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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행운의 법칙 스크랩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래리 크랩
김박사 추천 0 조회 255 08.05.05 09: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래리 크랩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래리 크랩 지음/윤난영 옮김

두란노/2003년 8월/263쪽/8,500원

▣ 저 자 래리 크랩

미국 일리노스 대학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레이스 신학교에서 상담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성경적 상담 연구소’의 설립자이자 책임자이기도 하다. 현재 콜로라도 기독교 대학에서 기독교 상담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격려를 통한 상담』 『기독교 상담 심리학』 『남자와 여자가 함께 멋있게 살아가는 지혜』 등이 있다.

▣ 역 자 윤난영

바이올라 대학(B.A.)과 탈봇 신학 대학원(M.A.)에서 수학하였다. 역서로는 『사랑의 열쇠』와 『영적 가면을 벗어라』 등이 있다. 현재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와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혼자 힘으로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 혼자 춤추는 인생은 피곤하다. 성령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인생은 자유를 누린다.

여기, 두 개의 길이 있다. 한쪽 길은 옛 생활의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새로운 삶의 길이다. 성취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옛 생활의 길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속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새로운 길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며, 진정한 자유와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책은 당신의 눈과 마음과 영혼을 열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할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기 원하는가?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라!

▣ 차 례

자유에로의 초대

어느 그리스도인의 이야기

서문 - 두 가지 길

제1부 무거운 리듬 - 인생, 무엇이 문제인가

1장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

2장 우리가 만든 삶의 방식

3장 새로운 길이 열리다

제2부 피곤한 세대 - 떠나야 할 길

4장 보이지 않는 벌레

5장 어리석은 열심

6장 살아 있는 거짓의 용

7장 빗나간 소원

8장 눈을 멀게 하는 속임수

제3부 성령의 바람 - 새롭게 열린 길

9장 기쁨의 문이 열리다

10장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춤추기

11장 새로운 인과 법칙

12장 임마누엘, 즐거움의 중심

13장 하나님을 향한 부요함

14장 하나님의 섭리

제4부 새로운 리듬 - 어떻게 살아야 하나

15장 하나님을 즐거워함

16장 새로운 길의 주춧돌 다섯 개

17장 현 위치 점검 :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18장 선택의 기로 : 어떤 사이클을 택할 것인가

19장 목적 재점검 :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20장 다양한 통로 :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21장 새로운 기도 : 아빠에게 드리는 기도

프롤로그 -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래리 크랩 지음/윤난영 옮김

두란노/2003년 8월/263쪽/8,500원

제1부 무거운 리듬 - 인생, 무엇이 문제인가

1장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

우리 모두는 인생이 평탄하게 펼쳐지기를 원한다. 현재보다 미래가 좀 더 나아지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소원이 목적이 되고 가장 소중한 것이 될 때 우리는 ‘조건을 만족시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인과 법칙에 따라 살려고 한다. 그래서 ‘원하는 B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A가 있다’라고 믿고 싶어한다. 우리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하고 따르는 것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원리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당신은 청소년기에 있는 딸이 임신했다고 고백했을 때 고함치기보다 평온을 지킴으로써 위기를 헤쳐 나가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또한 묵상 기도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원리를 당신이 원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생의 원칙을 제공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마치 우리가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한 인과 법칙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여긴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원리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성경이 인기가 많은 이유이자 성경을 읽으면서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형통한 인생을 살고자 할 때는, 세상 지혜를 따르든지 성경적 원리를 따르든지 결국 교만해지고 낙심하며, 또는 자기 만족이나 자기 증오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들을 꾸준히 경건하게 훈련하여 성공했다면 그 부모는 감사하기보다는 자랑스러움으로 교만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러한 교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2장 우리가 만든 삶의 방식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인생의 60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거의 반세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다. 오랫동안 나는 기독교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고 믿고 있었다. 올바르게 살면 깊은 평안을 즐길 수 있다고 믿었다. 자녀들은 우리를 존경할 것이고, 영혼은 새로워지고 쉼을 누리며, 사역은 만족스러워서 죽을 때까지 삶이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과 법칙에 따라 살았던 것이다. 나는 인생이 형통하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인과 법칙에 매여 사는 것은 심각한 잘못임을 성경은 특히 세 구절을 연결시켜 말씀하고 있다. 첫 번째 구절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과 법칙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나은 삶의 축복을 얻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 : 9).” 두 번째 구절은 하나님이 이러한 인과 법칙을 무효화 시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전의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 : 18~19).” 이제 세 번째 구절을 살펴보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 : 3, 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주는 ‘더 좋은 소망’보다 축복이 주는 ‘더 나은 삶’에 가치를 두어서, 삶의 형통을 위해 올바로 행해야 하는 부담을 갖고 방황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 각자가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급진적인 순례의 길을 가도록 초청하신다. 비록 우리 영혼이 여전히 불결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나아오도록 초청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에 자신을 내어 맡기며, 인생의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의 새로운 길이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 : 6).”는 말씀을 기억하라. 부담으로 인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3장 새로운 길이 열리다

