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원 박사 周·人·工 四書三經] *<제121강> (2018.09.10.)
— <周·人·工 四書三經>은 ‘周易과 人性을 工夫하는 四書三經 강좌’를 말한다 —
시경(詩經) 제6강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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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경(詩經) 공부 ☞ 대아(大雅) / [文王之什]
3. 대아(大雅) - [文王之什] ② <綿>*<旱麓>
❊〈綿〉주렁주렁 달린 오이 / [文王之什] 582
☞『詩經集傳』에서 <綿>을 ‘文王之什’에 분류했다.(卷十六 大雅 文王之什 三之一)
綿綿瓜瓞이여 오이들이 주렁주렁 달리어 있네
民之初生이 백성들이 처음으로 생겨나서는
自土沮漆하니 저강과 칠강 가의 흙에 살았지
古公亶父 陶復陶穴하여 고공단보께서도 동굴 속에 살아
未有家室이러시니라 그 옛날 처음에는 집이 없었지
· ‘綿綿瓜瓞’(면면과질)에서 ‘綿綿’은 주렁주렁 달린 모습, ‘瓞’(질)은 ‘작은 오이’
‘綿綿瓜瓞’은 결국 자손이 계속 이어져 융성해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自土沮漆’(지토저칠)에서 ‘沮漆’은 둘다 강이름, ‘沮’는 ‘沮水’, ‘漆’은 ‘漆水’
· ‘古公亶父’(고공단보)에서 ‘古公’은 호, ‘亶父’는 字. 文王의 할아버지 태왕(太王)을 가리킴.
· ‘陶復陶穴’(도복도혈)에서 ‘陶’는 ‘掏(도)’와 통용, ‘파내다’, ‘復’은 ‘굴’이다.
<집전>에서 말했다. “이 또한 周公이 成王을 경계한 것이다. 太王[고공단보]이 처음 岐周로 遷都하여 王業을 여시니, 文王이 이로 인하여 天命을 받음을 追述한 것이다. 이는 그 首章이니, 오이 덩굴이 먼저는 작고 뒤에는 커짐을 말해서 周나라 사람이 처음 漆水와 沮水 가에 사니 告公의 때에는 窰竈와 土室의 가운데에 거쳐하여 그 나라가 매우 작았는데, 文王이 이른 뒤에야 커짐을 비유한 것이다.(此亦周公戒成王之詩 追述大王始遷岐周 以開王業 而文王因之 以受天命也 此其首章 言瓜之先小後大 以比周人始生於漆沮之上 而古公之時 居於窰竈土室之中 其國甚小 至文王而後大也)”
古公亶父 來朝走馬 고공단보 어느 아침 마을 달려서
率西水滸하사 至于岐下하시니 서수 가를 따라서 기산에 와서
爰及姜女로 聿來胥宇하시니라 강녀와 더불어서 터를 잡았네
· ‘爰及姜女’(원급강녀)에서 ‘爰’은 ‘이에’, ‘姜女’는 강씨 성을 가진 여인, 태왕의 비
· ‘聿來胥宇’(율래서우)에서 ‘胥’(서)는 ‘보다, 살피다’
孟子가 말씀하셨다. “太王이 빈(邠) 땅에 거주하실 적에 狄人들이 침략하거늘 皮幣와 珠玉과 犬馬로써 섬겨도 침략 당함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그 노인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狄人들이 탐하는 것이 우리의 土地이다. 나는 들으니, 君子는 인민을 기르는 土地로써 인민을 해치지 않는다 하니, 여러분은 어찌 군주가 없음을 염려하리오. 내 장차 이곳을 떠나겠다.’ 하시고 邠 땅을 떠나 梁山을 넘어 岐山의 아래에 도읍을 정하여 거주하셨는데, 邠땅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仁人이다.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 따라 오는 자가 시장에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周原膴膴하니 주나라 벌판을 기름진 옥토
蓳茶如飴로다 쓴 나물 씀바퀴도 꿀맛 같았네
爰始爰謀하시며 爰契我龜하사 사람에게 물어보고 거북점 쳐도
曰止曰時하여 지금 여기 머물러라 결론이 나니
築室于玆라하시니라 드디어 이 자리에 집을 지었네
· ‘周原膴膴’(주원무무)에서 ‘膴膴’는 기름지고 아름다운 모양
· ‘蓳茶如飴’(근도여이)에서 ‘蓳’(근)은 ‘쓴 나물’, ‘茶’(도)는 ‘씀바귀’, ‘飴’(이)는 ‘단엿’
· ‘爰契我龜’(원계아귀)에서 ‘契’는 ‘爇’와 통용, 점을 치기 위해 거북에게 새기는 것.
· ‘曰止曰時’에서 ‘時’는 ‘是’와 통용, ‘옳다, 좋다’. 거북의 점괘가 길조로 나온 것을 말함.
