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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Ⅰ. 서론
십자군전쟁(The Crusades)은
예루살렘 성지탈환과
동서교회의 재 연합을 목표로 한 서구교회의 원정(遠征)이다.
박해 중에 순교를 미덕으로 생각하던 성도들이
4세기부터는 성지 순례를 열망하게 되었다.
교회는 성지 순례를 공로축척의 한 계기로 인정하기에 이르자
앞을 다투어 성지 순례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1073년부터 성지를 점령한 터키군은
성지를 순례하는 크리스찬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터키군의 횡포를 견제시켜 달라는 호소를
교황 우르반 2세에게 보냈다.
이윽고 교황 우르반Ⅱ세는 1095년 11월 26일
프랑스 동부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회의에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동원을 선포하고 호응을 호소했다.
이 전쟁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쳤다.
교황은 이 거룩한 싸움에서 죽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 호소에 응하는 사람은
감옥의 죄수라도 풀어 주어 군대에 편입시켰고
도처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는 곳마다 설교의 주제는
“성지를 이교도의 손에서 다시 찾자”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는 운둔 수도사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친히 성지를 순례하고
팔레스틴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받는 박해를 눈으로 보고
격분하여 유럽 각지로 다니면서
십자군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놀란 만한 반응을 일으켰다.
Ⅱ. 본론
1. 십자군전쟁의 원인
1) 직접적 원인
콘스탄틴시대부터 행해져 온 성지순례가 경건의 조건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그런데 성지들 중에서도 예루살렘이 가장 성스러운 곳이었다.
이슬람교가 638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성지순례에 별 지장이 없었으나
1071년 셀주크 터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
11세기 말부터 이 성지순례가 크게 방해를 받았다.
그러자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요청을 하고
1095년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결국 예루살렘 전부를 이슬람의 손에서 건지려는 전쟁으로
퍼졌다.
2) 종교적 원인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은
영적이고 세속적인 특별한 권리를 많이 누렸던 수혜자였는데
무엇보다도 십자군 ‘면죄부’는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일소하고
한 사람을 영적으로 무죄한 상태로 회복시킨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교황은 거룩한 싸움에서 죽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여기에 크리스토의 병사로 이교도에 대한 전쟁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로 간주되어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래서 귀족들과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흉악범들도 전쟁에 지원한다면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지 탈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라는
세기적으로 온갖 화제를 남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다.
3) 경제적 원인
제1차 십자군전쟁이 있기 한 세대 혹은 한 세대 이상 앞에
서유럽은 거듭 흉년을 당했다(970-1040).
그리고 1085-1095년에는 경제사정이 극히 침체되었다.
서방 사람들은 경제․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는 가운데
동쪽으로의 진출을 통한 해결을 모색했다.
이태리의 도시들은 성장하여 동부에로 통상의 길을 모색하던 중에
십자군의 진격을 자신들의 통상의 길로 이용하려 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야심에 찬 사람들은
십자군에 참여하여 모험심과 명예욕과 권력욕을 만족시켰다.
4) 정치적 원인
처음부터 비쟌틴제국의 황제들은 모슬렘 셀주크 터키의 공격에
대응키 위하여 서방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내우(내분)외란으로 동쪽 로마제국은 몰락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무서운 적은 셀주크 터키였다.
이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11세기에는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를 포함하는 제국을 만들었다.
바로 이들이 소아시아(터키지역)로 쳐내려왔고
1071년에 노르만족이 남부 이태리를 점령했지만
아르메니아에 있는 비쟌틴군대를 물리쳤다.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즉위하여
콘스탄티노플에 활기를 불어넣고
영토들을 다시 찾기도 했지만
비잔틴제국은 이미 기울어지는 추세에 놓여 있었다.
2. 십자군전쟁의 과정
제1차 십자군전쟁은 1096년에 일어났다.
교황 우르반 2세가 1095년 11월에
프랑스의 끌레르몽 총회에서
설교한 것에 감동되어 일어났던 것이다.
모인 사람들은 크게 감명되어
“하나님이 원하신다.”라고 외쳤고
이 외침이 십자군의 표어가 되었다.
주로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귀족들이 지휘하는
조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1097년 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단시일의 포위 공격 후에 십자군들은 니케야를 점령하였다.
1099년 6월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제1차 십자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압박은 완화되고
예루살렘은 다시 크리스토교도인 주권자의 손에 돌아갔다.
템플기사단과 호스피탈단의 기사들이 조직되어서
순례자들의 보호와 원조를 담당하고
또 이슬람도와의 투쟁에 대비하였다.
제2차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들의 외곽 거점이었던
에데사가 터키족에게 다시 빼앗기자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제2차 십자군 200,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곳곳에서 패배를 당하였으며
예루살렘은 1187년 이집트의 술탄인 살라딘에게 다시 뻬앗겼다.
이에 격분한 교황 그레고리 8세가
십자군 동원령을 내리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그리고 프랑스 필립 2세 아우구스투스가
제3차 십자군(1189-1192)을 동원하였다.
불행하게도 프레데릭은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고
남은 두 나라의 군대는 2년 동안의 공격 끝에
북부 팔레스타인의 아크라를 정복하였을 뿐이다.
이 사이에 출전국이었던
독일과 영국이 상호간의 영토분쟁을 일으켜서
같은편 끼리의 싸움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회유와 협박을 통해서 베네치아인들은 선박 수송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한 우회로를 주선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이 아니라 크리스토교의 형제들이 공격받았고
1204년에는 예루살렘 대신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이후 60년간 비쟌티움 제국에 대해서
“라틴인들”의 적대적인 통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황제, 왕, 제후직과 같은 행운을 차지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대소 귀족들이었다.
