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 날이 왔다. 전날의 설렘으로 잠을 잘 못 자 졸린 눈을 비비고 엄마와 함께 집결 장소인 태화강 둔치 주차장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학교를 가야하는데 기분이 묘했다. 왠지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기도 했고 심지어 방학인가? 하고 착각도 했다. 11시 35분이면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져지지가 않았다. 내가 일본에 가는 것이 맞긴 맞는 것일까?
'청소년 해외봉사단'이란 이름의 우리는 울산을 출발해 9시에 김해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30분 일찍 도착했고 그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기에 벌써부터 뭐하고 노나? 하는 고민이 생겼다. 공항에 도착해 화물칸에 실을 짐을 맡기고 출입국 카드를 쓰는데 처음 써보는 것이라 계속 틀리는 것이었다. 겨우 카드를 적은 뒤 우리와 동행하는 지도자 선생님 중 한 분의 항공 티켓에 Mr 라고 되어 있어(선생님은 여성인데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임)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티켓팅 하는 곳으로 갔는데 우리는 놀랄만한 말을 들었다. 그것은 기체결함으로 비행기가 안 뜰 수 있으니 어서 인솔교사를 모셔오라는 것이었다. 이제 일본에 갈 수 있다고 믿었더니 비행기가 안 뜬다고? 정말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현재 상황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비행기가 국내 기술진이 고칠 수 있으면 고치는 대로 가고 그게 안되면 인천을 경유해서 가는데 그건 6시 반 비행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최악의 사태는 아예 출발 못하고 집에 가는 것. 이 상황에 너무나 난감했다. 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기에 결국 우리는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공항 의자에 앉아 엄마께서 주신 밤을 까먹으며 가끔 자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였다. 잠시 우리를 인솔하시는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께서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오시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단체이고 출국 수속을 일찍 해서 대한항공 6시 반 비행기로 돌리고 늦게 출국 수속한 사람들은 먼저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법대로 하라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항공사의 억지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공항에서 지내야만 했다. 물론 항공사와 그 항공사의 나라를 욕하면서 말이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6시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라 무척 기대가 되었다. 창가 쪽이 아니라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붙어 앉아 만족했다. 이륙할 때는 완전 놀이기구 타는 느낌이었고 기내식도 대체적으로 괜찮았다. 그런데 서서히 고도를 낮출 때 귀에서부터 목 그리고 잇몸까지 아픈 것이었다. 너무 아파 계속 턱을 돌리고 손으로 매만지며 겨우 참았다. 긴 아픔 끝에 창가에서 새어나온 불빛, 일본 나리타다! 난 아픈 것을 잠시 잊고 옆에 있는 친구와 재잘거렸다. 우리가 드디어 일본에 왔노라고, 믿어져지지 않는다고 온갖 수선은 다 피웠다. 하지만 기쁜 것을!
비행기가 완전히 착륙하고 공항으로 입국 수속하러 갔다. 처음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기에 언제 다하나 싶었더니 그곳은 일본인 입국 수속 장소였다. 그제야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외국인 입국 수속하는 곳에 갔더니 몇 사람과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그렇다, 우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 안에는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이란!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출구로 나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 뵈었다. 4박 5일 동안 우리의 입과 손과 발이 되어주실 분들이시기에 깍듯이 인사하고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치바현 도가네시에 있는 우리나라의 수련원과 같은 곳인 '도가네시 청년의 집'이었다. 시설도 깔끔했고 무엇보다 우리의 수련원과 시설이 달라 무척 신기했다. 겉 건물은 빌라, 입구는 학교, 침실은 병원 분위기……. 다른 곳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10시가 훌쩍 넘었기에 씻고 침실로 향했다.
2003년 9월 17일 수요일
공식적 활동의 첫날이 밝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창문을 열어 놓고 자는 바람에 코감기에 걸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일어나 씻고 배정 받은 1층을 쓸면서 청소를 했다. 이 곳은 우리나라 수련원과는 달리 매일 아침 먹기 전에 배정 받은 청소구역을 청소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빗자루가 한국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에 어떻게 쓸어야 할지 좀 난감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난감했던 건 방 안에 있는 화장실이었는데 계단처럼 턱이 있고 변기가 턱 위에 있는데 삐죽 튀어 나와서 도대체 어떻게 일을 봐야 하는지 몰랐다.
