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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돌
문 순 태
“아저씨, 그 돌을 차에 실을려구요?”
내가 끙끙거리며 돌을 보듬고 버스에 올라타려고 하자, 동글 납작한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햇볕에 그을린 여차장이 안경무늬 원숭이처럼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신경질적으로 내쏘았다.
“미안해, 운임은 낼께.”
나는 여차장을 향해 비굴할 만큼 는질는질* 미소를 피워 날리며 다짜고짜로 버스에 올라, 출발을 알리는 벨이 빨리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제발 돌은 실을 수 없으니 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기를 아버지 혼에게 기원하며 서 있는 승객들을 어깨로 조심스럽게 밀치며 뒤쪽으로 깊숙이 꿰고 들어갔다.
“이봐요. 밀지 말아요. 사람도 못 타는데 웬 못생긴 돌까지 들고 그래요?”
누구인가 왁살스러운*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긁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승객들 발등이 다치지않도록 조심스럽게 돌을 버스의 바닥에 놓았다.
버스가 출발을 하자 나는 비로소 후유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운 버스 중에서 다섯 번째에서야 가까스로 탈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손을 들 때마다 버스는 비포장 황톳길에서 뿌연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쓰며 멎곤 했지만, 내가 그 큰 돌을 들고 차에 오르려고 하면 돌은 실을 수 없다면서 가슴을 밀고 쾅 문을 닫아버리곤 했었다.
나는 돌을 깔고 앉아서 피곤한 몸을 버스의 흔들림에 내어 맡겼다. 내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내가 깔고 앉아 있는 돌에 짓눌려 온몸이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으깨져버린 것 모양 나른했다.
해발 사백 미터쯤 되는 까치산 꼭대기에서 신작로까지는 돈을 주고 운반을 해 왔지만, 버스가 올 때마다 끙끙거리며 들고 차에 오르려고 여차장들과 네댓 차례실랑이질을 하는 바람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것이었다.
“수석(壽石)이우?”
돌을 깔고 앉아서 흔들라다가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 고개를 들자, 옆 의자에 앉은 알밤껍질 색깔의 잠바 차림 중년 남자가 물었다.
“엣끼, 저런 흔해빠지고 못생긴 돌이 수석이라니. 수석이라면 산이나 짐승을 닮거나, 아니면 모양새라도 좀 색다른 데가 있어야지 원, 쑥떡 뭉쳐놓은 것같이 평범한 저 돌을 수석이라니, 무식 폭로 말게!”
잠바 차림과는 동료인 듯 그와 나란히 앉은, 코끝이 두루봉술하고 주근깨가 많은 남자가 큰 소리로 말하자, 버스 안의 승객들이 내가 깔고 앉은 돌을 기웃거리며 푸웃푸웃 웃었다.
승객들은 내 몰골과 못생긴 돌을 비교해가면서 번갈아 훔쳐보며 아무래도 돌과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갸웃거렸다.
반듯한 새 양복에 넥타이를 감고, 살짝 귀머리를 덮은 머리에 물기름을 적당히 발라, 어디로 보나 못생긴 돌이나 나를,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정원석이로구먼그랴.”
누구인가 감탄하듯 큰 소리로 말했으나
“저렇게 평범한 돌이 정원석이라니요.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돌이오. 천렵할* 때 솥이나 걸라면 모를까 원.”
하고 주근깨가 다시 비아냥거리는 투로 받았다.
“아무리 평범한 돌이라고 해도, 도시에서는 저만한 돌 구하기도 힘드네. 시골에서야 흔하지만, 저걸 가져다 아파트 응접실에 떠억 놔 봐. 이 사람아, 귀물로 보일 테니깐. 내 말이 맞죠? 응접실에다 놔둘거죠?”
사람이 좋아 보이는 잠바 차림의 남자가 애써 호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글쎄요. 안방에다 모실까 헙니다만.”
내 말에 승객들은 다시 푸웃푸웃 웃었다.
내가 깔고 앉은 돌을 안방에 모시고 싶다는 말은, 내 마음속 가장 깊숙한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온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나는 그 돌을, 죽는 날까지 아버지의 육신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돌에서 아버지의 영혼을 느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갓 못생기고 평범한 그 돌이,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에서 30년 동안이나 아버지를 지켜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엎드려 큰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참으로 마음이 끌렸다.
아버지는 부면장네 머슴이었다.
내 생각에 월곡리 안통에서 아버지만큼 키가 크고 힘이 센 남자는 없었던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나뭇짐을 따를 수 없었다고들 했었다. 어린 내 생각에도, 월곡리 안에서 아버지의 나뭇짐이 젤 크다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러웠으며,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마을에서 가장 큰 나뭇짐을 지게 되기를 빌었다.
아버지는 동네 앞 윗당산의 늙은 팽나무만큼이나 우람하고 단단하게 보였으며, 명절이나 2월 초하루 머슴낱*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소처럼 일을 해도 앓아눕는 때가 없었다.
나는 부면장네 사랑채 쇠죽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밤마다 무쇠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팔뚝을 베고, 컬컬한 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흥얼거리는 아버지의 육자배기*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하였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쑥덕거리는 이야기로 어머니는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고도 했고, 큰물에 떠내려가 죽었다고도 하였다. 아버지가 속상해 할까봐서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는 손톱만큼도 꺼내지 않았다.