엄격한 인과 법칙 아래의 삶은 실제로 불가능한 삶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당신을 그 법칙에서 구해 주었다면(그 법이 불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만일 행함이 아닌 ‘관계에 의한 신분 상승’으로 당신이 왕의 아들과 딸로서 살아가게 길을 열어 주었다면 당신은 그에게 깊이 감사할 것이다. 그를 더욱 가까이 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동화가 아니라 사실이다. 구원의 길이 열렸고 이것이 새로운 언약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언약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우리 삶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주장하려는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대로 하시도록 그를 신뢰해야 하는 것이 어렵고, 둘째, 그가 주시는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즐거워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아 알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인한 더 좋은 소망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나은 삶의 축복을 좋아할 것이다. 더구나 신뢰하기보다는 주장하려는 인과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갈라디아서의 ‘초등 학문(principles)'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연쇄‘ 혹은 ’연속‘이라는 의미가 있다.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세상의 연쇄 반응은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공의에 근거한 연계성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는 단어에서 바울은 인생을 자기 뜻대로 주관할 수 있다는 본성적인 의식 구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종교와 윤리적 시스템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유능한 삶을 위한 원리이다.

제2부 피곤한 세대 - 떠나야 할 길

4장 보이지 않는 벌레

에덴 동산 이후 사람들은 실제로는 남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는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가고 있는 곳을 인식하는 도덕적 나침반이 심각하게 어긋난 것이다.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실제로는 옛 길을 가고 있으면서 새로운 길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기독교의 큰 비극은 생수의 웅덩이가 우리 영혼의 타오르는 모래 안에 갇혀서 부글거리고 있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생수를 마시기 위해 영혼의 깊은 곳을 파헤치는 대신, 자기 기만과 형통한 삶을 위한 전략으로 그것을 덮어 버린다. 그래서 오염된 물을 마시면서도 그것이 깨끗한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생수다. 그것은 우리를 바꿀 능력이 없다. 꿈이 깨졌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인내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바꾸지 못한다. 옛 길은 본성적인 자기 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할 뿐이다.

이것은 폭풍우가 오기 전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모래 위에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다. 사과를 반짝반짝하게 잘 닦아서 이런 멋진 과일 안에는 벌레가 있을 수 없다고 당신에게 확신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오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이런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도 신비스러운 존재다. 어떤 때는 성령께서 내 안에 자유롭게 역사하셔서 기쁨과 영적인 능력이 충만하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언짢고 불신에서 오는 절망에 빠진다. 그럴 때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찾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나는 새로운 길을 따라 살고 싶다. 그러나 어떤 길이 새로운 길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영혼의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5장 어리석은 열심

옛 생활의 길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선택은 종종 순진해 보이고 심지어는 의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을 이와 같이 대언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 : 20).”

현대 교회에는 현대화된 유대주의 사고가 침투해 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어떤 교사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덧붙였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오히려 격려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냐 율법을 행함으로냐는 중요한 논쟁점이다. 그 어느 시기에도, 심지어는 모세의 시대에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은 사람은 없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모세와 다윗, 요나, 롯 모두 마찬가지였다. 구약의 어떤 성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바울은 영적 성장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 : 1~5).”

나는 우리의 중독증을 이해한다. 우리 안에는 깊은 열망이 있다. 우리는 열심은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단편적인 생각으로 우리는 지루함을 피하고 생동감을 느끼고 싶어 열심히 옛 생활 방식대로 산다. 우리가 지칠 때 안도감을 줄 만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서 가장 큰 축복을 빼앗아 가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6장 살아있는 거짓의 용

우리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용 가까이 살고 있다. 우리 주위의 세상, 우리를 삼키려 배회하는 마귀, 우리 안에 있는 육체가 그것이다. 용이 으르렁거릴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저녁 시간에 방문한 친구 같을 수도 있다. 원수인 마귀는 우리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에 대해 감탄할 정도로 속삭인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에 집중하도록 한다. 우리의 유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친근하고 좋은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종교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것이나 그가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주로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권자이신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도움을 주는 친구로서 인식하게 만든다.

