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들자! 나주 금성동 파출소로
증언자 : 김성수(남)
생년월일 : 1963. 4. 4(당시 나이 17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대학생)
조사일시 : 1988. 8
5·18 당시 31사단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가 무기한 휴강에 들어가자 자취방에서 며칠간 쉬다가 21일 오치고개 고속도로로 나가 시위대 버스를 탔다. 차 안에는 2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여자가 5명 정도 있었다.
우리들은 '김대중이 석방하라. 전두환이 물러가라'는 구호와 훌라송, 애국가 등을 부르고 각목으로 버스를 두드리면서 시내로 진입했다.
시내로 들어서니 인도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서방을 거쳐 광주역으로 갔더니 택시 한 대가 불타고 있었다.
양동에서 군용 트럭으로 바꿔타고 시내 곳곳을 누비다가 나주로 갔다. 나주 금성동 파출소 진입로로 막 들어서자, 일부 경찰들은 도망가고 몇몇 경찰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는 무기고로 갔다. 무기고 문이 잠겨 있어서 군용 트럭으로 서너 차례 밀었더니 철문이 열렸다. 맨 앞줄에서 들어간 사람들이 너도 나도 권총을 들고 나왔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공기총과 장총밖에 없어서 나는 공기총으로 무장했다. 그 때 우리는 실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들은 나주를 벗어나서 남평지서로 갔다. 방위병 몇 명이 우리를 보더니 도망가 버렸다. 남평지서에는 경찰도 없고 무기고도 텅 비어 있어서 남평시내로 진입해 차를 정차시켰더니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거기에서 50대 남자 2, 3명과 젊은 사람 7, 8명이 우리 차에 탑승해서 다시 광주로 왔다.
임동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무기를 털러 갔는데, 30대 후반의 직원인지 시민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무기고에서 총을 직접 빼줬다. 그때 나는 M1으로 무장했다.
화정동 공단입구에서 시민들이 음료수 상자를 올려주었고 지나가는 시위차량에서도 음료수가 남는다고 같이 나눠먹자고 2박스 정도를 우리에게 주었다. 다시 양동으로 갔는데, 차에 탔던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주먹밥과 담배를 조그마한 푸대에 담고 있었다. 이렇게 시내 곳곳에서 차가 지나가면 주먹밥, 담배, 음료수 등을 차에 올려주었다. 시내를 돌다 돌고개로 갔는데, 담배를 푸대에 담던 아저씨가 담배를 가지고 내려버렸다.
돌고개에서 다시 광주공원으로 갔다.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실탄을 배급하고 있길래 나도 실탄을 배급받았다. 광주공원에 있는 한 시민이 M60을 차에다 설치하자, 어떤 사람이 "내가 해병대 출신이니까, M60은 내가 사수 하겠다"고 했다. 어깨 부분에 총을 맞은 사람이 내 옆에 있었는데, 그 사람을 나와 몇몇 사람이 업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원들의 가운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다시 광주공원으로 와서 군용트럭을 타고 시내를 누비면서 공중을 향해 총을 쐈다. 캄캄한 저녁에 양동에서 차를 내려 친구 자취방을 찾아갔더니 친구는 없고 문은 열려 있어서 안에 들어가 누워 있는데 저녁내 총소리가 들렸다.
친구집에서 하루밤 자고 다음날(22일) 12시경에 일어나 양동으로 나갔다. 양동다리에서 15-16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시내에서 본 처참한 광경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깐 그 이야기를 듣다가, 아세아극장, 고속버스터미널, 광주역으로 가보았으나 사람들이 없어서 다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공용터미널은 유리창이 다 깨져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다. 이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날이 저물어 양동 친구 자취방으로 와서 밥을 해먹고 잤다.
다음날(23일) 내 자취방으로 가려고 하자 친구 자취방 앞에서 세들어 살고 있는 50대의 경상도 사람이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집에서 3, 4일 기거하다가 두암동을 거쳐 광주교도소 앞 동일실업고등학교 앞을 걸어가는데, 그 학교 옥상에서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겁이 났으나 못 본 체하고 지나갔다. 거기를 무사히 통과해서 내 자취방으로 왔다. (조사정리 박인근)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 가득한 주말 보내시고
사랑이 함께하는 휴일 맞이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