제5차 십자군은 주로 소년층으로 구성된 군대였으므로
‘소년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프랑스의 목동 스데반과
독일의 소녀 니콜라스가
불과 수천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도중에 흩어지고
이집트로 출정한 많은 소년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다.
제6차 십자군(1227-1229)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서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관할하고
동시에 성지로 잇는 도로들을 양도받음으로써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스스로 예루살렘 왕으로 자처하였다.
그를 파문하였던 교황 그레고리 9세는 매우 화를 냈으나
유럽에서는 그의 업적을 환영하였으며
그를 가리켜서 ‘예루살렘의 해방자’라고 하였다.
제7차 십자군(1248-1250)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끌었으나 대실패에 그쳤으며
제8차 십자군(1270)도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7차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튜니스에서 열병으로 죽음으로써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뒤늦게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1271-72년 동안 아크레에 진격하여
나사렛을 쟁취한 후 10여년 동안 영향을 끼치고 돌아간다.
이 이후로는 수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십자군 원정에 대한 제의을 했으나 한 사람도 실현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약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갖가지 비화와
많은 문제점만 남긴채 끝이 나고 만다.
이로써 1291년부터 이슬람교도 손에 넘어간 예루살렘은
1947년 이스라엘군에 의하여 탈환되기까지
700년 동안 이교도들에 의해 짓밟히도록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말았다.
3. 십자군 전쟁의 결과
십자군은 서구라파에서
정치적 및 사회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
다수의 기사와 귀족들이 십자군사로서 출정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을 위해 비용을 내기 위해
자기들의 토지를 농민이나 중산계급의 부유시민에게 매각하였으므로 봉건제도는 약체화 하였다.
왕들은 중산계급의 조력에 의해 중앙집권화할 수가 있었다.
중산계급은 독제군주가 통치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민족국가를 즐겼다.
그것으로 인해 실업에 있어서
중요한 안전과 질서가 보존되기 때문이다.
종교상의 성과로서는
교황은 십자군 기간에 교황의 특권을 높히고 증가시켰으나
민족의 정력을 십자군에 주입한 결과
민족감정이란 것이 일어나서 그것이 교황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콘스탄티노플에 라틴계의 왕국이 창건된 것은
동서간의 종교적 저항을 깊게 하였고
동로마제국을 약화시키고 드디어 이것이
1453년에 멸망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군열이 생긴 일로 인해
교황에게 충성한 수도사들의 단체가 부가되었다.
경제상의 결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였다.
제1회 십자군이 성공하자
곧 베니스를 주도자로 하는 이태리의 도시들은
근동과의 교역을 시작하였다.
견직과 향료와 약미와 같은 사치성의 산물이 근동에서 수입 된
것은 문예부흥시대의 문예보호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근동에서 보아두었던 사치품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회교도의 지배로부터 영구히 해방하는 일에는 십자군이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십자군은 많은 복지를 서구라파에 가져왔고
서구라파의 문화적 지방근성을 소산시키는데 힘이 되었다.
아라비아의 지식과 과학과 문명이 서구라파에 도입되어
스콜라 학자는
이것을 연구하여 이 지식을
크리스토교의 계시와 융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Ⅲ. 결론
십자군이란 11세기 말에서 13세기말 사이에
서방의 크리스토교인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되찾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을 말한다.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정은 처음부터 귀족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청빈 운동 속에도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1187년 예루살렘이 다시금 함락된 이후에 확신감에 찼던
청빈 운동 참여자들에 의해서
크리스토교에 새로운 길을 열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성지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은 실제로는
아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농민 출신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비록 십자군 전쟁으로 성지탈환이라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은 예상보다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에
중세의 봉건제도에 기초한 유럽의 정치와 교권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십자군전쟁은
곧바로 십자군전쟁의 결과에 의해서
중세의
임금
교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개혁으로
끝맺음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십자군전쟁으로 인해서 당장에는 교권이 확립되고 더욱 공고히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는 전쟁 이후로 로마교황청에 순종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1309년에는 프랑스의 아비뇽에 교황청을 세우고
70여 년 동안 독자적인 교회를 운영하기도 하였던 점을 감안할 때에
십자군전쟁은 또 다른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확보된 막강한 교권을 가지고서
로마교황청은 극도의 사치를 누리기 시작했다.
소위 르네상스 교황이 등장하여서 아름다운 성전을 신축하고
치장하는 등 유럽의 크리스토교는
내부적인 부패를 막을 길이 없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서서히 치닫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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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회교도에 빼앗긴 성지 엘루살렘을 탈환하기위하여 유럽그리스도 교회가 주도한 수차레의 원정 전쟁 (1095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전쟁은 1456년까지 약361년 동안 계속) 십자군(라틴어: croisade)은 역사적으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보면 십자군 원정은 성전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전쟁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배경
1071년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하자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 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당함.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기 황제가 되어서 1086년 안티오크 베데스다등의 도시가 이슬람에 빼앗기자 서방에 원군을 요청 하여 교황이 민중과 그리스도교회를 선동하여 전쟁 발발.
3.경과
이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와 문명의 충돌로써 서양의 중세사에 가장큰 의미를 가진 전쟁이며 이 전쟁의 배경에는 교황과유럽영주들의 잇속과 이해타산이 엉켜 원래목적인 성지탈환은 뒷전이고 전리품 노획과 약탈이 우선된 전쟁이였음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이슬람교도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했고, 포로의학대 행위로 인해 이슬람을 뭉치게 했고 결과 는 결국 성지회복은 실패했고, 십자군은 타락하여 중세 상인들의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으로 전락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독단적인 의도가 강해 이루어진 전쟁이며이를통해 교황의 권위 신분사회의 후퇴 중세사회 영주의 몰락을 초래하게되었음.