바울은 용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천국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약속된 좋은 것을 현세에서 누리길 원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 : 8, 9).”라고 말하고 있다. 인생이 즐거울 것이라는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인정하면 인생을 자기 뜻대로 주관하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살았다. 그것은 언젠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만큼 하나님께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이 나아갈 것임을 의미한 것이다.

몇 달 전 오후 3시에 나는 이를 닦고 있었다. 왜 뜬금없이 이를 닦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않게 나는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이를 닦는 것이 희미해지고 깊은 심령에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성령께서 “네가 알기 원하는 것을 말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다른 세계’는 15초 정도 지속되었으며 나는 얼른 아래층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의자 곁에 가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펴고 음성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음성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5시 30분쯤에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로마서 7장 6절을 펴 읽으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묵상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서 벗어났으므로 성령의 새로운 길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의문의 묵은 것(옛 길)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관주에 적힌 히브리서 7장 18절과 19절을 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익숙했던 단어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전엣 계명(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도록 올바르게 행하는 옛 길)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하고.” 내 심장이 뛰었다. 계속 읽어 나갔다.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나는 크게 외쳤다. “바로 이거야!” 나는 기쁨과 소망으로 외쳤다. 나의 깊은 영혼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눈을 감고 듣기를 원했다. 나의 영혼 가운데 울리는 천국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으며 부활한 나사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래리, 새로운 삶의 길이 있단다. 너는 50년 동안 내 거룩함에 참여하려고 했지. 그러나 수년 동안 너는 옛 언약의 값싼 방식대로 살아왔구나. 성령은 지금도 네게 말하고 있단다. 네 형제의 죽음, 네 몸의 암, 네 어머니의 치매, 인간관계의 갈등, 상한 심령 등 이 세상에 환멸을 느끼도록 만드는 어려움을 통해서 말이다. 성령은 이 악한 세대에 축복받는 더 나은 삶에 목적을 두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며, 진정한 기쁨은 나를 아는 것에 있음을 계속 말하고 있단다. 나를 아는 것을 추구하면 더 나은 삶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이제 내 피로 열어 준 새 길로 가야 할 때이다. 래리, 옛 길에서 나와서 함께 가자!”

몇 달 후 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그날의 체험을 나누었다. 우리는 내 방에 함께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를 그의 동굴로 초대했다. 그 어두운 공간에는 그가 받은 축복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작은 램프가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는 인생이 진정한 기쁨을 줄 것이라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대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세마포로 감겨 있는 나사로와 같았다. 그는 가족을 실망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과 갈등했으며, 그의 일이 하찮은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친구의 심령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꽁꽁 묶였던 것이 풀리고 있었다. 나는 소망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 때가 되었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급함에 목마를 때가 되었어. 바로 새로운 길로 살아야 할 때란 말이야!”

7장 빗나간 소원

우리는 모두 옛 길이든 새로운 길이든 어느 한 길을 걷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어거스틴도 같은 말을 했다. 어거스틴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또한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영혼의 허무함을 알았다. 그 허무함은 절제할 수 없는 성적 쾌락으로 그를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더 좋은 소망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성적 쾌락보다 더 큰 기쁨을 발견했다. 이 기쁨 외에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어거스틴은 인생 말년에 두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글을 썼다. “한 도시에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살고, 다른 도시에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평안의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자기가 선택한 평안을 누리며 산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삶에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다. 원만한 관계, 건강,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재력, 보람된 직업 등을 갖추면 인생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기본 원칙을 따른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면 한동안 평안을 즐긴다. 그러나 그런 평안으로는 결코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평안을 주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 : 27).”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에서 받는 축복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보장된 최상의 축복에 의존한다. 즉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라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며, 나쁜 일이 일어날 때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 부부가 반항하는 아들 때문에 겪었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고통은 우리를 거의 파멸시켰다네. 그 아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우리 노력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어. 결국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존하고 그를 더 잘 알아 가며 그의 주권 안에 안식하기로 결심하게 됐어.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 아들을 도울 수 있고 우리는 그를 주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 우리가 평안해지니까 아들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 진정으로 감사하고 기쁘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을 올바로 고치는 것이 우리 목적이 아니야. 물론 간절한 바람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그 친구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있다. 꿈이 깨어질 때 겪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옛 생활의 길을 버리도록 도와준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면 마귀와 같다.”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옛 생활의 길은 악하다.

