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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9)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남강수계) ② 산청-(2)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재(再) 출행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산청(山淸)
산청군(山淸郡) 생초(면)에서, 함양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강천’과 지리산 심원계곡과 뱀사골계곡에서 흘러내려온 ‘임천’이 합류하여 ‘경호강(鏡湖江)’을 이루어 동진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산청(山淸)은 함양의 바로 인접한 경호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산청의 서쪽은 함양군이고, 동쪽은 합천군과 의령군이며, 남쪽은 진주시와 하동군이 있다. 그리고 북쪽은 거창군과 접하고 있다. 산청군(山靑郡)은 ‘경호강’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산청읍(山淸邑), 차황면(車黃面), 오부면(梧釜面), 생초면(生草面), 신안면(新安面), 생비량면(生比良面), 신등면(新等面)에 위치하고, 그 서쪽에는 금서면(今西面), 삼장면(三壯面), 시천면(矢川面), 단성면(丹城面)이 있다.
산청의 인물
문익점(文益漸), 목화씨 전래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은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강성현(江城縣, 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에서 남평 문씨 충정공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익점은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이라고 지었는데, 그 의미는 첫째 나라가 융성하지 못함을 걱정하며, 둘째 성리학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셋째는 자신이 학문을 통해 도(道)를 이루지 못한 세 가지 근심걱정을 뜻한다.
효행에 있어서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그는 모친상을 당했을 때, 왜군이 남해안 일대를 침입하는 상황에서도 상복을 입고 묘를 지키며 3년상을 지냈다. 왜장이 이를 보고 감탄하여 나무를 켜서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글자를 써 놓고 가니, 그 고을까지 온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휘사(指揮使)로 삼남지방에 내려온 이성계 장군은 선생이 지키는 묘로 조문(弔文)을 하고, 3년상을 지킨 문익점의 효를 표창할 것을 우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1383(우왕 9),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부르고 '삼우당효자비'를 세웠다.
33세에 고려의 사신으로 원(元)나라에 갔다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계획에 동조하라는 원나라 황제의 강압적인 조용에,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 두 군주가 없다.”는 말로 거절하며 공민왕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이에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받아 운남서 교지국에서 귀양살이를 살다가 그곳에서 헐벗은 백성을 떠올리며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종자를 붓대롱에 넣어 가지고 귀국하였다.
고향 산청으로 돌아와 진주 정씨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 종자를 심어 기적적으로 목화재배를 성공하게 되고 순식간에 전국에 보급되어 농가 경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문화에 크게 향상시켰다. 그 덕분에 추운 겨울 백성들이 따뜻한 솜옷을 입을 수 있었다. 훗날 세종대왕이 문익점에게 “부민후(部民候)”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목화시배지(木花始培地)’는 사적 108호 지정되어 있으며, 단성면 사월리 106번지에 있다.
허준(許浚), 「동의보감(東醫寶鑑)」
허준(許浚, 1539~1615)은, 자(字)는 청원(淸源)이요,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陽川)이다.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내신 허론이며, 조부는 경상도우수사를 지낸 허곤이다.
허준선생은 30대 초반에 내의원에 들어가 37세에 어의로서 국왕의 병을 직접 진료하며, 내의원 의관을 총괄하는 수의로서 활약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1610년(광해2)에 완성하고 1613년(광해5)에 초판을 간행한 의학서적으로 25권 25책으로 발행되었으며,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의(東醫)’라는 말은 허준선생께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동의보감 집례(東醫寶鑑 集禮)’에 나와 있듯이 “옛적에 이동원이 「동원십서(東洹十書)」를 지어 북의(北醫)로서 관중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은 동방에 치우쳐 있지만 의약의 도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의학도 가히 동의(東醫)라고 할만하다.”고 하여 우리나라 전통의학과 동의보감을 중국 의학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이동원, 주단계와 견주고자 했던 것이다.
2009년 7월 30일 바베이도스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에서 공중보건서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전문 의학서로 인정을 받았고, 우리의 전통의약인 한의약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한의약의 우수성과 가치를 전국민과 더불어 지구촌 인류에게 홍보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지난 2013.9.6~10.20(45일간)에 이곳 동의보감촌에서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개최하였다.
유이태(劉以泰), 조선의 편작
유이태(劉以泰, 1652~1715)는 자(字)가 백원(伯源)이며,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등이요,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숙종의 어의(御醫)를 지냈으며, 이때 공로로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가인 산음(현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의술이 신기에 가깝다하여 중국의 명의 편작에 비유될 정도였다고 한다.
홍역 예방·치료에 대한 의학전서인 「마진편(痲疹篇)」을 펴냈으며, 이 외에도 「실험단방(實驗單方)」, 그의 경험을 적은 「인서문견록」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중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은 책이름만 전할 뿐 실물이 공개된 바 없었다. 삼목영(三木)이 저술한 「조선의서지(朝鮮義書誌)」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두 책의 사본을 소개하면서 “인서문견록은 경험방 중에서 아주 우수한 것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2009년 산청한방약초축제’ 개최 때 일본 무전(武田) 행우서옥(杏雨書屋)에 소장되어 있던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이 공개되었다. 이 책은 서문이 붙어 있는 장서본으로서 연구가치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개 사람의 한평생을 바라보건데, 병이 없는 자가 드물다. 그렇지만 병든 자로 하여금 능히 자기의 병을 조치할 수 있는 방도를 알려준다면 반드시 몸이 훼상하는데 이르지 않아도 될 것이니 가치 조심하지 않으랴! 내가 평소에 경험한 여러가지 잡병 치료법과 여기저기서 얻어 들은 단방을 한 책에 수록하여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하고자 했으니 구료하는 방도가 비록 의문(醫門)의 전서와 같이 상세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데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을 것이다. 기축년(1709년) 가을(음8월) 인서노부가 쓰다.”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한국학중앙연구원)에 설화로 유이태 설화가 가장 많이 채록되어 있는데, 그의 설화인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묘소는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35-1번지에 있다.