부면장네 집에서 아버지한테 진드기처럼 붙어살면서, 소도 뜯기고, 새도 봐주고, 애업개 노릇도 하면서 눈칫밥을 먹고 자란 나는 진돗개 모양 눈치가 빨라서 어른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같은 나이 또래의 동네 아이들이 검정 책보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에 보기 좋게 두르곤, 노래를 부르며 짝 지어 학교에 갈 때마다, 나는 부면장네 아기를 업고 동구 밖 물레방앗간까지 겅중거리며 따라가곤 하다가, 떫은 땡감*을 먹고 체했을 때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면, 푸드덕 뜸부기가 날고 억새풀이 키를 넘는 강변을 마누 뛰어다녔다. 나는 울컥울컥 슬픔이 솟구칠 때마다, 월곡리에서 제일 큰 아버지의 나뭇짐과, 말뚝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팔뚝을 떠올리면서 어서 자라서 아버지처럼 힘센 머슴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열 살만 되면 애비한테서 떠나야 한다. 이 애비도 열 살 때 가난한 살림에 입이라도 덜어줄랴고 홀몸이 되어 뜬골로 떠돌다 꼴머슴*이 되었다. 너는 애비한테서 떠나면 토회지로 나가야 한다. 촌구석에 머물면 꼴머슴이 되고, 어른이 되면 상머슴*밖에 더 되것냐. 거렁뱅이가 되더라도 도회지로 나가야 한다. 도회지 거렁뱅이는 머슴보다 낫다.”
아버지는 내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나도 아버지 같은 힘센 상머슴이 되고 싶은디?”
하고 말할라치면 아버지는 사나운 부사리*처럼 두 눈을 무섭게 짓부릅뚜며 노려보았다.
“이노무 자슥아, 할아부지, 애비가 평생을 머슴 산 것도 지긋지긋헌디, 너꺼정 머슴이 되것다고? 네놈이 열 살만 되면 다리모갱이를 작씬 부질러서라도 도회지로 내쫓을 테니까 그리 알어!”
아버지는 두 손으로 내 다리를 부러뜨리는 시늉을 해 보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문에 나는 열 살이 되는 것이 죽기만큼이나 무서웠다. 차라리 열 살이 되기 전에 디딜강 깊은 물에 풍덩 빠져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기다리지도 않은 열 살은 너무 빨리 왔다. 마을 앞 백일홍이 몇 번 피를 토하듯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고, 디딜강에서 서너 번 멱을 감고 나자 얼핏 열 살이 되었다.
열 살이 되던 ,; 아버지가 내 다리를 부러뜨려 내쫓을까봐서 슬금슬금 아버지를 베돌던* 그해 초여름, 뱀딸기처럼 빨간 아침 해가 까치산 머리 위로 봉긋이 솟아오를 무럽, 마을 앞 신작로에 수많은 탱크들이 으르렁 거리며 지나갔다.
전쟁이 터졌다고들 했다. 미처 피란을 못 간 부면장 부자가 엉겁결에 집 뒤 대밭에 숨었으며 그 큰 집을 아버지와 둘이서 지켰다.
아버지는 나를 방 안에 가두어두려고 했으나, 아버지 몰래 집에서 빠져나간 나는 무서움도 모르고 마을을 꿰고 다니며 모자에 붉은 별을 붙인 사람들을 구경 했다. 아무것도 무섭지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는 대창을 깎아 들고 마을 청년들과 어울렸다.
“이 댁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이 길뿐이다. 내가 헌 말을 귀담아들었다가 후담에* 어른이 되거든 대창 든 애비에 대해서 옥생각하지* 않도록 하그라.”
치르륵치르륵 뱀의 혓바닥 같은 번갯불이 별도 없이 까마귀 날개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핥아대던 날 밤, 내게 집을 맡기고 대창을 꼬나 쥐고 나가던 아버지가 말했다.
그날 밤에 대밭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던 부면장 부자와, 월곡리 이장이 까치산 참나무숲에 끌려가 대창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한밤중에 참나무숲에서 들려오는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나는 번갯불과 함께 식은땀이 촉촉하게 젖은 등줄기를 대패로 깎는 듯한 비명소리를 듣고 호롱불도 밝히지 않은 먹방*에서 이불을 뒤집 어쓰고 바들바들 떨었다.
새벽녘에야 대창을 들지 않고 휘주근하게* 기운이 빠져 돌아온 아버지는, 두엄자리* 옆 닭의 벼슬 모양으로 빨간 맨드라미꽃밭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발로 땅을 찍어 차며 통곡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아버지는 대창을 들고 마을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없었다.
때가 되어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빈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같은 한숨만 계속 토하며 푹푹 찌는 쇠죽방 안에만 붙박여 있었다. 그 무렵,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남자로 믿고 있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염병*을 앓고 난 늙은이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약해 보였다.
대창에 찔려 죽은 부면장 부자를 안산* 철쭉꽃밭에 묻고 돌아온 아버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부면장 어른과 그의 늙은 아버지를 누가 죽였느냐고 물어봤지만, 아버지는 대답 대신 괴로운 얼굴로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혹시 아버지가 부면장네 살림을 독차지하려고 그들 부자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에, 불현듯 아버지가 무서워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곧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서울에 가 있던 부면장의 큰아들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되련님이 오실 때꺼정, 우리는 이 집을 지켜야 헌다. 우리가 헐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란다.”
아버지의 그 말에 나는 비로소 내가 잠시라도 아버지를 의심했던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어,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가 부면장 부자를 죽였다면 도련님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되련님이 못 돌아오시면요?”
“꼭 돌아오실 끄다. 이 댁이 그렇게 허망흐게 찌그러질 집이 아니다.”
내 말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길었다. 까치산에서 붉은 해가 솟아 할미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나는 아버지한테 꽉 붙잡힌 책 마당 한가운데 긴 대막대기를 꽂아두고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양만을 눈이 빠지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고 무섭고 답답한 어둠이 깔리면 아무것도 움직이는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더욱 지루하고 답답했다.