8장 눈을 멀게 하는 속임수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속임수가 있다. 첫째, 우리는 축복을 받으면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올바르게 살면 삶이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적인 현대의 유대인과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둘째, 축복과 시련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여, 성경의 원리는 유익을 위해 타협할 수 있다고 보는 실리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율법주의자가 되어 형식에 얽매이게 된다. 이런 사람은 내면의 고통을 보호하는 이상한 형식적 행동에 사로잡히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된다. 셋째, 더 나은 인생을 위한 수고가 헛되고 너무 힘들게 느껴져서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나 무감각한 생활, 정신 착란과 성격 장애 등의 정신병에 빠지게 된다.

제3부 성령의 바람 - 새롭게 열린 길

9장 기쁨의 문이 열리다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순례의 길을 걷도록 초청하고 싶다. 비록 환상이 깨어진 인생, 얕고 일시적인 쾌락으로 가득한 인생, 깊고 지속적인 슬픔을 주는 일들로 가득한 인생일지라도 말이다. 이 땅의 식료품 가게에 말라빠진 빵 몇 조각뿐이 없을지라도 앞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 보면 ‘가족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쓰인 문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이 그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은 인생을 평탄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게 하는 생명의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이 땅에서의 인생을 더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새로운 길이 있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최상의 부요보다 못하지 않다. 이 세상의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있는 생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달콤함은 우리 영혼을 더 목마르게 할 뿐이다. 이 세상 즐거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을 주는 새로운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0장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춤추기

새로운 길을 걷는 사람들은 급진적인 은혜를 믿는다. 먼저 거룩하다고 선포함 받고, 그런 다음 거룩하기를 원하게 되며, 결국 실제로 거룩해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온다. 무례하고 누추한 모습으로, 찡찡대고 졸라대면서 그렇게 나아온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나아올 수 있겠는가? 그것이 원래 모습이다. 그들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최고 소원이며 첫째 되는 갈망이기 때문에 은혜에 의존하며 하나님을 원한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간청에 자동적으로 응답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의 때에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반드시 오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하신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 그에게로 나아갈 때 우리는 얼굴이 더럽고 콧물이 흐르고 옷이 찢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 길을 가는 동안 그리스도가 이미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마치 우리가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녀들인 것처럼 기쁨으로 반겨 주신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시듯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감사함으로 그의 발 아래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자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신다. 어떻게 그를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1장 새로운 인과 법칙

유대인이 의존했던 인과 법칙은 이제 무효하다. 그러나 다른 인과 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을 알면 새로운 길로 계속 나아가는 데 입맛이 좋아질 것이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자기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 : 8).” 이러한 인과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 그러나 이것은 옛 생활의 길에 적용하는 인과 법칙과는 다르다. 올바로 행하면 인생이 형통한다는 원인과 결과의 약속이 깨졌다. 대신 하나님은 새로운 인과 관계를 만들어 주셨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인과 관계란 첫째, 성령의 말씀 듣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옛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고, 둘째, 성령의 음성을 더 명확히 듣는 것을 배우면 성령은 새로운 길로 가도록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가장 우선시되도록 강화시켜 주셔서 어떤 환경에서든지 깊은 기쁨과 풍성한 의미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임마누엘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보증된 인과 법칙이다.

12장 임마누엘, 즐거움의 중심

요한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 계시록 말씀은 증거가 희박해 보일 때에도 예수님을 계속 믿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심지어 세례 요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 : 20).” 하고 물었던 적이 있다. 인생이 힘들고 잘 풀리지 않을 때 가끔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예수님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는 여기 계시다.”라고 선포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보여 주셨다. 숨막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린양이 임마누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역사 가운데 오셔서 그것을 이루어 놓으셨다.

요한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길을 따라 살도록 초청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저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 : 1~4).”

이것은 영적 순례를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소중한 체험을 위해 삶의 불이익에 불평하지 말고 인내하라고 말한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한 더 나은 소망은 그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이제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로운 길이고 임마누엘 아젠다가 이루어지는 길이다.