초객(楚客)과 초삼(楚三) : 산청의 명의(名醫)
산청의 명의(名醫)인 초객(楚客, 1751~1812)과 초삼(楚三, 1754~1809) 형제는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 출생으로 본관은 양천이다. 형인 초객(楚客)의 호는 문포(文圃), 본명은 허영(許郢)이고, 아우인 초삼(楚三)의 호는 호은(湖隱), 본명은 허언(許鄢)이다. 본관은 양천이다.
초객(楚客)은 약 처방에 능하였고 초삼(楚三)은 침술로 이름을 떨쳐 전설적인 명의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생 초삼이 침으로 응급치료를 하면 형인 초객이 약을 써서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 진양의 향토사를 기록한 「진양지(晉陽志)」에 이들의 명성을 전해주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 “초객이 금강산 방면을 돌다가 어느 마을의 머무르게 되었는데 집주인이 마침 약을 달이고 있었다. 약봉지에 ‘초객탕’이라고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기에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주인의 아이가 두창(頭瘡)으로 사경을 헤매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나을 약이 없다고 했다. 영남에 당대의 화타, 편작이라 불리는 '허초객'이란 명의가 있어 환자들이 흔히 그 이름을 약포에 적어 복용하면 혹여 살아날 수도 있다하기에 시험 삼아 해 본 것이라 하였다. 초객이 웃어 말하기를 ‘이름만 빌려 쓴 약을 주는 것이 어찌 그 사람을 찾아가 처방을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고 약처방을 알려주니 얼마 있다가 환자가 낫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초객·초삼 형제의 명성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청을 근거로 활약하면서 초객이 저술한 경험의약자료인 「진양신방(晉陽神方)」은 한국한의학연구원에, 「진우신방(晉隅神方)」은 산청한의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 지방의학 발전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산청지역의 소중한 의약문화유산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이다. 초객의 묘소는 진주시 수곡면에, 초삼의 묘소는 산청군 단성면에 있다.
성철(性徹) 큰스님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 법호는 퇴옹(退翁)이며,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5세 때인 1936년 3월 하동산(河東山)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1947년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자운, 운봉 스님으로 비롯된 문경 봉암사 결사는 수행하면서 지켜야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내걸어 한국불교의 전통을 바로잡고, 전통에 따른 참선을 강조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한국불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44세 때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외부의 출입을 막으며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논리를 확립하였다.
1967년에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되면서 그 해 겨울 음력 11월 3일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음력 1월 20일까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대중들에게 매일 「백일법문(白日法問)」을 열어 불교의 근본진리가 ‘중도(中道)’에 있음을 말하며 선종의 종지가 ‘돈오돈수(頓悟頓, 한 번의 깨달음으로 수행이 완성)’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81년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할 때에 취임법회에는 나가지 않고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로 등장하면서 최초의 한글법어 “생명의 참모습”을 발표하면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로서 종단의 존중을 받았다.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입적하셨다. 세수 82세, 법랍 58세이다.
성철대종사 생가(生家)와 겁외사(劫外寺)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스님 생가와 겁외사가 있다. 20012년 생가터에 성철스님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 겁외사(劫外寺)가 들어섰고, 사찰 뒤로 성철 스님의 생가인 율은고택과 사랑채 건물, 성철스님기념관이 있다.
성철스님은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해인사의 초대 방장을 지내셨고 조계종 제6대 종정이시기도 했다. 이 곳 묵곡리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성철대종사가 태어난 곳으로 해인사 성철스님 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단순한 생가복원 차원을 넘어서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하여 2001년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성철대종사는 비록 우리와 똑같은 속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영원한 진리와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부처의 길을 택하여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철저한 수행과 무소유의 삶으로 사신 수행자임은 물론 모든 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부처”로서 추앙받고 있는 이 시대의 성인이다.
성철대종사의 부친인 율은 이상언 옹의 호를 따 ‘율은고택’으로 명명한 생가는 크게 유물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으로 구분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 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채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은 성철 스님의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로 이루어진 기념관이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서 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성철대종사의 수행자적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성철대종사 생가복원과 겁외사 창건의 의미는 성철스님 개인을 추앙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굳으면, 속인으로 오셨다가 부처님으로 가신 성철스님처럼 영원한 진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표본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겁외사는 추모의 공간이 아니라 발심의 공간이다
기산(岐山) 박헌봉(朴憲鳳), 국악계의 큰 스승
박헌봉(朴憲鳳, 1906~1977)은 호는 기산(岐山)이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산청군 단성면 길리에서 박성호의 차남으로 태어나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하여 15세까지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 16세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 6개월 만에 보통과(초등학교)를 마치고 1923년 중등중학교(中等中學校) 고등과 3부를 졸업한 후 형님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하여 1928년 지리산에서 4년 동안 가야금과 한시 연구에 몰두했다. 이후 진주로 돌아와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하고, 상경(上京)해서는 정악, 아악풍류, 경서도 가무 등 국악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조선음악협회 조선악부에서 민족음악진흥을 꾀하다가 광복이 되자 ‘국악건설본부’를 창설하여 국립국악원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국악(國樂)'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사용하였다.
1960년 민속악 교육을 위한 최초의 사립국악교유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이후 국립극장 운영위원, 한국 국악협회 이사장, 줌화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6년 「창악대강(唱樂大綱)」을 통해 국악에 대한 열정과 혼을 후세에 남겼으며, 평생을 국악진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다.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산청군 단성면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산관, 교육관, 전시관을 건립하여 '기산국악당'이라 이름 지었다.