단 한 가지 마음이 놓이는 것은, 전쟁통이라 아버지가 늘 벼르던 대로 나를 월곡리에서 내쫓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 전쟁이 끝나지 않고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함께 부면장네 큰 집을 지키고 살았으면 싶었다. 아버지가 나를 도회지로 쫓아내지 않는 건 순전히 전쟁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물 옆 빨갛게 익어 휘늘어진 앵두를 혼자서 이빨이 시리도륵 따먹을 수 있었고, 앵두가 떨어질 무렵엔 다시 텃밭의 단수숫대에 단물이 차올랐으며, 더위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해서는 쇠죽방 앞의 석류가 익어 터졌고, 이내 사랑채 접시감나무가 발그스레 빛을 발했다.
나는 온종일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눈을 피해 안방이고 부엌이고 마음 놓고 새앙쥐처럼 들락거릴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마음이 꺼림한* 일이라면 아버지 성질이 갑자기 왁살스러워진 것이었다. 우리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함께 대창을 깎아 들고 몰려다녔던, 가난한 집의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대문을 걷어차며 아버지를 부르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욕을 퍼붓곤 했던 것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네놈들과는 상종을 않겠다아. 네놈들은 사람 잡는 백정들이 여.”
아버지는 대문을 두들기는 마을 청년들을 향해 내지르곤 하였다.
“저 사람들이 부면장 어른을 쥑였어?”
아버지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듯싶어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 아버지는
“이 자슥아 너는 몰라도 돼!”
하고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사흘 동안 추적추적 가을비가 안산의 잡목숲을 적시더니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부드러운 햇살이 눈부시게 꽂혀 내렸다.
아버지와 나는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 이틀 동안 집 안에서 감을 땄다. 텃밭의 뾰주리감*이며, 뒤꼍 장두감, 사랑채 접시감, 두엄자리 옆의 먹감*을 모두 따서, 절반은 연시를 앉히기 위해 병아리를 가두어 기르는 가리*에 넣어 지붕에 얹어놓고, 나머지는 곶감을 깎아 사랑채 벽에 줄줄이 두름*을 매 걸었다.
아버지는 감나무마다 감을 딴 뒤에는 두서너 개씩을 까치밥으로 남겨두곤 했는데,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매달린 까치밥의 감이 유난히도 빨갛게 돋보였다.
푸른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린 까치밥이 없어지던 날, 월곡리에 있던 붉은 별을 붙인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피란 갔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친정에 가 있었던 부면장네 부인과 아이들도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으며, 서울에 있던 도련님은 푸른 제복에 권총을 차고 나타났다.
집에 돌아온 부면장네 가족들은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인지 두 어른의 죽음을 별로 마음 저리게 슬퍼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장집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온 그들은 슬픔을 짜낼 기력마저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배불리 밥을 먹고 몇 날을 푹 자고 나서야, 얼굴에 서서히 슬픔과 분노를 함께 떠올렸다. 슬픔보다 분노가 더 컸다. 자기 가족을 누가 죽였느냐면서 눈에 빨간 자운영꽃 같은 핏발을 빳빳하게 세웠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핏발 선 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죄 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오들거리고 온몸의 힘이 좍 빠졌다.
눈에 핏발을 세운 그들이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이 어느 놈이냐면서 뿌드득뿌드득 이를 갈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창 깎아 들고 한데 어울려 횃불 밝히며 산을 오르내리던 젊은 사람들이 동짓달 서릿발에 구절초꽃잎 지듯 죽은 듯 숨을 죽였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 날 아침 우르르 부면장 집으로 몰려오더니, 쇠죽을 끓이고 있던 아버지의 목에 삼으로 꼰 밧줄 홀랑이*를 걸고 개끌듯 끌고 나갔다.
“부면장 어르신 부자를 쥑인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네놈이 부면장네 살림을 차지헐라고 눈이 뒤집혀서…….”
아버지를 끌고 나가면서 그들은 목청껏 소리쳤다.
“이눔들아, 네눔들 죄를 왜 나헌테 뒤집어씌우냐. 천벌을 받을 눔들아.”
아버지는 발부리에 힘을 쏟아 땅을 밀어 버티고, 홀랑이 밧줄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며 발버둥 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센 아버지였지만 네 사람의 청년들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홀랑이 밧줄을 잡아당기고 작대기로 허리와 어깨를 후려치며 발버둥치는 아버지를 끌고 이슬이 안개가 되어 몽글몽글 퍼지는 까치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내 힘으로 아버지를 살려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목이 터지도록 아버지를 부르며, 뒤따라갔다. 그러자 아버지를 끌고 가던 청년들이 나를 붙잡아, 동구 밖 상여바위 옆, 마을 사람들이 개를 잡을 때 매달아 죽이는 Y자 모양의 미루나무에 묶어버렸다. 나는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수리나무며, 복가시나무, 가시나무, 쥐똥나무, 황철나무 등 잡목이 울창한 까치산 후미진 계곡 속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가 범벅된 아버지의 울부짖음만이 산울림처럼 쩌렁쩌렁 울려왔다.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과 노인들까지도 마을 앞 돈들막* 위에 모여 서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까치산 계곡에서 울려오는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심장에 송곳질하는 아픔을 참으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보다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릴 생각은 않고 무표정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이들 마을 사람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미루나무에 묶인 채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온몸의 힘을 쥐어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서울에서 돌아온 부면장네 도련님과, 아버지가 부면장 집으로 오기 전 오랫동안 머슴을 살았던 대추나무집 최 주사 어른과, 통샘거리 박 생원 어른도 불러보고, 땅뺏기 놀이며 자치기, 발 들고 밀어내기 놀이 등에 가끔 나를 끼워주곤 했던 월곡리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내 울부짖음은 까치산 잠목숲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산울림이 되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외로움과 고통을 주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은 얼마 뒤에 찬란한 가을 햇살을 등지고 개선장군처럼 까치산에서 내려왔다.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돈들막으로 가서, 부면장 어른 부자와 이장 어른을 죽인 빨갱 이의 앞잡이를 처치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물레방앗간 옆 째보네 주막으로 몰려가 술을 퍼마셨다.