迺尉迺止하며 迺左迺右하며 안심하고 머물면서 좌우로 살펴
迺疆迺理하며 迺宣迺畝하니 경계 긋고 도랑 파고 이랑을 내며
自西徂東하여 周爰執事하니라 서쪽에서 동쪽까지 다스리셨네
· ‘迺尉迺止’(내위내지)에서 ‘迺’(내)는 ‘이에’
乃召司空하며 乃召司徒하여 사공도 불러오고 사도도 불러
俾立室家하니 其繩則直이어늘 집들을 짓게 하니 먹줄이 반듯
縮版以載하니 作廟翼翼이로다 판축으로 담을 쌓으니 종묘는 근엄해!
· ‘司空 乃召司徒’에서 ‘司空’은 토목공사를 맡은 관리. ‘司徒’는 사람을 부리는 관리
捄之陾陾하며 度之薨薨하며 들것에 흙을 담아 판축에 넣어
築之登登하며 削屢馮馮하여 흙 다지고 높은 곳은 깎아내리니
百堵皆興하니 담장들이 한꺼번에 다 세워지네
鼛鼓弗勝이로다 격려하는 북소리가 못 따라 하네
· ‘捄之陾陾’(구지잉잉)에서 ‘捄’(구)는 ‘담다’, ‘陾陾’(잉잉)은 흙을 담는 소리, ‘어영차’
· ‘度之薨薨’(탁지횡횡)에서 ‘度’(탁)은 ‘흙을 판에 담다’, ‘薨薨’은 흙을 힘차게 담는 소리
· ‘削屢馮馮’(삭루빙빙)에서 ‘屢’(루)는 높이 나온 곳, ‘馮馮’(빙빙)은 흙을 치는 소리.
· ‘鼛鼓弗勝’(고고불승)에서 ‘鼛’(고)는 ‘큰 북’, ‘弗勝’은 백성들이 일을 즐거워하고 공사를 권면하여 북치기를 그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迺立皐門하니 皐門有伉하며 바깥문을 세우니 우뚝해지고
迺立應門하니 應門將將하며 응문을 세우니 엄정해지네.
迺立冢土하니 戎醜攸行이로다 제단 세워 군사들이 행진을 하네.
· ‘迺立皐門’(내립고문)에서 ‘皐門’(고문)은 ‘왕(王)이 출입하는 넓은 문’
· ‘皐門有伉’(고문유항)에서 ‘伉’(항)은 우뚝한 모양
· ‘迺立應門’(내립응문)에서 ‘應門’(응문)은 ‘왕궁의 정문(正門)’
· ‘迺立冢土’(내립총토)에서 ‘冢土’(총토)는 ‘토지(土地)의 신(神)에게 제사지내는 곳’
· ‘戎醜攸行’(융추유행)에서 ‘戎’(융)은 ‘크다’는 뜻. ‘醜’(추)는 ‘무리’. ‘戎醜’는 대중이다.
· <集傳>에서 말했다. “太王의 때에는 아직 制度가 없어서 다만 ‘두 門’[皐門과 應門]을 만들었고 그 이름이 이와 같았는데, 周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게 되자, 마침내 이것을 높여 天子의 문으로 삼아서 諸侯들은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大(太)王之時 未有制度 特作二門 其名如此 及周有天下 遂尊以爲天子之門 而諸侯不得立焉)”
肆不殄厥慍하시나 그 노여운 마음이 없진 않아도
亦不隕厥問하시니 그 위로의 정성이 여전하셨네.
柞棫拔矣라 行道兌矣하니 가시나무 베어내고 길을 뚫으니
混夷駾矣하여 維其喙矣로다 곤이(昆夷)들이 달아나네, 숨이 차도록.
· ‘肆不殄厥慍’(사부진궐온)에서 ‘殄’(진)은 ‘끊다, 다하다’
· ‘亦不隕厥問’(역불운궐문)에서 ‘隕’(운)은 ‘떨어지다’, ‘問’은 ‘問安하다, 위로하다’
☞ <집전>에서는 ‘問’을 ‘聞’과 통용, ‘소문, 명예로운 소문’으로 해석했다.
· ‘柞棫拔矣’(작역발의)에서 ‘柞’은 ‘갈참나무’, ‘棫’은 ‘떡갈나무’, ‘拔(발)’은 ‘베다, 뽑다’
☞ <집전>에서는 ‘拔’(패)를 ‘우거질 패’로 읽어, ‘~나무들이 쑥쑥 뻗어 올라가’로 해석했다.
· ‘混夷駾矣’(곤이태의)에서 ‘混’은 ‘昆’(곤), ‘混夷’는 서북쪽 오랑캐, ‘駾’는 달아나다.
