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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01.
-이제 곧 착륙할 예정이오니,승객 여러분들은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맑고 경쾌한 스튜어디스의 목소리가 비행기 안에 울리고 오랜 시간 동안의 비행에 지쳐 잠이 들었던 정수는 스튜어디스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드디어,한국인건가........눈을 비비며 창 밖을 바라 본 정수의 심장은 두근두근,기대감에 떨려왔다.27살의 정수는 5년전으로 돌아가 잠시 추억에 잠겼다.
창 밖을 향해 본 한국의 하늘은 마냥 푸르고 깨끗했다.가을이다...가을...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계절도 가을이었지,영운아..보고싶어....
비행기가 착륙하고 정수는 부푼 마음을 안고서 비행기에서 내렸다.내리기전 스튜어디스에게 윙크하는건 센스.정수의 윙크에 스튜어디스의 얼굴이 붉어진다.웃겨..피식-,시니컬하게 웃은 정수는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빨리했다.게이트에서 빠져 나온 정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누군가를 찾는듯 했다.그러다 곧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 보조개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동해야!!"
"어,정수야~"
동해란 이름을 외치며 손까지 흔든체 트렁크 가방을 질질 끌며 동해란 사람에게로 뛰어오는 정수..활기차 보이는 정수의 모습에 동해는 씁쓸하면서도 기쁜듯 웃어보였다.정수야,너 그거 아니..영운이가 결혼했단거.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참 난감하기 짝이 없는 동해였다.어젯밤,정수가 입국하기 전,국제전화로 간단히 통화를 한 두 사람이었다.통화를 하는 내내 정수는 영운의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영운이 잘 있지?,영운이가 나 보고싶어 하진 않아?,영운이 여전히 멋있지?,나 빨리가서 영운이 보고싶다 동해야,우리 영운이,영운이..........
그런 정수에게 영운의 결혼 소식으로 상처를 줄 수 없었다.어차피 정수가 알게 될 일이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내 입으로 어떻게 정수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을까,영운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난 정수의 표정을 생각하기도 싫은 동해였다.영운을 위해,아니 정확히 말 하자면 서로를 위해 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정수였다.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영원히 함께일꺼라고..정수는 철석같이 믿었다.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그러니 영운일 잘 보살펴달라고 동해에게 부탁하고 간 정수였다.그 후 5년 뒤 정수는 정말 돌아왔지만 정작 영운은 늘 있던곳에 없다.그는 결혼을 해버렸고 애달픈 사랑을 나눴던 정수는 잊어버린듯 했다.
공항 근처 카페에 앉은 두 사람은 그간의 회포를 풀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외국에 나갔는데 처음엔 의사소통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앓았단 말과 한동안은 친구가 없어서 참 많이 쓸쓸했단 것,그래서 밤에는 참 많이 울었단 것...정수는 간간히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그런 정수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는 동해는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마치 아빠가 아이의 학교에서 있었던 하루 일과를 듣는 듯한 모습이랄까?
"아참,영운이는?"
"풉-켁켁..어?"
드디어 올것이 오고야 말았나,왜 영운이 얘기를 꺼내지 않나 싶더니,기어이 내 입으로 영운이의 근황을 말해줘야 하는건가.갑자기 영운의 이름이 거론되자 동해가 놀란 듯 마시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뿜어냈다.그런 동해의 행동에 정수의 얼굴은 요상하게 구겨졌다.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이런건 그냥 넘어가기 힘들다.더러워,이동해..
"뭐라구?"
"영운이,영운이는 왜 같이 안 온거야?영운이 나 온거 몰라?"
"저기..그러니까 정수야..."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려대며 뜸을 들이는 동해를 보며 정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내가 아는 이동해가 맞나 싶다.3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친구 이동해는 하고싶은 말 다 하고 직설적이기로 유명한 아이였다.거기다 까칠하긴 얼마나 까칠하던지,머리에 떠오르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천하의 이동해가,지금 내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건가?
"뭔데,영운이한테 무슨일 있어?"
"...................저...."
"이동해!!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봐,뭔데?영운이가 나 두고 딴 여자랑 바람이라도 났어?"
"어?!!"
뜨끔,동해의 눈이 똥그래지며 화들짝 놀라는 얼굴을 하고 정수를 쳐다본다.그런 동해의 반응에 정수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버렸다.정말이야..?믿을수 없단 눈을 하고선 동해를 쳐다보는데 차마 정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수가 없어서 애써 정수의 시선을 외면해버리는 동해였다.
