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2월 7일
말씀: 슥2:1-5
제목: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
사람들이 어디사세요. 그러면 어디에 산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사는 동네 때문에 가치가 평가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주택 살면 주택 것들, 주공에 살면 주공 것들 이러면서 사람차별하고 그 차별이 아이들까지 이어져서 주택 것들은 주택 것들과 놀아라 그러면서 어린 아이 때부터 사람괄시하고 빈부의 차이를 경험하게 만듭니다. 둔산동에 가면 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사이에 통로가 없습니다. 같이 다니기 싫다는 것이겠지요. 임대아이들과 일반아파트아이들이 함께 학교생활도 하지 못하도록 반 편성할 때 나누라고 항의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2005년도 결혼정보센터에서 통계를 낸 것인데요, 26세에서 39세의 회원들을 조사를 했는데 같은 지역고등학교출신을 배우자로 선택한 비율이 40.3%였다고 합니다. 특히 강남고교출신 남성인 경우 83.9%, 16.1%는 서울여성출신을 아내감으로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강남출신 여성도 강남출신 남성을 절반이상이나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빗장 도시화되고 있습니다. 빗장도시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학력차이와 교육의 수준차이, 비싼 집값차이, 이 삼박자가 어울려 다른 지역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패쇄적인 도시로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빗장 도시화되는 이런 사회풍토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교회 와서는 형제요 자매요 이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요새를 쌓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현실에서는 요새를 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빗장을 걸고 요새를 쌓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답을 하려면 첫 번째로 우리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먼저 우리는 쉽게 빗장도시에 대한 비판의 자세를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근히 빗장도시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빗장도시가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상승기회의 교육환경을 꿈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면 땅값이 비싼 동네나 교육환경이 좋은 지역의 환경과 도시가 끔직하고 무섭기도 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비감과 거부감과 또는 선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둔산동이나 서울 같으면 강남이나 이런 곳에 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수 만 있다면 좋은 환경과 교육제도가 잘 된 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 욕망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좋은 환경의 교육의 분위기가 있는 도시를 꿈꾸는 것입니까? 자녀 때문입니다. 생애의 흐름 속에 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그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가능하다면 확률적으로나마 더 좋은 교육환경을 아이들에게 제공해 주고 싶어 하는 모든 부모의 솔직한 바람은 누구나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둔산동이나 녹원지역이 자녀를 위해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대전은 좀 덜 하지만 서울 같은 경우는 강남, 소유 8학군이 모든 사람들의 자화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빗장 도시를 쌓고 그 안에서 자녀에게 학력과 부를 재생산하고 그것을 고착화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을 하지 않은 한 우리는 각자의 수준에서 빗장도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도 못한 채 요새를 쌓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들이 성을 쌓으려고 하는가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의사들에게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크로닌이가 쓴 ‘성채’라는 소설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이 자기와의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지니고 다녔다는 전설적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 주인공이 앤드루 맨슨인데 의사입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외지의 탄광촌에 들어가서 열악한 환경에서 광부들의 폐결핵을 연구하는 인도주의적 의사였는데 나중에 명성을 쌓고 그러면서 돈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태클을 걸었습니다. ‘여보 왜 돈 돈 하세요 그토록 가난했을 때도 우리는 행복했잖아요. 당신이 늘 비난하던 돈의 재물이 되기 싫어요. 당신이 그러셨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채를 보며 살아야 된다고 당신은 전에 그런 기백을 가진 분이셨어요’그렇게 제동을 걸었지만 앤드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는 다만 성공하고 싶을 뿐이야 세상은 신분과 재산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거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에게 부림을 당해 나는 그런 현상을 뼈에 사무치도록 맛보았기 때문에 나는 남을 부리고 싶은 입장이 되고 싶은 것뿐이야’그렇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신분이나 재산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이며 역사적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한 결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18:11절에서 ‘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라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현대인들이 빗장도시로 진입하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서 성채를 쌓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새를 쌓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요새를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이방인들은 높은 성벽을 쌓고 있습니다. 거기다 문을 달고 자물쇠를 채우고 완벽한 요새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어차피 성을 쌓고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성을 쌓고 있습니다. 