선생은 생애 전반기에는 국악의 부흥과 계몽에 힘썼고, 중·하반기에는 국악의 이론가 및 교육가로 국악진흥에 헌신하였다. 국악운동의 선각자이며 구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국악교육 계승발전에 큰 틀을 세운 국악계의 스승이시다.
산청 사람,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
— 나는 꼴찌였다 —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山淸)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고마 해라. 민우(손자)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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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승지(淸淨勝地) 산청9경(山淸九景)
★ [제1경] 지리산 천왕봉
지리산(智異山)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신라 5악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리워 왔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의 그 깊은 의미를 빌어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였다.
지리산은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天王峰 : 1,915.4m)을 비롯하여 제석봉(帝釋峰 : 1,806m), 반야봉(盤若峰, 1,732m), 노고단(老姑壇, 1,507m) 등 10여 개의 고산준봉이 줄지어 있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르는 주능선의 거리가 25.5㎞로서 60리가 넘고 지리산의 둘레는 320㎞로서 800리나 된다.
천왕봉에서 발원되어 흐르는 물로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칠선계곡을 비롯하여 뱀사골계곡, 대원사계곡 등 수없이 많은 계곡과 불일(佛日)폭포, 구룡(九龍)폭포, 용추(龍湫)폭포 등 뛰어난 자연경관은 명산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으며, 화엄사(華嚴寺), 쌍계사(雙磎寺), 연곡사(燕谷寺), 대원사(大源寺), 실상사(實相寺)등의 대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암자와 문화재는 이곳이 한국 불교의 산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리산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에게 삶터를 제공해주는 생명의 산이기도 하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에서 마치 양손을 벌리듯 15개의 남북으로 흘러내린 능선과 골짜기에는 245종의 목본식물과 579종의 초본식물, 15과 41종의 포유류와 39과 165종의 조류, 215종의 곤충류가 자라고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황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한때 지리산의 350여 군데에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국보만도 7점, 보물 26점에 지방문화재와 주요 사적지, 민속자료까지 헤아리지 않아도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산이며, 어떤 수식도 필요없는 산이다.
지리산(智異山)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남한 육지의 최고봉으로 주능선 길이 45㎞, 산의 둘레 320㎞, 지능선 15개, 1000m가 넘는 준봉 20개, 경호강, 덕천강, 동천, 화개천, 연곡천 등 12개 동천이 있으며, 70개의 골을 형성하고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 20개 국립공원 중 가장 넓다. ‘지리산 10경’으로 노고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낙조, 벽소명월, 불일폭포, 세석철쭉, 연하선경, 천왕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를 꼽는다. ☞ 지리산 10경은 별도로 소개할 것이다
★ [제2경] 대원사(大源寺) 계곡
지리산 천왕봉 동북쪽 유평계곡에 위치한 방장산(方丈山) 대원사(大源寺)는 충남 예산의 수덕사의 견성암과 석남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비구니 도량으로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기도 하였다가 여순 사건 때 빨치산 토벌로 모두 불타서 1955년 법일스님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대원사 계곡은 깊고 울창한 수림과 반석이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계곡인데 원래는 마을 이름을 따와서 유평 계곡이라 불렀으나 대원사 비구니 사찰의 깨끗한 이미지가 더해져 지금은 대원사 계곡으로 불리고 있다.
여름이면 12km나 이어지는 대원사 계곡은 선녀탕, 옥녀탕 등의 용소등과 소(沼)와 세신대, 세심대가 있으며 사시사철 밤낮으로 물에 씻긴 바위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희고 깨끗하다. 대원사 계곡물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하여 12km를 이르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린다. 신밭골과 조개골 밤밭골로 모여든 계류는 새재와 외곡마을을 지나면서 수량이 많아지고, 비구니 도량인 대원사가 있는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서부터 큰 물을 이룬다.
대원사계곡 밤밭골에서 치밭목산장과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유평리 코스는 약 5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 [제3경] 황매산(黃梅山) 철쭉
경남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에 위치한 황매산(黃梅山, 1113.1m)은 한뫼산으로 큰(넓은) 산이란 뜻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후에 한자어로 바뀌면서 ‘황매산’이 되었다.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기백산 줄기의 준봉인 황매산은 고려 시대 무학대사가 수도를 행한 장소로서, 경남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산 1번지의 황매봉을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뻗은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작은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
황매산은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으로 원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솟은 모습이 명산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황매산'의 '황(黃)'은 부(富)를,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며 전체적으로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또한, 누구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여 옛날부터 많은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황매산은 계절별로 변신이 화려하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산록을 분홍빛으로 수놓고, 여름에는 넉넉한 산자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계곡 물은 경호강을 이룰 만큼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고 가을에는 억새가 촛불을 밝힌 듯 흰 꽃을 피우고, 겨울에는 남녘의 산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눈이 내려 은빛의 설경을 자랑한다.
★ [제4경]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仇衡王)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수로왕의 10대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편에 의하면,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신라가 가락국이 병합되었따. 구형왕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을 중단하고 나라를 양위하였다하여 양왕(讓王)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구형왕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4~5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라를 지키지 못함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한 유언에 따라 손자 김서현(金舒玄)이 석릉을 조성했다.
이곳에서 김유신장군은 7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시조(김수로) 명료를 왕산중턱의 왕대에 추봉하고 왕산사는 구형왕과 선대왕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는다. 또한 김유신 장군은 이곳에서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기상을 닦았고, 사대터, 시능터 등 왕산 일대 유적지를 남기게 됨으로써, 산청의 왕산은 가락국 삼왕(김수로왕, 구형황, 흥무대왕 김유신)의 고적지가 되었다.