"..동해야,"
"어..."
"아니라고..해줘..."
나도 될 수만 있다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 정수야...여전히 영운이가 너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얼른 나와 함께 영운이에게로 가자고...이제 다른 곳으로 가지말고 니가 있어야할 영운이의 옆자리로 돌아가자고...그렇게 말하고 싶은데,사실인걸...너만 사랑한다던 김영운은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어.영운이와 그의 아내를 꼭 닮은 아이까지 있는걸, 정수야 이미 영운이는 너의 사람이 아닌 타인의 사람이 되어버렸어..
순수하고 맑기만 하던 그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뿌옇게 흐려졌다.5년동안 영운을 생각하면서 외국생활을 버티고 또 버텨온 정수였다.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그러나 정수는 그게 아니었다.1년,2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영운에 대한 애정이 날로만 깊어가는 정수였다.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홀로 귀국을 결심한 뒤 드디어 영운을 만날 수 있단 생각으로 귀국하기 일주일 전 부터 잠을 설친 정수였다.서로 사랑한게 정수가 외국에 나가있었던 5년이란 시간을 빼도 자그마치 5년이었다.합하면 10년째 사랑인데,오로지 영운에게만 일편단심이었는데,그런 나의 지독하게 눈물겨운 사랑이 날 잊은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그래도 이렇게 눈물만 흘려보내며 가만히 앉아있을수 밖에 있었던건,영운의 결혼상대가 남자가 아닌 여자란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니가 나 버리고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하고 있었다면 그 남자 찾아가서 패죽여버렸을거야,그런데 내가 가만히 이렇게 앉아서 넋놓고 있는 이유가 뭔 줄 아니?....상대가 여자란 것 부터가,나랑 상대가 되질 않잖아....난 남자니까,너랑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니까..우릴 향한 시선이 곱지도 않을테고 우리 두 사람의 사랑에 욕이란 욕은 다 니가 들을테니까,그리고 결정적으로 너 닮은 아이도 낳아 줄 수 없잖아...그래서 차마 날뛰질 못하겠어,속으로는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니가 너무 미워 죽겠는데,너 찾아가서 객기란 객기는 다 부리고 싶은데....너랑 결혼한 사람이 여자니까,애써 참고있는거다..
어느새 정수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동해는 정수의 눈물을 연신 닦아주며 정수의 매마른 등을 쓸어주고 정수를 달래주었다.동해가 토닥여주자 정수는 더욱 울컥해 엉엉,소리를 내며 동해에게 안겨 많은 양의 눈물을 쏟아내었다.동해야,나 어떡하니...어떡해야해,나...영운이와 다시 예전처럼 행복하던 그 때로 돌아가려고 이렇게 온건데,또 힘들거 알면서도 왔는데...정작 영운이는 없잖아,내 사랑이...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훨훨 날아가버렸잖아...
한참을 동해의 품에서 목놓아 울던 정수가 겨우 눈물을 그치고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찻잔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얼마나 많이 울었는지는 정수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눈가는 여전히 촉촉히 젖어있었고 빨갰으며 딱 봐도 알수있을 정도로 눈은 부어있었다.그리고 콧등과 볼도 빨개져 있었다.
정수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때 까지 말없이 묵묵히 기다려주는 동해였다.예전에 영운이와 소위 말하는 사랑싸움을 하고서 무작정 동해에게 찾아갔을 때 웃으며 정수를 집에 데리고 들어와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고,영운이가 밉다고 칭얼대는 정수를 아무 말 없이 다 들어주며 그래,그렇지,김영운 나쁜놈이지,라며 맞장구도 쳐주던 동해였다.늘 정수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친구이상의 존재였다,동해는.정수가 잘못을 해도 언제나 정수의 편이 되어주었던 동해..그런 동해마저 없었다면 정수는 아마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동해야,"
"응.."
"나,다시 영국...갈까..."
"뭐?!안돼 그건!!"
