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를 넘어서는 무더운 날씨에 아랑곳 하지않고 우리 향우님들의 열정은 만차를 넘어 개별승합차를 동원 함께 동참해주는 열정은 가히 장성인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일것이다
얼마를 달려 1차 머문곳은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지점에 있고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이색적인 장소인 임진각이다.
이곳은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북쪽 한계선으로 남북을 관통하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국방상의 요지이며, 실향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각은 연건평 2,442㎡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되어 있으며 3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임진강과 자유의 다리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통일로와 나란히 달리던 경의선이 끊어져 있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표지판을 볼때 남북분단의 현실을 피부로느낄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1977년부터 매년 연초에 연시제(年始祭), 추석에 망향제(望鄕祭)를 올리며, 그밖에도 북한에 계신 부모님을 경모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다시 버스에 승차 일행이 다다른곳은 이이율곡 선생의 아버지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율곡 선생이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지라 녹음이 짙어 눈도 시원하고 숨을 쉬는 내내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마음이 맑아진다.
내심 대학자이었던 율곡 선생의 정신을 들여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율곡 이이선생의 가족묘역과 자운서원 그리고 율곡기념관이 있다.
자운서원은 (경기도기념물 제45호) 1615년(광해군 7)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하는데 1650년(효종 1)에‘자운(紫雲)’이라 사액(賜額)을 받은 후 1713년(숙종 39)에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과 현석 박세채 두 분을 추가 배향해 지방교육을 담당 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묘정비만 남아 있다가 1970년 문성사와 내삼문, 강인당, 동재인 입지자, 서재인 수양재을 복원 하였으며 신사임당묘와 이이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4호.제15호)는 여견문을 지나 자운산
기슭에 율곡선생묘와 신사임당묘를 비롯한 가족묘 13기가 자리잡고 있다. 율곡기념관은 율곡선생관련 자료전시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신사임당의 서화 유품과 큰 누나 매창과 막내 동생 이우(호는 옥산)의 작품을 감상 하고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영상으로 시청 모처럼 신사임당 과 율곡선생의 존경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았다
1536년(중종 31년) 1세
음력 12월 26일에 강릉 북평촌(현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다.(선생의 원래 고향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연산군 10)∼1551년(명종 6). 시. 글씨. 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본관은 평산(平山).
[高山九曲歌(고산구곡가)]
[1]
高山九曲潭(고산구곡담)을 사람이 몰으든이
誅茅卜居(주모복거)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武夷(무이)를 상상하고 學朱子(학주자)를 하리라.
[2]
一曲(일곡)은 어드매고 冠岩(관암)에 해 빗쵠다
平蕪(평무)에 내 거든이 遠山(원산)이 글림이로다
松間(송간)에 綠樽(녹준)을 녹코 벗 온 양 보노라.
[3]
二曲(이곡)은 어드매고 花岩(화암)에 春晩(춘만)커다
碧波(벽파)에 곳츨 띄워 野外(야외)에 보내노라
사람이 勝地(승지)를 몰온이 알게 한들 엇더리.
[4]
三曲(삼곡)은 어드매고 翠屛(취병)에 닙 퍼졋다
綠樹(녹수)에 山鳥(산조)는 下上其音(하상기음)하는 적의
盤松(반송)이 受淸風(수청풍)한이 녀름 景(경)이 업세라.
[5]
四曲(사곡)은 어드매고 松崖(송애)에 해 넘거다
潭心岩影(담심암영) 온갖 빗치 잠겻셰라
林泉(임천) 깁도록 죠흐니 興(흥)계워 하노라.
[6]
五曲(오곡)은 어드매고 隱屛(은병)이 보기 죠희
水邊精舍(수변정사)는 瀟灑(소쇄)함도 가이 업다.
이 中(중)에 講學(강학)도 할현이와 詠月吟風(영월음풍) 하올이라.
[7]
六曲(육곡)은 어드매고 釣峽(조협)에 물이 넙다
나와 고기와 뉘야 더욱 즑이는고
黃昏(황혼)에 낙대를 메고 帶月歸(대월귀)를 하노라.
