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쯤이다. 가수 나미의 매니저 이영달 씨가 멜로디 하나를 들고 왔다.
가사를 붙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건네준 카세트에는 이미 반주음악이 담겨 있었고
악보도 깨끗이 베껴져 있었다.
"이 노래는 일본 K레코드사와 2개 국어로 동시에 발매될 계획이니까 신경 좀 써주세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빈 악보를 받아든 내 심정은 막막하기만 했다.
멋진 가사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세트에 담긴 반주 음악을 들어보면 근사한 내용이 떠오를 것 같은데
오선지 위에 연필을 갖다대면 생각이 날라가 버린다.
더구나 작곡가들은 가사 쓰는 사람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말의 흐름을 무시할 경우가 많은데 그런 멜로디에
자연스러운 구절을 붙이기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아,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 올거야
― ‘슬픈 인연’ 중간, 브릿지 부분
첫 마디 ‘아’ 부분이 네 박자고 네 마디 후에 음이 또 네 박자자다.
이 네 박자가 각기 한 음으로 독립적 단어로 떨어지는 것이
노래의 흐름상 자연스러운데 우리나라 말 중에 한 자로 떨어지는 단어가 몇 개인가.
바로 이 구절에서 나는 내가 쓰려고 하는 단어와 멜로디의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시켜야만 했다. 우선 한 자로 떨어지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고작 ‘나’ ‘너’ ‘저’ ‘그’…… 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말을 붙여 보았자 문장 흐름이 연결되지 않았다.
억지로 문장 흐름을 만들어 놓았다고 해도 멜로디에서 주는 음의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작곡가가 멜로디를 조금만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곳이 멜로디의 클라이막스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고민을 더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감탄사였다.
감탄사는 잘만 사용하면 문장 흐름과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
더욱 감흥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나의 곁으로 다시 올거야
이 밋밋한 문장 앞에 ‘아’를 붙이게 된 것은 훨씬 많은 고통을 느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였다.
그까짓 것 생각하느라고 시간을 소모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사실 나는 이 가사를 쓰기 위해 시도 여러편 읽어보고 영화도 여러 편 보았다.
그러나 좀체로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청계천 4가에 있는 B극장에서 ‘파리의 야화(夜話)’를 보았다.
마피아 두목이 미인계를 쓰기 위해 한 여자를 고용한다.
그러나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여인에게 고백하지만 거절 당한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임무를 수행하고 떠나려는 여인과
그 여인에게 사랑에 빠진 마피아 두목의 이별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꼭 돌아올 것이다. 아직 우리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니까.”
세월의 길고 짧은 차이가 있을 뿐 사랑하는 것이 진실인 것을 알면
여인은 돌아온다는 것이 영화 속 마피아 두목의 생각이자 곧 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했다. ?
사랑이 진실인 줄 안다면 여인은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흘러간 그 세월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나는 이미 한 편의 가사가 다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사의 주제가 결정되었으니 거기에 살을 붙이기란 식은 죽 먹기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이별 장면을 그려보았다. 충분히 한 편의 짧은 드라마가 되었다.
나는 앞에서 인용했던 클라이막스 부분을 생각하고 스토리를 전개 시켰다.
멀어져 가는 저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린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 올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는 강물 풀리듯 술술 풀려나갔다.
그러나 다음 구절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는
곧 바로 연결 된 것이 아니었다.
멜로디를 확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움이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될텐데……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또 그렇게 불태울 수가 있으려나
그러나 어떤 멜로디를 갖다 놓아도 멜로디의 절실함을 돋보이게 할 수 없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애꿎은 멜로디 탓만 했다.
불필요한 예비 음들은 왜 붙였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멜로디 뿐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내가 들아온 멜로디들은
거의가 싱코페이숀(엇박자)이 들어 있는 악보여서
그 놈의 예비 음들이 문장을 만드는데 여간 불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음 하나에 두 개의 발음이 붙거나, 두 음에 한 개의 발음이 붙거나 상관없었다.
그러나 멜로디 보다는 리듬이 중요시 되고부터는 꼭 필요한 발음과 악센트가 요구 되었다.
난 그대 눈을 보면서 꿈을 알았죠
그 눈빛 속에 흐르는 나를 보았죠
― 김희갑 작곡 ‘물보라’에서
어젯 밤엔 난 네가 미워졌어
어젯 밤에 난 네가 싫어졌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면
나 혼자 가슴 아팠어
― 이호준 작곡 ‘어젯 밤 이야기’에서
앞의 노래 ‘물보라’에서 ‘난 그대’를 ‘나는 그대’라고 한다든지
‘그 눈빛 속에’를 ‘그대 눈빛 속에'라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
‘난’이라고 한다든지 ‘그’라고 하는 것은 이 멜로디에 탄력을 주어
가사 내용 이상의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뒤의 노래 ‘어젯 밤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발음상으로 잘 들리지 않는 음 ‘난’이 새로움 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어젯밤엔’ ‘난 네가’의 개념이 아니라
‘어젯 밤엔 난’ ‘네가’ 개념으로 끊길 듯 이어지는 리듬의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것이 많이 완화되어 요즈음에는 일단 가사 잣수 맞추는 데는
편리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대 스타일의 가사 쓰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간 것 같지만 내가 활동하던 그 시절의
사와 노래를 이해하려는 분들을 위하여 몇 자 적어 보았다.
잣수와 악센트 때문에 오는 고통, 그것은 결코 불필요한 고통은 아니었다.
‘슬픈 인연’의 마지막 구절을 연결하기 위하여 몇 날 밤을 고생한 나는
아주 오랫만에 우연히 어떤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지나온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한 마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찌뜨러지고 변해버린 인상에서 그가 걸어온 20여년의 세월을 보는 듯했다.
(그래.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 거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음 구절을 연결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또 그렇게 불태울 수가 없어서)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괄호 친 부분을 생략하고 연결했을 때 나미, 아니 그 이후에 015B, 조관우 등이 불러
수많은 사람들을 울린 <슬픈 인연>은 탄생한 것이다.
노래 가사는 결코 멜로디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멜로디가 하지 못하는 부분은 가사가 보강해 주고,
가사가 하지 못하는 부분은 멜로디가 보강해 주면서 하나의 노래는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노래 가사를 백안시하는 시인들이 섭섭할 때가 많다.
노래 가사는 결코 진화하지 못한 시가 아니다.
박/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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