다시 나가겠다니,그게 무슨소리야.들어온지 얼마나 됐다고..하긴..영운이 조차 곁에 없는 이 시점에서 한국에 계속 있어봤자 아프기만 더 아플텐데,영운과의 추억이 가득한 이 곳에서 정수는 많이 괴로울지도 모른다.그래도 5년만에 보는 얼굴인데 그냥 다시 훌쩍 가버리겠다니,그건 동해가 절대 용납할수 없는 일이었다.그깟 사랑...아니,정수에겐 그깟 사랑이 아닐테지만 그래도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아닌가.영운도 정수를 잊고 살아가고 있을텐데.그래..한 때는 영운도 정수가 외국으로 나가버렸을때 하루가 멀다하고 술과 담배에 쩔어살았었다.매일 정수만 찾으며 눈물로 하루를 보냈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곧 기운을 차리고 회사 경영수업 받는거에만 몰두하는 영운이었다.그 후로 영운이 많이 바뀌었지,더이상 영운의 앞에서 정수의 이름을 거론하는건 금기시 되어버렸다.그런 영운을 잊어버리는건 안될까.
잊고 다른 사랑 해도 되잖아 정수야...나 너 아픈거 보기 싫어,너 또 외국 나가서 혼자 끙끙대고 아파할거잖아,차라리 내가 널 볼 수 있는 이 곳에서 아파해..그럼 적어도 내가 위로해주면서 같이 아파해 줄 수 있잖아.
카페에서 나온 동해와 정수는 기분 전환겸 드라이브를 즐기기로 했다.동해의 잘 빠진 페라리 F430...차에 타자마자 차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정수의 행동에 동해는 풋-,하고 웃었다.뭘 그렇게 봐,라고 물으니 정수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동해를 쳐다보며 한다는 소리가, 이동해 돈지랄 너무 심하다,라는 말.하긴, 차 한 대 빼는데 거액을 투자했으니 돈지랄이 맞긴 맞다.그래도...차 좋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타자마자 대뜸 돈지랄이 너무 심하다,라니.
"시끄러,운전도 못하는 주제에."
"나 면허 있어!!"
"면허만 있음 뭐해,운전을 못하는데."
"씨이..."
정수를 놀려먹으면 너무 재미있는 동해다.그것도 5년만에...피식,웃다가 어디 가고 싶은곳 없냐고 물으니 대답은 하지 않고 두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은뒤 투덜거리기만 한다.하하,이걸 누가 27살로 보겠어.동해가 크게 웃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수는 아무 반응이 없다.뭐하나 싶어 고개를 슬쩍 돌렸더니 차창쪽으로 얼굴을 돌리고서 조용히 울고있는 정수가 보였다.그런 정수의 모습에 대략 할 말을 잃은 동해였다.정수의 어깨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겨 정수를 품 안에 가두어 버리는 동해....안타깝기만 하다.내 친구가 사랑 때문에 아파하니,나도 아프다.김영운도 친구이지만,내겐 박정수가 더 소중해....이 순간 다시 한번 영운이 미워지는 동해였다.
"...나...혜원이네 좀 데려다 줘.."
"혜원이?니 사촌?"
동해의 물음에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러대는 정수다.혜원이 결혼 했다는데,결혼식 참석도 못하고...왔으니까 보러 가야지..하며 정수는 눈물을 닦고 베시시 웃어보였다.하나도 안 이쁘거든,동해가 정수의 뺨을 슬쩍 밀며 말했다.그래도 바보같이 웃어버리는 정수였다.그래,우는것 보다야 바보같아도 웃는게 낫지....동해도 정수를 따라 빙긋 웃어보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확실히 차가 좋아서 그런지 시원스럽게도 미끌어졌다.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혜원인가 뭔가 하는 정수의 사촌네 집에 도착한 동해의 페라리.고맙단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리려는 정수를 동해가 급히 붙잡는다.정수가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왜,하고 입을 벙긋 거렸다.
"너 어디서 살거야?"
"글쎄,집 구해지기 전까진 호텔에서 지낼까?"
"나 있는데 뭐하러 호텔에서 지내.돈지랄은 박정수 니가 더 한다."
"민폐되기 싫어,아님 혜원이네 집에서 지내던지 하지 뭐.보다시피 집이 넓어서 방도 많을거야,"
"...야,이거 가지고 있어."
동해가 내민 건 휴대폰이었다.주니까 받아들긴 했는데 정수의 머리 위엔 물음표가 한가득 떠있다.이걸 왜?,멀뚱멀뚱 보고만 있으니 동해가 내일 전화할테니까 받아,했다.그제서야 아-,하고 바보 도터지는 소리를 낸 정수가 히죽,웃는다.동해도 잘 나가는 기업에 이사라 많이 바쁠텐데,동해에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정수였다.
