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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金時習
김시습 (金時習 .. 1435~1493) ... 본관은 강릉(江陵), 字는 열경(悅卿), 號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며, 법호(法號)는 설잠(雪岑), 시호(諡號)는 청간(淸簡)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무관이던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김시습의 초상화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1439년 세상을 떠났다. 59세이었다. 야복 차림에 패랭이형(平凉子型)의 모자를 쓰고 있으며, 얼굴 윤곽선과 모습을 옅은 갈색으로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구성하였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조선 초기 초상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초상화는 김시습의 청년기(靑年期)와 노년기(老年期)의 모습, 두 종류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중 어느 때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 초기의 초상화는 현재 수 폭 밖에 전해오지 않을뿐 아니라 그것도 이모(移模)나 가채(加彩)가 심한데 비하여, 이 김시습 초상화는 원본(原本) 그대로 초기의 화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장의 자화상(自畵像)을 그렸다고 하지만, 위 초상화를 자화상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자화상 여부를 불문하고 이 초상화는 김시습이라는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 세계를 약간 찌푸린 눈매, 꼭 다문 입술, 눈의 총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초상예술의 진수(眞髓)라 할 전신(傳身)이 탁월하게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시대의 고아 時代의 孤兒
김시습(金時習)은 유(儒), 불(佛), 선(仙)이라는 동양의 3대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가(思想家)이자, 타고난 천재성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기인(奇人)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룰 길이 없는 포부와 역량을 한탄하며 " 시대의 고아 (時代의 孤兒) "로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꿈 꾼 이상세계를 작품을 통하여 승화시킨 고귀한 예술혼(藝術魂)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부조리(不條理)한 세상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넘어 일종의 허무의식(虛無意識)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이미 이루어진 현실을 또 다른 목적으로 무너뜨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불의(不義)를 인정하거나 그 것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타도하려고도 하지 않은 중용(中庸)의 자세를 견지한 셈이다.
김시습의 자화상 (自畵像 )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볼 만큼
海東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
네게 어이 해당하랴 ?
네 형용은 아주 적고
네 말은 너무도 지각 없구나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골짜기 속에 ...
골짜기 속에 ... 宜爾置之丘壑之中
골짜기 속에 둔다 .. 구학지중(丘壑之中) '는 말은 아무렇게나 시신(시신)이 나딩굴게 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본래 일구일학(一丘一壑)이라 하면 은둔자의 거처를 말하지만, 김시습은 "구학(丘壑)"이란 말을 더욱 자조적(自嘲的)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일생을 남에게 관대하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때로는 자학적(自虐的)이기까지 하였다. 그의 자화상(自畵像)은 미간(眉間)을 찡그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어떤 초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다. 정신(精神)의 긴장(緊張)은 그의 몸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시습이 말년(末年)에 머물렀던 부여(扶餘) 무량사(無量寺)에는 그의 초상화를 모신 각(閣)이 있다. 그는 59세에 이 곳 무량사에서 죽는다. 그리고 아래의 사진은 그의 부도(浮屠) 즉 묘(墓)이다. 무량사(無量寺) 입구에 있다.
출생 그리고 천재 소년
김시습은 1435년 (세종 17)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야사(野史)에서는 김시습이 태어나기 전날 밤, 근처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로 다음 날 김시습이 태어나자 장차 귀한 인물이 될 징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웃에 살던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崔致雲)이 논어에서 인용한 ' 배우면 곧 익힌다 '는 뜻으로 시습(時習)으로 짓기를 권유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의 외조(外祖)가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문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논어'에 '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에서 시습(時習)을 따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태어난지 8달 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살 때에는 이미 시(詩)를 지었다.즉,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라는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는..말 그대로 천재이었다.
5살 때 홍문관 수찬(修贊)으로 있던 이계전(李季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하면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배웠고, 이후 13세까지 이웃집의 성균관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시경, 서경을 배웠다. 그리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周易)과 예기(禮記)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하였다. 자연히 그의 천재성이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좌의정 허조(許稠)가 김시습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으로 그의 집을 찾았다. 김시습을 만난 허조(許稠)는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 네가 아주 글을 잘 짓는다 하던데, 이 늙은이를 위하여 늙을 노(老)자를 넣어서 詩 한 구절을 지어 줄 수 있는가? "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는 바 없이 즉석에서 이렇게 詩를 지었다.
