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함은
근본이 좋은 귀족 가문의 자제로 그 풍모가 깨끗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그 지기(志氣)가 드높았다 전해진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다함을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니
사다함은 청을 이기지 못해 화랑이 되었는데
그 인기가 엄청나서 그를 따르는 낭도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562년 9월에
대가야가 신라에 모반하므로
진흥왕은
백전노장이었던 이찬 이사부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불과 15,6세의 나이로
왕에게 자신도 종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처음에 진흥왕이 사다함의 나이가 어리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사다함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몇차례 더 청하였다.
결국 진흥왕은 사다함의 청을 받아들여
사다함을 이사부의 귀당비장으로 삼아 종군하도록 하니
그의 낭도들도 사다함을 따라 출전하였다.
이사부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마침내 국경에 이르었는데
이때 사다함은
이사부에게 청하여
휘하의 5천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을 급습하였다.
갑자기 급습당한 가야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우왕좌왕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전단량 위에 백기를 세워 놓으니
가야군이 크게 당황하므로
곧 이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치자 곧 항복하였다.
대가야를 평정한 후에
진흥왕이 공로를 논하였는데
사다함의 공이 특히 으뜸이었다.
삼국사기 사다함열전에 따르면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로를 책정하여
사로잡은 가야인 3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이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에 왕이 토지를 하사하였으나 사다함은 이마저도 사양하고
대신 알천땅의 불모지를 청하여 얻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진흥왕은 사다함에게 가야인 200명과 좋은 토지를 하사하였으나
사다힘이 이를 3번에나 굳게 사양하므로 왕은 억지로 상을 내렸다.
그러나 사다함은 가야인 포로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고
하사받은 토지는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둘 중 어느것이 사실이든 간에
사다함은
하사받은 가야인 포로들을 풀어주는 등
실로 너그러운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사다함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신라인들은 사다함의 덕행과 미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사다함은 이보다 앞서서
무관랑이라는 이를 친구로 사귀어
죽어도 변치 않은 벗으로 지낼 것을 맹세하였다.
그런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사다함은 몹시 슬퍼하며 통곡하다가 그 역시 7일만에 죽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는 겨우 17세에 불과하였다.
일부 학자는 이 기록을 토대로
사다함과 무관랑이 실은 동성연인의 관계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미소년
집단이었던 화랑도 내에서
이런 일이 흔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거니와
고대 시대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동성연애가 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추측은 추측일뿐 사실로 완전히 단정짓기는 힘들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그는 5세 풍월주였다고 한다.
비량공과
벽화후(소지마립간의 부인이자 법흥왕의 후궁이자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누나)
사이의 아들인
구리지의 아들.
어머니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자 4세 풍월주 이화랑의 남매인 금진.
형제로 친형 토함(4세 풍월주 이화랑의 부제)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 설원이 있다.
우산국 정벌로 유명한 이사부와 함께
가야를 정벌,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받은 토지는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포로로 받은 가야인 300명을 풀어주었다.
풍월주 3대 미남(위화랑, 이화랑, 보종랑) 중 하나인 이화랑은
사다함을 가리켜 자신을 뛰어넘는 아름다움과 무예 실력을 가졌다고 평했으며,
문노는 완벽하지만 그의 유일한 오점은 미생과 친하게 지낸 것이라고 평했다.
또한 미실은 자신이 사랑한 남자 중 최고의 남자는 사다함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다함을 까는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이
고작 성문 관리직인가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당시 사다함의 나이와 가문을 생각하면 정말 파격적인 인사다.
친구였던 무관랑이 죽자
그의 죽음을 슬퍼해 7일 동안 통곡하다가 죽었다.
이런 점 때문에 사실 화랑들 안에서 동성애
가 퍼져 있던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무관랑을 유혹했지만
사다함이 너그럽게 용서하자
무관랑은 도망치기 위해 월성을 넘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시가 연인 미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무렵.
이에 사다함이 슬퍼하여 병들자 금진이 자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며 안타까워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탓이 아니라고 어머니를 위로하고 죽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사다함은 미실과 친척 관계다.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의 여동생이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이므로
미실에게는 당숙이 된다.
부계로 따지면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의 처남(미실의 삼촌은 아님)의 처남의 사촌(겸 매부)의 아들이 사다함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미실이 지소 태후에 의해 쫓겨났을 시기에 미실과 정분이 있었다.
그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미실은 다시 불러들여지는데,
사다함은 크게 슬퍼해 '청조가'라는 노래를 지었다.
나중에 세종
과의 사이에서 생긴 하종이 태어날 때
사다함이 미실의 배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다함과 닮아
사실 하종은 사다함의 아들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화랑세기에선 그에게 자식이 있었는지 언급이 없는데,
공식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
의 할아버지 김원훈이 사다함의 아들이란 언급이 있다.
풍월주 부제로 있었던 동생 설원이
아직 어리다는 걸 염두에 둔 건지
미실을 생각한 건지 능력을 보고 생각한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사다함은 죽을 때 설원이 어린데 이 뒤를 어찌 하겠냐는 이화랑의 말에
차기 풍월주로 세종
을 추천했다고 한다.
미실의 어린 남동생 미생도
화랑으로 만든 뒤
문노가 말도 못 탄다며 탐탁치 않아 하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라며 설득하기도 했다.
그는 미실이 세종과 혼인하기 전 정을 통했던 인물로,
화랑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라
가야 공격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 시절에 동백매도(冬栢梅徒)의 수장이었다고 한다.
전쟁에 나가기 이전, 미실과 혼인을 약속했으나,
돌아와보니 미실은 세종과 결혼해있었다.
이에 사다함은 큰 실의에 빠졌으며,
미실에게 마지막 선물로 (후에 "사다함의 매화"로 불리는) 가야의 책력을 남겨주고 자살한다.
이 책력은 원래 가야 왕실의 것으로,
가야 멸망 후에는 진흥왕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사실을 숨긴채 사다함이 몰래 빼돌린 것이다.
그가 건내준 책력은
후에 미실이 신권(神權)을 장악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신권을 장악해낸 미실은
왕실의 권위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된다.
이 책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월천대사'가
미실을 도와준 이유도
바로 사다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가야 멸망 때
죽을 위기에 처한 월천의 목숨을
사다함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월천은 따로 미실에게 충성심을 가진게 아니라
사다함에 대한 보은의 차원으로 도와준 것이었다.
미실은
그를 "생애에 유일하게, 뭔가의 이득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히 사랑만을 준 남자"로 기억하고 있다.
<선덕여왕>드라마 초중반부에
미실은 거의 인간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권력욕의 화신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데,
그런 그녀가 인간적 감정을 드러낸 몇 안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서리
의 앞에서 그를 기억하며 눈물짓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