가락각의 옛터 왕산사지(태왕궁지)는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어있으며, 국가 사적 제214호 구형황릉(仇衡王)은 경사진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동아시아에서 하나뿐인 역사 사적지이다.
이곳이 왕릉이란 사실은 1798년 산청유생 민경원에 의해 왕산사의 나무궤에 보관되어온 탄영스님의 「왕산사기」와 구형왕, 계화왕후의 영정, 의복, 녹슨 칼, 활, 유품 등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이후 후손들이 왕과 왕후의 향화를 받들어 지금까지 220여년 동안 제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 있다.
왕릉 아래로 1Km 지점에 구형왕과 계화왕후의 제례를 받는 전각인 덕양전(德讓)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매년 봄(음력3우러16일), 가을(음력9월16일)에 춘추제례를 올리고, 매월 초하룻날 보름날에 삭망 항례를 올린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 [제5경] 경호강(鏡湖江) 비경
“거울같이 물이 맑다”하여 이름 붙여진 경호강(鏡湖江)은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부터 산청읍을 거쳐 진주의 진양호까지 70여리를 돌고 돌며 맑은 물길과 빼어난 주변경관으로 시인, 풍류객이 남긴 시와 글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맑은 강물에 그림같이 비치는 수계정과 적벽산, 백마산 일대의 옛 성터, 생초고분군과 조각공원, 양촌강변, 저녁노을에 불타는 엄혜산, 고기잡는 풍경이 일품이며, 특히 여름철이면 넓은 강폭과 빠른 유속으로 수상유람의 스피드와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래프팅의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 [제6경] 남사예담촌 ― 남사마을
단성면 남사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하면서 18~20세기 전통 한옥 40여 호에 85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 남사마을이 그런 명성에 알맞은 곳이다. 농가 105호, 비농가 30호, 주민 숫자가 340명이나 되어 전통 마을 기준으로 볼 때 작지 않지만 많은 가옥이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한국 전통 역사박물관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경북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이 하회마을이라면 경남에는 남사마을이 있다고 할 정도다.
특이한 것은 이곳이 다른 마을처럼 특정 성씨의 집성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사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고려 말 진양 하씨(약 700년)로 알려져 있다. 성주 이씨(약 450년)는 하씨가 정착한 지 약 100년 후 단종 복위 모의 사건으로 성삼문의 이모부인 이숙순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 계기다. 밀양 박씨(약 350년)는 병자호란 당시 외가에 피난해온 박승희, 박승필 등이 정착해 계속 살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전주 최씨(약 100년), 연일 정씨(약 80년), 재령 이씨를 포함해 여러 성이 있었지만 현재는 30여 개에 가까운 다성이 있어 씨족 마을이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진 감이 있다.
많은 성씨가 수백 년간 마을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양반 가문의 반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 말 하즙(1303~1380)과 하윤원(1322~1376) 부자, 그의 외손 통정공 강회백(1357~1402), 강회중(?~1441), 영의정을 지낸 하연(1376~1453) 등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물론, 많은 가문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명성을 유지한 것도 큰 요인이다. 구한말 애국지사인 곽종석(1846~1919), 국악 운동의 선구자인 기산 박헌봉(1906~1977) 등도 이곳 출신이다. 결속력이 남다른 씨족 마을이 근본인 조선 시대에 많은 성씨가 한 마을을 이루면서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 자체에 특이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지정 문화재도 많이 있는데 우선 남사옛마을담장이 등록 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어 마을 전체의 명성을 높여준다. 최씨 고가(문화재 자료 제117호), 이씨고가(문화재 자료 제118호), 면우 곽종석 유적(문화재 자료 제196호), 이사재(尼泗齋, 문화재 자료 제328호), 사양정사(문화재 자료 제453호), 배산서원(문화재 자료 제51호) 등도 등록되어 있다.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리산 초입에 자리 잡은 남사예담촌은 안동하회마을과 더불어 경상도의 대표적인 전통한옥마을이다. 경남하면 산청 남사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 또한 전통한옥마을로 유명하다.
전통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요즘 평범하게 살아 가면서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지리산 초입의 이 작은 마을이 유난히 정감 있고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해묵은 담장 너머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삶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 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옥은 수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의 삶의 양식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한 민족의 문화가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딛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것 이다. 농촌전통테마 마을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배움의 장소이다.
남사예담촌의 ‘사양정사(泗陽精舍)’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있는 1920년대에 건립된 정사이다. 사양정사는 한말의 유학자 계제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鄭德永)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사로 자녀교육이나 손님을 영접하는 장소 이용하였다. 정제용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말의 유학자인 후산(後山) 허유와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한 면우 곽종석의 문인이다.
사양정사(泗陽精舍)란 ‘泗水’(사수)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사수(泗水)’는 공자(孔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사수’라 하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정사라 이름 하였던 것이다. 건립이후 주로 자손을 교육하고 문객을 맞아 교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정사(精舍)는 본채와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앞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며 왼쪽부터 누마루, 방 2개, 대청, 누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다락이나 벽장 등의 수납공간이 풍부하며 유리를 사용한 부분이 있어 근대한옥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대문채는 7칸 규모이며 그중 4칸이광으로 이용되고 솟을 대문이 있다. 근대 한옥의 변화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3호)
★ [제7경] 남명 조식 유적지(遺跡地)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연산군 7년 1501∼선조(宣祖) 5년)의 유적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덕천강에 있는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남명(南冥) 유적(遺跡)은 조선중기의 위대한 유현(儒賢)이며 뛰어난 실천 도학자였던 남명(南冥)이 만년에 강학하던 산천재(山天齋)를 비롯하여 사후(死後) 그를 모시던 덕천서원(德川書院) 등을 일괄 지정한 유적지이다.