4. 원인
3세기 이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순례 여행이 안전하고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양쪽의 상황이 모두 안정되어 있어야 했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하킴은 11세기 초에 선임자들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자 및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성지 순례 여행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1050년 무렵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면서 순례 여행은 더욱더 어려워졌다.따라서 유럽은 성지를 이슬람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였고 당시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권의 공격에 시달렸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잃을 지경이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탄압한다는 과장된 주장을 하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선동에 설득되었다. 곧 전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약 200여 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5.전개과정
제1차 원정
1096년~1099년. 셀주크 튀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호소에 응한 서유럽의 기사들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를 공격해 학살, 약탈 등을 저지르면서 예루살렘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이슬람교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들 몇 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제2차 원정
1147년~1148년. 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 기독교도와 군소의 도시 등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교 측이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드 2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어떻게든 간신히 팔레스타인까지 도착했지만 다마스커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차 원정
1189년~1192년. 1187년에 이슬람교 세계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만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에 의해 점령, 탈환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낙마해 익사했다. 그리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악콘을 탈환하였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귀국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악콘을 확보한 것으로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
1202년~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아니고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도항비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료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 다음에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 라틴 제국이 건국하였다.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을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동로마제국은 57년 후인 1261년에 부활한다). 알비 십자군 어린이 십자군 어린이 십자군은 10대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십자군에 가담한 광신적인 종교현상을 말한다. 스테판이라는 10대 소년이 우두머리였으며, 출애굽 설화에 나오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주장과는 달리, 유럽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수장되고 말았다. 이들중 노예로 팔린 소년들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관용으로 해방되었다.
제5차 원정
1218년~1221년. 악콘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머나먼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대군을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 전 국토를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제6차 원정
1228년~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종종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그레고리오 9세는 교회로부터 파문된 채로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것을 구실 삼아,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황제군에게 격퇴되어 1230년에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풀어주었다.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제7차 원정
1248년~1249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000명 남짓한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정을 하게 되지만, 아유비드 왕조의 살라딘 2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제8차 원정
1270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재차 출병, 아프리카의 니스를 목표로 삼았지만, 도중에 서거하고 만다.
7.결과 및 실패의 원인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걸출한 지도자였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심지어는 적인 소년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 인해 야기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동로마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 정교회 교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역사 최초의 분열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8.십자군 전쟁이 끼친 영향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9. 교황권이 쇠퇴된 이유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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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유일한 성공-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
1096년 각 지방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계획했던 기사군이 조직되기도 앞에
먼저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자,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식량을 빼앗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라인 강 근처에서는 유대 인들을 학대하여 비난과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일부 부대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기도 앞에 헝가리인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농민군(민중 십자군, 군중 십자군이라고도 함)도 목적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슬람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십자군은 1096년 가을에서야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1차 십자군에는 위그 드 베르망두아(프랑스 왕 필립 1세의 동생)가 총사령관으로 지휘를 맡고,
툴루즈(프랑스 미디피레네 지방)의 레몽 백작,
로렌(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고드 프루아 드 부용 공작,
부용의 동생 보두앵 백작,
플랑드르(중세에 북해 연안의 저지대 남서부에 있던 공국.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로 나누어짐)의 로베르와 같은 유명한 기사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1097년 니케아(소아시아 북쪽에 있는 도시)를
점령한 다음,
안티오크(지금의 터키 남부 하타이 주의 중심 도시)를 차지 하기 위해 시리아 지방을 향해 전진했다.
그렇지만 이슬람 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병력을 잃었다.
비잔티움 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십자군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하였다.
심한 더위와 질병,
굶주림 등으로 고생하던 십자군은
내부 세력의 갈등까지 겹치는 바람에
1099년 7월에서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십자군은 6주 동안 싸우면서
이슬람 군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승리한 십자군은 예루살렘-라틴 왕국(1099~1187년)을 건설하였고, 보드 앵 백작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
요한 기사단 등 기사 수도회를 설립하여 성지를 방어하게 하였다.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은
십자군 전쟁 사상 가장 비조직적이고 잔인했으며,
7차에 걸친 전쟁 중 크리스토교 세력이 승리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1144년 이슬람군이 에데사(예루살렘 동북방에 위치)를 점령하자, 다시 제2차 십자군(1147~1149년)이 결성되었다.
2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등이 참여하여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이 적들에게 속아 부대에서 빠져 나가는 일이 생기고, 내분까지 겹쳤다.
결국 2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그 뒤 십자군이 쉽게 출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라는 이슬람 국가를 세운 사람)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공격하였다.
뒤이어 그는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들은 서방 세계에서는 다시 제3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3차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붉은 턱수염 때문에 ‘붉은 수염왕’이라 불림),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영국 국왕 리처드 1세(‘사자왕’이라 불림)가 이끄는
군대가 참전하였다 하여 ‘왕들의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왕들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가장 먼저 출발한 프리드리히 1세는 허무하게도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강에 빠져 죽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연합으로 예루살렘 포위 작전을 진행하던 중 불화가 생겨 먼저 귀국해 버렸다.
혼자 남은 리처드 1세는 끝까지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그도 살라딘과 크리스토교도의 성지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협정만 맺고 귀국하였다.
1198년 새로 교황이 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십자군 결성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빠지고, 주로 프랑스 기사단을 중심으로 제4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202년 베네치아에서 집결한 십자군은 바다 건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십자군의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밀린 선박 이용료를 빌미로,
달마티아(크로아티아 남서부,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지방) 연안을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십자군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같은 크리스토교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을 파면(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직무나 직업을 그만두게 함)했다.
