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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행동하지 않는 지성 - 장 폴 사르트르(6)
카뮈와 벌인 다툼은 루소가 디드로, 볼테르, 흄과 벌인 다툼만큼이나, 톨스토이가 투르게네프와 벌인 다툼만큼이나 씁쓸했다. 그리고 톨스토이-투르게네프의 사례와는 달리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여성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던 카뮈의 잘 생긴 외모,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재능과 독창성을 질투했던 듯하다. 1947년 6월에 출판된 <페스트>는 젊은이들을 매혹시키면서 순식간에 35만 부가 팔려났가. <현대>는 <페스트>에 몇 가지 이념적인 비판을 가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불편한 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좌익 쪽으로 향하면서, 가퀴는 더욱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됐다. 어떤 의미에서 카뮈는 당시 영국에서 조지 오웰이 점하고 있던 것과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전체주의 체제를 반대했고,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반열이 있는 악독한 인간으로 보게 됐다. 사르트르와 달리 카뮈는 오웰처럼 사상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계속 견지했다. 드 보부아르는 1945년에 카뮈가 그녀에게 토로한 얘기를 기록했다. “당신과 나, 우리의 공통점은 세상 모든 것 중에서 개인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교리보다 인간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보다 우정을 우선시합니다.”
드 보부아르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카뮈의 생각에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51-1952년에 나온 카뮈의 책 <반항하는 인간>을 둘러싼 최후의 파국이 왔을 때, 그녀는 물론 사르트르의 진영에 섰다. 사르트르와 그가 <현대>에서 거느린 시종들은 카뮈의 책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책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2단계로 펼치기로 결정했다. 우선 사르트르는 당시 스물아홉 살이던 프랑시스 장송을 선택하고 편집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가혹한 비판을 가하겠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거야.” 그리고 카뮈가 반박을 하자, 사르트르는 카뮈에게 주는 불쾌한 장문의 글을 썼다. “폭력적이고 겉치레뿐인 독재적 성향이 자네를 사로잡았네. 관념적인 관료주의의 지원을 받은 그 성향은 도덕적인 법칙에 따라 자네를 지배하는 척하겠지.” 가뮈는 “상처받은 허영심”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고, “좀스러운 작가들의 싸움”에만 빠져 있었다. “음울한 자부심과 상처받기 쉬운 면모가 결합된 자네의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자네에게 말하지 못해 왔다네.” 이즈음 조직화된 극좌파 모두의 후원을 받고 있던 사르트르의 공격은 카뮈에게 심한 타격을 줬다. 카뮈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카뮈는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르트르와 절교한 것 때문에 가끔씩 우울증에 빠졌다. 카뮈는 가끔은 사르트르를 “어머니가 소득세를 대신 내줘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비웃으면서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지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수준에 있는 사람과는 그 누구와도 우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르트르의 무능력은 가끔은 너무나 경박하기까지 했던 그의 정치관이 일관성 없고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타고난 정치적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중요한 정치적 견해를 사실상 전혀 갖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1940년대 말엽에 정치적으로 유력한 인물인 케스틀러와 아롱 같은 사람들과 갈라서고 난 후에야,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지지할 수 있게 됐다. 1946-1047년에 자신이 젊은이에게 신망이 높다는 것을 의식한 사르트르는 어떤 당을 지지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지식인들에게는 “노동자”를 지지해야 하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노동자를 아무도 알지 못했고, 노동자를 만나려는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프롤레타리아 집안 출신으로 오드 지방 억양을 강하게 구사하는 영민한 비서 장 코 정도였다. 