아침 식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갔는데 식당은 셀프 형식으로 자신이 먹을 반찬은 자신이 덜어 가는 방식이었다. 난 제일 만만해 보이는 계란찜과 스파게티, 양배추 샐러드, 김, 그리고 일본인의 김치라고 불리는 우메보시(매실 장아찌)하나를 들고 왔다.
식기를 들고 먹는 건 생각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식기가 들기 편하게 생겼고 가벼웠기 때문이다. 된장국을 한 모금 마시고는 좀 달다고 느꼈지만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길러진 음식적 본능 탓인지 계란찜을 먹으면 짠맛이 날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계란 맛은 짠맛도 계란 맛도 아닌 단맛이 나는 것이었다. 계란찜을 먹은 여학생의 절반은 밥 먹는걸 포기했다. 자기가 던 음식은 다 먹어야 한다는 사모님의 말씀에 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밥을 억지로 먹었다. 김을 믿었건만 김 역시 달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우메보시를 믿었다. 그러나 시다 못해 써서 뱉고싶은 그것에 난 심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렇지만 일본인 숙박인이 나간 후 우리와 중국인만 있었을 때 더 이상 단 반찬은 나오지 않았다. 김과 된장국 빼고)
나의 충격은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환경연구센터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의 예고를 지나게 되었다. 마침 등교시간이라 학생들을 보게 되었는데 학생들의 차림새가 나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짧은 교복치마에 각각의 니트조끼, 염색기가 묻어나는 머리의 여학생, 교복 바지에 풀어 해친 남방, 부스스한 긴 머리의 남학생들……. 우리나라 학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혹시나 선도부나 선생님이 단속하지 않을까 교문을 봤지만 선생님들은 그냥 바라볼 뿐 어떤 터치도 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지금 긴 머리도 묶네 마네 인데 은근히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게 한 건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성들이었다. 제일 신기했던 광경은 짧은 교복치마에 자전거를 타면서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본인은 전부 곡예사?!
차를 타고 가면서 보던 광경 중에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많았는데 그 가게들의 공통점은 전부 크든 작든 전부 주차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주차장을 찾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그렇게 도로를 달려 이찌하라에 있는 환경연구센터에 도착했다. 이 연구소가 1968년 일본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왠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연구센터에서는 기대와는 달리 지겨움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연구실을 둘러보고 실험하는 체험적 강의를 원했던 것이 반해 연구센터 측에서 이루어 진 건 말 그대로 강의만 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직접 듣고 이해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통역을 해서 들어 더 지겨웠다. 그 지겨움은 수질, 지질학 강의에서 초 절정이었다. 학교에서 고생하며 외운 1학기 기말고사 범위가 눈앞에 나타나 나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여기서도 공부해야 하는 건가, 학생은 어딜 가든 공부를 해야하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강의들 중에서 얻은 두 가지, '금방 쓰레기가 되는 것을 사는 건 쓰레기를 사는 것이다'와 일본은 '재활용'이 아닌 '재사용'(특히 페트병이나 유리병)을 한다는 점이었다.
