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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2 - 오스만이 티무르의 시련을 극복하고는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다!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 은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동 유럽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중세 부터 근대 까지 유럽을 위협하던
제국이며... 동시에 모든 이슬람 국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국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 가지 (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 라는 베이(bey, 부족장) 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서 시작했으며.... 정복 전쟁을 통해 셀주크 투르크국의 분파인
룸 술탄국의 멸망 이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하여 아나톨리아를 장악합니다.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무려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정복하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
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해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하는데 성공
했으며 이후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폴란드,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모로코, 남쪽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쪽으로 이란과 접하는 전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 국가가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백성들 중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믿었던 종교는 이슬람이었으니 셀림 1세가 칼리파
직위를 물려받은 시점부 터 이슬람이 제국의 국교로서 확고하게 굳혀졌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으며,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 (1876 kanun-ı esasi) 에서야 비로소 이슬람을 국교로 삼게 됩니다.
그 전에 알프 아르슬란은 터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5만명을 지휘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고 그 군세를 대파한 이후 이라크에 있던 셀주크 제국
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소아시아를 호령하는데
저 전투에서 동로마의 귀족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2만명을 이끌고 후퇴하니 패배에 일조합니다.
이후 알프 아르슬란의 터키 왕국은 룸 술탄국으로 불리는데.... 동로마 제국과 각축을 벌이던 중 1243년에
몽골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룸 술탄국을 격파하자 패배한 룸 술탄국은 몽골의 조공국이
되니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한시름 덜게 되었고.... 몽골 제국의 계승 제국중 하나이던 일칸국은
룸 술탄국의 최후 술탄이 죽은 뒤에, 후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자 사라져 버리고 소 영주들이 난립합니다.
룸 셀주크가 약화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튀르크멘 영주 (Bey) 들이 아나톨리아에 할거하여 여러
아나톨리아 베이국이 세워졌으니 그 중 하나가 오스만이었는데,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어로
작성된 최초의 연대기인 “오스만 가문의 역사” 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샤로, 이란 서부와 중앙아시아 방면의 튀르크멘 (오우즈) 유목민의 수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5만호의 튀르크멘과 타타르인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도망가 룸 셀주크에
귀부했다는데..... 몽골제국의 침략이 잦아든 뒤에 돌아가려고 했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다가
익사했고 아들인 에르투으룰은 그대로 정착하고, 룸 술탄 측에 서서 동로마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전공을 인정받아 아나톨리아 중부의 카라자다으 (Karacadağ) 라는 산지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됩니다.
신생 국가 오스만 베이국의 탄생이었는데.... 하지만 에르투으룰은 봉지를 쇠위트 (Söğüt) 로 이전당했고
그의 아들이 오스만 베이국의 건국자로 여겨지는 오스만 1세 (재위: 1299년 ~ 1326년) 이며,
그는 룸 셀주크로부터 독립을 꾀했고 당시 아나톨리아 북서부 지역에 남아있던 동로마 세력을 격파합니다.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1324년 동로마 제국 부르사를 점령하여 오스만 베이국 수도 삼았는데,
부르사의 함락은 곧 동로마령 아나톨리아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그후 니코메디아와
니케아등 요새화된 대도시들이 몇개 남아있었으나 결국에는 니코메디아가 1341년에
함락되면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터키 아나톨리아에서의 세력은 사실상 일소되었습니다.
당시 오스만 수장은 가잔 한과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명의의 화폐를 주조하고 이란의 일 한국 훌라구 가문에
공납을 바치는 속국이었으나 1335년 아부 사이드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일 한국이 분열되는 틈을
타서 바다를 건너 발칸반도에 진출하여 위용을 떨치고 백년후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을 기반을 닦게 됩니다.
오르한 가지가 재위를 시작한지 5년 후인 1330년에는,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 왕국을 포사다 전투에서
이기며 독립해 왈라키아 (루마니아) 공국을 세웠고, 6년후 1331년에는 불가리아 제2 제국에서
이반 알렉산더르가 제국의 제 2의 중흥을 시작하며..... 1331년 세르비아 왕국에서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왕위에 오르니, 그리스 북부 주변 3국 또한 전성기를 맞이하며 힘을 키우게 됩니다.