그렇다면 노동자 대부분이 지지하는 당을 후원해야 하는 것일까? 1940년대의 프랑스에서 그것은 공산주의 지지를 뜻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는 그가 설파하는 강경한 개인주의 철학과는 정반대였다. 그런데도 1940년대 후반에도 공산당이나 스탈린주의를 비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롱과 케스틀러와 싸운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지도적인 공산주의 지식인이 된 옛 제자 장 카나파는 메스껍다는 듯이 썼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희롱하기를 좋아하는 위험한 짐승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어느 정도 알기는 하지만, 마르크스를 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보여준 유일하게 긍정적인 행보는 1948년 2월에 “역명주연합(RDR)”이라는 비공산주의 계열 좌파 조직의 반냉전 운동을 도운 것이었다. 운동의 목표는 세계의 지식인들의 규합 —그는 이것을 “지성인의 인터내셔널”이라고 불렀다 —하는 것이었고, 운동의 주제는 대륙 통일이었다. “유럽의 젊은이들이여 단결하라!” 사르트르는 1948년 6월에 한 연설에서 선언했다. “각자의 운명을 스스로 실현하라! (……..) 유럽의 창조를 통해, 이 새로운 세대는 민주주의를 창조해 낼 것이다.” 사르트르가 유러피언이라는 카드를 놓고 역사를 만들어 내기를 진정으로 원했다면, 그는 10년 후에 유럽공동체(EC)를 창설하게 될 운동의 기초를 다지고 있던 장 모네를 후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사르트르가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세세한 문제들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르트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저노가 마찬가지로 RDR의 동료 창설자였던 다비드 루세는 사르트르가 꽤나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명석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루세는 사르트르가 “사상의 유희와 운동에 굉장이 깊이 관여했지만”, 실제 사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르트르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1949년 6월에 당의 첫 전국 대회가 열렸을 때, 사르트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돌로레스와 멕시코에 있던 그는 결혼하자고 그녀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RDR은 간단히 해산됐고, 사르트르는 변덕 심한 관심을 게리 데이비스의 터무니없는 세계 시민운동으로 옮겨갔다. 걸출한 소설가이자 냉소적인 가톨릭 독립 교회주의자인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이 시기에 공개적으로 사르트르에게 몇 가지 사리에 맞는 충고를 했는데, 이 충고는 루소에게 불만을 가진 여자 친구의 비아냥거림을 상기시켰다. “우리의 철학자 양반은 이성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정치는 포기하라, 그리고 수학을 공부하라!”
사르트르는 그러는 대신 동성애자 절도범인 장 주네의 사건에 착수했다. 주네의 영리한 범죄 행각은 경솔하게 남을 믿는 사르트르이 성격(종교적 신앙을 대체할 만한 것을 찾는 측면)에 강하게 어필했다. 사르트르는 주네를 다룬 거창하고 부조리한 책을 썼다. 700페이지나 되는 책은 도덕률 페기론, 무정부주의, 성적으로 모순된 태도를 진심으로 찬양했다. 사르트르의 지각 있는 친구들의 의견에 따르면, 진지하고 체계적인 사상가 사르트르는 사라지고 지적인 선정주의자 사르트르가 등장한 것이 이 시점이었다. 생김새나 차림새, 생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시골 마을의 보수적인 여선생님 같았고, 사르트르보다 더욱 이성적인 인물이었던 드 보부아르가 그런 바보짓에 빠져드는 사르트르를 구해 내는 데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사랑과 (존 웨이트먼이 썼듯, 루이 14세의 맹트농 부인처럼) 그의 궁전에서 그녀가 차지한 신분을 붙잡아 두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음주와 약물 섭취를 너무나 염려했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자신감을 지켜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와 같은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따라서 그녀는 그의 조언자라기보다는 그의 모방자로 봉사했고 그것이 그들 관계의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오판에 힘을 실어줬고, 그의 우둔함을 뒷바침했다. 정치적 감각 면에서는 사르트르보다 나을 것이 없었던 그녀는 가끔은 세계 정세에 대해 사르트르와 똑같은 난센스를 표명하게 됐다.