빡빡한 강의들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 이찌하라 시내 쪽을 경유해서 왔다. 숙소가 있는 곳이 촌 마음에 가까운 곳이기에 시내는 비교적 번화가 거리였다. 그 곳 광경중 모노레일(위에 매달려 가는 전철)과 벌집 같이 촘촘한 집이 모인 아파트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많은 사람들. 그 이유가 일본은 차나 자전거 없이는 다니지 못한다고 선교사님께 들었다. 그럼 우리나라는 자전거 없이 잘 살 수 있는 나라인가? 하고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한일전을 시청했다. 일본에서 보는 한일전은 어느 때 보다도 반가웠고 마음이 찡했다. 경기장 주위 광고 문구나 한국어로 된 플랜카드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읽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활약하는 모습과 응원 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져 진한 감동으로 와 닿았다. 또 예상외의 일본 캐스터들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 날 경기는 2:1로 한국이 승리했고 덕분에 우린 목사님께 맛있는 음료수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2003년 9월 18일 목요일
전날의 피로함과 익숙하지 않은 침대 탓에 몸이 쑤셨다. 목도 따가운 것이 감기 초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여전히 콧물이 나왔다. 컨디션이 어제에 이어 최악이었기에 오늘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우리가 간 곳은 도가네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이 곳은 분리수거 된 쓰레기 중 소각할 수 있는 것들을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산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특이했다. 처리장 주변의 숲들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신비로운 느낌이었는데 그 곳에 요정이 날아 나오거나 유니콘이 뛰어 나올 것 같았다. 그 곳에서는 역시 강의를 들었는데 전 날보다 빡빡하지 않았고 금방 끝났다. 강의 후 우리는 쓰레기 처리장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이 쓰레기를 싣고 와 버린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가장 특이한 점은 쓰레기를 소각하면서 나오는 열로 목욕탕을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예약 무료제로 말이다. 역시 목욕을 사랑하는 일본이라 그런 것이 나왔을 수도 있지만 쓰레기로 다른 에너지를 내서 공익으로 돌린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쓰레기 처리장을 나와 도가네시 시청을 가기 전에 근처 댐에 들렸다. 일본은 호수 주변이 인기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둘러본 주택가는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우리나라의 일산 신도시 주택가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집이 좀 더 작고 더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일본 만화에 서로 옆집에 사는 주인공들이 집과 집 사이를 넘나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상한 깨달음인가?)
그 후에 도가네시 시청에 도착했는데 울산 시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좀 작은 규모에 오래된 듯한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시청이기에 몸가짐을 바로 하고 시장 실에 들어갔다. 울산 시장님도 만나기 힘든 내가 일본 도가네 시장님을 만난다니 마음이 벅차 올랐다. 조금 후 등장하신 시장님은 친절한 분이셨다. 그 분께 한가지 놀라운 점은 잘 모르실 거라는 부분, 학교현왕이나 복지시설 현황 부분을 매우 잘 아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정치가 분들은 우리나라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난 후,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악수하고 싶다는 요청에 우리 모두 악수를 하며 사진을 찍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때까지의 한국인 중에 악수하며 사진 찍자는 사람이 우리가 처음이었다는 말씀과 함께 미소지으시는 시장님의 모습에 인자함이 묻어났다. 시장님과 사진촬영이 끝난 후 우리는 '시청아저씨'(시장 비서직을 하시는 분인데 우리와 시장님의 만남에 큰 힘을 쓰신 분이었다)분과 사진을 찍었다.
시청을 나와 식사를 하러 갔는데 이번 점심은 뷔폐식이었다. 전날도 이날도 점심은 포식하는구나!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간 뷔폐집은 요일별, 시간별 요금이 달랐고 시간제한이 있는 점이 우라나라와 달랐다. 처음에는 시간제가 있다는 것에 너무 한다는 느낌이었지만 뷔폐집에 들어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식에 일식에 후식(아이스크림, 솜사탕, 여러 종류의 과일들, 푸딩, 케이크 등등)과 구어 먹을 수 있는 육류들까지 거의 환상적이었다. 본전은 뽑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먹기는 했지만 그다지 많이 먹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의 하이라이트는 비데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내가 태어나서 이때까지 가 본 식당 화장실 중 최고였다.
점심을 먹은 후 하수 처리장에 가게 되었다. 음식을 먹고나서 바로 가면 안 좋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예상외로 깔끔했다. 물이 정화되는 과정과 미생물에 대해 잠깐 강의를 들은 뒤 먼저 간 곳은 실험실이었다. 그 곳에서 정화할 때 제일 중요한 미생물을 현미경을 통해 봤는데 책이나 인쇄물로만 보던 미생물을 실제로 보니 너무 좋았다. 그 후 쭉 물이 정화되는 과정을 살펴봤는데 우리나라의 모습과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다른 점은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수처리장을 나온 우리는 100엔 shop에 가게 되었다. 100엔 shop은 모든 물건을 천 원에 파는 곳으로 생필품뿐만 아니라 학용품이나 옷, 화장품 등도 팔아 축소할인매장이라고 보면 된다. 그 곳에서 선물을 이것저것 산 후 숙소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바로 한국어 학원에 갔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한국 방문 이후 배우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시청과 하수처리장에서 만난 시청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아저씨의 인기는 우리에게 폭발적이었고 아저씨께서도 부끄러우신 지 자꾸 숨으려 하시는 것이었다. 서로의 소개와 인사가 끝나자마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일본인 분들과 가까이 있던 아이들은 이야기라도 했지만 멀리 있던 나로서는 무척 아쉬웠다.