"그럼 얼른 들어가,"
"응응...무슨 일 있으면 1번 누르면 되?"
"아,아니!!1번 말고 2번.."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선 아니,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동해 때문에 간 떨어질뻔한 정수다.뭔가 켕기는게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거겠지,동해 몰래 풋-,하고 웃어버린 정수가 동해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차창을 내리며 내일 보자,하는 동해에게 정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손을 흔드니 동해도 역시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곧 엑셀 페달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정수는 발걸음을 돌려 트렁크 가방을 질질 끌며 높고 큰 검은색 대문 앞에 섰다.초인종을 눌리자 짹짹짹-,거리는 새 소리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정수의 사촌 동생인 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세요?]
"나,"
[..정수오빠?!!]
"응,얼른 문열어-"
[응,오빠 얼른 들어와!!!]
반가운 혜원의 목소리에 정수는 피식,웃고 말았다.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혜원이 정수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놀란 정수가 쥐고있던 가방 손잡이를 놓으며 눈을 크게 뜨다 곧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혜원의 등을 토닥였다.신랑이 보면 놀라겠다,얼른 떨어져-,장난스런 정수의 말에 혜원은 호호호,하고 웃으며 정수에게서 떨어졌다.5년만에 본 혜원은 재벌집 며느리 티가 많이 났다.부쩍 커버린 혜원을 보고 정수는 자신이 혜원의 아빠라도 된 마냥 흐뭇하게 웃어보였다.
그런데,이상하게도 익숙한 향기가 혜원의 집 안에서 났다.낯익은 향기....이 향기가 무슨 향기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정수는 또 한번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02.
"너희 신랑은,지금 시간이면 회사에 있으려나?"
"응,요즘 새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쁜가봐...야근도 자주하구,"
"아...얼굴 좀 보자-어떻게 생겼,"
혜원과 집 안에 들어서며 혜원의 남편에 대해 얘기하다 뭔가를 본 정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거실 한쪽 벽 면에 결혼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자리를 잡고 있었다.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 속에 5년동안 너무나도 그리웠던 사람이 있다는게 문제인거지.들어오다 말고 굳어버린 정수를 보며 혜원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선 오빠,하고 정수를 부른다.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자 혜원은 밉지 않게 인상을 찡그렸다.굳은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정수의 곁으로 다가가 정수를 툭툭 치며 다시 한번 오빠,하고 부르는 혜원..혜원의 터치에 정수는 그제서야 어어?,하고 혜원을 바라보았다.
"뭘 그리 멍하니 서있어.."
"어,아니....저기 벽에 걸려있는 사진...."
"아-,저거 우리 결혼사진!! 어때? 우리 남편 잘 생겼지?"
"으응..."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여버렸다.저 사람....내 사랑이야,혜원아....왜 이 집 안에 들어서자 마자 그토록 절실하게 그리웠던 향기가 났던건지,이제서야 알아버렸다.사진 속 영운은 너무나도 멋있었다.보고 있자니,우리 꼭 결혼하자며 강의를 다 들은 후,드레스샵에 가 턱시도를 입고 미리 결혼식 예행 연습도 하면서 행복하게 웃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그땐 마냥 좋았었는데....
"어머,오빠..울어?!!"
또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나보다.화들짝 놀라며 내게 물어오는 혜원이에게 웃어보이며 아니라고 답했다.눈에 뭐가 들어갔나보다 라고,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며 눈을 비비적 거렸다.나 정말 아무래도 괜히 한국 들어왔나봐,동해야....어쩜 이런 경우가 다 있니,정말..하늘도 무심하시지,영운이가 다른 여자와 결혼 했단것도 충분히 배신감이 드는 일인데,다른 여자도 아닌 내 하나뿐인 사촌여동생이..내 남자의 마누라라.참 환상적이다,멋지다 정말.....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인지,눈물은 쏙 들어가고 대신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울다 웃는 정수를 혜원은 살짝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런 혜원을 의식한 듯 정수는 얼른 이야,사진 속에 있는 여자 너 맞아?!! 하고 농담조로 물었다.그러자 혜원이 오빠도 참,하고 웃으며 팔을 아프지 않을 정도의 찰싹,소리를 내며 때렸다.
"너 애기는?"
"응?"