그러자 십자군들은 동로마에서 추방당한 아이작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의 제안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교회의 유물과 보물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을 분할하여 라틴 제국(1204~1261년)을
세워 볼드윈(3차 십자군 전쟁 때 큰 활약을 펼침)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의 테오도루스 1세는 다른 비잔티움 지도자들과 함께, 니케아(아나톨리아 남동쪽으로 64km 떨어진 곳.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로 후퇴하여 니케아 제국을 세웠다.
니케아 제국은 1261년에야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다.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1212년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수많은 소년·소녀가 십자군을 조직하여 성지 회복에 나섰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북프랑스의 양치는 소년 에티엔의 이야기를 듣고 모여든 어린이 십자군들은 7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를 향했다.
그들이 항해하는 도중에 2척의 배가 난파되어,
그 배에 타고 있던 어린이 십자군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 일부는 마르세유의 못된 상인에게 속아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다행히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 지도자가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700명의 어린이 십자군 노예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십자군은 제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적인 열정보다는 정치적·경제적인 욕심이 앞섰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이슬람 지역으로 원정을 나갔지만,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을 공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제5차 십자군 전쟁(1228~1229년)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헝가리 왕의 지휘 아래 이슬람의 근거지인 이집트로 가 다미에타(지금의 지중해 연안의 나일 삼각주에 있는 두미아트의 주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바꾸자는 이슬람 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카이로로 진격하다 실패하였다.
제6차 십자군 전쟁(1248~1254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1229년 예루살렘을 양보 받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제7차 십자군 전쟁(1270~1272년)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주도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이슬람 군과 싸우다 크게 패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엄청난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추락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시 전쟁에 나섰다.
그는 튀니지로 원정하여 시리아까지 진출했지만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결국 제7차 원정도 무산되고 말았다.
1291년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크리스토교인들의
도시 아콘이 이집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지를 되찾기 위해 출전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봉건 영주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국왕들은 권력이 강해지고 영지를 확장하게 되었다.
결국 서유럽의 각 나라가 중앙 집권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 십자군 전쟁 이후 동쪽 무역의 주축이 되었던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성장 발전하게 되었고,
지중해 무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중해 무역권은 뒤를 이은 북유럽,
내륙 무역권 형성과 함께 발전하여
농업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을 무너트렸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된 서유럽 사회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잔티움 문화의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미술, 이슬람의 철학·의학·화학·수학·천문학 등이 전해지면서
서유럽 문화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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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이래 급격히 세력을 확대한
이슬람교도 투르크족이 비잔틴 제국을 압박하고
성지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유럽 군주와 제후들을 향해 십자군을 호소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기사들은 교황의 열변에 감동하여 제1차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1096년에 조직된 제1차 십자군은
플랑드르 백이나 툴루즈 백과 같은 프랑스의 대제후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들은 1099년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이것은 이후 여덟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십자군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전쟁이었다.
제1차 십자군 이후에도
예루살렘 왕국이 투르크족의 지속적인 위협을 받자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1147년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 후 1187년에 다시 예루살렘이 다시 투르크족에게 넘어가자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189년의 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필립 오귀스트를 비롯해 영국왕과 독일 황제까지 가담한
대규모 부대였지만
내분으로 인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 황제는 도중에 강에서 익사하고,
프랑스의 필립 오귀스트는 곧 귀국했으며,
영국의 리처드 1세는 무력함을 깨닫고 이슬람과 순례자들의 예루살렘 출입을 보장한다는 협상만을 맺고 돌아섰다.
1202년의 제4차 십자군은
플랑드르 백작을 위시한 북프랑스의 기사들이 주로 참가하였는데,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원래 목적인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얽힌 베네치아 상인들과 협력해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고,
그곳에 라틴 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라틴 제국은 1204년에 비잔틴 황제를 퇴위시키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옹립하여 건설되었지만,
1261년 멸망하였다.
이 전쟁으로 베네치아 상인은 비잔틴 상인을 누르고 동쪽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비잔틴 황제로서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돼버렸다.
1212년 프랑스와 독일의 소년, 소녀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 마르세유에서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 사건 역시
십자군 전쟁이 가져온 비극 중 하나였다.
1217년에는 제5차 십자군 전쟁이 조직되어 이집트의 다이엣타를 공격하였다.
프랑스의 성 루이 왕은 제7차(1248년)와
제8차 십자군(1270년)에 참가해
한때 탈환되었던 다미에타를 재점령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그러나 루이 왕 자신이 포로가 되는 바람에
엄청난 몸값을 치렀고, 결국 1270년 튀니스에서 병사하였다.
서방의 크리스토교 세력이 모두 합심해
동쪽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벌인 십자군 전쟁은
결국 서쪽의 패배로 끝났다.
기원전 4세기 서쪽과 동쪽이 충돌했던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서쪽이 승리했지만 13세기에는 동쪽이 승리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총 8회에 걸쳐 200여 년 동안 진행되면서
프랑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먼저 종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전쟁이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써 교황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될 때
절정을 이루었던 교황의 권위가
십자군 실패와 함께 땅에 떨어진 것이다.
반면 정치적인 측면에서 왕권이 오히려 크게 강화되었다.
교황권의 약화와 함께 십자군에 종군했던
기사계급들이 몰락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 왕권이 성장하고
그로 인해 국민국가의 발전도 앞당겨 졌다.