아무도 미루나무에 묶여 있는 나를 끌러주지 않았다.
나는 미루나무에 묶인 채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연리초꽃처럼 빨강 보랏빛으로 변하는 까치산만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디쯤 죽어있을까, 먼 시선으로 잡목숲을 헤집고 있는 것이었다.
산골의 짧은 가을 해가 미끄러지듯 할미산 너머로 떨어지고, 월곡리 사람들의 마음처럼 음산한 어둠이, 대지에서부터 까치산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꾸역꾸역 디밀고 올라가서야, 남편도 없이 곰배팔이* 아들과 함께 사는 째보네 주막 아줌마가 미루나무에 묶인 나를 풀어 주었다.
그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아버지를 찾으러 까치산에 갈 수가 없었다.
언젠가 꼴을 베러 가서 낫을 부러뜨리고 돌아와 부면장네 할아버지한테, 눈에서 마른 번갯불이 튀도록 호되게 꾸중을 듣고 쫓겨났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어슬렁어슬렁 돌아왔을 때처럼, 나는 온몸의 물기가 좍 빠져 휘주근한 몰골로 아버지도 없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면장 집에서는 나를 안으로 들여 넣어주지 않았다. 은혜를 모르는 개만도 못한 살인자의 아들을 거두기 싫다면서 밖으로 내쫓고 대문을 걸어버렸다.
나는 갈 곳이 없어 어둠이 두껍 게 깔린 고샅*을 서성거렸다. 월곡리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째보네 주막에서 식은 밥 한 덩이로 창자를 달래고 아무도 없는 상엿집*에서 잠을 잤다. 상엿집에서 자면서 아버지가 꽃상여에 실려 가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를 실은 꽃상여는 너울너울 까치산 꼭대기로 춤추듯 올라가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아버지를 싣고 하늘로 올라간 꽃상여의 모습이 오랫동안 눈에 선하계 밟혀왔다. 상엿소리도 귀에 살아남았다.
햇살이 퍼지기 전, 나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곰배팔이 장돌식이를 데리고 이슬을 털며 까치산으로 올라갔다.
혼자서 죽은 아버지를 찾아가기가 어쩐지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곰배팔이한테, 함께 가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선뜻 따라나서주었다.
애써 이슬을 터는 것처럼 곰매팔의 팔꿈치를 흔들며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도꼬마리풀이며 며느리배꼽, 한삼덩굴이 씨름하듯 뒤엉킨 밭둑을 앞서 걷는 장돌식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몇 번이고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냈다.
월곡리 마을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곰배팔이 장돌식이만이 나의 유일한 친구인 것 같은 생각에, 외로움 속에서도 불끈 용기가 솟았다.
하기야 월곡리 아이들 중에서 아무도 장돌식이와 같이 놀아주지 않았지만, 아이들한테 머슴 아들이라고 내돌림을 당하던 나만이 이따금 그와 함께 어울리곤 했었다.
“네 아부지가 어디쯤에 죽어 있을 것 같으냐?”
막상 그 덩치 큰 까치산에 들어서자 어디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할지 막연해서, 두렷두렷* 덤불 속을 쑤석여보고 있는데, 장돌식이가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를 끌고 간 마을 청년들한테 물어보고 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한테 묻지 않고 내 혼자 힘으로 찾고 싶었다.
우리들은 한동안 골짜기와 등성이를 헤맸다.
지쳐버린 우리들은 보기 좋게 머리를 깎은 것처럼 벌초를 한 무덤 위에 댕돌같이 올라앉아서, 가지째 꺾어 온, 서리를 맞아 한결 맛이 좋은 구찌뽕 열매를 먹고 있었다.
길고 아름다운 꼬리를 가진 장끼 한 마리가 떡갈나무 덤불 속에서 푸드덕 날았다. 나는 꿩이 날아가는 소나무 가지 끝 쪽을 바라보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소나무 가지 끝에 펼쳐진 한 조각의 파란 하늘을 보는 순간, 지난밤 꿈에 아버지를 실은 꽃상여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찍혀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 어젯밤 꽃상여가 산꼭대기로 올라갔었지.”
나는 혼잣말처럼 말하며 서둘러 산꼭대기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곰배팔이 장돌식이도 퍼떡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아버지는 까치산 꼭대기에 있었다.
홀랑이에 목이 감긴 채, 잎새들 사이로 찔려오는 햇살을 담뿍 받고 큰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가 죽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소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도 그렇게 슬프지가 않았다.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다행히 장돌식이가 옆에 있어주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울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에 묶인 홀랑이 밧줄을 풀었다. 밧줄이 풀리자 아버지의 시체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것처럼 쿵 땅이 울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무에서 내려와 아버지 시신을 반듯하게 누이자, 아버지는 햇살이 찔러오는 하늘을 향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눈을 감게 하려고 손바닥으로 눈두덩 을 여러 차례 쓸어내렸으나 그대로였다.
장돌식이한테 마을에 내려가 삽과 괭이를 가져오도록 시킨 나는 눈을 빤히 뜨고 누워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기가 무서워서 빨갛게 단풍이 든 떡갈나무 잎을 뜯어 으스스한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눈을 가렸다.