13장 하나님을 향한 부요함

수년간 알고 지낸 이웃 여인이 얼마 전, 자신의 암 치료가 실패할 경우 장례식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어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녀는 이제 가발을 벗어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는 “만일 대머리 여자를 보는 것이 괜찮으면 한번 오세요.”라고 썼다. 상당히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편지를 마쳤다. “하나님은 정말 멋지지 않아요? 나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요!”

그녀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암이 치유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인가? 고통을 줄여 주시리라 믿어서인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존하듯이 여전히 기도한다. 아니,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간청하고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간청을 들어주실 수 있다. 자녀들의 간구를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다.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 갈망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자세는 달라진다.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응답을 강요하고 주장하는 태도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필요를 간청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는 태도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을 더 알아간다. 기도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며 그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우리의 시각을 주님의 시각으로 바꾸어 준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영혼 구원의 소망을 붙잡고 있다. 그들 창고가 축복으로 가득할 수도 있고 텅 빌 수도 있지만, 창고는 항상 열려 있고 그들 마음은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그들은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를 마시고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는 양식을 먹을 수 있다. 인생이 어떻든지, 얼마나 낙심되고 화가 나고 허전하며 실패했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거룩한 곳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유한 농부’의 아젠다를 버리라. 임마누엘 아젠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다. 창조 때부터 그의 계획이었다. 그것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14장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하나님 섭리의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임마누엘 아젠다를 이루시고 성경의 새 언약을 성취하시는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태초부터 시작해서 7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제1장 : 하나님만이 계셨을 때로 성삼위 일치의 영원한 하나되심으로 좋은 교제를 하고 계셨다.

․ 제2장 :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졌다.

․ 제3장 : 모든 천사들 중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던 루시퍼는 마음에 교만이 싹터 하나님의 영광을 갖기 원했다. 루시퍼는 하나님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한 무리의 천사들을 꾀었고,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위치를 떠나 사탄과 그의 귀신들이 되어 악의 세력을 형성했다.

․ 제4장 :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다. 땅 위에는 ‘즐거움’이라는 뜻인 에덴 낙원을 만드셨으며 사람도 지으셨다.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완전한 공동체의 즐거움과 놀라운 삶의 축복을 나누시기 위함이었다. 이 때는 하나님이 만드신 규율을 따르면 낙원에서 계속 놀라운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즐길 수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 위에 세워진 관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가 사람들을 죄의 길로 꾀는 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 제5장 : 죄가 인간의 마음에 독버섯처럼 퍼졌다.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인생에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에 더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젠다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 제6장 :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장이다. 홍수 이후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면서 심판만으로는 결코 임마누엘 아젠다를 성취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고, 세월이 흐르면서 아브라함과의 언약, 시내산 앞에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통해 “나는 나 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다른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네 삶이 평탄할 것이다. 네가 명령을 준행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말씀대로 지키지 못했고 지킬 수도 없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기 위해서는 죄로 오염된 바이러스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다시 다윗을 통해 “여호와가 너를 위해 집을 이루고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할 것이다.”고 언약하셨다. 이 언약들이 오늘날까지 임마누엘 아젠다를 진행하고 있다. 임마누엘 아젠다의 마지막 단계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새 언약을 세우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성취되는 새 언약으로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제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이 언약은 하나님 섭리의 마지막 장까지 지속될 것이다.

․ 제7장 : 마지막 장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항상 그와 함께 있어 영원한 교제를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임마누엘 아젠다는 완성될 것이다. 그의 임재와 그의 축복이 있는 그곳은 바로 천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제6장에 살고 있다.

제4부 새로운 리듬 - 어떻게 살아야 하나

15장 하나님을 즐거워함

새로운 길이 정말 가능한가? 실제로 성령의 새로운 길을 살 수 있는가? 아브라함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흥분하지 않았다. “지금 아기를 낳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듭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망을 포기하려 합니다. 제가 주관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텐트 너머의 평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비록 여종에게서 났지만 어느새 건강하게 자란 이스마엘이 있었다. “하나님, 제게 이미 있는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길을 시작하려는 지금 우리는 기도부터 바꿔야 한다. “하나님, 어떻게 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끊임없이 지속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인생의 형통을 더 즐기고 때때로 죄를 즐기기도 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서 더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것을 바꾸려면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싶은 새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미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실제가 될 수 있을까요? 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갑니다. 아브라함에게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제 삶에도 기적을 베푸실 줄 믿습니다. 이제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겠습니다. 이제 제 삶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옛 생활의 길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초자연적인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이삭이 태어나게 해 주세요!”