2003년 9월 19일 금요일
이번 아침은 무척 설렜다. 왜냐하면 내 생일이기도 하며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며 난 언제 저기 한 번 가보나 했더니 이렇게 내 생일을 디즈니랜드에서 보내게 되다니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았다. 계약완료로 인해 숙소에서 마지막 아침을 보내게 된 우리는 전 날 만든 매직풍선 꽃을 드린 뒤 인사를 하고 나왔다. 숙소를 떠난 약 2시간 뒤 디즈니랜드에 도착하였다. 미키마우스 모양 버스와 디즈니랜드 입구를 본 후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나는 생일 축하 노래를 들었고 눈물이 핑 돌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디즈니랜드에서는 두 조로 나누어 다니기로 했는데 우리 조는 걸어다니며 매직풍선을 만들어 주었다. 저번 롯데백화점 앞 광장에서 했을 땐 우리도 서툴렀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디즈니랜드에서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까지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우리가 만들어서 주면 아이들은 받기는커녕 잡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하고 고민한 끝에 전 날 목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를 전제로 가정 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어 남에게 다가가는 것을 잘 하지 않고 장사에 밝은 일본인이기에 이런 풍선을 공짜로 나누어 줄 리도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풍선을 불쑥 내민 내 잘못도 작지는 않았다. 그 후 나는 풍선을 줄 때 "스미마셍, 프레젠또"라는 말을 꼭 했다. 역시 그 말을 하니 그제야 풍선을 받아주었다. 풍선을 조금씩 나눠주며 우리는 탈 만한 놀이기구는 다 탔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인기 있는 기구에 '예약제'라는 것을 실시하는데 예약 표를 끊어 표에 찍힌 시간대로 가면 바로 탈 수 있는 제도였다. 처음엔 무조건 예약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막 했다가 낭패를 봤었다. 한번 예약 표를 끊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다시 끊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선을 나누어주다 시간이 되면 타는 방식으로 갔다. 여기서 우리나라와 잠시 놀이기구를 비교하자면 우리나라 놀이기구는 짜릿함이라면 디즈니랜드는 보기위주로 뒤어있다는 것이었다. 사방에 별로 인해 반짝이는 별로 인해 진자 우주를 나는 느낌의 열차와 급류 타기를 타며 아기자기한 인형 쇼를 볼 수 있는 등 말이다.(전체적으로 디즈니랜드는 아기자기하고 깜찍했다.) 놀이기구를 탄 후 우리는 동화 속 주인공들이 나오는 퍼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 책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동화 주인공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니 나도 모르게 흥분했었다. 시간이 다 되어 아쉽게 디즈니랜드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는 미련이 남아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다.
다시 2시간을 달려 일본 전통 가옥 여관에 도착했다. 겉 건물이 허름해 별로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은 정말 깔끔했다. 도착하자마자 먹게 된 저녁밥은 진수성찬이었다. 완벽한 일본 음식을 먹은 기분이랄까? 한국에서 먹은 일식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저녁을 다 먹은 뒤 샤워를 하고 유카타(일본 전통 잠옷)를 입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그리고 적나라하게 안을 비추는 바람에 결국 안에 반바지를 입었다. 하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에 일본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 있어 기쁘긴 했다. 너무나 피곤했기에 포근한 매트 위에 깔린 이부자리에 얼른 누워 잠을 잤다.
2003년 9월 20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유카타가 더운 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갈아입고 잘걸 하고 후회가 됐다. 씻은 후 아침을 먹었는데 아침은 간단히 나왔다. 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그런 건가? 아침을 먹은 뒤 짐을 챙겨 선교사님 차에 싣고(우리가 타고 다니던 버스도 어제로 계약 완료가 되어서 결국 목사님과 선교사님의 승용차로 이동했다) 단체 사진을 찍은 뒤 해상공원으로 향했다.(참, 여기서 일본 여관 주인분과 종업원 분의 서비스는 정말 대단했다. 포장용으로 쓸 신문을 조금 달라고 했더니 신문은 물론 잡지와 만화책을 주었고 우리가 차를 타고 나갈 때에도 교통 정리를 해주셨다. 그리고 90도로 깍듯이 인사하셔서 조금은 부담이 됐다.)