정수의 물음에 혜원의 눈이 커진다.아기가 있다는건 말하지 않았을텐데,어떻게 알았을까...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혜원이 이쁘게 웃으며 정수의 팔을 잡고 어디론가를 향해 정수를 이끌었다.뭣모르고 끌려간 곳은 영운과 혜원의 아기가 있는 방인듯 했다.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빌하며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아기용 장난감...그리고 커다란 창을 통해 햇빛을 받으며 흔들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아기가 보였다.
자고 있는 모습이 꼭 영운이를 빼닮았다.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진 속 애기 영운과 현재 자신의 눈 앞에 누워 자고있는 아기의 모습이 똑같아 정수는 또 한번 가슴이 저려오는걸 느꼈다.씁쓸히 웃으며 이쁘다,하고 아기의 볼살을 손가락으로 살살 만져보는 정수였다.
"..이름이 뭐야?"
"정운이..영운씨가 지어온 이름이야-,"
혜원의 입에서 나온 애기의 이름에 정수는 눈을 크게 뜨며 혜원을 바라봤다.정운이..?
-우리 나중에 결혼하면,애기 이름 뭘로 짓지?
-애기도 못 낳을텐데...
-입양이 있잖아,이 바보!!
-서방한테 바보가 뭐야..넌 진짜.....
-음~우리 이름 따서 짓자..남자는 정운이로 짓고 여자는 수영이 어때?!
-니 마음대로 하셔,
.........뭐야,김영운....이거 반칙이잖아,나랑 결혼해서 아기들 이름 그렇게 짓기로 해놓고선....너 지금 뭐하잔거니....그래도 영운이 물 흐르듯 흘려보내 버린 그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고 생각하고 있는거에 대해,정수를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단 뜻으로 해석되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며 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애써 눈물을 참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무는 정수다.혜원에게 자신이 울고 있단걸 들키지 않기 위해 정수는 무던히 애를 써야했다.자고있는 아기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체 이쁘다,귀엽다..를 남발하는 정수.작디작은 아기의 손과 발을 만져보기도 했다.그 때 아기가 잠에서 깬 듯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아기와 눈이 마주치고 아기가 나를 향해 베시시,하고 웃는데 숨이 멎을것만 같았다.영운아,니 아들이라 그런가...벌써부터 웃을때 눈매가 너랑 똑같아,아기인데도 너만의 향이 조금 나는것 같아........이젠 이러면 안되는데...이젠 이런 생각 갖지 말아야 하는데...있지,영운아.....지금 니가 너무나도 보고싶어.....
한번 깨버린 아기는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결국 아기는 정수의 품에 안겨있었다.오만가지의 생각으로 정수는 머리가 터질것만 같았다.그러다 갖게 된 궁금증..도대체 무슨 인연으로 두 사람이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걸까.혜원의 말을 들어보니 정략결혼..같은 것이라 했다.같은게 아니라 정략결혼이다.두 회사의 합병을 위해 한 결혼....결혼한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냐고 물으니 혜원은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삶인것 같다고 답했다.
"그 이가,날 사랑해주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날 많이 아껴주고 챙겨주고 그래..그거면 됐지,뭐.."
혜원의 말에 정수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영운과 판박인 정운에게 시선을 주었다.또 한번 허공에서 정수와 정운의 시선이 교차되고 정운은 조금 전에,막 깨어나 정수에게 보여줬던 웃음을 또 한번 정수에게 보여주었다.이번엔 꺄르르,하고 웃는 아기들 특유의 웃음 소리까지 추가해서.정말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참 웃는게....김영운스럽다.
"정운이가 오빠 너무 좋아한다,얘 잘 안 웃어..근데 오늘따라 방긋방긋 잘도 웃네.."
신기하단 듯한 표정으로 꺄르르,하고 숨넘어갈듯 웃는 정운을 쳐다보는 혜원이었다.정수는 시니컬하게 피식,하고 웃어보였다.뭣도 모르고 보면 마냥 귀여운 아기의 얼굴이지만,눈동자에서 읽힌다.나와 영운이 사이를 아는것 같아,이젠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싶었지만 그래도 아기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나,아저씨 알아요...순간 울컥하며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그냥 혜원에게 떠넘겨 버렸다.
"오빠 좋아하는데 계속 안고있지,왜..."
"계속 안고 있으니까....손목 아파,"
"칫...엄살은...참,고모랑 고모부는 언제 오셔?"
