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이집트 일주의 일정 중 방문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간단한 정보입니다.
미리 공부하고 가시면, 조금 더 친근한 느낌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둘러보실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이집트 북쪽의 지중해 해안선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는 현지 아랍어로는 알 이스칸다리야(اسكندريه)로 불립니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도시는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동서로 20km 가량 길게 뻗어 있는 모습입니다.
고대 서양의 역사에서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국가가 가장 강대국으로 인정받던 시기였기에 고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지중해를 둘러싼 많은 나라와 유명한 도시들이 쇠락을 거듭했지만, 그 중에서도 300 BC 이후 지중해의 무역과 문화, 예술,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먼저 알렉산드리아가 탄생한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331 BC,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원정이라는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거점으로 이집트를 점령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는 남쪽의 테베(현재의 룩소르)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은 본토인 그리스와 지중해 바다로 연결되는 가장 가까운 이집트 북부 해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길 원했습니다.
당시에는 담수호로 둘러싸인 지중해 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곳이 알렉산더의 명을 받은 유명한 건축가 디노크레테스에 의해 해안선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아름다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재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부재군주였습니다.
그가 이집트에 머무른 시간은 거의 없었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정복전쟁을 하며 인도까지 갔다가 회군하면서 323 BC에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사후, 휘하 장군이자 전장에서 그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한 측근이기도 했던 프톨레미가 이집트를 이어받아 다스리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 문화에서는 진정한 후계자가 되려면 선왕의 주검을 책임지고 장례식까지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진정한 알렉산더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프톨레미가 알렉산더 대왕을 이집트로 모시고 와서 알렉산드리아에 무덤을 만들었고, 후에 로마의 초기 황제들까지 와서 참배했다는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현재까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고고학자들도 강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프톨레미는 알렉산더 대왕의 유지를 이어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헬레니즘을 꽃피우며 이집트의 문화와 그리스의 문화를 적절히 융합하여 새로운 시대, 즉 자신의 이름을 딴 프톨레미 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집트의 파라오로 칭하고 그의 후손들도 프톨레미 왕가의 이름을 이어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바로 이 프톨레미 왕조 시대가 알렉산드리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3 BC 경부터 프톨레미 1세는 알렉산드리아를 당시 지중해의 꽃으로 불리던 로마나 아테네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들어 정치와 문화,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알렉산드리아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정통 이집트 왕조의 상징이었던 오벨리스크나 스핑크스, 여러 신전들이 그리스의 신들과 결합해 새로운 신이 창조되었고 그런 이국적인 사원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고대 세계 최초로 언급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파로스 등대가 바로 이때 알렉산드리아의 상징으로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130m가 넘는 높이의 백색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암초가 많은 지중해 연안의 해안선으로 들어오는 무역선들을 안전하게 알렉산드리아의 항구까지 안내해 처음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압도적인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도시의 부와 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알렉산드리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14세기에 지진으로 인해 바닷속에 가라앉아 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또 하나의 명물은 당시 최고 수준의 학문을 자랑하던 아테네의 석학들까지 죽기 전에 가 보고 싶어 했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건축입니다.
프톨레미 1세가 283 BC에 건축한 이 도서관은 당시에는 지금의 공공 도서관의 의미와는 다른 일종의 국립 연구 기관으로 출발했는데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100여 명이 넘는 학자들이 상주하며 고대 학문을 연구하고 파피루스(고대 이집트의 종이)를 이용해 당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의 필사본이 존재한다고 할 만큼 거대한 장서들을 보유했다고 합니다.
약 70만 권의 장서를 보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전체의 도서관의 장서를 합한 것보다 10배가 넘는 숫자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던 시기에는 다른 나라의 도서관에 장서를 늘리지 못하도록 이집트의 특산품이자 유일한 종이였던 파피루스의 수출을 중단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유명한 도서관도 후대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지금은 그 자리에 현대식 도서관이 새롭게 문을 열어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기념관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프톨레미 왕조 시대의 알렉산드리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그 부를 바탕으로 위에 열거했던 찬란한 신전과 파로스 등대, 도서관 등을 건립할 수 있었습니다.
프톨레미 1세의 유지를 이어 받은 그의 후손들도 축적된 부를 이용해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의 진주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도시로 가꾸어 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알렉산드리아의 역사도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약 300년 동안 지중해의 진주로 불리며 번성했던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으로도 잘 알려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미 왕가의 마지막 여왕이었습니다.
