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연구회'가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오늘의 한글날이 이 기념일에서 비롯됐다. 이 학회는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1908년 세운 '국어연구학회'를 이은 단체다. 주시경 탄생 150주년도 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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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강사로 가르치던 서울의 '한글배곧'은 1917년 3월 황선운이라는 학생에게 졸업장을 내줬다. 졸업장 이름은 '마친보람'이다. 꽃과 잎을 엮은 테두리 안에는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풀어 가로로 늘어놓은 '풀어쓰기' 글씨가 줄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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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씨는 학교를 '배곧', 증서를 '보람', 원장을 '어른'이라 부른다. 이 학교의 전신은 1911년 9월 '국어연구학회'가 이름을 '배달말글몯음'으로 바꾸면서 강습소를 고쳐 세운 '조선어강습원'이다. 강습원을 세울 때 원장은 뒷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을 지낸 남형우였고, 강사가 주시경이었다. 두분 모두 대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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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원이 세워지기 한 해 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그 무렵 주시경은 제자들과 함께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했다. 홍암 나철 선생이 1909년 단군을 받드는 이 교단을 다시 일으키며 내건 말이 '國亡道存'(국망도존)이다. 나라는 망해도 도는 남는다는 뜻이다. 그 말을 붙든 신자 가운데 여럿은 만주로 건너가 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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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주시경과 제자들은 1913년 3월 학회 이름을 '한글모'로 고쳤고, 이듬해 4월 '조선어강습원'도 '한글배곧'으로 바꿨다. 우리 글자를 '한글'이라 부른 기록이 나타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한문을 '진서'로 높이고 우리 글을 '언문'이라 낮춰 불렀다. '한글'의 '한'은 '크다'와 '하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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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191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로 대종교에 몸담았던 백연 김두봉은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해 1922년 그곳에서 '깁더 조선말본'을 펴냈다. 국내에 남은 제자들의 일은 1921년 12월 서울에서 세워진 '조선어연구회'로 이어졌다. 장지영 등이 참여한 이 학회가 '가갸날'을 정했고,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꾼 것은 193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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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제는 외솔 최현배를 비롯한 학회 회원과 관련 인물 33명을 잡아들였다. 이윤재와 한징은 감옥에서 숨졌다. 일제 법원은 고유한 말이 민족의식을 기른다는 이유를 들어, 학회 간사장을 지낸 고루 이극로에게 징역 6년, 최현배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이극로와 최현배 등의 상고는 1945년 8월 13일 기각됐고, 그들은 이틀 뒤 광복을 감옥에서 맞았다. 풀려난 날은 8월 1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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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회가 처음 정한 기념일을 우리는 해마다 10월 9일 한글날로 기린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일을 기리는 날이지만, 그날을 만든 학회 사람들이 16년 뒤 일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도 이날 함께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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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은 시절 그들은 나라 대신 말과 글을 지켰고, '國亡道存'이 그 시절의 말이었다. 해방 뒤 친일 정권과 독재 정권을 거치며 그 말은 '國存道亡'(국존도망)으로 뒤집혔다. 나라는 있으나 민족혼은 사라진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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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기 2년 전인 1908년, 주시경은 '국어문전음학'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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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을 쓴 주시경은 황선운이 '마친보람'을 받았을 때 이미 세상에 없었다. 졸업장 본문은 '다 마치었기에 이 보람을 줌'으로 끝난다. 맨 아래에는 '서울 한글 배곧 어른'이라는 글씨가 자모를 풀어 쓴 그대로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