일부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심각한 대가를 취루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빗장을 무너트리거나 빗장의 자물쇠를 여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빗장도시에 들어가서 다시 성을 쌓고 빗장 자물쇠를 잠그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로인해서 교회가 복음전도가 막히고 있고 교회본질이 무너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나라가, 도시가 성을 쌓고 빗장도시를 만들면 그곳은 사람을 삼키는 무서운 땅이 됩니다. 성에 빗장을 걸면 서로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통의 부재로 인해서 끝내는 사람을 삼키는 무서운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용산 재개발을 위해 경찰과 철거민들이 격렬하게 부딪히게 되었고 5명의 철거민들과 1명의 경찰이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경찰과 이명박정부는 폭력조직에 대응하는 대치였다고 사과를 거부하고 반면에 철거민들과 시민단체는 이명박살인 정권이라고 비난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이유와 어떻게 되었던 6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 앞에서 유가족들은 사과를 요구하고 이명박정부는 사과를 안 하겠다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이 소통의 부재가 6명의 죽음 앞에서도 말로서도 소통을 못하는 무서운 일들을 빚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연기군에 세종시문제만 하더라고 그렇습니다. 정부와 연기주민들과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연기주민들은 주민대로 성곽을 쌓기 위해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한다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화가 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든지 아니면 투쟁하던지 해서 피해와 아픔과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지요. 재개발과 돈이라는 성채 때문에 한반도는 사람을 삼키는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 정탐꾼이 보고한 내용가운데 들어있습니다. 민13:28 ‘ 그러나 그 땅의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정탐꾼은 가나안땅을 가리켜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왜요? 성벽이 크고 견고하며 거인이 사는 땅이니까 사람을 삼키는 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성벽 쌓고 요새를 쌓고 전쟁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거주민을 삼키는 재앙의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화된 땅, 사람을 삼키는 빗장도시로 변해가는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성채를 쌓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누구나 욕망의 성채를 하나씩 품고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성채를 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현실적인 성벽을 쌓는 유혹을 이겨내려면 이 욕망을 이겨낼 만한 크기의 꿈이 있어야합니다. 꿈이 없으면 결코 욕망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자기를 희생해도 좋을 만큼 자기 욕망이 없어져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꿈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성채나 빗장도시 없이도 얼마나 멋지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8개의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 3번째 환상이 성벽에 관한 환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 번째 환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스가랴 2:1 ‘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어떤 소년이 줄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뭘 재기위해 들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딘가를 측량하겠지요. 그래서 스가랴가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길이와 넓이를 보고자 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측량한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노아의 후손이 바벨론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트리시고 그 바벨요새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려내셨습니다. 그리고 요새가 많고 견고한 성이 있는 가나안땅에 들어가 요새를 무너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세우셨는데, 이스라엘이 1000년의 역사가운데 요새를 쌓았다가 그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포로 민들을 끌고 귀국을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포로 귀한 이후에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을 짓고 솔로몬과 다윗 때보다 더 거대한 성을 쌓고 하나님의 위대한 왕국이 재건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다음에 성전건축이 중단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가랴가 3번째 본 환상에서 예루살렘을 측량한다고 하니까 이것은 보통 기쁜 일이 아니죠. 예루살렘에 먹줄이 쳐지고 그리고 그 위에 성이 건설되면 열국의 보배가 임하게 될 것이고 온 열방 사람들이 유다사람들의 옷자락잡고 함께 가자고 할 날이 올 것이라고 꿈을 꾸고 있는데 이 놀라운 회복의 계획이 이 소년에 의해서 알려지자 하늘세계에서 온 통 소란이 일어납니다. 이제 스가랴에서 말하든 천사가 나가고 나니까 다른 천사가 와서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소년에서 달려가서 이것을 멈추라고 지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스가랴 2:4-5에 나타납니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 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예루살렘은 성곽이 없는 성읍이 될 것이기 때문에 측량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곽 없는 성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프라자’입니다. 이 의미는 넓게 사방이 터인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성벽과 문과 빗장이 없는 마을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에스겔38:11 ‘말하기를 내가 평원의 고을들로 올라가리라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에게 나아가서’