1330년 여러 베이들의 영토로 분열된 터키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마르마라 해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가 오스만의 영역이었는데, 이후 오스만 술탄국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베이국들을
복속시켜가며 소아시아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동로마 제국이 완전히 몰락해가는 틈을 타 유럽에 진출해 동로마 제국을 속국화 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황제들이 무능했거나 폭군이었다기 보다는 일이 꼬였다는
느낌이 드니, 우선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함락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팔레올로고스
왕가의 초대 황제 미하일 8세는 수도를 복구하고 제국의 국방을 위해 국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뒤를 이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국방력을 희생하더라도 세금을 감면해 주기로 합니다.
그로 인해 오스만 베이국을 비롯한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니... 사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유럽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알짜 영토는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였는데, 이후 동로마 제국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뭘 하고 싶어도 병사와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터키 서북부 오스만제국 초기 수도 부르사 Bursa 에 톱하네 Tophane 공원은 옛 부르사
성채 Bursa Kalesi ( Bursa Hisari) 인데.... 공원 입구에 이슬람 전사를
뜻하는 초대 오스만의 술탄인 오스만 가지와 아들인 2대 오르한 가지의 묘소가 있습니다.
톱하네 공원 서쪽에는 무라디예 Muradiye Bloku 가 있는데 훗날이스탄불을 점령하게 되는 메흐메트
2세의 아버지인 술탄 무라트 2세의 영묘를 중심으로 모스크와 튜르(묘) 가 모여있는 성역으로
부르사 Bursa 시내 예쉴 튜르베 Yesil Turbe 는 10개의 파란색 대리석 무덤 중에 ‘튜르베’는 5대
술탄 메흐메트 1세의 묘를 가리키니 8각형 건물 외벽을 덮고 있는 푸른색 타일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예쉴 튜르베 바로 옆에 예쉴 자미 Yesil Camii 는 무라트 2세 때인 1424년에 완성된 오스만
초기 양식의 모스크로 내벽을 덮고있는 이즈닉에서 만들어진 청록색
타일은 오스만의 미학을 표현하는데..... 예쉴은 터키어에서는 초록색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동로마 제국은 그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 때도 튀르크의 침공으로 아시아 영토를 잃을지언정 그럭저럭
싸우기도 했고, 그리스 쪽 영토를 수복하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 어린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자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 섭정,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 를 불신하던 황후, 대주교, 그리고 수하
였다가 배신한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 가 섭정이 수도를 비우자 반역자로 선포해 내전에 돌입합니다.
이 팔레올로고스 내전 (1341 ~ 1354) 은 세르비아와 교황과 튀르크 용병 (이때 오스만의
2대 술탄 오르한도 칸타쿠제노스 편에 참여했다) 들이 모두 참여하면서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또 악명높은 중세 흑사병까지 덮쳐 동로마는 난장판이 되어버립니다.
그 와중에 1354년 대지진이 아나톨리아와 유럽을 잇는 천혜의 요새인 칼리폴리스 요새를
강타했고 손 안들이고 칼리폴리스를 차지한 오스만은 처음으로 발칸 반도에
발을내딛는데, 동로마 제국은 칼리폴리스 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스만은 묵살했고, 이후 14세기 동안 오스만은 발칸 남부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의 혼란을 틈타 오스만은 그리스 북부를 집어삼키는데....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이
1355년에 급사하니 스테판 5세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후계자를 가지지 못하고 죽었기에
세르비아 제국은 순식간에 사분오열되어 몰락하게 되며.... 또다른 세력인 불가리아 제2제국 역시
세르비아 제국과 비슷하게 제위 계승 문제로 3개로 쪼개지는 바람에 오스만에게 각개격파 당해 멸망합니다.
1362년에 무라트 1세가 오스만의 3대 술탄에 오르는데.... 터키 서북부에 고대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공의회를 열었던 니케아는 후일 셀주크 튀르크인들이
점령해 이즈닉으로 도시 이름이 바뀌었으며 1197년 1차 십자군 때는 격렬한 전쟁터 였습니다.