"글쎄,언젠간 오시겠지..."
정수의 대답에 혜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왜 그런 표정으로 봐..엄마,아빠랑은 얘기 안하고 그냥 나혼자 온거야,어쩌면 안 오실지도 몰라,일이 워낙 바빠서 말야.정수의 말에 혜원은 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귀국을 반대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잠시 떠오른 정수는 나즈막히 웃어보였다.엄마..나 그냥 엄마 말 들을걸 그랬나봐,나 지금 영운이 만나지도 않았는데 상처 잔뜩 받고있어....역시 옛말에 어른들 말 틀린거 하나도 없다더니,그냥 엄마말 들을걸 그랬다......
"그럼 오빠 혼자 지내야해?살 집은..구했어?"
"......조만간 다시 출국할텐데 집은 뭐하러 구해,"
구할 계획이었어,집 구해서 영운이와 함께 살고 싶었어.근데 영운이는 이미 너와 함께잖니.
"다시 갈려구?"
"응,여기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그냥 잠깐 들어온거야."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정수의 말에 혜원의 양 미간이 살짝 좁혀진다.물론 기분 나쁘다는건 아니다.오랜만에 만났는데,그것도 하나뿐인 사촌여동생과 만났는데 어쩜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나눌수 있는지,꼭 자신의 남편과 닮은것 같아 혜원은 기분이 이상했다.
* * * *
꽤 높이 쌓여있는 파일들,그리고 책상 중앙 끄트머리에 놓여있는 '대표이사 김영운'이라 쓰여진 명패.그 속에 파묻혀 일을 하던 영운은 쓰고있던 안경을 벗어놓고 들고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의자를 빙글,반바퀴 돌려 창 너머의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하늘이 지독히도 푸르다.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은 높고 더 푸르러 지는 가을이 되면 또 생각이 난다.이건 그리움이라 칭하겠다.이미 마음속에선 밀어내버렸으니.....
행복했던 만큼 많이 아팠던,그러나 잊을 수 없는...잊지 못하는 내 첫사랑.내 모든걸 바쳐 사랑한 사람이었다.사랑을 위해서라면 내 배경이던,가족이던 뭐던간에,다 버릴수 있었다.오로지 너만을 위해서라면.5년이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그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앞으로도 만날수 없을 것이다.사랑은 한 때라 했던가,오래된 커플들은 사랑이란 감정은 식은지 오래고,오로지 정으로만 관계를 유지하며 만난다고 했던가.그 말은 적어도 영운에게는 틀린말이었다.하루하루를 처음처럼 사랑했다.평생을 그렇게 사랑할 작정이었다.그런데 떠나버렸다.
영운이 잡을 새도 없이,아무말도 없이 영운을 혼자 버려두고 홀연히 떠나버렸다.영운이 찾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자신의 사랑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해 멀리멀리 날아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나 혼자만의 사랑이었던가,생각했다.하지만 또 동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닌것 같았다.그렇다면 도대체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5년전도,지금도 알 길이 없다.옛 애인을 생각하려니 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버리고 떠났으면 내 머리속에서도 떠나버릴것이지,왜 지금까지 남아서 날 괴롭혀."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유독 니가 너무나도 생각이 난다.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나.예전에 널 기다리며 했던 생각들이..오늘따라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고 있어.
외국으로 나가버리긴 했어도 곧 올거라 굳게 믿고 기다린 영운이었다.우리 사랑이 어떤 사랑인데,너 없이 숨쉬지 못하는 날 뻔히 알았을테니까..금방 돌아올줄 알았어.그런데 넌 안 오더라.1년이 다 되었을땐 돌아와서 애교 몇 번만 떨어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시 돌아온 널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려고 했었다.2년이 지났을땐 왜 이제 왔냐며,그냥 웃어주고 너에게 달콤한 키스를 선사해주려고 했었다.3년이 넘었을땐...그냥 제발 돌아오기만 하라고,아무것도 묻지않을테니 제발 눈 앞에만 있어달라고...빌었다.하늘을 올려다 보며 빌고 또 빌었다.4년째 접어들 던 해,결국은 안 오는가보다..포기했어.영원히 내 곁을 떠났나보다.이젠,너 다시 돌아온다 해도 안 받아줄거야.이젠..내 쪽에서 사절이다,박정수.우리 사랑 끝이라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체 눈을 감고 있던 영운은 곧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영운의 비서 성민이 들어와 퇴근시간입니다,이사님.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집에 가야 할 시간임을 알려준다.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왼쪽 손을 들어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바라보던 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펼쳐두었던 서류들을 정리하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정장 자켓을 빼내어 자신이 입었다.그 때 마침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영운의 휴대폰이 지잉-,거렸다.
