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에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되어라>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징어 게임 Squid Game’를 보고 세상살이에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이것은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연기)이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로서 게임에 참가하여 짝이 되었던 오일남(오영수 연기)이라는 노인을 찾아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①첫째 질문: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을 만큼 돈 많은 사람이 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게임을 만들었을까? 더구나 게임을 만든 사람은 돈을 더 벌 필요도 없이 놀고 먹어도 되는 부자이어서 게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이 오히려 번거롭고 귀찮을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그 부자라는 양반이 죽음을 앞둔 처지인데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어린애 놀이에 돈을 투자했느냐? 는 것이다.
②두 번째 질문: 게임을 만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게임을 만든 사람이 굳이 게임에 참가하여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 게임이란 게 어린애들 장난 같은 놀이가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생사가 갈리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보통 상식으로는 게임을 만든 사람은 게임 밖에서 게임을 감상하면 그만일 것이다.
성기훈: (임종하는 노인 오일남에게) 영감님, 왜 그런 게임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왜 그런 위험한 게임에 일부러 들어와서 갖은 고생을 다 하셨어요?
오일남: 젊은이,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도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둘 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어릴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딱지치기, 오징어놀이, 땅따먹기, 구슬치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그런 재미를 느껴보고 싶었어. 그런데 놀이를 지켜보는 재미 보다는 놀이에 직접 참여해서 느끼는 재미가 훨씬 크질 않나? 삶은 놀이공원이야. 이 땅은 놀이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아지니, 모든 게 시시해졌어. 사는 재미가 없어졌어. 그래서 재미를 찾으려고 게임을 만들고 함께 놀았던 게지.
2. 오징어 게임은 삼독심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욕계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게임설계자인 오일남은 창조주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제기된 두 가지 질문은 창조론을 주장하는 종교(천주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에서 제기되는 근원적인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첫째, 창조신은 천지창조 이전의 무사안온한 경지에 머물지 아니하고 왜 만물을 창조하였는가? 완전무결하고 자족하신 신에게는 창조하는 일조차 번거로운 일일 텐데 무슨 이득이 있길래, 무슨 영광을 보자고 세상 만물을 창조해냈는가? 창조의 이유와 의미를 묻는 문제다.
둘째, 신이 일단 세상을 창조했다면 피조물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상 밖에 계시면 될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세계 속으로 들어와 피조물의 형상을 한 채 동고동락하는 것일까? 세계에 개입하는 신의 의지는 무엇인가? 심지어 신이 肉化하여 역사에 참여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인도신화에 따르면 태초의 브라흐마는 홀로 존재하니까 너무나 고독하였다. 고독한 신은 권태와 무료함에 지쳤다. 참 인간적인 신이다. 그래서 좀 많아졌으면 하는 욕망이 일어났다(多化의 欲). 어린이가 풍선을 불듯이 창조신은 자기 몸을 부풀려 불과 물과 흙을 불어냈다. 이렇게 불어내서 생긴 火水土화수토(삼종화합물)가 서로 섞여서 만물이 형성되었다. 브라흐만은 자기가 불어내 생겨난 만물을 사랑한다. 따라서 창조신은 개개의 사물 속으로 자기를 분화시켜 그 속으로 들어갔다. 브라흐만이 자신을 나누어 피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을 지와-아트만jiva-atman이라 한다. 그리하여 불어낸 자(창조신Brahman)가 불어낸 것(개별자jiva-atman)이 된다. 이것이 소위 梵我一如범아일여이다. 브라흐만이 완벽해 보이는 최고의 신인 것 같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피조물 속으로 들어간 브라흐만에게 세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①無知의 문제: 나는 왜 내가 태초에 창조주 브라흐만이었던 것을 모르는가?
②고통의 문제: 나는 왜 탄생과 늙음, 병듦과 죽음(생노병사의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가?
