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
다음검색
아침 단상(斷想) [오늘의 법구] ⊙ 다시는 집 짓는 일 더 이상 없네 집 짓는 자 나는 이제 너를 봤으니 다시는 집 짓는 일 더 이상 없네. 대들보도 서까래도 다 무너졌고 높다란 누각도 꺾여졌노라. 마음 이미 고요한 열반에 들어 온갖 욕망 이미 모두 멸하였노라. 以觀此屋 更不造舍 梁棧已壞 臺閣摧折 心已離行 中間已滅 이관차옥 갱불조사 양잔이괴 대각최절 심이이행 중간이멸 《법구경(法句經)》 『노모품(老耄品)』 ------------------------------------------------------------------------------------------------------------------- 지난 게송에 이어 이번 게송도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감회를 읊으신 내용입니다. 앞선 게송이 생사의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그 근본 원인을 찾지 못했던 구도자의 간절한 탐구를 보여 주셨 다면, 이번 게송은 마침내 그 원인을 밝혀내고 모든 번뇌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윤회의 집을 짓지 않게 되 었음을 선언하는 깨달음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입니다. 특히 이번 게송은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넘어, 무엇이 윤회의 집을 짓는지 깨달았으며, 그 집을 다시 짓게 할 원인까지 소멸시켰다는 데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법구의 해설 ① 以觀此屋 更不造舍(이관차옥 갱불조사) "집 짓는 자 나는 이제 너를 봤으니 다시는 집 짓는 일 더 이상 없네." 집 짓는 자의 정체를 밝히고,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사대(四大)와 오온(五蘊), 그리고 생사 의 윤회 속에서 거듭 형성되는 존재를 비유합니다. 그렇다면 집을 짓는 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무명(無明)을 바탕으로 탐욕과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업을 지어 다시 태어남을 초래하는 번뇌의 작용입니다. 중생은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고, 그 '나'를 지키고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일으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얻지 못하면 괴로워하며, 이미 얻은 것도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 업을 낳고, 업은 다시 생사의 윤회를 이어 가게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이 모든 과정의 근본을 통찰하셨습니다. '집 짓는 자'란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갈애와 집착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를 보았다"는 말씀은 단순히 번뇌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뜻을 넘어, 윤회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완전히 꿰뚫어 보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소멸시켰으므로 다시는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② 梁棧已壞(양잔이괴) "대들보도 서까래도 다 무너졌고" 집을 지탱하는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졌다는 것은 윤회의 집을 유지하던 근본적인 구조가 해체되었음을 비유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대들보는 무명(無明), 서까래는 번뇌(煩惱)를 가리킵니다. 무명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에 집착하며, 인연 따라 이루어진 몸과 마음을 변하지 않는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무명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일어나고, 온갖 번뇌가 서로 얽혀 삶을 지배합니다. 무명이 남아 있는 한 번뇌는 또 다른 번뇌를 낳고, 번뇌는 다시 업을 지어 생사의 굴레를 이어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무명의 근본을 밝게 비추어 보셨습니다. 그 결과 번뇌를 떠받치던 토대가 무너졌습 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번뇌를 억지로 억누르거나 잠시 피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깨달아 그 뿌리를 끊으셨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어둠을 없애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등불을 켜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 다. 지혜가 밝아지면 무명은 설 자리를 잃고, 무명이 사라지면 번뇌의 집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③ 臺閣摧折(대각최절) "높다란 누각도 꺾여졌노라." 높이 세운 누각[臺閣]은 무명과 번뇌에 의지하여 쌓아 올린 욕망과 집착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명예를 얻고 싶고, 재물을 쌓고 싶으며,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과 신념마저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하나가 충족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욕망을 낳습니다. 높은 누각을 쌓을수록 지 켜야 할 것이 많아지고,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커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누각의 토대가 되는 무명과 번뇌를 소멸하셨습니다. 토대가 무너졌으므로 그 위 에 세워졌던 욕망의 누각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욕망이 사라졌다는 것은 일체의 생활 의욕이나 선한 의지까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만족과 이익만을 위해 끊임없이 움켜쥐려는 갈애가 소멸했다는 뜻입니다. 중생을 향한 자비와 지 혜로운 행위까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다른 생명을 더 넓고 평등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④ 心已離行 中間已滅(심이이행 중간이멸) "마음 이미 고요한 열반에 들어 온갖 욕망 이미 모두 멸하였노라." 이 마지막 구절은 앞의 세 구절이 가리키는 결과를 밝힙니다. 집을 짓는 자가 사라지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고, 누각이 꺾인 결과 마음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났 습니다. 여기서 심이이행(心已離行)은 '마음은 이미 번뇌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니 고요한 열반에 들었음을 나타냅 니다. '중간(中間)'은 번뇌의 한가운데, 곧 '온갖 욕망이 일어나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고, 집착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며, 마침내 그 집착에 끌려 행동하 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러한 마음의 작용에 더 이상 속박되지 않는 것입니다. 