"여보세요,"
[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나'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는데."
[나 지금 장난칠 시간 없거든.]
"쿡,무슨일이야."
[정수가 한국에 왔어.]
작게나마 웃고있던 영운의 얼굴이 동해의 한 마디로 인해 단번에 굳어버렸다.누가..어딜 와? 굳은 영운의 얼굴을 보고 성민은 슬쩍 자신의 상사 눈치를 살폈다.무슨 일이길래,미세하게나마 웃는 이사님..멋지셨는데.처음 상사 대 부하 직원으로써 대면했을 때부터 지금껏 영운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그래서 처음에 성민은 영운이 웃는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나,하고 생각했었다.그러던 어느 날 혜원이 첫 아이를 출산했단 소식을 접했던 영운이 처음으로 잔잔한 미소를 짓던걸 성민은 봤다.환한 웃음은 아니더라도,웃으면 굉장히 멋있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웃지를 않는건지.이사님은 모르실겁니다,웃는것 하나에는 자신있던 저였는데 이사님과 함께 있다보니 제가 웃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그러니까,결론은.웃고 살자..이거다.차마 말은 못하고 성민은 오늘도 짧은 한숨으로 그 말을 대신한다.
성민이 운전하는 은색 세단 뒷좌석에 몸을 실은 영운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몇 분전,동해와의 통화내용을 다시 머리속으로 떠올려보는 영운이었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뭔데.
-알고만 있으라고.찾을땐 언제고...그리고,정수 너 결혼한것도 알아.
-..........
-언젠가 정수가 너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아예 들어온거냐.
-글쎄다.궁금한거 있으면 직접 물어보시던가.
-....안 받아줄거다.
-......누가 뭐래?
뚝,그렇게 전화는 끊겼었다.오늘따라 니가 왜 이렇게 그리운가 했더니,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서 그랬던건가.머리가 여러모로 복잡한 영운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그렇게 몇 분을 있었을까.이사님,댁에 도착하셨습니다.라는 성민의 말에 다시 눈을 뜨고서 천천히 차에서 내리는 영운이다.영운이 차에서 내림에 따라 성민도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수고했어,그럼 내일보자구."
"네,쉬십시오.."
허리 숙여 인사하는 성민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주고 영운은 발걸음을 옮겨 대문앞에 섰다.초인종을 누르자 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곧바로 삐-,소리가 나며 대문이 철컥,하고 열렸다.영운이 대문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차에 올라타 다시 시동을 거는 성민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영운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흔들리는 눈동자로 혜원의 뒤에 서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그리고 그 한 사람도,일렁이는 눈동자로 영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5년만의 재회,그리 기쁜 만남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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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_^,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 랩쟁이김영운이라고 합니다 Y_Y
노블리스에서 매일 소설만 읽다가 글을 올리려니...참 두근두근 ㅠㅠ , 잘 부탁드릴게요 /ㅅ/<-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압.. 마음아파요-_ㅜ 이런 오묘한 관계.... 예상치 못한 재회.. 영운과 정수가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 궁금해요! 다음편 기다릴께요~! ^^
우와, 돌아온 정수님과 결혼하신 영운님...다음편이 기대가 돼네요. 모른척 하실것 같은데...재밌게 읽었습니다.
헉, ㅜㅜ 가슴아픈 얘기가 이어질것 같네요.. 안녕, 내사랑이 과연 안녕? 내사랑인지 안녕~ㅜㅠ 내사랑인지...ㅠㅠ
사랑이 과연, 이루어질까요 ㅠ 아 저는 영운군이 정수군 평생 같이 있어줄라고 그 사촌동생이랑 결혼할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안받아준대요 ㅠ 어쩌죠 ㅠ 가슴이 아파요 ㅠ
오- 재미있네요, 처음 쓰신 건가요? 잘 쓰시네요- 읽을수록 빠져드는 기분^^
우와~ 두 사람의 슬픈 이야기가 시작되네요! 앞으로도 쭉 부탁드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