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월. 삶정치 어슬렁
어슬렁
어슬렁거리는 기분을 아는가? 할 일 없이 적당한 관심과 참견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는 게 어슬렁거리는 마음이다. 일이 바쁜 사람은 어슬렁거리지 못한다. 일을 마치거나 일이 없어 한가해야 어슬렁거릴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어슬렁거리는 것도 쉽지 않다. 천성이 느긋하고 여유가 있지 않으면, 작심하고 어슬렁거려야 한다. 세상과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되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어슬렁 산책
내가 갑자기 어슬렁 타령을 하는 것은 어제 그제 일을 겪으며 든 생각이 있어서다.
어제는 물금고 학생들에게 산 안내를 해줬다. 작년부터 만나온 친구들이다. 이제 고3이 되어 한창 힘들고 예민할 때지만 자연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친구들이다. 작년 겨울에 본 뒤 몇 달 만에 보는 탓에 내 마음도 약간 설레었다.
그래서 그제 미리 같이 걸을 산길을 답사했다. 이맘때 자연은 너무나 빨리 변해 하루이틀 사이는 물론 아침저녁 사이에도 새 잎 새 꽃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상과 원효암 버무골을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둘러보았다.
보통 때 같으면 초소를 가거나 집에 오는 길이라 심상하게 보던 숲이다. 하지만 어슬렁거리는 마음으로 둘러보니 새잎 돋는 숲의 특징이 더 잘 드러나 보였다. 둥굴레, 애기나리, 밀나물, 쥐오줌풀, 병꽃나무, 비목, 고추나무, 산조팝나무에 꽃이 피었으며 함박나무숲과 까치박달나무숲의 윤곽이 새잎들로 확연히 보였다. 나긋나긋 얇고 넓은 신갈나무잎과 도탑고 털이 많은 떡갈나무잎은 물론 굴참나무, 쪽동백, 단풍나무, 사람주나무, 쇠물푸레 숲이 잘 보였다. 그런가하면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란 뽕나무와 산벚나무의 위용도 새삼 실감했다. 숲길에서 만난 보라금풍뎅이 세 마리를 보고 주변의 오소리굴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산철쭉과 다른 연달래(철쭉)의 생태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1년 전 설해로 쓰러진 아름드리 소나무의 세대교체와 꽃 핀 뒤 죽은 시누대숲과 겨울을 난 시누대숲과 신갈나무숲 밑의 산거울군락과 비목군락을 살펴보았다. 늘 보던 것을 다시 보니 새로웠다. 보며 느끼고 깨닫는 게 설탕알갱이처럼 잘지만 톡톡 튀어 신났다.
그리고 이 버무골 숲이 천성산의 제일가는 자연림 중 한 곳임을 새삼 실감했다. 양수림 대신 음수림 중심으로 안정된 혼효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남사면이 바위들이 많고 습한 골짜기이기 때문에 산불 등의 해를 입어도 여전히 남부지방 원시림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에 원형을 잘 간직한 숯가마터와 원효스님이 수행한 원효암이 있고, 위로는 군부대였던 정상과 화엄벌을 마주보고 있으니 역사의 변화와 문화가 자연에 끼친 영향까지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며 숲길을 통과하니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평소에는 4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그리고 어제 물금고 학생들과 그 길을 걸었다. 거의 3시간이 걸렸다. 이것저것 살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말하며 나는 어제보다 더 놀랐다. 말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못 느꼈던 버무골 숲의 가치가 새롭게 더 느껴졌다. 새로운 자각과 의미에 나 자신이 놀랐다. 침묵한 채 아는 것과 말하며 아는 것이 달랐다. 말하는 과정 속에서 의미와 가치가 탄생하고 있었다. 말 자체가 말하는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말하기 전에도 나는 이 숲길을 무수히 걸으며 수많은 것을 경험하며 배우고 깨닫고 느꼈다. 하지만 감각과 경험이 의미를 만들지는 못했다. 사람들과 말을 나누며 비로소 의미가 자리 잡았다. 의미는 사람 사이에 탄생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슬렁거림의 경험이 이렇게 말을 통해 뜻으로 영글었다. 삶이란 이렇게 사이에서 생성의 과정이 아닐까? 우선 뜻에 집착하지 않고 또 뜻을 놓아버리지도 않고, 자연 안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는 여유로운 걸음 속에 있는 건 아닐까? 물론 말과 뜻이 있기에 동물과 구별되는 자연 안의 사람으로서의 삶이 가능하다. 자연과 사회 사이 어슬렁거리는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슬렁거림이라는 미시적 삶 속에서 삶의 공부와 정치가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슬렁 공부
고3 학생들을 보니 끔찍했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나의 고3은 암울했다. 매달 보는 월말고사와 모의고사와 입시압박 때문에 고2까지 유지하던 독서를 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매일 가위에 눌렸다. 불안해서 읽고 싶은 책은 못 읽고, 대신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이 생겼다. 글로라도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시험공부의 괴로움과 독서 못함의 괴로움, 일기에 대한 집착을 보면, 나는 외부의 주입식 지식을 몹시 싫어했다. 대신 내 의지로 선택하여 배우는 지식에 관심이 많았다. 일리치가 말한 은행저축식 지식을 혐오했고, 나 스스로가 형성해나가는 지식을 선호했다. 시험도 커리큘럼도 맞을 리 없었다. 흥미가 없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대학도 시험을 본다는 점에서 주입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강했다. 하지만 대학이 좋았던 이유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었고, 도서관에 골라 읽을 책이 넘쳤기 때문이다. 나는 주입지식이 아니라 생성지식을 희구했다. 그것이 참 공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입지식에서 벗어나 생성지식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와 직장을 떠나면서였다. 드디어 마음껏! 내 몸과 마음의 욕구와 리듬에 맞춰 삶을 운용하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생성하는 지식과 생성하는 공부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어슬렁거리는 살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숲에서 보고 듣고 느낀 물과 돌과 하늘과 바람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들은 오롯이 생성하는 지식의 일부가 되어주었다. 감각하고 느끼는 경험 속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찾고 알아보면서 지식이 서로 연결되고 생명처럼 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식은 솔씨 하나가 떨어져 가지와 잎을 내고 뿌리를 뻗어 자라는 것과 같이 삶의 경험과 함께 하나의 유기체적 연속으로 자란다. 은행저축식으로 머릿속에 쌓아두는 게 지식이 아니다. 주입해서 넣어두는 지식은 결코 나도 내 것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다. 하지만 내가 한 공부와 생성지식은 그 자체가 바로 나의 욕구이며 세계고 자신이다.
