코르테스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0년 전과는 달리, 어떤 대접도 받지 못했다.
다시 7년이 지난 1547년 12월 2일, 에르난 코르테스는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뉴 스페인으로 옮겨져 매장됐다.
생전까지만 해도, 코르테스는 위대한 영웅이자 정복자로 평가받았다.
아즈텍 제국 정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받았고,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과 함께 유럽 문명의 승리라고 불렸다.
잉카 제국을 멸한 프란시스코 피사로.
코르테스라는 이름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먼 친척이기도 했다.
하지만 1821년에 멕시코가 독립하고 민족주의가 유행하는 한편 유럽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코르테스를 침략자이자 살인자로 비난하는 목소리도 커져 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코르테스는 아즈텍 문명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아즈텍인의 목숨을 앗아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코르테스에게 고문받고 있는 쿠아우테목을 그린 것.
코르테스는 처음에는 쿠아우테목에게 우호적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즈텍의 보물을 숨긴 곳을 대라며 쿠아우테목을 고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쿠아우테목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코르테스의 온두라스 원정 무렵 반란죄로 처형당했다.
하지만 아메리카인 동맹군을 끌어들여 아즈텍 정복에 활용한 점은 코르테스의 외교적 능력이 뛰어났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게 하며, 적은 수의 병력으로 몇백만 명의 인구를 보유했던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은 군사적 재능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코르테스군과 아즈텍군의 전투를 그린 것.
코르테스군에는 스페인인 기병이 한 사람 있고, 아메리카인 동맹군이 두 사람 그려져 있다.
아즈텍 제국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인을 동맹으로 끌어들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으며,
후에 잉카 제국을 멸하는 피사로 역시 이런 전략을 응용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코르테스가 옛 아즈텍인들을 가혹하게 지배하며 많은 아즈텍인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하급 귀족의 아들이라는, 그리 탄탄한 지위를 보장받지도 못한 인물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었으며
그들을 이끌고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거기엔 분명, 그동안 가려져 있던 또다른 에르난 코르테스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잔인하고 가혹한 통치자이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웅변가였고
아즈텍 제국에 반발하는 아메리카인들을 이용한다는 작전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끝내는 거대한 제국의 문을 닫은 정복자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르난 코르테스.
물론 총독으로서 옛 아즈텍인들에게 저지른 일들은 변호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코르테스를 평가해서도 곤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