노목개화심불 老木開花心不老 ...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 '란 시(詩)이었다.이러한 소문은 드디어 대궐 안에까지 알려졌고, 이를 들은 세종(世宗)은 박이창(朴以昌)에게 시켜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라고 지시하였다. 박이창(朴以昌)은 대궐로 불려 온 김시습(金時習)의 능력을 여러 방면으로 시험해 보았으나, 어린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이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박이창은 이러한 사실을 세종(世宗)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세종(世宗)은 김시습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비단 50필을 賞으로 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김시습이 그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지 말고 혼자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하였다. 이에 어린 김시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음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세종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였고,
세종(世宗)은 김시습이 성장하면 중(重)하게 등용(登龍)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 세종대왕은 김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 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김시습은 머뭇거리지 않고 '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龍)이 푸른 바다 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聖王之德 黃龍 海之中 '이라고 답하였다.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힌 김시습은 이어서 당시의 석학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반(金泮)과 윤상(尹祥)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여, 겨우 10여 세에 익히지 못할 책이 없을 정도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서서히 불행이 닥쳐오기 시작하였다.
김시습이 15세가 되던 해, 어머니 장씨(張氏)가 죽게 되어 김시습은 외가(外家)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3년이 못 되어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별세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결혼(結婚)하였지만, 학문에 심취한 김시습은 가정에 흥미를 잃었으며, 이때 또한 과거(科擧)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과거를 준비할 겸해서 삼각산 중흥사(中興寺)로 들어갔다. 그가 21세가 되던 해에 중흥사에서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된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그는 통분을 금치 못하고 꼬박 사흘동안 망연자실하여 방 안에만 틀어 박혀있던 김시습은 공부하던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머리카락마저 잘라버리고 산(山)을 내려와 세상을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분노와 회한의 방랑생활
아무런 계획없이 방랑 길에 나선 김시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명성이 높았던지라 어디를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맺힌 젊은 지식인의 회한(懷恨)은 지울 수가 없었다. 관서지방으로 방향을 정한 김시습은 이러한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시(詩)로 지으면서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하였다. 미치광이, 천치바보 등 사람들이 조롱하고 욕을 하여도 김시습은 타협하지 않았다. 불의(不義)한 세상에 대항하는 길은 거기에 물들지 않은 고결(高潔)한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일뿐이었다. 김시습은 더욱 견결하게 세상을 비판하며, 혼탁한 세상과 대치하였다.
이내 마음 못 꺾으리 어느 위력도 / 옛날도 지금도 이 마음 빛나리라 / 순 임금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 높고 낮은 차이란 본디 없는것 / 대장부는 언제나 염치가 있는 법 / 세상 눈치 보면서 이리저리 따르랴 / 학자와 문인은 역사에 남아 있다 / 제왕의 칼부림도 역사는 못 막으리
3년여에 걸쳐 관서(關西)지방의 곳곳을 돌아 본 김시습은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 을 쓰고 나서 관동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26살에 관동지방의 유랑을 마치고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정리한 후, 이번에는 호남지방으로 다시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났다.
김시습은 '탕유관서록'의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았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이었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 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29살이 되던 해에 삼남(三南)지방의 유랑을 끝낸 후 이번에도 역시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지었는데, 문득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어느덧 가슴 속의 회한은 희미해져 있었다. 오랜 기간의 객지생활로 몸은 쇄약해졌지만,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공부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1463년 (세조 9)에 책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한성(漢城)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부터 자신을 아껴 주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만나게 되었다.
효령대군과 김시습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효령대군은 조카인 세조(世祖)에게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세조(世祖)의 불경(佛經)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계유정난(癸酉靖亂) 때의 공신(功臣)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상사가 다시 역겨워진 김시습은 경주(慶州)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으로 들어가 칩거하고 만다.
그 후 2년이 지난 1465년 (세조 11) 3월에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해 달라는 효령대군의 요청을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찬시(讚詩)까지 지어 주지만, 효령대군과 세조(世祖)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곳에서 김시습은 속세와 완전히 단절하고 6년 동안 머무르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와 산거백영(山居百詠)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이러면서 세월도 흘러 세조와 예종(睿宗)이 연이어 죽고 어느덧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랐다.