38세 때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제수되고 왕이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매번 상소(上疏, 봉사(封事)로써 의견을 개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66세(명종(明宗) 21, 1566) 되던 해 10월 초에 상경(上京)하여 왕을 잠시 뵈옵고는 곧 귀향하였다. 사후 광해군(光海君) 7년, 1615)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다.
★ [제8경] 정취암(淨趣庵) 비경
대성산 정취암(淨趣庵)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정취암 탱화가 유명한 절이다. 정취암은 옛 단성현(丹城縣) 북방40리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절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 하여 예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 6년에 동해에서 아미타불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비추니 한 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대사께서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淨趣寺)를 창건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에 중수하고 조선 효종 때에 소실되었다가 봉성당 치헌선사가 중건하면서 관음상을 조성하였다. 1995년에 응진전에 16나한상과 탱화를 봉안하고 1996년 산신각을 중수하여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다. 이 탱화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위 끝에 서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면 천장 만장 높은 곳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는 시원함과 함께 적막과 고요 속에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든다.
★ [제9경] 동의보감촌(東醫寶鑑村)
지리산(智異山)과 동의보감(東醫寶鑑)의 고장, 산청은 당대 최고의 명의인 허준 선생, 조선중기 명의 유이태, 조선후기에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초삼, 초객 형제 등 명의들로 이름난 전통한방의 본 고장이다.
또 지리산 자락에서 자생하는 약초(藥草)는 그 효능이 탁월해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산청군에서 금서면 특리 일원에 동의보감촌을 조성해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특히 2013년에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기 위해 정부에서 기획⋅주관한 ‘2013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동의보감촌에는 지리산 대자연 숲속체험과 백두대간의 기운을 테마로 한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풍부하여 가족여행이나 힐링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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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백운동(白雲洞)계곡
지리산 계곡 중에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계곡이 백운동 계곡이다. 일찍이 남명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남명선생장지소(南冥先生杖之所)’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으며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글을 지은 작품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지리 산록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큰 스승답게 세상의 탐욕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학문에 몰두한 산림처사(山林處士)의 마음이 담긴 글을 백운동계곡에서 남긴 것이다.
백운동계곡의 들머리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이어지는 20번 국도를 따라가다 하동군 옥종면으로 갈라지는 칠정삼거리를 지나 1㎞여 지점에 있는 백운동계곡이란 푯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웅석봉에서 내려 운산 자락이 길게 뻗어 나와 덕천강가에 닿으면서 계류를 쏟아 내는데 이 계곡이 백운동 계곡이다. 웅석봉은 경호강과 덕천강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주며 어천 계곡과 청계 계곡의 물은 경호강으로, 계림정 계곡과 백운동 계곡의 물은 덕천강으로 흘러 보낸다.
계곡을 따라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점촌 마을에 들어서면 시원한 계류와 함께 ‘白雲洞’(백운동)이란 글자를 새긴 기암절벽과 ‘龍門洞天’(용문동천)임을 알리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널찍한 암반이 반긴다. 그 위로는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知沼)가 있다. 폭이 26m, 길이가 30m에 달하는데 주변이 모두 바위라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줄을 잇는다. 또한 높이 4m 여의 백운폭포와 다섯 곳의 폭포와 담(潭)이 있다 하여 이름도 오담폭포인 곳을 비롯해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등천대(登天臺)는 정말 계류의 물보라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거세다.
이외에도 옳은 소리만을 듣는다는 청의소(聽義沼), 아함소, 장군소, 용소 등의 소(沼)와 탈속폭포, 용문폭포, 십오담폭포, 칠성폭포, 수왕성폭포 등이 있으며 사림(士林)의 거두로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적 자주였던 남명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안빈낙도(安彬樂道)의 풍류를 되새길 수 있는 계곡이다.
산청 중산리(中山里)계곡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비롯된 계곡이 중산리계곡이다. 중산리(中山里)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리산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어 일찍부터 지리산 등정의 출발지로 이용됐다. 5백여년 전 말(馬)과 하인, 제자들을 대동하고 지리산을 올랐다던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하여 김일손(金馹孫), 조식(曺植), 이륙(李陸)과 같은 학자들도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올랐다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계곡답게, 또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덕천강의 발원지답게 계곡미도 빼어나다. 공원매표소를 지나 오늘날 지리산 등산로를 개척한 허만수(許萬壽)를 기념해 세워놓은 비석 옆으로 오르면 천왕봉 등산로이자 중산리계곡을 이루는 주요 골짜기인 법천골로 들어가게 된다. 해발 1,750m에 위치해 있는 장터목 바로 아래에 있는 산희샘에서 시작된 법천계곡은 법천폭포, 유암폭포, 무명폭포를 비롯하여 소(沼)와 담(潭)이 곳곳에 있어 교향악 같은 우람한 소리와 실내악처럼 고요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산청쪽인 중산리와 함양쪽인 백무동에서 각각 9km 거리에 위치, 양쪽 모두 무거운 등짐을 지고 올랐을 때 어느 쪽도 손해봄이 없어 장터목을 삼았는지 아니면 산청에서는 법천계곡, 함양에서는 한신계곡으로 해서 오름에 따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가을에는 계곡을 가득 메우는 단풍이 좋아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천왕봉과 중봉 사이에서 발원한 계류가 용추폭포를 거치면서 수량을 더해 써리봉에서 흘러오는 계곡물과 만나면서부터는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수려한 경관이 펼쳐진다.
산청 선유동(仙遊洞)계곡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글자 그대로 선녀가 하강해 놀았던 곳이다. 그 증거로 사람들은 계곡에 선녀가 술을 빚어 담아 두었다는 동이 2개가 아직도 있다고 하는데, 실제 폭포 위쪽에 있는 거대한 반석에 보면 지름이 50cm, 깊이가 약 2m에 이르는 장독 모양의 커다란 홈이 있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언제나 푸르름을 뽐내는 수월마을은 선녀가 놀다간 절경 아래 위치한 마을답게 소담스런 풍경을 하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계류 따라 1km 정도 가면 암벽 깊숙이 감춰져 있는 수월 폭포가 보인다. 수량은 많지 않으나 높이 약 15m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의 모습이 여인의 단아한 치마폭 같이 조신해 보인다.