경제적인 변화 또한 중요하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재개됨으로써
상업이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이슬람과 비잔틴의 새로운 문화가 서유럽에 유입되어
중세 문화가 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새로운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세는 서서히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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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동-서유럽 관계 역사상 최악의 막장 드라마
가장 추악한 십자군
가라는, 그리고 가겠다던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하게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희대의 막장 전쟁. 전쟁 기간은 1202년부터 1204년까지 약 2년.
흔히 제4차 십자군 자체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결성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베네치아 공화국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4차 십자군의 전개는 우연에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마어마한 연쇄작용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그 연쇄작용이라는 것은 일단은 같은 크리스토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4차 십자군을 결성한 프랑스 제후들의 군대를 중동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십자군에 협조하지 않기로 살라딘의 후계자 알 아딜과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즉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하기 싫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인답게 잔머리를 굴려서, 십자군에게 성지까지 실어다 주는 뱃삯을 요구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85세의 눈 먼 늙은 공작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들을 선동하며 당초의 약속과 달리 실제로 집결한 제후들이 적어 돈이 거의 없던 제후들은 결국 뱃삯을 몸빵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뱃삯'은 십자군 출정 1년 전부터 합의되어 있던 것이고,
십자군에 참여했던 제노바나 피사 역시 뱃삯을 받았던 사례가 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과도한 수준으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군사 35,000명과 말 5,000마리를 태울 수 있도록- 당시 돈으로 은화 8만 4천 마르크였다.
문제는 베네치아 공국은 이 대규모의 군대 운송을 준비하느라고
1년동안 돈이 되는 일들을 안하고 이것에만 몰빵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군대가 출발할 시기가 되자,
다들 베네치아로 모여들어서 출발하지 않고
각자가 편한 항구에서 제각기 출발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러니 베네치아 측에서는 준비했던 만큼의 운송량만큼의 군대가 모여들지 않으니,
그만큼 운송비를 받을 수 없었고,
이것은 베네치아의 경제에 큰 타격이 될 판이었다.
비교하자면,
어찌되었건 예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병력으로 인해 출항이 어려워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금' 지불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십자군에게 헝가리 왕국에게 빼앗겼던 아드리아 해의 식민도시 자라 시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은 독실한 크리스토인이고,
같은 크리스토인을 공격하는 데에는 많이 망설였지만,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군후들이 모였는데 '돈이 없어' 출발도 못한 채 돌아가는 것은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출정하자'는 지도부의 결정에 출정을 결정했다.
애초부터 강력한 방어 태세는 갖추지 못했던 자라는 사흘도 걸리지 않고 십자군에게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헝가리 왕은 교황에게 충성하는 영토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제4차 십자군은 막장테크를 탄 것이다.
흔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것 때문에 파문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제4차 십자군이 파문당한 것은
같은 크리스토교 국가인 헝가리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이미 4차 십자군의 막장성을 제대로 느낀 프랑스 출신의 시몬 드 몽포르란 양반이 자라 공격 이후
"이런 건 주님의 뜻에 반하는 거다!
이딴 짓 때려 치우고 딴 살림 차릴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나서서 프랑스로 돌아간 뒤
알비 십자군에 참가도 하고,
아라곤 왕국 국왕의 목도 따고,
잉글랜드에 자기 아들도 보내면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
하지만 한 번 약탈과 재물의 맛을 본 십자군은
성지 따위는 잊어버리고
동로마 제국의 제위계승전에 용병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점령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도시 자다르를 털어봤자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에게 빌렸던 돈을 지급할 수 없었다.
그 돈을 지급할 만한 도시는 단 한 군데 콘스탄티노플밖에 없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삼촌에 의해 쫓겨난 동로마 제국의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를 요청,
이를 받아들인 십자군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이때 그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함락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이 많을 텐데,
이 과정이 좀 막장이었다.
콘스탄티노플로 갔지만 한 줌 정도밖에 안 되는 십자군의 규모로 함락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시 십자군은 베네치아군과
다른 십자군의 두 파벌로 나뉘어 지휘했는데,
금각만 안쪽을 공격한 베네치아군은 성벽을 넘어 시내로 들어섰으나
바랑기안 친위대를 앞세운 동로마의 반격에
배 안으로 쫓겨들어가는 추태를 보였고,
육지 쪽 성벽을 공격하려던 십자군은 오히려 맞싸우러 뛰쳐나온 훨씬 많은 동로마군에게 역관광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지속된 권력 투쟁과 왕위 찬탈로 제국 내부의 분위기와 여론은 막장 상태였고 십자군을 적당히 손봐줬다고 생각한 알렉시오스 3세가 군대를 성 안으로 불러들였는데, 이걸 황제가 무능해서 패주한다고 착각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황제를 쫓아내버리고 알렉시오스 4세를 맞이해버렸다.
그 결과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4세(1203~1204)로 즉위하였으나, 애초에 그가 약속한 막대한 보상 자체가 무리였으며
(보상금은 은화 8만 4천마르크였다) 가톨릭 개종 강요와
보상금 징수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분노하여
봉기할 지경에 이르자 반대파에게 끔살당했다.
정권을 장악한 시민들은
"너네에게 보상 준다는 황제가 죽었으니 보상은 없다"고
십자군들을 문전박대했고,
이에 십자군은 꼭지가 돌아서
알렉시오스 4세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기어코 대가를 받아냈다.
사실 아직도 베네치아에 가면 이때 약탈한 보물들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일단 멸망했으며,
그 남은 자리에 라틴 제국(1204~1261)과
몇 개의 부속국가가 들어섰다.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은 각지로 흩어져 망명국가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플 탈환을 위해 진력했으며
결국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동로마 제국은 다시 부활하였지만,
이렇게 국력을 소모해버린 그들은
14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수도 집중도가 높았던 동로마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한 국력 손실을 끝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동유럽(발칸 반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아낼 지역 강국이 사라졌으며, 이 때문에 중부 유럽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까지 오스만 제국이 거침없이 확장할 수 있게 된 것.