1471년 김시습이 37살이 되던 해에, 또 다시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20여년을 세상과 겉돌았던 그로서는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듬해 서울 성동에 집을 짓고 이름없는 민초(民草)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하였다. 이 때 김시습의 나이는 벌써 40세에 들어서고 있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천재(天才)의 가슴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만이 가득하였다.
세상에 대한 야유
이러한 그의 심정은 현실에 대한 야유로 나타나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영의정 정창손(鄭昌孫)과 달성군 서거정(徐居正) 등이 김시습에게 공개적으로 질타와 망신을 당하여지만 그들도 그리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들도 김시습의 천재(天才)의 한(恨)을 이해하였고, 망나니같이 구는 그를 상대해보았자 자신들의 체면만 훼손될 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젊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신숙주(申淑舟)도 증오하였다. 세조(世祖)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한강을 지나다가 강변 압구정(鴨鷗亭)에 걸려있는 한명회(韓明澮)의 詩를 발견하였다. "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 "라는 詩이었다. 이를 본 김시습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분통을 터트린다. 그리고 두 글자를 고쳐 놓았다. "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
김시습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기이(奇異)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 시절 김시습은 책을 읽다가도 의분(義奮)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기도 하고, 詩를 지어서는 마구 찢어서 던져 버리는 등 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혼(魂)이 나간듯 살아가는것이 당시 그의 모습이었다. 김시습은 이렇게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불안정한 심신으로 10여년을 보냈다.
끝없는 방황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마치 불자(佛者)처럼 살아가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인 1481년 (성종 12)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또 한 번의 변신(變身)은 기인(奇人)같은 일생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이 그를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시습은 먼저 조상에게 그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罪)에 대하여 용서를 빌고는 안씨(安氏)부인을 맞아 가정을 꾸몄다. 그러나 모처럼의 가정생활도 얼마 후 안씨(安氏)가 세상을 떠나버려 끝나고 만다. 그런 와중에 1482년 폐비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賜藥)이 내려지는것을 본 김시습은 또 다시 세상 만사가 허무하고 혐오스러워져 다시 방랑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특별히 친분을 주고 받던 유자한(柳子漢)이 부사(府使)로 있는 강원도(江原道) 양양으로 길을 잡고 떠났다. 그러나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김시습은 얼마 안되어 다시 길을 떠나 관동(關東)의 각 지방을 발길 닿은대로 떠돌아 다녔다.
사청사우우환청 乍晴乍雨雨還晴 잠시 개었다 비 내리고, 내리다 다시 개니
천도유연황세정 天道猶然況世情 하늘의 이치가 이럴진데 세상 인심이야 어떠랴
예아편시환훼아 譽我便是還毁我 나를 높이다가 곧 도리어 나를 헐뜯고
도명각자위구명 逃名却自爲求名 명리를 피하다가 돌이켜 스스로 공명을 구한다
화개화사춘화관 花開花謝春花管 꽃 피고 지는 것을 어찌 상관하겠는가
운거운구산부쟁 雲去雲求山不爭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도 산은 다투지 않는 법
기어세인수기인 寄語世人須記認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꼭 새겨 두기를
취환무처득평생 取歡無處得平生 기쁨을 취한들 평생 즐거움을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김시습 ... 無量寺에서 죽다
이렇게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던 김시습이었지만 일정 기간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밭을 개간하는 등 손수 일을 하며 지냈다. 노동(勞動)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그는 자신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반드시 밭일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추악하고 가증스럽기만 한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던 김시습은 표리부동한 세상의 人心을 비웃으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天才 소리를 들으며 자란 총명함과 학문에의 열정을 모두 묻어 버린채, 영원한 이방인(異邦人)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삶의 회한은 엷어갔지만 가슴 속까지 서려오는 외로움만은 견딜 길이 없었던 김시습은 지친 몸을 이끌고 충청도 부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 들었다.그는 젊었을 때부터 머리를 깎고 중처럼 살았지만 佛敎에 완전히 귀의(歸依)한 것은 아니었다.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세조(世祖)에게 저항하는 뜻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가(佛家)의 정신을 통하여 젊은 날의 허무(虛無)를 달랠 수 있었던 그는 마지막 길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싶었던지 병든 몸을 이끌고 한적한 무량사를 찾아 갔던 것이었다. 그 곳에서 김시습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1493년(성종 24)에 59세를 一期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말년을 또 다시 방랑생활로 보낸 끝에 낯선 사람들 품 속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김시습은 죽기 전에 화장(火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관(棺)을 절 근처에 안치하였다가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棺)을 열어 보니 시신(屍身)이 썩지 않고 그대로였으며, 얼굴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승려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시체를 화장하고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돌탑을 세워 그의 뼈를 거두었다.
