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질 때면/ 황다연
피맺혀 어지럽던 그 상처 뒷모습에
아름다움 느꼈을 땐 세월이 흐른 뒤였다
눈앞에 아물거리는 그리움 몇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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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밤/ 정유지
반달이 둥둥 떠서
시월을 몰고 온다
낙엽진 뚝방 너머
억새가 깃을 턴다
되돌아 되돌아온 말
비워야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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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막마을*/ 정희경
서 있는 소들처럼 막사는 버티었다
팔려 가지 않으려고 힘을 준 다리 기둥
벽면에 소들의 울음 펄럭이고 있었다
기울어진 지붕 위에 환기창 열어두고
다닥다닥 붙어 피는 전봇대의 흐린 체온
실핏줄 붉은 언덕에 컨테이너 번진다
저 뱃길 따라가면 고향에 닿아질까
쫓겨난 황소걸음 피난 온 아기 울음
막사에 등대 한 채 짓고 무적(霧笛) 소리 보낸다
* 부산시 우암동 189번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수탈되는 소를 위한 소 막사가
한국전쟁 때 피난민의 주거지로 사용되어 형성된 마을. 갈맷길 3-1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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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맷길은 치유다/ 최성아
회색에 지친 날은 발걸음 닿는 데로
가만히 눈을 감고 바다 내음 맡고 싶다
바람이 손을 내밀면
가슴 열어 감싸며
물음표 꼬리 따라 미로를 헤매지만
도시를 다 털어낸 머리칼 휘날리며
비워도 넉넉해지는
갈맷빛을 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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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부산시조> 문학상 수상작
나무 이야기/ 제만자
벽은 허물어지고 잎은 썩어 흙이 돼도
감동포성* 지키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아마도 많은 것들이 흘러간 걸 아나 보다
강 쪽에 드러낸 숨죽인 퍼런 기억을
갈수록 굳어 가는 나무만이 알 것 같아
앞날이 멀다 싶을 때 그늘 밑에 가 본다
수난의 로힝야족 바다에 떠 외친다
떨리는 몸을 실은 토막 하나 점점 지쳐
또 다른 나무 이야기가 아득하니 묻힌다
*구포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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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김소해
여기 기도는 바다 너머 너 거기에 닿는다
제 새끼 건드리면 십리 밖 어미 꿈틀하듯
창문은 열어두거라 긴 파동의 내 하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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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같다는 그 말/ 김임순
고개 들어 눈길도 하늘 아래 우듬지
탄성이 절로 새는 대접만한 꽃이 폈소
태산목, 당당한 자태 서늘한 설렘이여
걸맞은 이름값에 유월에야 말문 여네
튼실한 초록 잎에 두툼한 백자 사발
목련이 무색해지는 보름달도 여럿 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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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백송(白松)/ 박옥위
부정한 세사에 숨길 것은 없다고
조계사 백송은 비늘을 다 벗는다
미끈한 하얀 나신이 내 비늘도 벗긴다
헛됨을 보는 눈이 그 속을 어찌 알까
착하게 살았으면 듣는 귀가 맑을 것을
그 삶이 길이 되느니 선 채로 비경이다
오백년 허리 휘며 백송은 하염없다
부처가 따로 있나 그대 마음이 부처지
누군가 탁 치는 죽비, 하늘에 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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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2/ 서관호
보라!
스치고 간
맺지 못할 인연들을
사노라
뱉어버린
이행 못한 약속들을
산천에
그리움 되어
피고 지고 또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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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그 빈자리/ 우아지
예정에 없던 비가 유리창에 배어든다
우산을 손에 쥐고 바람이 길을 트는
퇴근길 전화할 곳이 없다
하루 한 번은 했는데
바쁘다 시간 없다 핑계로 챙기지 못한
투명한 슬픔 한 방울 나뭇잎에 반짝이면
너무나 빨리 가버린 아버지를 불러본다
초가을 저물 무렵 느티 아래 정류장
버스 탈까 걸어갈까 하늘은 잿빛이다
가신 지 석달하고도 보름
전화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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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나빠, 하루나, 겨울초, 유채/ 이말라
초라하게 강해야 했던 겨울 끝 언저리
어깨는 움츠려 추위에 담보 잡혔던
봄날은 저만치서 서성대고 푸른 것 귀할 때
겨울초 김치라며 젓갈 내음 신선하던
누구는 하루나라하고 엄마는 시나나빠라던
이제는 유채란 푸른 이름 꽃도 밝은 그 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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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부산시조 제56호/ 부산시조시인협회/ 2024 하반기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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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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