16장 새로운 길의 주춧돌 다섯 개

새 언약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근거를 줄 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을 보증해 준다. 새로운 길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인도한다. 그럼 새로운 길로 인도해 줄 다섯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제시하고 다음 장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1.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펴보라

2. 당신 앞에 항상 두 갈래 길이 있음을 인식하라

3. 당신의 목적을 재정비하라

4.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방법을 깨달으라

5. 당신의 기도 생활을 새로운 길의 생활에 맞추라

17장 현 위치 점검 :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순례의 길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할 때 우리는 깨어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 단계이다. 당신의 내면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초청하고 싶다.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생명력 있는 한 가지 진리를 명심하기 바란다. ‘깨어짐이 자유로 인도하는 길이다.’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자신을 보면서 우리 안에 더러움을 정결케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유케 되는 깨어짐을 경험한다. 자유를 느끼기까지 얼마 동안 깨어짐에 머물러 있을지는 성령께 달려 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위로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시다.

하나님은 성령의 새로운 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자유케 하시기 위해 고통과 문제들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의 때에 은혜를 비추시며 우리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순간, 얼마나 실패하고 갈등했는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사랑과는 다른 거룩한 사랑의 맛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향해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미소지으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깨어짐은 우리 눈을 축복받는 더 나은 삶에서 더 좋은 소망을 약속하는 친밀함으로 돌리게 도와준다. 축복은 결코 깨어짐을 치유해 주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덮어줄 뿐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현재 위치를 발견했는가? 당신이 시스템을 좋아하고 신비함과 신뢰보다는 예측하고 주장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또 시스템에 맞지 않는 것을 부인한다면,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나누지만 연약함을 감추고자 한다면, 당신의 현재 위치는 옛 생활의 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비가 계획보다 신뢰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며 삶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진실한 믿음을 소중히 여겨 정직하게 삶을 직시한다면, 또 연약함과 죄로 인해 깨어지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신은 새로운 길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성령의 기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좁은 길을 발견했고 새로운 길, 협착한 길로 걷는 노력을 이미 하고 있는 셈이다.

18장 선택의 기로 : 어떤 사이클을 택할 것인가

만일 인생에 대한 기본 사고방식이 옛 생활의 길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올바르게 행하면 우리 삶이 평탄할 것이라고 믿으며 더 나은 삶에 목적을 두고 산다면, 우리 앞에는 두 길만이 열려 있음을 볼 것이다. 첫째 길은 ‘재조정 사이클’이라고 부른다. 이 사이클에서 중요한 것은 인생이 회복되는 듯한 좋은 기분이다. 그래서 무언가 잘못된 것을 말하는 영혼의 아픔에서 멀어지고자 ‘부인’하고, ‘전략’을 세우고, ‘평가’하고, 방법을 ‘재정비’하는 사이클을 계속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안정’을 느낀다.

두 번째 길은 ‘치료적 사이클’이다. 때로 재조정 사이클이 실패해서 문제에 잘 대처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당신은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이클은 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당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개방’하면서 시작된다. 그 다음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에서 ‘방향’이 결정되어 새롭게 개발된 자유를 즐기려 한다. 그러나 아직 두렵다. ‘격려’가 필요하다. 이제는 격려와 함께 깨달음과 행동을 ‘정렬’해서 올바르게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행해야 할 때이다.

기독교적 치료는 새로운 길의 삶을 격려하지만 기독교적인 치료라고 주장하는 치료법 중 상당수가 단지 옛 생활의 길에서 부딪힘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들은 말한다. “인생을 직시하고, 필요하면 도움을 얻으라. 이 세상에 동화하라. 인생은 당신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은 돕는 자라는 생각에 마음을 맞추라.” 그러나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것은 옛 생활의 길이다.