김시습은 유자(儒子)로 출발하였으나, 세상을 등지고 절집을 더돌다 보니 불자(佛子)가 되었고, 불자가 되어 산천을 가까이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도가(道家)가 되었다. 그래서 김시습은 유불선(儒佛仙)을 회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1493년 부여군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치니 59세이었다. 그는 부처님 사랑이 헤아릴 수 없이 넘쳐나는 절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김시습의 사상적 방랑
다섯 살에 '대학'과 '중용'을 배우고 시와 산문을 지었던 신동,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했던 생육신, 천재 시인이자 전기소설의 저자, 공자적인 이상과 원칙을 죽을 때까지 고수하였던 유학자, 세상을 등진 채 산림을 방랑하며 술 마시고 哭하며 노래했던 ' 거짓 미치광이 ' , 머리 깎고 유랑하며 불교 공부에 매진했던 비구(比丘), 노자와 장자를 공부하며 연단과 양생을 실천하였던 도가(道家), 김시습의 화려한 사상적 이력이다.
김시습, 그는 평생 어디에도 얽메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삶의 여정을 걸었다. 그는 유학의 원칙을 포기한 적이없으면서도 승려로 자처하고,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길을 가면서도 불제자로 알려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 은밀한 것을 탐구하고 괴이한 일을 행하는 색은행괴(索隱行怪)나 방외인 '으로 단정짓기도 어렵고, ' 행적은 승려이지만 본 마음은 유학자 '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평생의 지기이었던 대제학 '서거정'의 말처럼, 그는 입산도 출산도 마음대로 하고 유학에도 불교에도 구애됨이 없었다. 그는 孔子이면서 佛子이자 老莊이었고, 동시에 공자도 불자도 노장도 아니었다. 김시습의 사상적 방랑은 줏대 없는 흔들림과는 달랐으니, 진리를 현현하는 구도자의 몸부림 그 자체이었다.
김시습, 사후
김시습이 죽은 후, 중종은 김시습을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청간(淸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 매월당집 (梅月堂集) '을간행하게 되었다. 그후 선조는 이율곡에게 명하여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 해동의 백이 (伯夷)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집의 (執議)'의 벼슬을 추증, 남효원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고,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되었다.
김시습의 舍利와 舍利函 ...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원래는 작품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5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판본(板本)도 김시습 자신이 돌방에 감추어서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고 한 만큼 간본(刊本)은 없고 필사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것을 일본에서 두 차례 번각(飜刻)하였고, 그 중 1884년에 나온 일본판(大塚本)을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1927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알려졌다.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慶州 南山의 용장사(茸長寺)에서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폐사(廢寺)된 절이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삼층석탑, 마애석불, 석불대좌 등의 유물만이 남아있다. 이 곳에서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저술하였다.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茸長寺址).....
남아있는 5편의 단편소설은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이다. 각 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들이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이 서로 만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간단한 줄거리는 .....
' 만복사저포기 '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 양생(梁生)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처녀가 떠난 후 장가를 가지 않고 山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내용이다. '이생규장전 '은 개성에 사는 이생(李生)과 최녀(崔女)가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부부가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崔女가 죽음을 당한 후 환신(換神)하여 李生과 부부생활을 한다. 崔女는 다시 떠나고 李生 또한 죽음을 택한다는 내용이다.
