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 일반적인 관용구가 된 그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란 말을 갈리레오는 한 적이 없다.
갈릴레오(갈릴레이)가 종교 재판 끝에 불만을 품고 이런 말을 저항적으로 내뱉었다고 전하는데
어디에도 그런 흔적이 없다.당시 교회 소송의 기록에도 없고,그가 직접 썻다고 하는 편지나 글
에도 없으며,당시의 어떠한 기록에도 이런 내용의 문장은 등장하지 않는다.갈릴레오가 당시의
권력인 교회(카토릭)를 향해 말 했다고 전해지는 이 항변 문구의 최초 언급은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이 있은지 100년이 훨씬 지나 프랑스의 신부였던 '이라이유(Irailli)' 가 쓴 부정확 하기로
소문난 '문학논쟁' 이란 글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이런말을 했다고 소문이 나고 크게 인기를 끌게 된것은 당시(근세초) 카토릭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탓도 있고,교회의 반대자와 희생자들을
학문과 진리의 순교자로 만들려는 노력이 더해지면서 소급 차용했던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아무튼
그 유명한 물리학자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한적이
없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2,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보다 몇십년 앞서 화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 와는 다르게 갈릴레오는
일생동안 나라(세속권력)와 교회의 권력자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당시의 나라란 것은 도시
국가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었다.당시 갈릴레오의 최대의 적은 속세에 있는 대학의 동료교수들
이었지 교회 설교단의 수도사들은 아니였다.그가 50 이 넘은 나이에 어쩔수 없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도 대학의 다른 물리학 교수들의 조롱을 받을까 두려
워서였지 교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였다.그는 교회의 예수회 회원들로 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던 물리학자 였다.당시의 석학으로 교회와 각을 세우고 저항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다.
3, 갈릴레오는 1632년 2월 교황청의 소환장을 받아 로마로 향하게 된다.로마에 도착한 그는 처음에
피렌체 대사의 손님으로서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1633년 4월12일 부터 6월22일까지의
종교재판소송 기간에는 바디칸 내에 있는 방 3개 짜리의 집에서 지냈는데,하인과 함께 정원이 내려
다 보이는 전망좋은 집에 기거 했다.그러니까 그는 세상에 알려진 것 과는 다르게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고 고문을 당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그가 추기경들과 교회에 대한 불복
종죄란 판결(지동설 인정으로)이 내려지긴 했으나 형벌이란 것이 겨우 3년 동안 매주 7개의 참회
시편을 읽는 것과 금고형이 더해 졌을 뿐이다.그는 한번도 감옥에 들어간 적이 없었고,그럴 필요도
없었다.
당시의 갈릴레오는 기득권인 1%의 한사람 으로서 처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그는 재판이 끝난후
대우를 받으며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그리고 그 다음은 시에나의 대주교의 집에서 귀빈으로
지내다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국가(토호)에서 주는 연금을 받으며 방해
받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으며,그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1642년 생을 마쳤다.
첫댓글 그랫군요!
자세히 봐야 알수가 있어요...
올려주신 글들 감사합니다
많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 3자가 개입해 새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특히 인물과 영웅들의 얘기는 거의가 가공된 소설에 불과 합니다.
@상선거사 그럿다고 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당연하지요.그런데 이것도 권력이거든요.특히 종교 권력이 관여하고 있거든요.그래서 힘든 겁니다.서양사에 대한 검증도 기독교를 탈색하면 많은 진실들이 보입니다.또한 교과서란 것의 중요한 가치가 국민 세뇌에 있거든요?즉 배움이란 이름하에 지식의 통제도 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