1952년에 공산당과 관련된 딜레마를 해결한 사르트르는 공산당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공산당의 두 가지 선전 선동 캠페인에 관여하면서 도달하게 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인 판단이었다. 하나는 “앙리 마르탱 사건”(마르탱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기를 거부해서 감옥에 간 해군 수병이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당이 미국인 NATO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장군을 반대하면 일으킨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한 것에 대한 캠페인이었다. 당시의 많은 이들이 예견했듯이, 마르탱을 석방시키려는 공산당의 캠페인은 실제로는 당국이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오래 그를 옥살이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런 결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마르탱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사르트르는 조금 더 분별력을 보였어야 했다. 구태의연한 의회 보수주의자 앙트완 피네가 독재를 획책한다고 비난하면서 사르트르의 정치적 인식 수준이 폭로됐다. 사르트르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보여준 적도, (열정은 말할 것도 없고)관심을 가진 적도 결코 없었다. 다당제 사회에서 투표권을 갖는 것은 그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무엇을 뜻한 것일까? 이것은 대답하기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사르트르가 1952년에 공산당에 동조한 것도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당시는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범죄가 서방 세계에 상세히 보도되고 진실로 받아들여지던 때라서,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가 떼를 지어 공산당을 떠나던 시기였다. 이제 사르트르는 그동안의 주장들이 뒤집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스탈린의 수용소에 대해 어색한 침묵을 지켜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침묵에 대한 그의 변명은 <현대>에 참여하면서 그가 선언했던 것들과 완전히 모순됐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주장했다. “우리는 공산당 당원도 아니고 공공연한 공산당 동조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련의 노동 수용소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우리의 본분이 아니었다. 사회작적으로 의미심장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체제의 본성에 대한 이 논쟁에서 자유롭고 초연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열린 슬란스키를 포함한 다른 체코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소름 끼치는 재판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스스로 입을 다물어야만 햇다. 더 안 좋은 것은 1952년 12월 빈에서 개최된 공산주의 세계 평화 운동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대회에서 재주넘는 곰이 되기로 사르트르 스스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를 하이에나와 자칼이라고 부른 파다예프에게 굽실대겠다는 뜻이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평생에 제일 중요한 사건 세 가지가 1936년의 인민 전선, 파리 해방, 그리고 “이 대회”였다고 말했으며 (뻔뻔한 거짓말이다), 그가 예전에 쓴 반공 희곡 <더럽혀진 손>의 빈 공연을 공산당 우두머리들의 간청에 따라 취소시켰다.
시종일관 공산당 노선을 지지하던 4년 동안에 사르트르가 행하고 말한 것들의 일부는 그의 신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버트런드 러셀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남긴 불쾌한 격언이 진실임을 상기시켜주는 사례다. “아무리 어리석고 믿을 수 없는 주장이라 해도 철학자 한두 명은 그것을 두둔하게 마련이다.” 그는 1954년 7월에 러시아를 방문하고 와서 여행을 함께했던 <리베라시옹> 기자와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는 조지 버나드 쇼가 1930년대 초반에 악명 높은 러시아 여행을 한 이래, 주요한 서방 지식인의 입에서 나온 소련에 대한 가장 비굴한 설명으로 꼽힌다. 사르트르는 소련 시민들은 여행을 다니지 않는다고 말햇다. 여행이 금지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훌륭한 나라를 떠날 욕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장했다. “소련 시민들은 우리가 하는 것보다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효율적으로 그들의 정부를 비판합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소련에는 완전힌 비판의 자유가 있습니다.” 많은 해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을 인정했다.
1954년에. 소련을 처음으로 방문한 후, 나는 거짓말을 했다. 실은 거짓말이라는 용어는 너무 강한 용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몬을 썼다……나는 논문에서 내가 믿지 않은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사실들을 몇 가지 말햇다. 그렇게 한 일부 이유는 고국에 돌아오기 무섭게 나를 초청해 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소련과 내 사상 사이의 관계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젊은이 수천 명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 나온 이상한 고백이다. 게다가 사르트르는 당시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공산당에 동조했기 때문에, 그가 애초에 저지른 잘못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고백이기도 하다. 1952-1956년에 그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감춰 두는 편이 사실상 훨씬 관대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