열반은 단순히 마음이 잠깐 편안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하여 생사 를 거듭하게 하는 원인이 사라진 경지입니다. 따라서 이 게송의 고요함은 감정이 없거나 세상일에 무관심해진 상태와 다릅니다. 좋고 싫음에 끌려다니지 않고, 얻고 잃음에 흔들리지 않으며,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 없이 지혜와 자비 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자유를 성취하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2. 게송의 대의(大意) 이 게송의 대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에서 비롯된 번뇌와 집착이 윤회의 집을 짓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근본 원인을 완전히 소멸하여 다 시는 생사의 집을 짓지 않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바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셨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조금 더 풀어 보면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윤회의 원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괴로움이 생기면 외부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외부 조 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무명과 욕망과 집착을 함께 살펴보라고 가르칩니다. 둘째, 겉으로 드러난 번뇌보다 그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화를 참는 것과 성냄의 뿌리를 소멸하는 것은 다릅니다. 욕심을 억누르는 것과 욕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통찰하여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도 다릅니다. 수행은 단지 번뇌를 감추는 일이 아니라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을 밝히는 일입니다. 셋째, 해탈은 같은 집을 다시 짓지 않는 자유입니다. 깨달음은 일시적인 평온이나 특별한 체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이 소멸했으므로 그 원인에 의해 다시 생사의 집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게송은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는 동시에, 그 깨달음이 무엇을 완성했는지를 분명하게 밝히 고 있습니다. 3. 전송(前頌)과 후송(後頌)의 연결 전송과 후송의 흐름을 함께 놓고 보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① 집 짓는 자를 찾아 헤맴 — 집 짓는 자의 정체를 밝게 봄 ② 윤회의 원인을 알지 못함 — 무명과 번뇌의 근본을 깨달음 ③ 거듭 태어나는 고통 — 다시는 집을 짓지 않는 해탈 ④ 구도의 간절함 — 깨달음의 확고한 선언 전송에서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생사의 윤회 속에서 집 짓는 자를 찾으셨습니다. 이번 후송에서는 마침 내 그 정체를 밝히셨고, 다시는 집을 짓는 일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오랜 탐구가 끝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 원 인을 소멸하여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만 수행의 관점에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게송을 읽고 자신의 번뇌 를 관찰하며 집착을 줄여 갈 수 있지만, 일상에서 잠시 마음이 고요해진 것을 부처님의 완전한 해탈과 동 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게송이 가리키는 궁극의 경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방향으로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4. 마지막 정리 오늘의 본 게송을 이렇게 풀어서 정리해 봅니다. 「나는 이제 집을 짓는 자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았노라. 그것은 바로 욕망과 갈망이었다! 그것 때문에 끝없는 윤회(輪廻)를 한 것이라 이제는 그 실상(實相)을 낱낱이 알아 대각(大覺)을 이루었으니 다시는 윤회하는 괴로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 모든 번뇌는 사라졌고, 근본적인 무명(無明)을 없앴으니, 마음은 고요하여, 이미 열반(涅槃)을 성취했노라! 그러니 무슨 욕망이 있을 것인가? 모든 욕망과 갈망은 완전히 사라졌노라!」 오늘의 게송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새기고 싶은 말씀은 집을 무너뜨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집을 짓게 하는 원인을 소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집을 짓게 하는 원인을 알았으면 원인을 없애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면식범이라 하더라도 신출귀몰하면 잡기 어렵듯이 웬만한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우니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번뇌는 낯선 곳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익숙해진 생각과 습관 속에 숨어 있다가 조건이 맞 으면 다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을 알아차리고, 성냄이 일어나면 성냄을 알아차리며, 그 밑바탕에 어떤 집착이 있는 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한 번 알아차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 살피고 바르게 실천해야 조금씩 그 힘이 약해질 것입니다. 다만 수행은 번뇌와 싸워 억지로 이기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인연을 지혜롭게 관찰하고, 그것을 키우는 마음을 놓아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알아차리며, 집착을 내려놓고, 자비로운 행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무명을 살피면 번뇌의 뿌리가 보이고, 집착을 놓으면 마음이 자유로워지며, 자비를 행하면 그 자유가 삶 속에서 빛납니다. 🌿 집 짓는 일 끝이 났고 번뇌의 집 무너졌네. 마음의 온갖 속박 훨훨훨 벗어났네. 우리도 부처님 같이 그 길을 따르리다. 무명을 밝혀서 어리석음 몰아내고, 탐애를 놓아서 집착을 줄여 가고, 아상에 머물지 않고 정심정행 하오리다. 번뇌를 알아차리는 것은 지혜요, 집착을 내려놓는 것은 수행이며,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나아 가는 길임을 명심하면서 새로운 한 주 맑고 향기롭게 열어 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 _(())_ 향기로운 불교 _(())_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