[8]
七曲(칠곡)은 어대매오 楓岩(풍암)에 秋色(추색) 됴타
淸霜(청상) 엷게 치니 絶壁(절벽)이 錦繡(금수) 로다
寒岩(한암)에 혼자 안쟈셔 집을 잇고 잇노라.
[9]
八曲(팔곡)은 어대매오 琴灘(금탄)에 달이 밝다
玉軫金徽(옥진금휘)로 數三曲(수삼곡)을 노는 말이
古調(고조)를 알 이 업스니 혼자 즐겨 하노라.
[10]
九曲(구곡)은 어대매오 文山(문산)에 歲暮(세모)커다
奇巖怪石(기암괴석)이 눈 속에 무쳐셰라
遊仁(유인)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업다 하더라.
‘조선 유학 대가’ 이황·이이 만남
당시 조선은 임꺽정이 출몰하는 등 사회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던 시절 율곡은 “물 새는 배에 타고 있는 백성을 구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면서 벼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친구에게 설명하고‘동호문답’만언봉사’성학집요’등의 저작물은 사회개혁안이었던 셈이다.
조선 유학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분 다 유교 이상 국가를 꿈꾼 조선의 대표 선비로 퇴계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이이는 20년가량 국가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배우고 느낀 걸 실천하였으며
자연과 인간의 작용을 리(理·원리나 법칙)와 기(氣·현상)로 풀어가는 두 학자의 이론은 조선 유학 수준을 최고로 끌어올렸는데 이후 조선 유학은 이황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로 구분됐으며 양 계보는 조선 사회를 이끈 지배 이데올로기였는데 기호학파는 경기와 충청에서 따온 이름으로 서인 세력의 중추를 이루면서 조선 중후기 정치를 주도했다.
전시 작품들(아래)
성학집요
신도비
율곡기념관을 나와 버스에 오르니 차안의 에어컨 바람이 간담이 싸늘할 정도로 시원함을 느낀다
약 15분여를 달리다 보니 율곡 오리허브농원이 나온다
고향 향우분님이 경영하시는곳으로 2만여평에 농원을 세워 연수원으로 사용되도록 하였다는데 경치가 장관을 이룬다
반갑게 우리들을 맞아 주시는 사장님의 환한 웃음에 배고픔 조차도 잊어버리게 하였다
정성것 마련해주신 음식들 일류 한식 부페 식당보다 나은것같다
맛도 환상적이다 토속적인 음식맛도 먹는 즐거움을 배가 시킨것 같았다
법성포에서 공수해온 토속주인 법성 토정주를 40여년전에 맛보고 그곳에서 맛을 볼 수 있었다는게 행운이라 생각해본다
배가 부르니 이젠 소화도 시켜야 할듯싶다
족구장에 이르니 천연잔디가 싱그럽게 펼쳐져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짝홀수로 나눠진 족구 경기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열띤 경기, 응원도 빠질수는 없으리라 홀수이겨라! 짝수이겨라!
승패는 갈려야 하겠지만 승자는 패자에게 패자는승자에게 서로 잘했다고 칭찬화는 모습은 장성 향우이었기에 가능하였으라 생각된다
신발 멀리 날리기 ,명함 전달하기 깨임엔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주 재미있었다
이젠 몸도풀고 소화도 적당히 되었으니 우리한번 놀아나볼까
3층에 마련된 노래방시설은 우리 향우님들 전원이 참석할 수 있는 넓은장소라 좋았다
청춘을 돌려다오! 았싸! 좋고 좋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나눠주는 푸짐한 행운권 추첨과 선물에 모두들 함박 웃음이 짓는것같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경길에 올라 버스안에서의 아쉬움을 달래는 막춤 조아부러
벌써 도착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사당역에 도착하였다
집행부에 감사들 드리며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참여 해주신 향우님들에게 깊은감사를 드리고 다음달에 만나기로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다음산행에서 만나요
보장?김갑술 올림
첫댓글 사진 설정도 좋았고 야유회 후기 내용도 해설가 이상으로 잘 표현하셨습니다...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순간에도
볼것은 다 보시는군요... 아주 아주 좋습니다.
정말좋았네!
형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술만 잘드시는줄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영상으로 편집까지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