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새로운 나와 너를 만나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당신이 나이며 최고입니다.
이것은 20년 동안 해 오던 행복한 가족 캠프에서 하는 인사다. 대종사님은 교의품 8장에서 우리가 진리를 깨치려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고자 함이니 만일 활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쓸데없는 일이다. 하시고 그 첫 번째 덕목으로 일원상을 대할 때 마다 견성성불 하는 화두를 삼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묻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 답을 주지 않는다. 원불교가 100년이 지나고 교단 4대를 맞으며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면 일원상을 대할 때 마다 견성성불 하는 화두를 삼지? 하고 묻고 있는가? 그냥 사경하고 봉독하며 법문 듣고 부지런히 암송하고 있다. 법문을 듣고 암송하면 그 내용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때문에 화두가 잡히지 않고 이것의 중요성을 모른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공부인과 수행자에게 뼈아픈 비극이다.
대종경 서품 1장에서 참 나를 대각하신 일원상의 첫 번째 내용이 생멸이 없다. 하셨다. 인과품 1장에서도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길이 돌고 돈다 하셨다. 일원상을 대할 때 마다 견성 성불하는 화두를 삼아라는 것은 생멸 없는 참 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라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의두와 성리 공부는 의심되는 바를 자기에게 물어서 답을 얻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 과정을 보자. 처음에는 하늘을 보고 의심하셨고 산신을 찾아 답을 구했으나 구하지 못하시고 도꾼들을 찾아 문답하여도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 후 “이 일을 어찌 할꼬?” 하는 화두를 지니고서 여기에 깊이 몰입하시다가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으셨다. 대종사님이 평생 몸으로 하신 가장 큰 수행은 자기를 잃어버릴 만큼 스스로 의심을 품고 계시다가 결국 대각하신 것이다.
부처님도 초기 법문에서 생노병사에 의심이 걸리셨고 6년 고행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시다가 당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서 생멸 없는 참 나를 발견하시고 생사해탈 하셨다. 생멸 없는 나는 누구인가? 이 화두를 조용히 품고 부단히 자기에게 물어 보자. 묻고 또 물으면 가장 먼저 이 몸의 나, 생 노 병 사 하는 나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자득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음을 알아차렸다. 이 몸의 나를 나로 알고 지내온 모습을 보니 끊임없이 분별주착하며 지내온 어리석은 중생이었다. 생사가 있는 나, 죄복, 선악, 고락, 시비, 음양, 대소, 유무, 자타, 과거와 미래가 있는 나를 나로 알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하여서 치연히 생존경쟁 하는 삶, 성공하고 출세를 위하여 달려온 나날이었다. 출가하여 전문 수행자가 되었어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몸을 참 나로 알고 이를 들어내기 위해 마음은 부끄럽게도 좋은 자리를 찾고 높은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범부 중생, 어리석은 중생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나를 나로 알고 산다. 자성의 나, 성품, 일원, 허공의 참 나는 태어난 적이 없고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나이다. 불생不生과 불별不滅을 자각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한다. 죄복, 선악, 고락, 시비, 음양, 대소, 유무, 자타 등이 둘이 아닌 하나를 자각하는 것이 해탈解脫이다. 참 나는 죄복, 선악, 고락이 하나여서 지복 지선 극락을 즐긴다. 이를 여실히 살펴보면 아무 문제가 없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늘 새로운 나와 너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처음 뵙겠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당신이 나이며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