그날 우리들은 썩은 돌비늘*이 두껍 게 깔린 땅을 파고 아버지를 묻었다. 흙을 져 나를 수도, 떼*를 뜰 수도 없어 평장(平葬)을 하고 둘이서 끙끙거리며 돌을 날라다 무덤 위에 덮었다.
나는 아버지의 돌무덤을 곰배팔이 장돌식이한테 부탁한 뒤, 상엿집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날이 밝기 전에 쫓기듯 월곡리를 떠났다.
월곡리를 떠나면서 나는 장돌식이한테, 월곡리 사람들을 머슴으로 부릴 수 있을 만큼 큰돈을 벌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말해주었다.
그 결심을 맷돌질하듯 어금니 웅등 물고 30년 동안 시장바닥에서 뼈가 굵고 손바닥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 월곡리 사람들을 모두 머슴으로 부릴 만한 돈은 못 되어도, 이만하면 어깨 펴고 살겠다 싶어서야 두 눈 부릅뜨고 고향에 돌아갔다.
30년 만에 대하는 고향이었는데도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
나는 옛날 째보네 주막이었던 곰배팔이 장돌식을 찾아갔다. 집은 옛날 그대로 지지구지했는데, 그만그만한 아이들이 벅신거렸다.* 아이들의 성을 물었더니 모두 장가라고들 했다. 이것들이 모두 장돌식의 아이들이구나 생각하며 제 아버지 행방을 물었더니, 어머니와 함께 산에 떡갈나무 잎을 따러 갔다면서 해거름 때에야 돌아올 거라고 하였다.
나는 장돌식이가 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되도록이면 고샅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강둑에서 대밭 뒤를 휘움하게 감아 돌면서 멀찍이 마을을 휘둘러보았다. 옛날 그대로였다. 상여바위 옆 내가 묶여 있었던 미루나무는 오히려 키가 작아진 듯싶었고, 여름이면 각시 샘물만큼이나 시원한 그늘을 늘어뜨려준 윗당산의 늙은 괭나무며, 땅뺏기 놀이를 하던 판판한 당산들, 부면장네 대밭 뒤의 꿀참나무숲이 옛날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지붕들이 울긋불긋 색칠을 했고, 물레방앗간이 없어졌으며, 내가 월곡리를 떠나오기 전 이틀 밤을 잤던 상엿집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강둑에서 월곡리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났는데 다행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까지도 알 수 있었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해 질 무렵에 툽상스럽지만* 건강해 보이는 제 마누라와 함께 떡갈나무 잎을 한 가마니씩 지고 이고 돌아온 장돌식이도 선뜻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내 이름을 밝혀서야 나를 알아보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얼싸안기도 하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빙빙 돌며 내 모습을 둘러보고 어린아이들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팔자가 쭈욱 늘어졌구만그려. 이만하면 월곡리 사람들을 몽땅 머슴으로 부릴 수가 있겄구만. 허어, 내 친구가 이렇게 팔자가 늘어지다니, 허어!”
장돌식은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즐거운 듯싶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거짓 없는 즐거움인 것이었다.
“돌식이 네놈도 다복해 뵈이는데? 마누라도 얻고 자식들도 많고!”
나는 그를 만난 것이 기뻤다.
“허여! 아암 다복허고말고. 이 사람아, 나는 월곡리 안에서 일등 가는 아들 부자여. 아들만 여섯이라니께!”
그러면서 장돌식은 큰 소리로 마누라와 아이들을 불러 내 앞에 나란히 세우고 자랑스럽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나를 소개했다.
“이봐 마누라. 이 신사 양반이 내 친구여. 이놈들아, 이 양반한테 냉큼 인사드려. 이 애비하고 어 세상에서 젤 친한 깨복쟁이 친구여. 애비한테도 이런 비까번쩍한 친구가 있단 말여.”
장돌식은 곰배팔 팔뚝을 휘저으며 겅중거렸다.
밤이 되자 우리들은 물레방앗간이 있었던 자리의 팽나무 아래에 앉아서 줄담배를 피우며 서로 지금껏 살아왔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월곡리에서 나가서 장사치가 되어 돈을 번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내게 그의 홀어머니가 염병에 걸려 죽은 이야기며, 장가를 들자 주막을 걷어치운 것, 요즘엔 떡갈나무 잎을 따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람들한테 팔아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록 가난하지만, 병신인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사는 건강한 아내와 말 잘 듣는 여섯 아이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윤기가 자르르한 달빛이 비단처럼 우리의 우정을 감싸주었다. 달빛이 까치산 계곡을 빗질하듯 곱게 훑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30년 전 아버지가 마을 청년들한테 끌려가면서 울부짖던 목소리가 찌르르 뇌를 뚫었다.
“참 부면장네는 어떻게 사는가?”
나는 그때 아버지를 끌고 간 마을 청년들의 얼굴을 하나 떠올리며 물었다.
“살림이 작살이 났다네.”
“작살이 나다니, 왜?”
“모르재. 부면장 손자 놈이 다 쌔그라 묵었으니께.”
“도련님은 살아 계시고?”
“그 양반 불쌍허게 됐네. 우리 모양으로 날마다 떡갈나무 잎 따러 댕기네.”
“살아 있다니 다행이구만. 그 양반한테만은 우리 아버님이 부면장 어른 부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줘야……”
“그 걱정은 말소.”
“우리 아버님은 절대로 죽이지 않았네!”
“그 일이라면 풀쎄 만천하에 밝혀졌다네. 자네가 월곡리에서 나간 뒤 한 5년쯤 되었을까? 비석거리 덕길이하고 두껍다리 옆 만춘이하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는디, 덕길이 입에서 부면장 부자와 이장을 죽인 것이 바로 만춘이 네놈이라고 하면서, 그 죄를 덮어씌울랴고 자네 아부님을 애매하게 죽인 것까지 폭로가 되고 말았네.”
