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출신 대학생밴드가 모여 만든 실력파 밴드
평균율
우리나라의 인구의 절반 가까이는 수도권 (서울, 경기, 인천)에 집중해 있다.
가요계 또한 공연이나 음반작업 등이 수도권에서 이루어 지며 활동의 본거지도 주로 수도권이다.
그러나 70년대 말 ~80년대 초엔 광주의 방송국에서 가요제를 개최하기도 했고 서울의 국민대학교 스쿨밴드인 마젠타가 입상을 했는데 당시 마젠타의 가수가 희극인 김한국이다.
아무튼 각 지방의 가요제가 있어 그곳을 통해 가수와 연주자가 진입을 했지만 여전히 문화는 서울 중심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 부산출신 대학생들이 약진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가요제의 경우는 지역예선을 도입했는데 예전 유명한 썰물이 있긴 했으나 85년 대학가요제 대상팀인 '높은음자리' 그리고 85년 강변가요제의 입상팀인 '어우러기 '그리고 86년 도시의 그림자, 바다새 그리고 87년 '여운'등 중창단이 발군의 실력으로 우리나라 제1의 항도 부산의 분위기를 알렸다.
아무튼 이야기를 돌려 당시 유행하던 밴드들이 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건 악기편성과 자체편곡등 여러가지 이유로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프로 뺨치는 실력이 있지만 음향이나 출력등에서 방송국 악단들이 연주해주는 중창단이나 솔로에 비해 불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런 불리함을 이겨내고 건반과 컴퓨터를 활용하여 연주에 힘을 불어 넣고 판을 뒤집은 이가 88년 대상을 받은 이들이 '무한궤도'이며 이들 중에 신해철이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명한 가수와 밴드가 되어 활동하는 이승철과 부활도 강변가요제에 나왔으나 야외에서 진행하는 당시 상황과 악기편성에서 실력만큼 만족할 만한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밴드입상자들이 80년대 초반보다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87년도 대학가요축제에 밴드가 몇 있었고 그후에 밴드출신가수들이 입상을 하며 부산출신 당시 부산수산대 '모비딕스'가 이름만큼 센 사운드로 출전을 한다.
88년 강변가요제에 이상은의 담다디에 가렸지만 금상을 받았던 부산출신의 이상우는 예비역으로 참가자 중에는 고학번으로 그에게 곡을 주었던 사람들이 바로 86년에 강변가요제를 출전했던 연주자들로 구성된 '허니문'이란 밴드의 베이스 박정원과 건반 김성란이 있었다.
이들은 이상우의 동아대 동문이었고 이상우는 솔로가수를 할 때 연주자 박정원과의 관계를 강조했으며 박정원의 곡을 발표한다.
이 박정원과 허니문의 드럼주자였던 강수호(나는 가수다!'에서 드럼을 멋있게 연주하던 분)그리고 지금은 임거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임길상 건반의 함양규 , 기타의 김주찬 등이 평균율을 만들고 여기에 다섯손가락에서 베이스로 활동을 했으나 군문제로 그만두고 88년 다시 다섯손가락의 건반으로 활동하다 부산출신 연주자들 틈에서 함께 활동한 최준성이 있었다.
이 최준성은 훗날 이색지대를 만들어 나가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을 박정원은 김보희와 모노를 만든다.
그리고 평균율의 보컬이던 옥윤창은 음색과 창법이 가수 이상우와 흡사한데 일반적으로 밴드가 나눠지면 솔로로 활동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데 크게 알려진게 없고 종교관련 음악을 하는 것 같다.
부산이라는 개방적이고 변화무쌍한 대도시에서 활동한 이들은 서울음반이 있던 의왕에서 합숙을 하며 전국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으나 그 활동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가수 김건모가 이곳에서 잠깐 활동을 한 듯한데 아마도 90년대 초반 평균율 1기가 해체되고 영입된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들의 음반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7명이라는 대식구를 거느린 밴드로 훗날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현재도 많은 곡들이 연주되며 현역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