‘평온의 고을’이 ‘프라자’입니다. 성과 빗장과 성벽이 없는 넓게 터인 지역이 될 것이기 때문에 성읍을 측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고대근동 아시아에서 성벽 없이 산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입니다. 고대뿐만 아니라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성벽이 없으면 적을 막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노출 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벽 없는 촌락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요. 그런데 성벽 없는 하나님의 도성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뒤에는 인간의 가시적인 성벽보다 더 강력한 보호수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가랴2:5 ‘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 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성곽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성곽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출애굽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군할 때에 아무런 보호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기둥이 되어 주셔서 그 누구도 이스라엘백성들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벽과 빗장과 성곽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큰 힘 이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불 성곽을 지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벽과 빗장과 성곽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멋진 비전 이 보다 더 환상적인 꿈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듣기만 해도 우리의 피가 용솟음치는 멋진 꿈이 아닙니까?
스가랴2:8절을 보면 더 선명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가 사면을 보호하고 눈동자처럼 보호해 줄 것이니까 인간적인 성벽 만들지 말고 들판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아주 멋져 보이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안하기 거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요새를 쌓은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요새를 쌓자는 것은 한 번 붙자는 것입니다. 요새를 쌓으면 사람이 교통 할 수 없습니다. 왜 요즘 세상이 차가운 공포의 땅이 되었습니까? 현대인들이 성을 쌓으면서 서로 지쳐 있어요.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마저 요새를 쌓는 다면 이 세상을 녹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차갑게 얼어붙은 이 땅을 하나님의 불로 녹이기 위해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낸 것입니다. 사랑에 줄이고 목말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새를 쌓느라고 사랑을 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지요. 이렇게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불성곽이 나타나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불성곽이 나타나지요. 하나님의 불성곽이 나타나려면 우리가 인간적인 요새를 버리고 성곽 없는 들판으로 나가야되지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 가지고 건드렸더니 그 사면에 불성곽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이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영광이 된다는 것을 열방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벽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땅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흘러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성벽 없는 성읍으로 만드시고 아직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바벨론을 피하여 도망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2:6-7 ‘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 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사방에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나는 피할 지니라’
바벨론으로 포로 된 이스라엘백성들이 100년 동안 3차에 걸쳐 귀한 합니다. 스룹바벨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끌고 1차 귀한하고 스가랴가 백성을 이끌고 2차 귀한 하게 되고 예레미야가 3차 귀한 이런 식으로 귀한 하게 됩니다. 2차 귀한 끝나고 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 바벨론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도망하라는 것이지요. 바벨론의 성곽에서 도망하여 성벽없는 예루살렘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사방에서 불성곽이 되어 줄 것이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불로 뜨거워지게 되고 이 공포의 땅이 풀릴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운데 나타나고 열방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열방에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까? 요새를 쌓아놓고 빗장을 걸고 성벽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불성곽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이 영명교회에 나타나 열방의 빛이 되고 열방을 녹이는 불이됩니까? 우리 영명교회가 성벽이 없는 촌락으로 나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 성곽으로 사면을 보호하는 보호자가 될 것이고 이 때 열방이 이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목도할 것입니다. 이제 영명교회가 빗장을 열고 이웃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의 빚진 것을 갚아야합니다. 우리교회성도들이 대부분 가난한데 쌓아놓은 성곽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이 왜 없습니까?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를 품고 있습니다. 가장 보배로운 그 분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우리성도, 우리가정, 여기서 탈피해야합니다. 성도들을 끌어오기 위한 쟁탈전이 지금 한국교회가 벌어진지 꾀 오래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로 갈까봐 빗장을 걸어놓고 성벽을 쌓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마음을 달래며 좋은 말만 골라하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야유예배 갈 때나, 전도 축제를 벌이거나, 교회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는 엄청난 돈을 씁니다. 교회 짓는 일이나 교회 성물에 관해서는 최고급으로 설치합니다. 그리고 빗장을 걸고 성도들의 유입을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의 모습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성도인 줄 모르고 전도하려고 하면 얼마나 쌀쌀하게 대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 가족 이외에는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 초차 싫어합니다. 