내가 간 해상공원은 파도가 높아 윈드서핑으로 유명한데 세계적인 대회도 자주 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곳 바다는 쭉 나가면 하와이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바다보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언덕이 더 좋았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언덕이었기에 우리는 온갖 폼을 다 잡으며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해상공원을 나온 우리는 근처 진자(신사)에 가게 되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하고 금방 나오게 되었다. 진자의 느낌은 신비롭지만 약간은 무서웠다. 진자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리가 있던 지역에 진도 4정도의 비교적 큰 지진이 났었다. 그런데 그걸 달리는 차안에서는 못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난 지진은커녕 미동도 느끼지 못했다. 아쉬웠다.
우리의 강력한 요청 끝에 들린 곳은 또 다른 곳의 100엔 shop이었다. 여긴 저번에 갔던 곳과는 달리 훨씬 넓고 많은 물건들이 있어 뭘 사야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선물 목록을 적은 나는 금방 사고 목사님과 함께 음반 가게에 가서 싱글앨범 하나를 샀다.(그런데 일본식 알파벳 발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어로 된 그룹 이름은 써서 보여주길 바란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그 곳에서 점심을 먹은 뒤 나리타공항 옆에 있는 항공 박물관에 가게 되었는데 그 날 마침 항공의 날이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옛날 비행기의 부품들을 전시해 놓고 직접 보고 만지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둘러본 결과 솔직히 돈 내고 보기엔 좀 아까웠을 것 같다.
박물관을 나와서 나리타공항으로 갔다. 일본으로 들어올 때 보다 짐이 배가되어 날 너무 힘들게 만들었다.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선 짐 검사를 하는데 역시 9.11 테러 영향과 미국계 항공사인 탓인지 검사가 정말 철저했다. 그래서 몸 검사할 때 한국에서 걸리지 않은 허리띠가 걸리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비행기 탑승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우리는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를 발견해 모두들 들떠서 인터넷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글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짧은 실력의 영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탑승시간이 되어 비행기를 탔는데 이번에는 모두 창가 쪽이었다. 아까 티켓팅할 때 직원이 제일교포여서 창가 쪽 신청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전 세계 투어중인 미국인 가족 단체가 앉았는데 아주 짧은 순간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짧은 대화를 하기 위해 옆 친구와 얼마나 열심히 작문했던가)
나리타공항을 이륙하는 순간 야경은 아름다웠다. 이제 일본과의 긴 아님 어쩌면 평생일지 모르는 작별이구나. 한참을 창문을 보다 잠들어 깨어보니 다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띈 배와 차와 집들, 그리고 지도에서만 봐 왔던 부산만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우리는 간판을 보고 읽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운 나의 모국 한국에 돌아온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한국에 와서 느낀 기쁨은 일본 나리타에 도착했을 때 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전체적 소감: 4박 5일의 짧은 순간에 난 일본의 극히 일부분을 보고 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일본은 역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것을 느끼고 왔다. 내년 1월이면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이 된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성행하고 일본 음악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1월이 되면 밀려올 일본 문화에 대한 충격은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의 높은 시민정신과 서비스 정신, 인사성은 놀랄 만큼 대단했다. 거리는 쓰레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했고 식당이나 여관 등에서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런 모습들, 그리고 마주치면 항상 인사를 하는 그 모습들이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쑥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 그리웠다. 역시 나는 대화하며 정서를 교환할 수 있고 입에 맞는 음식이 있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세상 어느 곳보다도 제일 좋은 곳은 나의 조국 한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첫댓글 이야~ㅋ 좋겠다 ㅋㅋ 나도 일본가고싶닷 ㅋㅋ 잘하면 올해 일본학교랑 우리학교랑 결연해서 홈스테이 할수도 있는데 ㅋ
글애도 조국이 최고죠? ㅋㅋ
일본 이국? 여행기 잘 봤어요 ^^ 생각보다 낯설음이 심하신가봐요 ^^;; 저도 길치에다 무섬이 많은편이지만 여행만큼은 왠지 설레임이 있어서 좋은 거 같아요 ^^;; 낯선 일본이 언니로 해서 마니 가까워진 거 같아요 >ㅁ<//