③죄악의 문제: 브라흐만이었던 나는 왜 죄를 짓는가?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를 짓는 세속에서 물러나 명상을 하여 범아일여를 실현하려 한다. 이것이 인도 종교의 보편적 내용이다.
4. 기독교에서는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는가? 신이 고독해서인가, 무료와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창조하는 재미를 느끼려 했던가? 이런 해석은 신을 인간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이다. 신에게는 인간적 속성이 전혀 없다. 세계를 창조해야 할 어떤 이유도 필요 없다. 그러면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실수인가, 우연인가, 아니면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인가? 신에게는 실수나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결국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나 의미는 불가지론에 속한다. 하기사 기독교의 창조론 자체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만 지지받을 뿐이니, 보편타당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신념체계일 뿐이다.
5. 권태와 무료함이라는 고통:
세상에서 가질만한 것을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자들, 소위 부자들, 유한계급이 경험하는 징후가 권태와 무료함이다. ‘사는 맛’이나 ‘사는 재미’를 돈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이런 믿음은 어느 정도까지만 유효하다. ‘돈으로 굴러가는 세계’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고,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될 때, 세계에 대한 환멸이 닥쳐온다. 그때 유한계급이 나타내는 반응은 다양하게 벌어진다. 돈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정치적으로 전환하여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금권정치다(트럼프). 다른 방향으로는 쾌락의 끝까지 가보자는 쾌락주의(티머시 리어리)와 될 대로 되라는 방탕주의(히피 족)가 있다. 또 다른 쪽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려는 공익추구 형 행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봉사와 기부라는 실천(빌 게이츠, 저커버그)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예술지향적인 추구가 생기기도 하며 아예 세상에서 물러나 자연에 은둔하기도(하워드 휴즈) 하고, 또 영적인 여정으로 길을 떠나기도 한다. 오징어 게임의 경우 오일남이란 부자 노인은 무료함과 권태에 지쳐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에 느꼈던 ‘사는 재미’를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느껴보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생사-게임을 만들었다. 자기가 게임의 신이 되어 세상을 설계하고 법을 만들어 참가자들을 장기-말처럼 갖고 놀았다. 그러나 그 결말은 허무한 죽음을 맞을 뿐이었다. 더구나 참가자들을 공포와 분노에 떨며 죽음으로 밀어 넣은 악행을 저지른 셈이니 속죄할 수 없는 악업만 쌓았다. 이제 자신이 저지른 악업의 결과로 중음계로 던져지리라. 그것은 가상게임이 아니라 망자가 맞이하게 될 생생한 현실이다.
6. 윤회에 참여하는(앙가쥬망 engagement) 보살:
대승불교에서는 윤회의 고통을 벗어난 경지, 열반을 얻은 사람은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보리심의 서원을 발해서 다시 윤회로 들어와 중생의 삶에 동참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윤회로 돌아온 사람을 환생자라고 하고 그런 삶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사람을 보살이라 한다. 오징어 게임과 같은 욕계에서 게임의 판을 바꾸는 사람(게임 체인저game changer)은 인간을 장기판의 말로 보지 않고 부처로 대접하리라는 서원을 세우고 실천하는 보살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사실 알고 보면 인간은 모두 환생자이다. 우리는 자신이 자각하든 못하든 간에 자신이 건립한 세계를 시간여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시간여행은 私的인 여행이 아니라 공공적인 시공간을 만들어가는 公-進化과정이며 세계구원을 향해간다. 그래서 보살은 세계를 벗어난 높은 곳에서 세계를 관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에 뛰어들어 중생과 함께 어울려 해탈의 춤을 춘다. 이것을 해탈의 기쁨이라 할까?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서 보이는 '소리 없이 번져가는 미소'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많은사람들이 게임에 중독된거 같습니다.
선과악
생각을 결정하는순간
선도악도 하나가됩니다.
악인도선인도 따로있는게 아니였습니다.
지금이순간 나는
선인도 악인도
될수있다는걸...
마지막장면에 구급차가 올때
저는 숨통이 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