· ‘維其喙矣’(유기훼이)에서 ‘喙’(훼)는 가쁘게 숨을 쉬는 모양
☞ <집전>에서 말했다. “太王이 비록 昆夷의 성냄을 끊지는 못했으나, 또한 자기의 명성을 떨어뜨리지는 아니하였다. … 그러나 太王이 처음 岐山 아래 이르렀을 때에는 숲과 나무가 깊이 막혀 있고 사람과 물건이 적었는데, 그 뒤에 生齒[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돌아오는 자가 날로 많아지게 됨에 이르러서는 나무가 위로 쭉쭉 뻗어 올라가서 (그 밑으로) 길이 통하니, 昆夷들이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숨어 엎드려서 오직 숨만 쉴 뿐이었다.(言大王雖不能殄絶混夷之慍怒 亦不隕墜己之聲聞 … 然 大王 始至此岐下之時 林木深阻 人物鮮少 至於其後生齒漸繁, 歸附日衆 則木拔道通 昆夷畏之 而奔突竄伏 維其喙息而已)”
虞芮質厥成이어늘 우와 예가 찾아와서 화해 청하니
文王蹶厥生하시니 문왕에게 생민들을 감동시켰기 때문
予曰有疏附며 疏遠하던 이들도 가까이 와서
予曰有先後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따르며
予曰有奔奏며 너도 나도 앞을 다퉈 문왕 도우니
予曰有禦侮라하노라 우리를 모욕하는 외적 막았네.
· ‘虞芮質厥成’(우예질권성)에서 ‘虞·芮’는 나라 이름. ‘質’은 질정하다, 청하다, 묻다
· ‘文王蹶厥生’(문왕궤궐생)에서 ‘蹶’(궤)는 ‘감동시키다’
· ‘予曰有疏附’에서 ‘予曰’은 ‘시인 스스로 말하기를 ~’, 어조사. ‘疏’는 ‘소원해진 사람’
[虞임금과 芮임금]☞ 虞나라의 임금과 芮나라의 임금은 오랫동안 밭의 境界를 두고 다투었다. 그러던 중 文王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재판을 의뢰하기로 하고 찾아갔다. 문왕의 땅에 가서 보니, 밭 가는 사람들은 밭두둑을 양보하고 길 가는 사람은 서로 길을 양보하며 모두가 서로 양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를 보고 부끄러워진 두 사람은 스스로 뉘우친 뒤 화해하고 돌아간 일을 읊은 것이다.
* [詩 내용의 歷史的인 背景] — 古公亶父에서 文王·武王의 周나라 建國까지
주(周)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 후에 太王)은 중국 상(商)나라의 제후국인 주(周)의 제후였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단보(亶父)이다. ‘공숙조류’의 아들이고 태백-중옹-계력(季歷)의 아버지이며, 훗날 주(周) 무왕(武王)이 태왕(太王)으로 추숭했다. 추숭되기 이전에는 고공(古公)으로 칭해졌고,『사기(史記)』에서는 그 ‘고공(古公)’과 이름인 ‘단보(亶父)’를 합쳐서 ‘고공단보(古公亶父)’라 칭했다. 아버지 ‘공숙조류’가 죽고 뒤를 이었는데, 시조(始祖)인 ‘후직(后稷)’과 4대 ‘공유(公劉)’의 사업을 다시 익히고 덕(德)을 쌓고 의(義)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고공단보’를 받들었다. 문왕(文王)의 할아버지[祖父]이다.
융적(戎狄)들 중 하나인 훈육(薰育)이 공격해 와서 재물을 요구하자 고공단보는 그들에게 재물을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다시 공격하여 땅과 백성을 요구하자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단보는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빈(豳)을 떠나서 칠수(漆水), 저수(沮水)를 건너고 양산(梁山)을 넘어서 기산(岐山) 아래 정착했다.
빈(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노인들을 부축하고 어린이들을 이끌며 모두 기산(岐山) 아래의 태왕에게 다시 귀순했다. 그 이웃나라의 사람들도 태왕이 인자하다는 소문을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했다. 이때 태왕은 융적(戎狄)의 풍속을 개량하고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으며, 오관유사(五官有司)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노래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태왕(太王)에게는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인 중옹(仲雍) 그리고 막내 계력(季歷)이 있었다.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은 아버지가 계력(季歷)을 세워 창(昌)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것을 알고는 둘이서 형만(荊蠻, 후에 오(吳)나라)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르고서 자리를 계력(季歷)에게 양보했다. ‘왕계(王季)’가 바로 이 계력이다. 마침내 태왕은 계력(季歷)에게 나라를 물려주어, 창(昌)에 이르러 천하를 셋으로 나눔에 3분의 2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문왕(文王)이요, 문왕이 죽고 아들 발(發)이 즉위하여 마침내 상(商)나라의 주(紂)를 치고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이가 바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다.
주공(周公)은 무왕의 동생으로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周)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어린 조카 성종(成宗)을 잘 보필하여 성덕을 이루었다. 무왕(武王)은 주나라를 세우고 2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희송(姬誦)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왕(成王)이다. 성왕(成王)은 그때 열세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래서 무왕의 동생인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보필하면서 천자의 직권을 대행하여 정사를 다스렸다. 이것이 주공보정(周公鋪政)이다. (역사상에서는 '주공단'이라고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보통 '주공'이라고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