이즈닉 박물관 Iznik Muzesi 을 보는데, 14세기말 무라트 1세가 어머니인 닐뤼메르를 기리기
위해 지은 이마레트로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구빈원이니, 어머니는 비잔틴
제국 황녀였다는데 오스만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다 보니 아마도 정략결혼을
한 모양이니... 박물관에는 로마, 비잔틴 대리석과 이즈닉 도자기 등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1332년에 건축된 진하즈 외즈백 자미 보다 160년 늦은 1492년에 지어지기는 했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예쉴자미 에쉴 자미 Yesil Camii 이슬람 사원이 있으니.... 사원에 부속된 미나레는 낮고
굵으며 기운차고 다채로운 색채의 대리석 기둥과 미나레의 타코이즈 블루 빛의 타일 등이 볼만합니다.
1389년에 4대 술탄에 오른 바예지드 1세는 유럽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
해에 바로 출격해서는 1389년의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공국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를 전사시키고 세르비아의 대부분을 정복해 기염을 토합니다.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는 그 여세를 몰아 3개로 분열된 불가리아를 공격하니.... 1393년
과 1395년 그리고 최후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1396년 전쟁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잔해들을 모두 병탄하는 위엄을 떨치며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고는 합니다.
전쟁 승리로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해 동로마 비잔틴제국을 고립시키면서 60년후인
1453년에 도시 함락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데.... 터키 북서부 부르사 Burasa
에 이슬람 모스크 울루 자미Ulu Camii 는 셀주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데 아랍 스타일을 모방한 전형적인 셀주크 양식으로 10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술탄 바예지드 Beyazit(베야즛) 는 저 전쟁에서 승리하면 부르사 Burasa 에 20개 모스크
를 짓겠다고 선서했는데, 실제로 그렇수 없으니 결국 4× 5 = 20개 돔이 있는
모스크를지었으니, 바로 부르사의 울루 자미 Ulu Camii 가 대표적인 모스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은 왈라키아(루마니아) 지방으로의 진출은 실패하는데, 이는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르체아 1세가 '카라노바사 전투(1394)' 와 '로비네 전투(1394)'
에서 승리하면서 바예지트 1세의 튀르크군을 철퇴시켰기 때문인데,
물론 왈라키아군 역시 타격을 입어 전투후,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 왕국으로 도피합니다.
오스만의 세력이 나날이 강해지자 서유럽 국가들이 헝가리 왕국의 왕, 지기스문트의 주도로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결성하였으나,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1396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패시키는 위엄을 보였으며 이 시기를 오스만의 1차 전성기로
보는데.... 영토는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북부에 이르게 됩니다.
바예지트 1세 별명이 이을드름 (Yıldırım), 튀르키예어로 뇌제 (雷帝) 였으니 성격이 불같았던
인물로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제패한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는
중에..... 동쪽에서 갑자기 티무르가 나타나 칭기즈 칸 가문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후 아나톨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합니다.
오스만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지방에 할거하던 튀르크계 소국들을 병합하였는데, 쫓겨난
군주들이 티무르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때다 싶었던 티무르가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니, 일본 센고쿠 시대에 가이국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를 집어 삼키자
영주들이 북쪽으로 달아나 요청하니 에치고국의 우에스기 겐신이 남하한 것과 비슷합니다.
니코폴리스 전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싸움에는 자신 있었던 당대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티무르와의 전쟁을 위해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제패한 대군을 직접 이끌고
출병했지만.....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전투에서 완패하여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술탄은 굴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오스만은 바예지트의 네 아들 사이의 내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술탄의 왕비가 옷을 모두 벗고는 맨몸으로 티무르에게 술을 따르는 치욕을 당했으니,
이후 오스만 제국은 왕궁에 정식 왕비를 두지 않고 노예라 불리는 후궁들만 두는 전통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이전까지 정복했던 튀르크계 소국들도 티무르에 의해 모조리 독립을 되찾았으며, 동로마
제국을 포함한 유럽의 신하국들도 상딩수가 독립하였으니..... 이로인해
오스만은 십여년간 암울한 내전기를 맞으며 혼란에 빠지니 이른바 오스만 공위시대라 불립니다.