결국 4차 십자군이 터지기 직전의 동로마는 마누엘 콤네노스 치하 중흥기를 구가하고, 국력의 최전성기는 지났음에도 여전히 동방 최강 단일 국가로서의 위세는 유지하고 있었고
이미 수 차례나 동로마가 위기에서 회복해내고
동방에 대한 방어선의 역할을 계속해 온 것을 고려한다면
결국 십자군의 행동은 팀킬이었다.
근동의 이슬람 세력이 거대해지면 제일 먼저 노리는 목표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것은 예견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제국이건,
이슬람을 재통일한 셀주크 왕조건 이슬람 세력을 통일하면 다음 목표는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음은
4차 십자군 시대 당시에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 세기 전 프랑크 왕국 시대에도 이슬람의 침입을 격퇴한 동로마 제국에 축하사절을 보냈고, 당장 십자군 자체가 셀주크 왕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동로마 제국이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위기감을 느끼고 시작한 것이다.
여하튼 십자군이 파문 받을 짓인 헝가리 침공에 이어서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크게 분노했다. 거기다 교황 특사가 십자군이 성지까지 향하기로 했던 맹세를 자의로 방면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리스 교회는 가톨릭에서 오로지 지옥의 본보기와 암흑세계의 소행을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향이 강했던 바티칸은 곧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거기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중한 보물들을 약탈해서 일부를 교황에게도 진상했을 뿐 아니라 가톨릭과 갈라선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에
가톨릭 국가인 라틴 제국(라티노 크라티아)을 세워 명목상
로마 교황의 체면을 높여주었다.
제4차 십자군은 도덕적으로는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의 큰 수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로마 교회의 세력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인노첸치오 3세는 "콘스탄티노플이 좀 더 빨리 라틴인의 손에 들어왔다면 성지(聖地)가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1187년 이래 계속 몰락하고 있던 중동의 십자군 국가들은 제4차 십자군으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약체화된 이들 세력은 이미 무슬림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중개무역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입장에서는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 더 득이었다.
따라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은
우트르메르(중동 십자군 국가)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편 이 원정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업적 라이벌이었던
동로마 제국이 몰락함과 동시에 이들이 동방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원정기간은 1217년에서 1221년의 4년간.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제후들의 4차 십자군에 실망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하지만 준비 와중에 인노첸시오 3세가 선종하면서 새로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본격적으로 원정을 준비해 각국의 지원을 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이에 헝가리 왕 안드라슈 2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키프로스 왕 위그,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후손)이 참가했다.
당시 독일 왕으로 몇 년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 2세는 참가를 수 차례 재촉 받았으나 장기간의 해외 원정을 꺼려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을 사령관으로 삼아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원정은 지지부진하여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었는데,
이슬람 측이 미리 겁 먹고 도시를 비우고 허물어버린 탓이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설레발이긴 했지만
십자군 역시 성벽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해서
방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18년 이에 실망한 제후와 왕들이 하나둘씩 귀환해버렸고 이에 제노바 함대의 제안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Damietta)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십자군은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전력 소모가 심해 더 이상 공세로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들은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휘하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십자군은 그래도 지원군에 힘입어 공세로 전환하여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공격을 고집한 교황 사절인 페라기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시점쯤에는 동방의 수수께끼의 크리스토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져있었으나
그 정체는 사실 몽골군이었다.
원정 기간은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협상단 겸 상단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가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1220~1250)에게 원정을 재촉했으나
황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려고 하지 않자
분노한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당하기 전에 이미 원정에 나섰으나,
항해 도중 병에 걸려 일시 귀국하자 파문을 당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2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겨우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미리 건조했던 함선들을 이끌고 이슬람 지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살라딘의 조카)과 여러 번 교섭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정이었으나
당연히 교황이 납득할 리는 없었고,
술탄 알 카밀도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미 알 카밀에 대항해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형제 알 아시라프는 물론,
이슬람 내에서도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큰 저항이 일었으며,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한 교황 측에서도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분노했다.
당시 교황측은 이슬람 쪽이 약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투를 하면 옛 예루살렘 왕국령 전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협정 조건에서 이미 성벽이 존재하지 않던 예루살렘에 새로 축성하지 않는다는 조약도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탈환해봤자 지키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내 교황 측 군대에게 공격을 받으나 돌아와서 이를 간단히 격퇴한다.
결국 교황은 다시 한 번 제후들을 선동해서 십자군을 재파병했다.
나바라왕 테오발트 1세, 영국왕 헨리 3세의 남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 등이 이에 호응해서 갔으나, 재원정군의 규모는 소규모였다.
그들이 도착했던 시기는 프리드리히 2세와 아이유브 왕조 간 휴전 협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는 하지 않았고
성지 순례와 아스칼론 쪽에 축성을 한 뒤 다시 돌아왔다.
결국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이후에도 5년간(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은 크리스토교 세력의 영향권에 드는 등
이 6차는 십자군 중 2번째(평화적으로 첫째)이자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원정 기간은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약 6년 간으로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었다.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제국의 군대에 점령당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와 호라즘 연합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넘어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켜 친동생들인 앙주 백작 샤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푸아투 백작 알퐁스, 성전 기사단 등과 함께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가는 길목인 만수라(Mansura)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바이바르스(Baibars)의 작전과 나일 강의 홍수에 말려들어 보급이 끊겨버렸고,
고립된 십자군은 괴멸당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9세는 포로가 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그 와중에 친동생 로베르가 전사하는 불운도 겪었다.