“그래 만춘이는 뭐라고 허든가?”
“혼자 한 일이 아니고 같이 한 일이라고 물고 늘어지더구만. 그때서야 월곡리 사람들은 자네 부친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었제.”
장돌식이의 말을 들은 나는 실팍한 돌멩이를 하나 집어 마을 쪽으로 힘껏 던지고 나서, 달빛이 점점 맑아지는 까치산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 다 그대로 월곡리에 사는가?”
나는 그날 아버지를 까치산으로 끌고 가던 청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며 물었다.
“만춘이만 월곡리를 떠나 살다가 3년 전에 다시 돌아왔네.”
나는 비로소 장돌식이한테 월곡리에 돌아와서 해야 할 일들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우선 그날 밤 안으로 당장 돈은 얼마를 주고라도 까치산을 사달라고 했고, 내일 아버지를 까치산 꼭대기에 이장(移葬)을 해야겠으니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특히 이장을 할 때는, 30년 전 아버지를 까치산으로 끌고 간 네 사람 모두 인부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월곡리 사람들에 한해서 누구든지 까치산 꼭대기까지 떼를 떠오면 한 장에 천 원씩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준비를 맡아서 해달라고 장돌식 이한테 1만 원권 지폐 한 묶음을 건네주었다.
내가 준 돈다발을 멈칫거리며 받은 장돌식은 한동안 멀뚱한 얼굴로 나를 짯짯이* 들여다보더니
“자네 아버님 이장을 허는 일에 그 사람들이 인부로 나와주겄는가?”
하고 어렵겠다는 투로 물었다.
“우리 아버님 일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든지, 돈으로 삶든지 알아서 하소.”
“그라고, 떼가 을매나 필요허다고 한 장에 천 원씩 이나 준당가?”
“다 생각이 있어 그러니 그대로 해주게. 그리고 돼지도 두어 마리 잡고…… 돈은 나한테 얼마든지 있네. 자 어서 가서 산을 사는 일부터 서두르게. 나는 여기 좀 더 앉아 있을 테니 어서 가보소.”
나는 장돌식을 떼밀며 말했다.
“혼자서 여기에?”
“혼자 여기서 생각 좀 하고 싶네. 잘 때가 되면 자네 집으로 갈 테니 내 걱정은 말소.”
장돌식을 보낸 뒤, 나는 두루미의 흰 날개와도 같은 달빛이 곱게 깔린 물레방아 옛터에 팔짱을 끼고 조그맣게 앉아서 촬촬촬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문득 30년 전 아버지가 죽던 날 밤, 부면장 집에서 쫓겨 나와 상엿집에서 추위와 무서움에 떨었던 때의 기억이 달빛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날 밤의 슬픈 기억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오랫동안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은 채 물레방아 옛터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참으로 달콤한 기억의 보상이었다.
나는 장돌식이가 어둠의 끝처럼 느껴지는 마을 앞 강둑에서부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마치 그대로 앉아서 새벽을 맞기라도 하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장돌식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사뭇 달빛을 휘저으며 모든 것이 다 잘되었노라고 하였다. 그는 내일 아침에 건넛마을에서 지관(地官)⁕까지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더니,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어.”
장돌식은 내가 준 돈다발에서 남은 지전과 까치산 매매 계약서를 뺨에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 아버님 일이라고 말했는가?”
나는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 이장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도 돈에 팔려 응했는지, 아니면 아무 내용도 모르고 그냥 마음을 정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말하려다가 참었구만. 서울에 잘 아는 사람이 있는디 월곡리에 구산*을 하여 선조를 모시고 싶어 헌다고만 했어.”
장돌식의 말에 나는 약간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내 일이라는 걸 알고 협조를 안 해주면 어쩌지?”
“돈이 생기는 일인디 제깐 눔들이 협조를 안 하기는―”
그날 밤 나는 장돌식이네의 골방에 때 묻은 목침을 베고 누워서, 밤새도록 미루나무를 흔들어대는 바람 소리와, 촬촬촬 흐르는 냇물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바람 소리, 물소리에 섞여, 30년 전 까치산으로 끌려가던 아버지의 울부짖음도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잠을 못 이루어 보리 꺼끄러기*라도 박힌 것처럼 썸벅거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는, 동이 트기 전에 장돌식을 깨워 삽과 괭이를 들고 까치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버지가 묻힌 돌무덤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 여러 차례 걸음을 멎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곤 하였다.
“이 사람아 다 왔네, 너무 올라가지 말게.”
나보다 훨씬 뒤따라오던 장돌식이가 손짓을 하여, 되돌아 스무남은 걸음 내려갔더니, 장돌식은 앙당그러진* 아기 다박솔* 위에 비닐 잠바를 벗어던지며, 턱끝으로 돌무더기를 가리켰다. 나는 순간 장돌식이가 가리키고 있는 돌무더기가 바로 아버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돌무더기 앞에 털썩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나라도 진작 이장을 헐까 했네만, 자네 돌아오기만 이해 저해 기다리다가 이렇게 됐구먼.”
장돌식이가 한 손으로 돌무더기를 들썩거리며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월곡리를 떠날 때 약속했잖은가. 월곡리를 몽땅 살 만큼 돈을 벌어서 꼭 돌아오겠다고 말이시.”
“나는 자네 말을 믿고 기다렸네.”
“30년 만에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게 되었구만.”
“그나저나 칠성판*'도 없이 맨땅에 가매장을 했는디 유골이 남어있을란가 모르겄네.”
“유골이 고스란히 흙이 되었어도 괜찮네. 암턴 아버님을 죽인 사람들 손으로 묘만 덩실하게 쓰면 되니께 말이시.”