' 취유부벽정기 '는 송도에 사는 홍생(洪生)이 평양 부벽정에서 취해 놀다가 箕子朝鮮 마지막 王의 딸인 기씨녀(箕氏女)를 만나, 나라가 망한 사연을 듣고 울분과 감회를 나누다 헤어진 후 선계(仙界)로 간다는 내용이다.' 남염부주지 '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의 박생(朴生)이 꿈 속에서 염라국에 가, 염왕과 토론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의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 용궁부연록 '은 송도의 한생(韓生)이 龍王의 초대로 龍宮에 가서 詩를 짓는 재능을 발휘하고 돌아온 후 세상의 名利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각 편들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인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첫째, 崔女로 대표되는 굳건한 기상이나 의지를 지닌 한국적인 인물을 청조하였다는 점. 둘째, 공간적 배경을 조선으로 함으로써 주체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점. 셋째,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말을 통하여 작가의 기구한 처지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 넷째, 愛民的 왕도정치 사상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 등은 작가의 창작 의도를 알 수 있게 한다.
전등신화 剪燈新話
특히 儒家的 선비의 입장을 견지하던 주인공들이 불교적 因緣觀이 투영된 만남을 통해서 결국은 죽음이나 不知所終 (부지소종 .. 어디에서 일생을 마쳤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의 道家的인 모습으로 귀결되고 있는 공통점은 儒, 佛, 道 3敎를 두루 통하고 화합을 지향하였던 작가의 철학체계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소설의 발달 과정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수이전(殊異傳)의 "최치원 이야기", 보한집(補閑集)의 " 이인보(李仁甫) 이야기" 같은 명혼설화(冥婚說話)와 삼국유사의 "調信 이야기" 같은 몽유설화를 계승하여 소설이라는 문화양식을 확립시켰고, 그 이후 소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전기문학인 도기보코(伽碑子)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매월당집 梅月堂集
김시습이 죽은 지 18년 후 中宗의 명을 받고 이자(李藉),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등이 유고를 모아 간행하였다. 23권 6책으로 23권 중 15권이 詩集인데, 詩는 세간과 궁궐, 자연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생로병사, 성명이기(性命理氣), 음양유현(陰陽幽顯)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것이 없다.
이 가운데 遊關西錄, 遊關東錄, 遊湖南錄, 遊金烏錄과 같은 記行詩는 울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천하를 돌아 다니던 청년시절에 쓴 것인데, 특히 관서록에는 강개시(慷慨詩)가 많다. "관동일록"은 김시습의 나이 49세 때에 농사나 짓고 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 지은 것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뛰어난 詩들이다.
이율곡의 ' 김시습전 '
김시습이 죽은 후, 선조는 이율곡에게 김시습의 전기를 쓰라고 명한다. 이에 이율곡은 그의 나이 47세 되던 해 7월에 '김시습전'을 쓰게 되었다. 율곡은 이 글에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과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몇 가지 기술을 인용하여 김시습의 면모 및 이율곡의 평가를 옮겨 보기로 하자.
장헌대왕(세종)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여 들어내지 말고 교양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 (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김시습이 이미 임금이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에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 명 태종의 연호)의 년간에 세종과 문종이 연이어 돌아기시었고, 노산(魯山 ..단종)은 3년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이때 김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김시습은 즉시 문을 닫고 3일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 동봉, 벽사청은, 췌세옹, 매월당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 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온 나라의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 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 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 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詩를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 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 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 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믄 모습이 완상할 만 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는 큰 소리로 목 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 사람들이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바 되었다.
臣 삼가 생각컨데,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하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를 가지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김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서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내키는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데 재주가 타고난 기량(器量)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경청(輕淸 .. 곡조가 맑고 가벼움)한 기(氣)를 받기는 풍족한데 ,후중(厚重)한 氣를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를 표방하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구극(究極)하여 보면,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채를 다툴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氣風)을 접하면 나약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김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 바른 말과 준엄한 논리로 기피해야 할 것도 저촉하며, 공(公), 경(卿)을 매도하기에 조금도 서슴치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덕과 넓은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 거룩합니다.
김시습의 글씨
위 초서 간찰(簡札)은 글자의 필세(筆勢)를 연결시키고 맥락을 통하게 한 금초(金草) 글씨이다. 그러나 광초(狂草)를 느낄 만큼 일필휘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혈맥은 끊어지지 않는다. 특히 셋째 줄 아래의 네 글자 ' 후운지여(後雲之餘) '의 경우는 연결된 부분의 서선이 글자의 위 아래가 서로 호응하여 생동하고 있는 뒤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