폭포수가 모이는 소(沼) 역시 명주 실타래를 세 개나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는 말처럼 깊은 데다가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해 신비감까지 자아낸다. 특히 폭포를 이루고 있는 바위 위쪽에는 용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승천하면서 물 양쪽 바위를 걸어가며 천천히 하늘로 올랐는데 그 발자국이 이어져 두 줄로 길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선유동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한 전설이다. 선유동의 이름을 낳은 계곡은 폭포에서 다시 1km 정도를 더 올라가야 한다. 선녀들이 빚은 술을 담았다는 동이 모양의 홈을 비롯해 자연스레 생긴 바위의 굴곡을 두고 선녀들이 한잔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남겼다는 발자국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전한다.
산청 웅석봉(熊石峰), 청계계곡
웅석기맥(熊石枝脈)은 백두대간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북쪽으로 내린 산줄기가 중봉(1874m)-하봉(1781m)-두류봉(1617m)-밤머리재-웅석봉(1099.3m)-백운산(515m)- 황학산(233m).을 지나 경호강 - 진양호에서 그 맥을 다하는 57km의 산줄기로 덕천강과 남강의 분수령이 되는것을 말한다. 백운계곡, 청계계곡, 어천계곡 등이 발원한다.
1983년 11월 23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웅석봉은 지리산에서 동쪽으로 뻗어온 산이면서도 지리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산이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중봉과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치솟는데 이 산이 웅석봉이다. 산청읍에서 웅석봉을 보면 마치 산청읍을 감싸고 있는 담장처럼 보인다. 지리산을 막아선 듯 버티고 서서는 산청읍을 휘감아 흐르는 경호강에 물을 보태준다. 또한 가을이 되면 화려하게 물드는 단풍으로 온 산이 불타는 것처럼 보인다.
웅석봉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산청읍 내리에 있는 지곡사에서부터 밤머리재와 성심원, 홍계마을, 대한촌, 어천마을, 마근담마을 등을 들머리로 하는 코스가 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지곡사에서 시작해 선녀탕으로 해서 정상에 올랐다가 내리에 있는 저수지 앞으로 내려오는 순환코스다. 웅석봉을 속속들이 볼 수 있는 데다 원점 회귀 산행으로 자가용을 이용해 산행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산행으로 두 개의 코스를 감상하기를 원하면 자가용 등으로 금서면 또는 삼장면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하차한 후 밤머리재 - 왕재 - 정상에 올랐다가 정상 - 내리 - 저수지 또는 정상 - 왕재 - 지곡사 코스를 권할 만하다.
웅석봉(熊石峰)은 글자 그대로 ‘곰바위산’이다. 산세가 하도 가팔라 곰이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산의 모양새가 곰을 닮았다 해서 곰바위산으로 부른다. 산행은 지곡사를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지곡사를 지나 웅석봉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합류지점을 건너면 산길에 접어든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완만한 능선과 연결되는 등산로이고, 계곡으로 들어서면 등산로는 가파르지만 한국자연보존협회에서‘한국 명수 1백선’으로 선정한 선녀탕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올라도 능선에서 만나므로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계곡으로 들어서면 점차 경사가 심해진다. 땀을 흘리며 오르다 보면 이름없는 폭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소(沼)들이 이어진다. 웅
석봉의 절경인 선녀탕은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 바로 위에 있다. 선녀탕은 그동안의 가파른 등산로를 보상이라도 하듯 절경을 뽐낸다. 주변에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선녀탕에서부터 다시 두 갈래 길이 있다. 오른쪽 계곡은 가파름이 덜하지만 우회하는 코스로 계속 가면 첫 들머리에서 갈라진 길과 만난다. 왼쪽은 두 계곡 사이에 솟은 삼각형 모양의 산등을 오르는 길로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그 가파름이 코가 땅에 닿을 정도다. 이 길을 오르면 곰이 굴러 떨어졌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체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등산 이력이 짧다면 오른쪽으로 해서 능선에 오르는 것이 좋다.
능선에 오르고부터는 그다지 힘들지 않다. 소나무 숲과 헬기장 주변의 넓은 초원지대 그리고 건너보이는 지리산의 유장한 흐름을 보는 즐거움으로 작은 오르내림은 계속되지만 오를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정상에는 곰을 그린 표지석이 있다. 건너보이는 암벽은 보기에도 아찔한데 가을에 단풍이 가득할 때면 산정에서부터 물든 추색(秋色)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하산은 여러 갈래가 있다.
단속사가 있는 대한촌을 비롯해 성심원쪽 등의 길이 있으나 대체로 원점 회귀 산행을 한다. 지곡사 아래에 있는 저수지를 내려다보며 곧장 앞으로 내려가면 2시간여 만에 소나무와 밤나무 숲을 지나 논길에 접어들게 된다. 저수지에 다다르면 산행이 모두 끝난다. 산행시간은 오르는데 3시간 정도, 산정에서 지리산 천왕봉 감상과 구절양장으로 흐르는 경호강의 이어짐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데 1시간정도 걸리면 총 6시간 정도 걸린다.