나는 차라리 아버지의 유골이 깡그리 썩어서 흙이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돌을 들어냈다. 돌무더기를 치우다가, 그중에서 가장 크고 못생긴 돌 하나를 들어 아무 데나 내던져버리지 않고 아기 다박솔 옆에 조심스럽게, 마치 아버지의 유골을 모시듯 옮겨 놓았다.
“이 사람아 그 돌을 왜 신주 모시듯 허나?”
아무래도 내 태도가 이상했음인지 장돌식이가 뚜벅 물었다.
“30년 전 이 큰 돌을 둘이서 옮겨 놓느라 얼마나 힘들었었는가. 그때 내가 아버지가 묻힌 곳을 잊지 않도록 표시를 해놓아야 한담서, 둘이서 이 큰 돌을 끙끙거리며 옮겨 오지 않았는가.”
내 말에 장돌식은 희번하게 아침이 밝아오는 소나무 가지 끝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살려낸 듯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 아버지의 유골은 거의 흙이 되어버렸고, 두개골 부스러기만 흙 속에 뒤섞여 있었다.
나는 준비해 간 백지 위에 흙덩이와 함께 두개골의 부스러기를 소중하게 싸서 비닐봉지 속에 넣었다.
월곡리에서 아무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지 못하는 들독을 어깨너머로 펑펑 들어 던지고, 집채 같은 나뭇짐을 지고도 달음질을 치듯 하던, 억세고 왁살스럽던 아버지가 한 줌의 두개골 부스러기만 남다니, 갑자기 밝아오는 아침 하늘이며, 서울의 집에 있는 식구들까지도 무의미하게 생각되어졌다.
그 한 줌의 뼈부스러기를 찾아내기 위해 30년 동안을 시장바닥에서 발바닥에 블불 붙도록 뛰었던 일이 허무하기만 하였다.
파헤쳐진 무덤의 흔적은 30년 전 아버지의 시체보다 더욱 처참하게 보였다.
구덩이를 메운 뒤 장돌식을 내려 보내 인부들을 데려오게 한 다음, 아버지의 뼈부스러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까치산 봉우리에 올라가, 햇살이 더 굵게 퍼지기를 기다렸다.
햇살이 더 높게 퍼져 내려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할 무렵, 장돌식이가 열두 사람의 인부와 지관을 앞세우고 내가 앉아 있는 까치산 봉우리로 올라왔다.
얼핏 보니, 바지게*를 지거나 삽이나 괭이를 들고 올라온 인부들의 얼굴을 대충 알아볼 수가 있었고, 아버지를 까치산으보 끌고 갔던 네 사람 모두 보여,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가슴에 맺혀 있는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외쳐 불렀다. 그들 네 사람들은 이제 50줄의 중늙은이들이었지만 꾀죄죄하게 오그라져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늙고 찌들어진 그들이 불쌍하게 보였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쥐색 잠바 차림의 지관한테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했다.
쉰이 됐을까 말까 한 지관은 자빠듬히 뒷짐을 지고 산을 한 바퀴 돌고 와서는, 내가 앉아 있는 산봉우리에서, 월곡리를 등지고 큰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산 너머 쪽으로 20여 보쯤 내려가다가, 흙덩이를 빚어놓은 것처럼 등성이가 툭 불거진 가장자리에 끝이 날캄한* 작대기를 꽂더니, 까치산 안에서는 이만한 자리가 없노라고 하였다.
나는 지관의 주장을 기분 나쁘지 않게 꺾고, 월곡리가 발부리 밑으로 빤히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아버지를 모시겠노라고 하였다. 지콴은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 찜찜한 얼굴로 혀까지 차가며 입맛을 다시더니, 내 요구대로 산봉우리에 작대기로 광(壙)을 팔 곳을 그어주었다.
인부들은 두 패로 나뉘어 네 사람은 광을 파고, 넷은 토방을 쌓은 돌을 메어 나르고, 나머지는 묘가를 다듬느라 나무를 베고 흙을 골랐다.
광을 한 자쯤 팠을 때 월곡리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까치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낙들은 큰 플라스틱 자배기*에 남자들은 바지게에, 떼를 떠서 이고 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들과 노인들도 여럿 보였다. 얼추 헤아려도 30명은 될 것 같았다.
나는 떼를 떠서 까치산 봉우리까지 이고 지고 올라온 월곡리 사람들 중에서 아는 얼굴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아버지가 머슴을 살았던 부면장네 늙은 도련님과 최 주사, 박 생원 댁 손자의 얼굴도 보였다. 나는 나보다 열 살쯤 위인 부면장네 늙은 도련님한테만은 인사를 할까 하다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떼를 떠 온 마을 사람들은 장돌식이한테 가서 자기가 떠 온 뗏장을 세어 보인 후 한 장에 천 원씩 어김없이 계산해 받아갔다.
한 번에 떠 온 떼로도 봉분과 토방을 만들기에 충분할 듯싶었지만, 나는 장돌식 이한테 계속 떼를 떠 오도록 하라고 일렀다.
까치산 봉우리에 큰 잔치가 벌어진 듯 벅신거렸다. 술과 돼지고기도 푸짐하게 마련하여 아무나 싫도록 먹게 하였다. 돼지고기를 안주로 욕심껏 퍼마신 술에 거나해진 마을 사람들은, 월곡리가 생긴 이래 가장 포실한 잔치를 벌였다면서, 내 앞에 와서 넙죽넙죽 허리를 굽히며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닐봉지 속의 아버지 유골 부스러기를 향해 마음속으로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 아버님, 이제 한이 풀리십니까. 옛날 아버님을 소처럼 부리고 개처럼 천대하던 주인의 아들들이 내가 시킨 대로 아버님 무덤에 덮을 뗏장을 떠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 죄를 벗으려고 죄 없는 아버님을 죽인 네 사람들이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저의 한이 풀렸으니 아버님의 한도 풀리셨겠지요. ―
유골 부스러기를 광 속에 놓고 흙을 덮으면서도 그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유골이 땅속 깊숙이 묻히고, 덩실하게 봉분을 짓기 시작하자 나는 차츰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한 쾌감을 맛보았다.