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세이며, 당시 떠오르는 대 제국 로마의 등장으로 시저와 안토니우스 등의 걸출한 영웅들과 대면하여 로마의 보호령으로 지정된 이집트를 끝까지 독립국으로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이 안토니우스의 죽음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끝내 자결하면서 30 BC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짧지만 찬란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한 이집트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의 제정시대를 연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된 많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조공이 모여 로마로 보내지는 무역항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서기 7세기 중엽 이슬람 제국의 이집트 점령으로 수도는 지금의 카이로 쪽으로 옮겨가게 되고 알렉산드리아는 완전히 역사 속에서 잊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이집트 최초로 기독교가 전파된 도시라는 사실입니다.
서기 40년 경에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마가가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와 구두 수선공에게 처음 복음을 전파한 이후 기독교가 가장 먼저 이집트에 퍼진 도시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집트에는 콥트 크리스챤으로 불리는 기독교도들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641년 이전에는 이집트 국민들의 대다수가 크리스챤이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기독교는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파를 이루고 있으며 카톨릭과는 다른 콥트교 내의 교황이 별도로 존재합니다. 이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한 마가가 제 1대 교황이라고 합니다. 현재도 이집트내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동쪽 항구쪽에서 바라본 해안선>
<여름철 알렉스의 해변 모습>
<알렉스 해안선의 야경>
<복원된 로마 원형극장>
<콰이트 베이 요새>
<새로 새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경>
<폼페이의 기둥으로 불리는 화강암 기둥과 세라피스 신전 잔해>
<도심의 모스크(이슬람 사원)>
<알렉스의 유명한 유리공예 모자이크 벽>
알렉산드리아는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많은 유적들이 제대로 발굴작업조차 거치지 않고 새로 지어진 도로와 건물들 아래 묻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고고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지하에는 엄청난 유적들이 묻혀 있다며 안타까워하지만, 여러 정치 경제적 이유로 도시 전체를 유적 발굴을 위해 다시 파헤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 클레오파트라와 시저, 안토니우스가 함께 거닐었을 해안가의 화려한 궁전, 그녀의 무덤 등
무수히 많은 유적들이 문헌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 화려하고 흥미 진진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찬란한 유적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재는 그 유적들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19세기 유럽풍의 오래된 건물들과 복잡한 도로망이 뒤얽힌 인구 4백만의 지중해 휴양도시가 돼 버렸습니다.
지금의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막기후인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곳이라 올리브와 오렌지 등의 지중해성 작물 농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천연가스와 송유관이 지나가는 이집트 제 2의 도시로서 많은 이집트인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합니다.
이집트에서 진짜 부자 소리를 들으려면 카이로에 집이 있고, 알렉산드리아에 별장이 있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그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도시 곳곳에 건물을 지으려 땅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 몇몇 남아 있습니다.
로마 귀족들의 지하무덤 형태인 카타콤 유적, 폼페이의 기둥이라 불리는 세라피스 신전의 잔해들, 소규모의 로마 원형 극장,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콰이트 베이 요새 등이 그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할 때는 현지의 한국인 가이드들이 농담처럼 말합니다.
“유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찬란했던 과거의 알렉산드리아 역사를 알고 이 곳을 방문하면 지중해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도시의 모습에서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화려했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겁니다.
아래는 우리 드빙팀이 머물게 될 소피텔 세실 호텔의 사진입니다.
이 곳은 19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낡았지만 고풍스런 느낌의 역사가 배어 있는 호텔입니다.
해안가 바로 앞에 자리해 멋진 풍광과 함께 시내 중심가와 바로 연결되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알렉스에서 보내는 하루 동안 드빙팀 회원님들의 상상력으로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첫댓글 천박사님 몽골 잘 다녀오셨지요?
아~~ 알렉산드리아! 내가 참으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우리 갈때는 빠지더니 이번엔 가는군요.. 쬠 심술이 생기네 크흐~~ 이 심술은 요까정요 ^^
나무공주님 잘 지내고 계셨어요?^^
2차 이집트팀은 알렉스 안 갔기에 섭섭하실 듯 합니다.
심술 인정! ㅋㅋ
미모는 여전하신지.. 함께 오셨던 멋진 일행분들도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