웅석봉은 독립된 산이면서도 지리산과 잇대어 있다. 산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웅석봉에 오르면 밤머리재로 해서 왕등재와 쑥밭재를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33km의 대장정을 꿈꾼다. 가락국의 전설을 안고 있는 깃대봉과 왕등재가 주는 신비는 예사롭지 않다. 구형왕릉 뒤 왕산과 더불어 왕이 올랐다 해서 왕등재로 불리는 이곳 늪지대에는 아직도 성터가 남아 있고, 가락국과 관련된 이런저런 전설들이 촌로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산청 효렴봉(孝廉峰)
효렴봉(孝廉峰)은 글자 그대로 산 아래에 많은 효자효부가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황매산과 부암산이 연출하는 철쭉과 기암괴석들의 향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이다. 단계에서 쳐다보면 장수가 투구 쓴 모습을 하고있는 산이다.
효렴봉(孝廉峰, 648m)은 글자 그대로 산 아래에 많은 효자 효부가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며 산 아래 사람들이 검소하게 살았다는 의미가 들어있기도 하다. 또한 황매산과 부암산이 연출하는 철쭉의 향연과 기암괴석들의 향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으로서 단계에서 쳐다보면 장수가 투구 쓴 모습을 한 산이다.
황매산의 한 줄기가 서남으로 흘러서 내려가다가 우뚝 멈춘 봉우리가 효렴봉이다. 그 용맹스런 모습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는 신기함도 있지만 648m의 정상에 오르면 먼데서 보기보다는 넓은 바위가 있어서 등산객이 쉬어서 땀을 식힐 수 있다.
이 산에는 천연 석굴 3개가 있다. 그 이름은 베틀굴, 박쥐굴, 누운굴이다. 베틀굴은 바위가 베틀처럼 짜이고 그 아래에 6 내지 7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다. 박쥐굴은 절벽에 뚫어져 있다. 매우 소스답고 누운 굴은 이름 그대로 나지막한 굴인데 50 내지 60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임진왜란 중에 효렴재 이경주, 동계 권도 두 분이 이곳에서 피난 하였다. 난이 끝난 이후에도 자주 소요하여 이들의 장구지소도 각각 남아 있다. 이 산을 음미하는 강회가 매년 4월 8일 열린다. 이 고장에 남아 있는 오랜 유풍이다.
▶ 효렴봉 아래에는 효산서원(孝山書院)이 있다. 효산서원은 산청군 철수리 단계천 앞에 있는 경주 김씨 문중서원으로 상촌 김자수와 퇴재 김영유, 삼묵재 김상례 삼 공을 향례한다. 필자는, 한국의 9개 서원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여, 2019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 3박 4일 동안 9개 서원 탐방 길에, 8월 30일 효산서원 허심원(虛心園) 산방(山房)에서 1박한 적이 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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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10경’
지리산은 전라 북도 남원시, 전라 남도 구례군, 경상 남도 산청군 · 하동군 · 함양군 등 3개 도, 1개 시, 4개 군에 걸쳐 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명산의 하나로 꼽힌다. 1967년 12월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국립 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 가는 높은 산으로 그 산세가 매우 웅장하다. 두류산 또는 방장산이라고도 하며, 한라산 · 금강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이다.
산의 북부와 동부에는 낙동강의 지류로 덕천강 · 남천 · 주천 등이 흐르며, 남부와 서부에는 섬진강의 지류로 화개천과 서시천이 흐른다. 천왕봉(1,915m) · 반야봉(1,751m) · 노고단(1,502m) 등 세 봉우리를 비롯하여 해발 1,500m를 넘는 산봉우리들이 치솟아 있고, 해발 1,000m 이상 되는 준령도 20여 개나 된다. 그 사이로 피아골 · 뱀사골 · 칠선 · 한신 · 대성동 · 백무동 등 20여 계곡이 절묘한 경치를 펼친다. 계곡 안에는 불일 · 구룡 · 용추 · 칠선 등 이름 있는 폭포들이 흩어져 있다. 울창한 자연림과 산을 덮은 구름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영산으로 알려졌으며, 화엄사 · 천은사 · 실상사 · 쌍계사 등의 유서 깊은 절들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산청군에 속한다. 지리산 등산지도를 처음으로 제작하여 배포했던 지리산산악회는 지난 1972년 가장 대표적인 자연경관 10곳을 들어 "지리산 10경"으로 발표하였다. 지리10경은 노고단의 구름바다, 피아골 단풍, 반야봉의 해지는 경관, 세석 철쭉, 불일폭포, 벽소령의 밝은 달, 연하봉 선경(仙景), 천왕봉 일출, 섬진강 청류(淸流), 칠선계곡이다.
* [제1경] - 천왕일출(天王日出)
이른 새벽 동틀 무렵 해발 1,915m 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보면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바다 저 멀리 동녘 하늘에 희뿌연 서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이것도 잠깐 동녘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면서 휘황찬란한 오색구름 속에서 진홍빛 거대한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부채살같이 뻗치며 불쑥 솟는다. 이 천왕봉 해돋이는 지리산 10경중 제1경으로 이 일출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삼대에 걸쳐 적선을 해야 된다는 속설도 있다.
* [제2경] - 피아골단풍(직전단풍, 稷田丹楓)
10월 하순경에 절정을 이루는 피아골 단풍은 현란한 "색(色)의 축제"다. 산도 붉게 타고, 물도 붉게 물들고, 그 가운데 선 사람도 붉게 물든다는 삼홍(三紅)의 명소. 피아골의 단풍은 가을 지리산의 백미다. 조선시대 유학자 조식 선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단풍이 좋다. 조식 선생은 "온 산이 붉고 물이 붉어서 사람 마음도 붉다"는 삼홍시를 읊었다고 한다.