“이만하면 월곡리 안에서는 젤로 큰 묘등이 되겠구만.”
“석물만 앉힌다면 세종대왕 능보다 더 덩실해!”
마을 사람들은 나 듣기 좋으라고 그러는지 큰 소리로 한마디씩 하였다.
이장 일을 모두 끝내고 마을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서 남은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한 잔씩 돌려 마시고 있는 자리에서, 나는 계획대로 내 신분을 밝혔다. 나는 그들이 내 신분을 알고 얼마나 놀라서 까무러칠까 하는, 일종의 달콤한 복수심을 생각하면서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내 아버지의 이름을 말했다.
“여러분들 오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실은 제 고향이 바로 월곡립니다. 30년 전에 이 마을에서 나갔었죠. 제 가친은 오랫동안 머슴을 살았던 황바우 씹니다요. 오늘 여러분들이 묘를 써주신 분.”
나는 되도록이면 목줄에 힘을 주어 그렇게 말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 표정에 별로 크게 놀라는 빛이 없었다. 특히 나는 부면장네 아들과 아버지를 죽인 네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죄스러움이나 위축감 따위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첨부터 황바우 아들이라고 밝힐 것이재 원!”
“아들이 잘된 걸 보니 돌무덤 자리가 명당이었던갑구만.”
“황바우 일이라면 우리가 이르케 많은 돈을 받기가 미안헌디.”
“참말로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일이구만.”
“그나저나 돈 벌어서 효도 한번 푸지게 잘했네그려.”
하고들 몇몇 사람들이 언뜻언뜻 한마디씩 뱉어냈을 뿐이었다.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지막 남은 한 잔의 술까지도 깡그리 털어 마시고,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거나하게 취해서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까치산에서 내려가버렸다.
나는 순간 까치산에서 내려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조차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잠시 후에, 산에서 내려가던 부면장네 아들이 허위허위 허리를 꺾고 다시 올라왔다.
“오랜만에 고향이라고 왔으니 오늘 밤에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 쉬었다 가소. 자네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았으면 한번 찾아갔을 걸세.”
부면장 아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하고, 같이 내려가자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잠시 후에 내려가 하룻밤 묵고 가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먼저 내려가도록 했다.
“꼭 우리 집에서 하룻밤 쉬었다 가야 허네 잉?”
부면장 아들은 산에서 내려가면서 다짐을 받았다.
양귀비꽃 같은 놀이 깔리기 시작하는 까치산 꼭대기에는 나와 장돌식과 음식 그릇을 치우는 장돌식의 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장돌식이한테 인부를 불러 아버지의 돌무덤에서 한쪽 다박솔 옆에 숨겨놓다시피 한 못생긴 큰 돌을 버스길까지 운반해주노록 부탁하고, 아버지의 큰 무덤 위에 올라앉아 월곡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돌은 왜 신작로까지 운반하라고 그러는가?”
장돌식은 산을 내려가던 인부 한 사람을 불러 내가 부탁한 대로 다박솔 옆의, 30년 전 우리들이 끙끙거리며 옮겼던 큰 돌을 운반해달라고 시키고 나서 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집으로 가져가려고.”
“미쳤는가? 하필이면 그 큰 돌을…….”
“어쩐지 그 돌에 우리 아버지의 혼이 들어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자네와 나 두 사람의 우정과, 월곡리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그 돌이라도 집에 갖다 놔야 고향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장돌식을 보며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건 그렇고, 그래, 자네 기분이 어쩐가? 이제야 한이 풀리는가?”
장돌석도 나를 보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었던 것 같구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되는 건데 말일세. 이제 부끄러워서 다시는 고향에 올 수가 없겠어. 내가 크게 잘못했네.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되레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말았어.”
나는 마치 내 심장을 떼어서 아버지의 유골 부스러기와 함께 무덤 속에 파묻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공허해졌다.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 때문에 말 한마디 없이 산을 내려왔다. 장돌식이가 부면장 아들과 약속한 대로 하룻밤 더 묵고 가라고 붙잡는 것을 탈탈 뿌리쳤다. 내가 저지른 부끄러움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돌을 깔고 앉은 채 버스 안에서 자울자울 졸았다.
꿈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깔고 앉아 있었다. 내 엉덩이 아래 깔린 아버지가 몹시 괴로운 듯 버둥거리더니 ‘이 불효막심한 놈아’ 하고 고함을 쳤다. 고함소리에 놀란 나는 벌떡 일어났다. 빵빵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귀청을 뜯었다. 버스는 불빛 사이에 낡은 기억처럼 어둠이 출렁이는 도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소설문학」 62호(1981. 1): 『문신의 땅』 (동아 1988)
문 순 태
문순태(文淳太) 1938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조선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I965년 『현대문학』 에 시 「천재들」 이 추천되고 1974년 『한국 문학』 신인상에 단편 「백제의 미소」가 당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의 역사와 현실을 줄곧 형상화해왔다. 영산강 상류지역(노루목, 방울재, 까치산, 할미산 둥)을 배경으로 근대화로 인한 고향 상실의 비극을 천착한 ‘징소리’ 연작을 비롯해 「말하는 돌」 「철쭉제」 『타오르는 강』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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