가족만을 위해 성벽을 쌓고 빗장을 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보장을 위해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이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고 믿고 성벽 쌓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적금도 들어야하고 보험도 들어야하고 써야 할 곳이 많이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돈이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보장에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가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은 흔들리고 있으며 무너지고 있음을 아이티지진으로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빗장을 열어야하며 성벽을 부수어야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 이웃을 품고 가면 하나님이 사면에 불성곽이 되어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불성곽이 되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꿈꾸고 성곽없는 들판으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사면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불 성곽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우리 주변 이웃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성곽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불성곽이 재앙과 악과 질병과 고통 속에서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 성곽으로 어떻게 보호해주시는 지에 대한 좋은 예는 바울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민족의 복음을 위해 사랑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그런데 감옥이 그럴 기다리고 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고 매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동족이 결사대를 조직해서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이를 갈면서 추격해 옵니다. 그래서 받은 고난과 아픔과 죽음을 직면할만한 위기를 수없이 넘겼지만 바울을 그 누구도 손 될 수 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바울이 가는 길에 방해가 될 수 없었고 그가 하는 일에 중단된 일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불 성곽으로 바울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고난의 길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은 가는 길이 험착하고 찾는 이가 적다고 표현하고 있고 넓은 길은 가는 길이 평탄하고 찾은 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구원과 멸망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불 성곽으로 우리의 사면을 보호하시고 돌보십니다. 바울의 사랑의 힘이 죽음도 감옥도 성곽도 막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돈으로 학벌로 성벽을 쌓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권력과 명예로 성채를 쌓고 있으면 우리의 영혼을 악으로부터 구원해 내리라고 믿고 있습니까?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힘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불행과 질병과 악으로부터 구해주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감옥에 갈 수 도 있고 매도 맞을 수도 있고 죽음의 위기를 당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인간이 세운 성벽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곽 없는 평온으로 나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불성곽이 되도록 허용만한다면 이 세상에서든 하늘에서든 우리를 해할 어떤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한 죽음마저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36-39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성벽 없이 들판에 나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환란, 기근, 적신, 위험, 칼 이런 것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지속적인 인내와 용기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적 성벽과 빗장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 성곽을 의지하고 성곽 없는 도성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길만이 이 땅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이 처 놓은 빗장도시나 성곽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땀 흘려 열심히 돈 벌어 놓고 이제 살만 하니까 당료가 와서 먹고 싶은 것 못 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행갈 만한 여유가 생기니까 나이가 들어서 멀리 여행도 가지 못 한답니다. 침례병원 의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세상에서 노력해서 돈을 모아놓고 그 돈 병원에 다 갖다 바치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러나 맞는 말이잖습니까? 우리가 쌓아놓은 성벽으로는 우리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불 성곽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이요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꿈이 바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라고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 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한,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한 누구도 우리를 손 될 수 없고 해 할 수 없고 넘어트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줄 믿습니다.
우리가 불 성곽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먼저 빗장도시화에 함께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마음의 성벽을 무너트려서 하나님의 불 성곽을 의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큰 신령한 은혜를, 이 세상에 알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고 맛 볼 수도 없는 귀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불 성곽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면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