내가 사람들과 말한다면 나는 주입지식이 아니라 생성지식을 나누기 위해서 말한다. 나는 상식이 없다. 내 삶이 있을 뿐이다. 삶을 나누고 싶다. 내가 전문가와 권력을 믿지 않는 이유는 내가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내 앎이 내 삶에서 함께 자라고 확장하는 이 자체를 참으로 느끼고 깨닫고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오류와 편견이 두렵지 않다. 오류는 정정하고 한계는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무작정 권위에 복종하지는 않겠다. 기꺼이 나의 불완전함과 미숙을 사랑하겠다. 무지와 오류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앎의 출발이다. 삶은 오직 부단한 과정이다. 살아 있는 변화가 곧 삶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용기다. 두려움과 불완전을 극복하고 살고자 하는 결단이다. 이렇게 한계와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배우며 살아간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나는 불완전한 내가 좋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고3 친구들이 시험공부에 매몰되어 참공부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시험공부도 잘 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맥락을 형성해가는 생성의 공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강희맹은 ‘자득의 묘’라는 글에서 도둑도 훌륭한 도둑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직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입식 공부 대신 자기 선택에 의한 생성의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한다. 각자가 터득하는 삶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어슬렁 삶
우리 삶이 위태로운 이유는 개개의 삶이 식민화되었기 때문이다. 식민화는 지배의 다른 이름이다. 지배로 인해 자기가 자기 삶에서 소외된다. 모든 사람이 삶을 산다. 그런데 자기 삶에서 소외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선생은 선생답게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 군인은 군인으로 자본가는 자본가로. 학생이 학생으로 행동하는 것은 선생이 선생으로 행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른은 어른 짓을 아이는 아이 짓을 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사람이 사람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로 규정받고 규정받은 대로 자기 삶의 내용을 맞춰간다. 우리는 외부에서 붙여진 이름에 맞춰 살아간다. 말과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다. 이름이 우리에 맞게 매겨지는 게 아니라 이름에 맞게 우리 삶이 매겨진다. 이름이 삶을 강요한다. 이름은 다른 말로 자리(형식)다. 자리라는 것이 권력과 시스템에 의해 강제되고 자동화된 상태에서 삶의 식민화는 피할 수 없다.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리는 프로쿠스테스의 침대다. 이런 상태를 나는 거시적 삶에 의해 미시적 삶이 포획되었다고 말하겠다. 우리는 모두 그물 안 물고기들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현대사회의 그물은 촘촘하다.
한편 내가 얘기한 어슬렁거리는 삶은 미시적 삶이고, 미시적 삶은 경험세계이며 일상의 삶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을 주체로 여기고 삶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체인 ‘나’의 실체라는 게 과연 있는가? 이름에 맞는 역할로 채워진 배우의 연기일 뿐이다. 그런 주체라면 일찌감치 거부하고 싶다.
나는 앞에서 의미(뜻)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이 타인의 인정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미를 추구하는 행동은 일종의 인정 욕구다. 말과 이름이 그것을 매개한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주어진 이름과 말의 의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미를 생성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안에서 나의 의미이다. 나는 말하는 존재이므로 의미를 생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에 충실할 때 나는 자기 의미를 풍부하게 가질 수 있다. 그 의미를 낳는 요람이 바로 삶의 어슬렁거림이다. 다만 사람이라는 이름만을 받아들인 채, 다섯 감각과 몸과 마음을 열고 삶을 만끽하고 싶다. 내가 가진 생명의 원초적인 의지와 욕구를 신뢰하고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을 믿는다. 그게 삶이고, 삶 안에 의미가 만들어지고, 그게 나다.
어슬렁은 기존의 이름과 지식을 거부하고 사회와 자연 안에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왕래하며 감각하고 경험하는 삶의 시도이자 방식이다. 그러므로 어슬렁거리는 삶은 소속되지 않고 정해지지 않은 삶이며 스스로 생성하고 확장하는 생명에 충실한 삶을 내용으로 한다. 어슬렁은 세계와 나 사이를 왕래하는 바느질이다. 어슬렁거리는 삶은 조용한 탐색이며 은근한 사랑이다. 거시적 삶은 어슬렁거리는 삶을 내용으로 하는 미시적 삶으로 채워져 그것이 사회적 형식을 짜나갈 때 만들어진다. 사회란 삶들의 그물이다. 이것이 삶 정치가 아닐까 한다. 정치적 삶이 아니다. 삶정치다.
첫댓글 ... 깊이 사색하며 읽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