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양(陽)자는 양고명야 산남왈양[陽高明也 山南曰陽]이라하여 산남쪽의 따뜻한 양지(陽地)를 말한다 언덕부(阜)자와 볕양(易)의 합쳐진 글자이다 언덕부자는 좌부방(阜=좌부방)이라하여 언덕을 의미하는글자이고 볕양(易)자는 햇볕(日)이 쉽게 잘 비취어지는 따뜻한 양지(陽地)쪽을 뜻하는것이다
이 글자는 또 거짓양(佯)자와 뜻이 통하는글자로 비슷하면서도 아닌것으로 쓰일때도있는것임을 유념해야한다 미치지도 않았으면서도 미친체하는것을 양광(陽狂)이라하고 놀라지도 않았으면서도 거짓으로 놀란체하는것을 양경(陽驚)이라고한다
양명(陽明)은 아주 밝다는뜻이며 근세 중국의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이 주창한 이 양명학을 알아보야야한다
陽明學
중국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이 주창한 유학의 한 계통. 왕수인은 명나라의 지배사상이었던 주자학(朱子學)에 대항하여 인간평등관에 바탕을 둔 주체성 존중의 철학을 확립하고, 만물일체의 이상사회 실현을 지향하는 심즉리(心卽理)·지행합일(知行合一)·치양지(致良知)라는 주제로 강학활동(講學活動)을 정열적으로 하였다. 제자에는 지식인 외에 제염(製鹽) 노동자출신인 왕간(王艮) 등도 있어 폭넓게 신봉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왕교에게는 많은 서민이 모여들어 주체적 실천을 존중하는 태주학파(泰州學派)가 형성되었다. 왕수인의 생전·사호 약 50년간 위학(僞學)이라고 하여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하였으나, 제자들의 교설에 힘입어 마침내 양명학은 공인되어 명나라 말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사상경향이 생겨나 마음을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 하여 수양을 존중하는 일파를 양명학정통파·우파(右派) 등이라고 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주자학의 수양법에 접근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마음을 무선무악(無善無惡)으로 보고, 속박을 벗어난 절대자유의 인간 생활방법을 추구한 왕기(王畿)나 주체적 실천을 존중한 왕간 등은 양명학좌파라고 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인간의 존재성 인식을 위하여 불교와 노장사상을 섭취하여 유불선(儒佛仙) 삼교일치(三敎一致)의 입장을 취한 사람, 사회적 실천을 존중해서 공동생활조직을 만드는 사람, 대담한 사회비판을 하는 사람 등이 나타났다. 이런 경향의 정점에서 이지(李贄)는 일상적 생활에 입각하여 종래 가치체계의 형이상학성·허구성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그 결과 경제생활의 향상을 배경으로 명나라 말기에는 주체의식이 고양되어 자유주의적·비판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는 한편 관헌에 의한 탄압,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는 학자들로부터의 비판이 더하여져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청(淸)나라 때는 다시 주자학을 정통으로 세우는 사상통제가 더해지고, 또 양명학의 비실용성이 지적되면서, 이 세력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실증(實證)을 존중하는 객관주의적 학풍이 생겨났지만, 인간주체성의 존중, 기성가치에 대한 비판의식 등 양명학의 성과는 사상적 유산으로 계승되었다.
〔한국의 양명학〕 양명학이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17세기 무렵이나, 왕수인의 《전습록(傳習錄)》이 들어온 것은 1521년(중종 16) 이전으로 왕수인이 살아 있을 때이다. 그러나 그때 지식인들은 정주(程朱)의 사상계통에 치우쳐서 이와 다른 사상은 사도(邪道)로서 백안시(白眼視)하여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정제두(鄭齊斗) 등에 의해서 연구되고 또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수용과정> 양명학이 들어온 초기에는 그 내용이 유교사상에 대항하는 것이라 하여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게 계속 배척을 받았다. 그 뒤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허균(許筠)·이수광 등으로 이어져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요가 <양명의 격치설(格致說)을 설명하고 양명의 사상으로 지금 세상을 다스린다면 왜(倭)를 소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선조가 재상 유성룡(柳成龍)에게 언급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다만 그 실용과 실천면에서 유학사상의 기성관념이나 도덕률을 반대하는 점이 수구(守舊)와 봉건보루(封建堡壘)의 존속을 위태롭게 할 염려가 있어 양반계급의 반발을 받았으며, 또 한편으로 불교와 도교의 주장까지도 받아들이는 자세가 유교지상주의의 정주학파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였다.
<양명학파의 수립> 왕수인의 사상은 계속 보급되어 장유·최명길 등은 본격적으로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유교철학으로서 정립시킨 것은 정제두이다. 그가 양명학에 경도(傾倒)된 이유는 <주자학자들의 학문이 학문하는 것이 아니라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 데에 반성을 촉구한다>는 확고한 근거에 따른 것으로, ① 주자학의 이원적 상응논리(相應論理)에 의거하지 않고 상즉논리(相卽論理)에 근본하는 일원론 ② 심즉리에 바탕하여 양지(良知)는 천리(天理)요, 천리는 양지라는 양지론(良知論)의 전개 ③ 주희(朱熹)의 이(理)를 물리(物理) 혹은 헛된 조리(條理)라고 반대하며 양명학의 이는 생리(生理)·생도(生道)·생기(生氣)라고 한 삶의 이치 등을 내세웠다. 정제두가 만든 <가법(家法)>에는 더욱 보수성이 두드러졌는데, 정주학적 허위는 비판하였으나 사상적 혁명성은 없었다. 하곡학파의 문류(門流)에는 정통파로 통하는 이재(李材)가 있었으며, 또 양득중(梁得中)의 양지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절충설이 대두되었고, 정제두의 연고지인 강화에서는 그의 자손과 이광사(李匡師)·심육·이종휘(李鍾徽) 등이 양지사관(良知史觀)에 입각하여 역사를 파악하였을 뿐 아니라, 정음(正音)·서예(書藝)·시문(詩文)을 발전시켜 강화학파(江華學派)로서 2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양명학의 영향> 이미 강화학파에서 이상학(李象學)·신작(申綽) 등이 실학을 연구하였고, 이건방(李建芳)·이충익(李忠翊) 등의 진가(眞假)추구는 실사구시의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홍대용(洪大容) 등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또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중심인물들도 양명학에 의하여 사상적 무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저서에 <천지만물이 한몸이다>라고 한 것과 사민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 도처에 양명사상과 공통되는 점이 많다. 양명학의 주체사상은 한국독립운동과도 연결되었다. 이종휘 등 강화학파의 사관이 신채호(申采浩)에 미친 사상적 주체성, 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송진우(宋鎭禹) 등 독립운동가에게 미친 영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택영이 성의(誠意)가 격물치지에 앞선다고 주장하였고, 박은식이 《왕양명선생실기》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펴내고, 정인보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조선혼을 환기시킨 내용 등은 양명학의 치양지의 사상이 한국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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