새로운 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길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이 영적 사이클은 모든 것에 대한 ‘깨어짐’에서 시작한다. 성령은 깨어짐을 통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시고 깨어짐과 회개를 통해 ‘의탁’으로 인도하신다. 자신을 내맡길 때 놀랍게도 ‘확신’이 일어난다. 성령은 당신의 영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거해 주신다. 성령이 주시는 이러한 확신은 당신 안에 생동감을 일으키고 전적인 ‘자유함’을 가져다준다. 당신 깊은 내면에서 무언가 솟아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당신 안에 생수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당신이 크게 넘어졌을 때조차 ‘새로운 순결’을 얻었다고 노래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성적 학대를 기억할 때라도 당신이 거룩하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성적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님을 깨닫고 ‘새로운 성향’을 가질 수 있다. 이전에 당신을 압도했던 슬픔이 더 이상 힘을 가지지 못한다. 당신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정 원했던 사랑과 즐거움, 평화와 오래 참음, 친절과 온유함을 가진 사람이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한다.

19장 목적 재점검 :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현대 기독교는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며 살고 있다. 어려움을 통해서라도 영적으로 변화되기 원하기보다 편안한 삶으로 인생을 꾸려나가는 데 더 관심을 둔다. 그러므로 순례의 길에서 중요한 세 가지 목적, 즉 ‘거룩한 만남, 영적 공동체, 영혼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안주와 편안한 집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치유와 성취와 성공을 추구한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빨간 불이 켜졌을 때 내 입술에서 처음 나온 말은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감정이 폭발하여 화가 슬픔을 덮쳐 버렸다. 격한 눈물이 내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평해요!”라고 외치는 거만한 마음에서 나온 분노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에서 나온 눈물이기도 했다. 나의 현재 위치가 분명해졌다. 내 영혼 안에서 서로 이기기 위해 다투는 두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에너지들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좁은 문에 내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저의 눈물과 제 인생의 이 힘든 순간이 허비되지 않게 하소서. 저를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힘과 마음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 순간 베일이 걷혔다. 나는 내 이마에 놓여진 승리자의 화관을 보았다. 그것은 더 축복된 가정도 아니었고 암이 낫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새로운 언약을 통해 성취된 개혁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기 원했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를 원했다.

․ 삼위 하나님 한 분 한 분과 교제하는 하나님과의 만남

․ 은혜를 진정으로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순례하는 성도들, 깨어지고 감사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와의 연합

․ 예수님을 닮아 가는 영적 성장과 삶의 변화

최상의 소망은 가장 나쁜 비극에서도 생존한다. 오히려 비극 때문에 소망이 더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상한 심령으로 깨어진 공동체와 연합하기 위해, 예수님과 닮은 모습으로 성령에 의해 변화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올 수 있다. 우리는 끓는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신선한 바다 가운데서 수영할 수 있다. 당신의 목적을 재정비하라. 성령은 이러한 목적을 향해 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20장 다양한 통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신다. ‘자녀들을 위한 그의 계획을 어느 것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주관하신다.’ 그 계획은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현재의 더 나은 삶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보배인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용서’. 둘째,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변화시키고 능력 주시는 ‘초자연적인 사랑’. 셋째, 나쁜 사람들을 단지 사회적 규범에 맞는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선하며 궁극적인 선을 귀중히 여기는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영적 능력’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그래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하나님을 사모한다면, 우리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영적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영적 순례의 길에서 우리는 성령의 7가지 사역(생각나게 하심. 영화롭게 하심. 부어 주심. 확신을 주심. 인치심. 기름 부으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기적(첫째,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적. 둘째, 솔직하고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기적. 셋째,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놀라운 변화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삶에서 증거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계속하시며 우리는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안식’, 즉 의존은 새로운 길을 가는 데 필요한 네 번째 핵심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순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는다. 순례의 길을 위한 연료는 대부분 기도를 통해 공급된다. 순례자의 본향으로 가는 어린아이의 기도 말이다. 나는 그것을 ‘아빠에게 드리는 기도’라고 부른다. ‘기도’는 새로운 길로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다섯 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21장 새로운 기도: 아빠에게 드리는 기도

기도할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기도를 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만족시켜 달라고 주장하는 것을 멈출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심할 때, 두렵고 불안함을 느낄 때, 영혼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 때, 기도 응답에 대한 의심이 생길 때,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결 방법을 알고 만족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것이 새로운 길의 기도 핵심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자신을 표현하라.

둘째,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라.

셋째,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라.

넷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라.

다섯째, 하나님을 원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라.

여섯째, 믿고 의심하지 말라.

당신은 지쳐 있는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행하는 일에 힘들어하고 있는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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