* [제3경] -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 서쪽 해발 1,507m의 높이로 솟아있는 노고단은 이 산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도 영봉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서 오르는 10km의 노고단 산행코스는 중간부터 가파른 길[코재]이 이어져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지만,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은 4시간 남짓의 힘든 산행을 한층 뿌듯하게 해줄 만큼 장엄하다. 특히 노고단 아래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절경은 가히 지리산을 지리산답게 만드는 절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며, 5월에 산철쭉이 고원 전체를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한 여름철과 가을에 걸쳐 천상의 화원을 이룬다.
화엄사 계곡의 끝머리 바위 턱에 앉아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며 계곡을 덮고, 능선을 휘감아 돌다 저 들녁까지 이르러 온통 하얀 솜이불을 깔아놓은 듯 펼쳐지는 운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 인간의 세계를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다. 노고단은 지리산 종주코스의 출발점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임걸령 - 반야봉 - 토끼봉 - 벽소령 - 세석평전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 능선길은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밟아보고 싶어하는 영원한 동경의 코스다. 봄에서 초여름까지 노고단의 비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추리꽃이다.
* [제4경] - 반야낙조(般若落照)
해발 1,732m의 지리산 제 2봉인 반야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여자의 엉덩이 같이 보인다는 봉우리로 전남과 전북의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노고단에서 바라보면 바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있는 봉우리다. 노고단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3시간 30분 가량의 산행코스인 반야봉은 사방이 절벽지대로 고산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반야봉에 오르는 기쁨은 낙조(落照)의 장관에서 찾는다. 여름날 해거름에 반야봉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서쪽 하늘의 황홀한 낙조는 아마도 자연이 인간을 위해 베푸는 시시각각의 축제 중에서도 가장 경건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축제가 아닐까? 때로는 구름바다를 검붉게 물들이며, 때로는 마지막 정염을 불사르는 선홍의 알몸으로 서서히 스러지는 태양과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아득히 먼 시원(始源)의 날에 시작된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끝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 [제5경] - 벽소명월(碧宵明月)
지리산 주 능선의 벽소령(碧宵嶺)은 빼어난 경관과 지리산 등줄기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입지조건에서 밀림과 고사목 위에 떠오르는 달은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 시인 고은씨는 "어둑어둑한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 아니면 볼 수가 없다."고 찬탄하였다. * 벽소(碧宵)는 푸른 밤이라는 뜻이다.
* [제6경] - 세석(細石) 철쭉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해발 1,600m의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이름 그대로 잔돌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평전에는 수 십만 그루의 철쭉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꽃망울을 터뜨리며 한바탕 흐드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피빛처럼 선연하거나, 처녀의 속살처럼 투명한 분홍빛의 철쭉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지는 절정기에는 산악인들의 물결로 세석평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시인 김석은 세석 계곡 훈풍이 꽃 사이로 지날 때마다 꽃들의 환상적이고 화사한 흔들림, 그것은 남녘나라 눈매 고운 처녀들의 완숙한 꿈의 잔치라고 이곳의 철쭉을 노래하기도 했다. 지리산 철쭉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처절하도록 서럽게, 그러나 꺾이지 않는 의지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진달래와 더불어 봄의 지리산을 단장하는 명물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제7경] - 불일현폭(佛日顯瀑)
청학봉(淸鶴峰)과 백학봉(白鶴峰) 사이의 험준한 골짜기 속의 깊은 낭떠러지 폭포로 오색무지개가 걸리고 백옥같은 물방울이 서린다. 60m 높이에서 떨어지는 장쾌한 폭포 소리가 온몸을 파고드는 냉기는 몸과 마음이 얼어 붙는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 [제8경] - 연하선경(煙霞仙境)
세석평전과 장터목 사이의 연하봉(煙霞峰)은 기암과석과 층암절벽 사이로 고사목과 어우러진 운무가 홀연히 흘러가곤 하여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천왕봉을 향해 힘차게 뻗은 지리산의 크고 작은 산줄기 사이사이에는 온갖 이름 모를 기화요초가 철따라 피어 지나는 이의 마음을 향기롭게 한다. 이끼 낀 기암괴석 사이에 피어 있는 갖가지 꽃과 이름모를 풀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지리산과 어우러져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고산준령 연하봉의 선경은 산중인을 무아의 경지로 몰고 간다. * 9경 - 칠선계곡(七仙溪谷) 지리산 "최후의 윈시림" 지대로 자연자원의 보고이다. 계곡 전체가 청정한 선경으로 일일이 그 이름조차 명명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 [제9경] - 칠선계곡(七仙溪谷)
칠선계곡은 지리산 "최후의 윈시림" 지대로 자연자원의 보고이다. 계곡 전체가 청정한 선경(仙境)으로 일일이 그 이름조차 명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지리산 최대의 계곡미를 자랑한다.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펼치는 선경이 마천면 의탕에서 천왕봉까지 장장 16km에 이른다. 들어가면 갈수록 골은 더욱 깊고 날카로워, 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하여 숱한 생명들을 앗아가 "죽음의 골짜기"로 불린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등반하고 싶어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칠선계곡의 등반로는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 9.4km 계곡 등반의 위험성 때문에 상당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반로를 벗어나서 마음놓고 발길을 둘 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을 출발하여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에서부터 주지터, 추성망바위,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포를 거쳐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선경의 진수를 볼 수 있다
* [제10경] - 섬진청류(蟾津淸流)
산이 높으면 물도 맑다. 지리산을 그림자로 한 채, 구례-하동 등 남서로 감돌아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은 그 물이 맑고 푸르러 한 폭의 파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앙쪽에 펼쳐진 백사장도 하얀 명주천을 깐 듯 아름답다. 급류를 타고 오르내리며 은어떼를 낚는 어부의 모습도 아름답기만 하다. 지리산 산자락을 그림자로 한 채 남해로 흘러드는 섬진강의 푸르고 맑은 강물과 하연 백사장과 더불어 이 강에 뜬 돛단배는 지리산 역사와 사연들을 들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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