바예지트 1세의 장남은 1400년에 요절했으므로 둘째 쉴레이만이 전투 당시 수도 에디르네에서 루멜리아,
즉 유럽을 관정하고 있었으며 셋째 이사는 부르사, 넷째 메흐메트는 아마시아를 맡아 각각
아나톨리아를 통치했으니..... 바예지트 1세가 죽기 전 까지 세형제는 협력하며 오스만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던 1403년, 아버지 바예지트는 티무르 진영에서 죽었고 티무르는 넷째 메흐메트를 술탄
으로 지목하자 장남이던 쉴레이만과 동생 이사가 반발하며 내전이 발발하였으니,
1403년에 이사와 메흐메트가 싸웠는데 메흐메트가 승리하여 부르사에 입성하였고,
이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서 재차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카라만으로 도주합니다.
양측의 완충 역할을 하던 이사가 패해서 퇴장하자 쉴레이만은 행동을 개시하여 1404년에
보스포루스를 건너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부르사, 그리고 앙카라까지 점령하자
메흐메트는 섣불리 싸우기 보다는 병력을 보존하며 아마시아로 후퇴해 수비에
일관하며 때를 노리며 티무르 측에 요구하여 포로였던 동생 무사를 데려와 휘하에 둡니다.
쉴레이만이 사실상 오스만 대부분을 다스리던 1410년에, 조용히 세력을 키운 메흐메트는
동생 무사에게 흑해를 건너 트라키아에 상륙하게 하여 쉴레이만의
후방을 쳤지만, 무사를 돕기로 했던 세르비아의 부크 라제로비치가 배신하며 패주합니다.
이후 승리를 한 탓에 자만해진 쉴레이만은 사치스럽게 지냈고, 그 틈에 세력을 회복한
무사가 유럽 서쪽 에디르네로 진격하자 1411년에 수비대가
항복하였으며.... 이에 쉴레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다가 잡혀 처형됩니다.
루멜리아(유럽) 를 완전 장악한 무사는 쉴레이만 편을 들었던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고,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2세는 메흐메트
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앙카라와 부르사 일대를 수복한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
폴리스에 수비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보스포루스를 건너 무사와 겨루었으나 패합니다.
메흐메트는 자신의 말이 칼에 베이는 수모까지 겪은후 소아시아로 철군하였고... 1413년에는 재차
보스포루스를 건넌 메흐메트는 세르비아 공국의 데스포트 스테판 라제로비치의 지원을 받아
소피아 인근의 차무릴 전투에서 무사를 격파하니, 무사는 배신의 댓가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0년만에 내전을 종식한 메흐메트는 공식적으로 메흐메트 1세로 술탄으로 즉위합니다.
술탄으로 즉위한 메흐메트 1세는 제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주살하고 아나톨리아와
유럽의 영토를 규합하는데 성공하면서 유럽의 신하국들에게 다소 지나친 요구를
하며 오스만의 위엄을 과시했던 바예지트와는 달리,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며 신하국
으로서 붙잡아두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티무르 제국을 의식하여 현상 유지 정책을 폅니다.
또한 메흐메트 1세는 많은 반란을 진압했고, 이후 무라트 2세때의 재확장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왈라키아(루마니아) 를 굴복시켜 발칸 반도의 신하국들을 오스만 술탄국의 지배하에 붙잡아
두었으며, 이후 무라트 2세 때인 1421~1422년에 아나톨리아 남서쪽의 여러 소국들을
재병합했고, 1428년에는 한때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였던 카라만까지 합병합니다.
한편, 1402년에 오스만 술탄국이 앙카라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의 몰락에
안심하며 오스만이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방치했는데....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국이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가까이서 목격해왔고,
오스만 술탄국이 또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자 유럽 각국에 급히 구원 요청을 합니다.
마침내 1444년에 동유럽 각국들이 대규모 십자군을 편성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 십자군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의 무라트 2세에게 궤멸되었고,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도 오스만 술탄국이 승리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사실상 확정나게 되었고, 오스만 술탄국은 다시금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역대 군주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서양의 Prince 에
해당하는 술탄으로 지칭되었고, 메흐메트 2세 이후로는 황제라는 의미의 Padishah,
Shahanshah 및 로마 황제 등 칭호를 사용했으며 메흐메트 2세 이후 제정(帝政)
이 된 후에는 기존의 술탄, 여술탄의 칭호는 황자, 황녀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