여담이지만 루이 9세는 만일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하면 로베르를 이집트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다고 한다.
여하간 석방된 루이 9세는
남은 원정군의 몸값을 지불하느라고
꼬박 4년 동안이나 중동에 머물렀고,
이 일이 끝난 뒤에야 겨우 프랑스로 귀국했다.
하지만 승리자 아이유브 왕조의 끝 역시 불행했다.
그 해(1250)에 살라딘 2세는 살해되고
아이바크(Aybak)가 맘루크 왕조(1250~1517)를 열었으며,
만수라 전투를 지휘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바이바르스는 10년 후에 술탄이 된다.
13세기는 몽골 제국의 시대였고,
호라즘 제국을 박살내고 달려오는 프레스터 존 몽골 제국은 유럽 세력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
안티오크 공국은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
몽골 편을 들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몽골군이 패배하고 물러나자
완전히 궁지에 몰렸고,
바이바르스는 126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로 안티오크를 함락시킨 뒤 대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중동의 대도시였고,
아시아(중동) 교회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크(안티오키아)는 가뜩이나 십자군에게 점령되던 순간부터 꾸준한 하락세였다가
이때 결정타를 입어 지금까지 시골도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자극 받은 루이 9세는 1270년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자신의 아들 필리프 3세와 함께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앙주의 샤를)의 제안을 쫓아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지원군으로 샤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고,
사위인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의 군대 등이 합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이처럼 2차례나 십자군 원정에 직접 가담하고,
2번째 원정에서는 왕 자신이 병사까지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즉각적인 보답을 하여 루이 9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루이 9세는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한편 진중에서 필리프 3세는 왕위를 이어받고
대관식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고,
또 나바라 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다.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크리스토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목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오고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는 뒷북을 친 격이 되었다.
늦게 도착한 이들 지원군들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과 함께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아콘/아코)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 왕 위그 3세가 해군 지원을 해주었다.
이들은 또한 일 칸국(1258~1353)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1271년 연합군은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술탄은 암살자(어새신)를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에드워드는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상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이 후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 등을 잃었다(1289).
또한 십자군을 지원한 일 칸국의 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함락시키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했으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결국 십자군은 쿠칸에 이어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1291)당하면서 모든 거점을 잃게 되었고,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1차 십자군이 끝난 직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가 일으킨 1107~1110년까지의
장거리 원정이다.
자그마치 노르웨이에서 중동 팔레스타인까지 원정을 했는데
바이킹의 원정에 버금가는 대원정이었다.
시구르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최초의 국왕급 인물이다.
1107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는 5,000명의 병력과 60척의 갤리를 타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환대 속에 겨울을 보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게 된다. 와중에 해적의 습격을 격퇴하고 오히려 해적들을 약탈하는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주변의 이슬람 소국들을 습격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한 뒤 보물들을 약탈하고
개종하지 않는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노르웨이 군은 1109년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국왕 루지에로 2세의 환대를 받은 뒤 키프로스를 거쳐
1110년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예루살렘왕 보두앵 1세의 따듯한 환대를 받은 뒤 예루살렘 왕국 군과 합세하여 시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성 십자가의 파편을 받는 등 많은 선물과 보물을 받았다. 이후 육로로 귀환을 선택,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면회했다.
이때 많은 부하들이
바랑기안 친위대로 복무하길 원해 남겨졌고
해군과 보물들을 황제에게 바친 대가로 튼튼한 말을 얻어
불가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을 주유하며 육로로 북상했다.
그 와중에 시구르드 1세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로타르 3세와 면회하기도 하였고,
이후 덴마크에 도착해서 국왕 닐스의 도움을 얻어 배를 빌려
1113년, 6년만에 노르웨이로 귀환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을 크리스토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 수만 명의 소년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성지 탈환의 기치를 걸고 배를 타고 출발하였으나,
그 후 오랫동안 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 후 이 계획 자체가 어른 사기꾼들이 꾸며낸 낚시로 밝혀졌는데, 배를 모집한 상인들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 물론 성지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다. 이들 중 불과 수십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년 십자군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니콜라스와 프랑스의 에티엔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적계시에 의한 십자군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니콜라스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어른들의 영적 불결함에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계시대로 천국이 아이들에게 열려있듯이
성지도 아이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는 또다른 사적계시를 받아,
모세의 기적처럼 지중해가 갈라져서
걸어서 성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대부분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교황의 명령에 의해 남은 무리의 대부분이 고향으로 반송되었다.
게다가 약속한 지중해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은 갈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상당수의 무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니콜라스와 남은 극렬 빠돌이들이 배를 얻어타고 성지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노예 상인의 떡밥에 물려서 노예가 되었다.
그후 니콜라스의 아버지는 자녀가 돌아오지 못하여 분노한 동네의 다른 부모들에게 구타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프랑스의 에티엔은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어느날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프랑스 왕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그게 끝이다.
에티엔은 자신의 편지가 필리프에게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해산되었으며 "이게 다야?" 하며 실망한 추총자들은 알비파 십자군에 참전하는 정도로 끝났다.
사실 소년 십자군의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분의 영을 받은 용맹한 기사가..." 하는 식의 감상적 기록을 남긴 수도자들의 기록인지라 자료로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이고깽 판타지의 중세적 선조 그러다보니 양치기 소년으로 위장한 노예상의 부하가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마르세유까지 소년 소녀들을 낚아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유명한 이야기인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추측된다.
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십자군은 남프랑스를 깡그리 엎어서 알비파의 씨를 말려버렸다(...)
