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와 인간 심령의 기본값인 ‘종교’ 모드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1-5)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땅을 판 값의 일부만 바치면서 전부라고 했다가 죽임을 당했을까? 그들은 새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힘차게 진행해 가는 길에 갑자기 장애물을 내밀어 왕의 행차를 멈춰 서게 하였다.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증언을 통해 밝혀진 것처럼 진정한 이스라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시고 주가 되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기 백성을 더하여 가시고, 그들은 그 왕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그 나라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 4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 절정을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오직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서만 가능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우리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현재의 하나님 나라, 시작은 되었으나 완성에는 이르지 아니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이 전투 중에 있는 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만 바라보며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제자들이 그들과 같지 않은 것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 안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교회가 진정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크게 흔들린 것이 아니고 여전히 전진해 가고 있으며, 문제를 잘 해결함으로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는 결과를 전하여 주고 있다. 일찍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항상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며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교회 안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알고 계시며, 니골라 당의 행위와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지적하시고 싸우시고 벌하신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일곱 교회의 여러 연약을 보았지만 결국은 온전한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며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계 22장).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끔 일어나는 죄와 연약 때문에 넘어지거나 후퇴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인내의 크심에 대해 감사하고, 그의 용서와 긍휼을 찬송하게 된다.
그런데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런 죄를 짓고 만 것일까?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행 4:31),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행 4:33)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는(행 4:34-35) 거룩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에서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죄를 짓는 일이 왜 가능한 것일까?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읽다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인용해 보고자 한다.
마르틴 루터의 근원적 통찰은 ‘종교’가 인간 심령의 기본값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설정을 바꾸지 않는 한 당신의 컴퓨터는 자동으로 기본값 모드에서 작동한다.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당신의 마음 역시 복음으로 회심한 후에도 다른 원리로 되돌아가 작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칭의와 희망과 의미와 안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찾으려는 게 우리의 습성이자 본능이다. 우리는 한 차원에서는 복음을 믿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믿지 않는다. 우리 마음이 ‘사실상 의지하는’ 대상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認定), 직업적 성공, 권력과 영향력, 가정과 가문의 정체성 등이다. 그 결과 우리는 계속해서 다분히 두려움과 분노와 무절제에 끌려다닌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 실천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속적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속속들이 배어들게 해야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복음을 늘 섭취하고 소화해 자신의 일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팀 켈러.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윤종석 옮김. 163-164.
우리의 기본값은 칭의와 희망과 의미와 안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찾으려는 것이요, 그러므로 엘리사를 곁에서 모신 게하시의 탐욕(왕하 5장)과 예수님과 3년이나 함께하였던 가룟 유다의 배신이 보여준 모습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항상 존재하는 것이요, 잠시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리고 주님의 붙드시는 은혜가 없으면 누구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넓고도 깊은 수렁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판후에 일부만 바치고도 전부를 바친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어떤가? 기도 시간에, 예배 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찬송하지만 사실은 지극히 일부만 바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음 찬송을 부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오늘 사도행전 5장을 공부하면서 더욱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323.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1)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 없이 드리리다 /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 없이 드리리다
(3)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가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영혼의 부담을 느낀다. 만약 이 찬송을 부르는 신자들이 이 가사의 절반만이라도 순종한다면 교회는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고, 세상은 확실하게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사의 내용보다는 ‘사람들의 인정(認定), 직업적 성공, 권력과 영향력, 가정과 가문의 정체성 등’을 더 많이 생각하고,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거짓된 행복에 안주하기 쉽다. 사실은 이런 정도도 고상한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건강 관리나 잘하며 사는 것을 가장 큰 행복과 의미와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간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다.
복음으로 회심한 후에도 다른 원리로 되돌아가 작동할 것이라고 말한 마틴 루터의 기본값에 대한 설명을 명심하자. 점점 죄를 벗어버리고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성화의 삶이란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죄성과 처절한 전투를 해서 우리의 몸과 환경과 삶을 의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쉬운 길이 아니고 많은 기도와 수고와 몸부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일에 꼭 필요한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는 바울 사도의 권면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값을 이기고 사는 새 사람의 삶인 것을 확신한다. 주여, 매일 매 순간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여주시고, 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