첫 공격 대상이 된 베지에(Béziers) 시를 점령한 후,
병사 하나가 도시 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의문을 던지자,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이렇게 베지에 시의 학살로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 후의 알비 십자군은 교황과 교황특사란 작자가 단단히 미친 놈이라는 것을 뒤늦게마나 깨닫고 무조건 학살이 아닌 항복 권유와 개종을 목에다 칼을 들이댄 채 권유했다.
물론 그래봤자 자기들도 미친 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개종을 거부하면 얄짤없이 화형시켰다.(...)
카타리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크리스토교보다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를 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는 육체라는 감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천시받았으며 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사실 항문을 통한 섹스를 뜻하는 BUGGER도 알비파의 한 분파에서 나왔다. 다빈치 코드를 인용하여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도 가르친 현대적인 계몽운동가라고 주장도 있지만,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을 가르친 건 "니들이 왜 임신을 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이 감옥 공장아!" 하며 여자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카타리파는 남프랑스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고, 후에는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카타리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경을 엉터리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 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아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툴루즈의 카타리파 영주들[49]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1213년의 뮈레 전투(Battle of Muret)다.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비교도 안 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다(레몽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였다.
베지에 시의 학살과 뮈레 전투의 여파로 1215년 즈음 십자군은 남부 프랑스를 거의 평정하지만,
알비파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전향한 척 했던 알비파는 레몽 백작의 아들(툴루즈의 레몽 7세) 지휘 아래 다시 봉기하여 툴루즈를 되찾았다.
1218년엔 십자군의 리더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공성전에서 전사하기까지 한다.
결국 알비 십자군은 십수 년의 악전고투 끝에 1245년에야
남부 프랑스를 완전히 평정하고 카타리파는 멸망했다.
어쩌면 십자군 전쟁의 진주인공들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수백년간의 전쟁. 엘 시드 등이 활약했다. 아라곤, 카스티야-레온, 포르투갈, 나바라 등등의 국가가 참가했으며 결국 아라곤과 카스티야-레온의 동군연합으로 설립된 스페인이 그라나다까지 쓸어버리고 국토회복운동을 완료한다. 보통 현대의 시점에서는 십자군에 포함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토회복운동에 종군하는 것도 십자군과 대등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때 산티아고 기사단이나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맹활약했다.
동유럽의 프로이센 일대(현재의 폴란드 북부)에 잔존하고 있던 이교도를 상대로 한 토벌 겸 개척전쟁. 주로 튜튼 기사단이 싸웠다.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한 후 기사단령을 세웠고, 이후 전쟁, 영토 확장, 무역 등으로 부흥하였다. 14세기의 전성기 무렵에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소규모 영지, 프로이센 전체, 리투아니아 일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대부분을 점유한 발트 해의 강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기사단을 경계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동군연합을 결성하였고, 이후 이들의 연합군에게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무참히 박살[56]나며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것은 튜튼 기사단국 참조.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작센,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등이 주축이 되어 스웨덴 북부의 사미족, 핀란드, 독일 북부와 엘베강 동부, 폴란드 서부와 북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를 둘러싼 지역을 공격한 십자군을 말한다. 발트 십자군으로도 부르며 동방 십자군이 포함되기도 한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1193년 북방 지역의 이교도를 공격하라고 촉구한 것이 공식적인 시작이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성전을 명분으로 한 공격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있던 슬라브족을 동방식민운동, 웬드 십자군 등의 이름으로 공격해 정복했고, 핀란드에 살던 핀족은 1154년에서 1249년 또는 1293년까지 거의 100년이나 스웨덴의 공격을 받고 정복당한다. 튜튼 기사단은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드 1세'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북부의 프루센을 공격하여 정복했고, 1230년에 튜튼 기사단국을 건국한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은 1193년에서 1227년까지 리보니아인, 에스토니아인을 공격해 정복했고, 기사단령과 여러 주교령을 세웠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국가들도 이 지역을 개종이란 명분으로 자주 침략하였다. 그 와중에 가톨릭 세력과 정교회 세력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여 팽창함에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한 전쟁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6년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발칸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뭉친 십자군 연합군을 대파하였다. 물론 그 후의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전투도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십자군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59], 경우에 따라서는 2차 빈 포위를 계기로 결성된 신성동맹이 벌인 '대(大) 투르크 전쟁(1683~1699)' 까지도 십자군으로 보기도 한다.
얀 후스의 사상을 따르는 보헤미아의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지기스문트 황제와 교황 마르티노 5세가 5차례에 걸쳐(1420∼1431) 보낸 십자군. 후스 전쟁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황제와 교황은 후스파를 몰아내고 헝가리까지 아울러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는 야망을 품었던 모양이지만,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에게 십자군은 처참하게 털렸고 후스파는 보헤미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모라비아 등지까지 진격하게 된다. 얀 지슈카의 사망 이후에야 전장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436년 프라하 조약에서 보헤미아에서 후스파를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교황과 황제와 기사들의 십자군이 조잡한 화약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민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것은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 중 하나였다.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 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와 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60]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노보고르트 공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박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몰아낸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나... 싶었지만 십자군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4차 십자군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년간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제로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고,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 같은 내부의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크리스토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순례자들에게 순례세금을 물리자 아예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한편 몽골군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던 몇몇 몽골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군이 처발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는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과 맞물려서 유럽 인구를 급격하게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자연적으로 농노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파는 십자군 전쟁의 병크로 실추된 교황권에 맞물려서 유럽 구성원의 머릿속에 '개인의 욕구, 권리' 등에 대한 인식들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어
결과적으로 중세가 끝나는 결과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